시대를 선점하는 아이돌, AKB48
완결

현역 최고, 최장수 아이돌의 전략

지난해 11월 일본 요코하마(横浜) 아레나에서 개최된 ‘2017 엠넷 아시안 뮤직 어워드(Mnet Asian Music Awards, 이하 MAMA)’에서 엠넷은 〈프로듀스 48〉이라는 프로그램의 론칭 계획을 밝혔다. 〈프로듀스 48〉은 팬들이 프로듀서가 되어 직접 아이돌 데뷔 멤버를 선발해 온 한국의 〈프로듀스 101〉 시스템과 2005년 데뷔 이래 일본 최고의 아이돌로 군림하고 있는 걸 그룹 AKB48(포티에잇)이 결합되는 프로젝트이다. 〈프로듀스 48〉은 한일(韓日) 양국에서 활동하는 단일의 글로벌 걸 그룹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어서 가요계의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특히 가요 팬들을 사로잡은 대목은 〈프로듀스 48〉에 현재 활동 중인 AKB48의 멤버가 연습생으로 참여한다는 점이다. 론칭 계획에 따르면, 2018년 1월 AKB48 멤버들만의 오디션을 거쳐 참가 멤버가 선정됐다.

AKB48은 역대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 일본 여성 가수라는 기록 외에, 걸 그룹 싱글 앨범 최다 1위 기록도 갖고 있다. 2017년 9월 기준으로 AKB48은 싱글 앨범 발표로만 36회 연속 1위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누적 음반 판매량(앨범·싱글 통합)은 총 5129만 8000장으로 하마사키 아유미(浜崎あゆみ)가 세운 5067만 5000장의 기록을 깨고, 일본 역대 여성 가수 음반 판매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남녀 가수를 통틀어서도 비즈(B’z)의 8233만 9000장, 미스터 칠드런(Mr. Children)의 5953만 5000장에 이은 3위다.[1]

아이돌의 전성기는 결코 길지 않다. 일본 연예계에서는 아이돌 그룹의 수명을 통상 3~5년으로 보고 있다. 대중의 선호도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다음 시대를 타깃으로 삼은 새로운 아이돌이 데뷔하는 가운데, 지속적으로 정상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AKB48의 인기에는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AKB48의 성공 스토리가 단순한 팬덤(fandom)을 넘어 일본 기업의 마케팅 전략 연구 대상으로까지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AKB48은 2018년 결성 13주년을 맞는다. 작금의 아이돌 전국(戰國) 시대에 AKB48은 오랜 기간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AKB48의 인기와 장수 비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가창력과 댄스 실력에서 아마추어 냄새를 풍기는 AKB48이지만, 이면에는 탁월한 전략이 숨어 있다. 이 걸 그룹은 지금까지의 스타 시스템과 경영학 텍스트에서 볼 수 없었던 전략으로 큰 성공을 일구었다. AKB48의 성장 과정을 분석하면, 일본 경제의 흐름만이 아니라 사회 문화 현상, 나아가 비즈니스 전략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칼럼니스트 나카모리 아키오(中森明夫)의 “아이돌은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선점하고 있다(アイドルは時代の反映ではなく、時代の先取りである)”는 말처럼 아이돌과 그에 대한 팬덤 현상은 경제는 물론 사회 문화 곳곳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AKB48의 전모

 
AKB48은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현역 최고의 아이돌 그룹이다. AKB48은 팀A, 팀K, 팀B, 팀4, 팀8 등 다양한 포맷이 가능한 그룹이다. 자매 그룹까지 포함하면 총 멤버 수는 300명 이상(정규 멤버와 연구생 포함)이다. 멤버 수로 기네스 세계 기록에 올랐을 정도다. 해외 그룹까지 합치면 그 수는 훨씬 늘어난다.

그룹명 AKB는 그룹의 홈그라운드가 위치한 도쿄 아키하바라(Akihabara) 또는 아키하바라의 속칭 아키바(AKIBA)에서 유래했다. 당초 멤버 모집 공고에는 ‘아키하바라48 프로젝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인디즈(언더그라운드) 데뷔 당시의 각종 미디어에서는 ‘Akihabara48’로 불리기도 했다. 현재는 그룹명을 AKB48로 통일했다. 또한 AKB48은 일본 최대의 걸 그룹 기획사 AKS(AKB48 그룹 본사)의 등록 상표이기도 하다.

AKB48이라는 명칭은 자매 그룹을 포함하는 경우와 포함하지 않는 경우 두 가지가 있다. 지역별로 거점을 두고 있는 자매 그룹은 지속적으로 확장되고 있다. 지난 2008년 SKE48(나고야 사카에)을 시작으로 일본 현지의 자매 그룹 NMB48(오사카 난바), HKT48(후쿠오카 하카타), NGT48(니가타), STU48(세토우치나이(瀬戸内)의 7개현)과 파생 유닛이 있다. 해외 자매 그룹인 JKT48(인도네시아 자카르타), BNK48(태국 방콕)에 이어 MNL48(필리핀 마닐라), TPE48(대만 타이베이)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다. 이를 통틀어 AKB48 그룹 혹은 AKB 그룹, 48 그룹이라고 부른다.

작사가이자 프로듀서인 아키모토 야스시(秋元康)는 탁월한 프로듀싱 능력으로 AKB48을 키워 냈다. 오늘날 아키모토는 일본 걸 그룹의 아버지로도 불릴 만큼 그 위상이 대단하다. 아키모토는 48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 “단어가 들어가면 오래된 느낌이 들기 때문에 상품 개발 번호와 같은 무기질(無機質)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설명한다. AKB48이라는 그룹 이름이 48명의 멤버 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많지만, 숫자는 상징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AKB48의 콘셉트는 ‘언제든 가서 만날 수 있는 아이돌’이다. TV나 인터넷, 잡지 등에서나 접하는 현실 세계에서 동떨어진 이미지의 아이돌이 아니라, 동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녀들의 그룹을 마케팅 전략으로 내세웠다. 언제고 가까이에서 접할 수 있는 친근한 존재, 그들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팬들과 함께 공유하는 아이돌을 표방한다.

 

AKB48의 10대 전략

 
AKB48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시스템과 전략을 갖고 있다. 분석 결과, 구체적으로는 졸업 시스템을 시작으로 선발 총선거, 악수회, 캐릭터의 다양성, 롱테일 전략, 해외 거점 전략, 전용 극장, 성장형 아이돌, 겸임 및 이적 제도, 무한 콘텐츠 생산 등을 꼽을 수 있었다. 

➀ 졸업 시스템
AKB48은 일종의 학교 개념을 도입해 졸업이라는 독특한 멤버 충원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다. 졸업이라는 이름으로 오래된 멤버는 퇴출시키고 총선거를 통해 새로운 멤버를 발탁함으로써 그룹의 신선함을 지속해 가는 전략이다. 무엇보다 매너리즘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가장 크다. 그룹에 적을 두고 있는 동안 춤과 노래, 연기력을 갈고 닦은 멤버들은 졸업을 통해 배우나 솔로 가수 데뷔 같은 더 높은 꿈을 향해 나아간다. 국내 대다수의 아이돌 그룹처럼 멤버의 결혼과 입대, 부상, 탈퇴 등으로 그룹의 존폐가 좌우되는 경우는 없다.

➁ 선발 총선거
일반적으로 총선거란 국회의원을 새롭게 뽑는 선거를 지칭한다. 하지만 AKB48에서는 2009년에 도입되어 매년 실시하고 있는 멤버 선발 총선거를 가리킨다. 팬들의 인기투표라고 할 수 있는 총선거를 통해 차기 싱글 음반에 참여할 멤버와 무대 포지션이 결정된다.

인기투표에서 1위를 한 멤버에게는 그해 각종 행사나 촬영 시에 무대 맨 앞 중앙에 설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된다. 모든 매체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자신의 몸값을 천정부지로 올릴 수 있어 멤버라면 누구나 열망하는 꿈의 자리이다. 총선거 전략은 AKB48의 음반을 밀리언셀러로 만든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2]

➂ 악수회
AKB48이 내세우는 가장 큰 강점은 여느 아이돌 그룹처럼 매스컴이나 대형 공연장에서만 접하는 아이돌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직접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이라는 점이다. 그 매개가 바로 팬들과 악수를 나누는 이벤트 악수회다. 악수회는 2005년 12월 16일 장비 고장으로 중단된 극장 공연 대신에 만들어진 악수 이벤트가 계기였다. 이후에는 CD 출시에 맞춰 정기적으로 열리고 있다.

팬은 음반(CD)을 구입하면 그 안에 들어 있는 참가권으로 악수회에 참여할 자격을 가진다. 평소 악수해 보고 싶었던 아이돌을 선택해 실제로 만나 악수를 나눌 수 있다. 10초 이내라는 짧은 시간이기는 하지만 팬은 멤버에게 간단한 인사말과 응원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 여러 장의 싱글 음반을 한꺼번에 구입해 악수회 참가권을 한 장씩 사용해 가며 몇 번이고 다시 줄을 서는 열성 팬도 적지 않다. 이런 과정을 통해 팬들은 AKB48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며 이른바 충성 고객(customer loyalty)으로 남는다. 

➃ 캐릭터의 다양성
시장의 모든 소비자가 원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AKB48의 멤버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멤버들은 귀여운 이미지, 유쾌한 이미지,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미지, 섹시한 이미지, 전형적인 미인 같은 다양한 캐릭터로 개성을 발산한다. 이를 통해 소비자가 자신이 원하는 상품(이미지)을 취사선택해 보다 적극적으로 소비하게 만든다. 멤버의 수가 많아서 우연히 얻어진 결과라기보다는 프로듀서의 치밀한 전략으로 평가할 수 있다.

➄ 롱테일 전략
비인기 제품에서 나오는 미미한 매출액의 합계가 히트 상품과 비슷하거나 더 커질 수 있다는 롱테일의 전략은 AKB48의 전략에서도 발견된다. 롱테일 전략은 매출액이 높은 소수의 상품 판매보다 매출액이 떨어지는 다수의 상품을 폭넓게 판매하는 것이 성과가 더 큰 경우를 말한다. AKB48에 견주어 말하자면, 비교적 인기가 적은 다수의 멤버가 ‘롱테일’에 해당된다. 실제로 2017년 선발 총선거에서 상위 세 사람(멤버)이 기록한 득표수는 각각 24만 6376표, 14만 9132표, 11만 3615표에 달했다. 그러나 3만 표 수준인 15위에서 22위, 2만 표 수준인 23위에서 55위, 1만 표 수준인 56위에서 100위의 득표를 합치면 상위권의 득표수를 능가한다.

⑥ 해외 거점 전략
AKB48의 아시아 진출 방식은 독특하다. 다수의 자매 그룹을 통해 일본 국내를 넘어 해외 시장으로 시야를 넓히고 있다. 흔히 해외 진출을 떠올리면, 가수가 다른 나라를 찾아가 팬 미팅과 공연, 방송 활동을 하는 것이 연상된다. 그러나 AKB48은 일본 국내 스케줄만으로도 바쁜 멤버들을 현지로 보내는 대신 아예 해외에 거점 그룹을 만들어 버렸다. 이를 테면, 태국 방콕의 AKB48 자매 그룹인 BNK48 멤버들은 태국 현지에서 치열한 오디션을 거쳐 뽑힌 그 지역 출신 소녀들이다. 이처럼 아시아 여러 지역에 AKB48의 자매 그룹을 만들어 그들을 통해 제이팝(J-pop)을 알린다. 그리고 그중 뛰어난 멤버들은 AKB48 멤버로 흡수시켜 ‘범아시아 아이돌 그룹’을 지향한다는 전략이다. 일본 현지 시장에만 머물러서는 사업 확장성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일찍부터 아시아 시장에 도전한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⑦ 전용 극장
2000년대 들어 음반 산업이 불황의 늪으로 빠져들면서 제이팝 아티스트의 주요 수입원은 음반 판매 수익에서 공연료로 바뀌었다. 자연스럽게 입장료는 크게 높아졌다. 그 즈음 AKB48은 일반 아티스트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렴한 입장료로 소득이 낮은 젊은 팬들을 끌어안았다. 정상에 올라선 이후에도 AKB48은 ‘만나러 갈 수 있는 아이돌’을 콘셉트로 거의 매일 200~300명의 관객을 대상으로 공연을 하고 있다. 이런 전략은 데뷔 초기부터 아키하바라에 AKB48만의 전용 극장을 가지고 있었던 덕분에 가능했다. 아키하바라 극장 주변은 일본 현지인은 물론, 외국인들이 찾는 팬덤의 성지로 탈바꿈하고 있다.

⑧ 성장형 아이돌
AKB48이 지향하는 아이돌상(像)은 팬들이 직접 참여해 육성시켜 나가는 ‘다마고치[3]형’(성장형)이다. 프로에 비해서는 실력이 부족하지만 팬들은 자신의 열광적 지지로 나날이 성장하는 멤버를 보며 용기와 위안, 대리 만족을 느낀다. 미완성 아이돌을 팬들이 프로로 성장시킨다는 콘셉트는 처절한 연습생 시절을 거쳐 완성도 높은 무대를 선보이는 한국의 아이돌 입문 패턴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한국 아이돌은 완성된 상태로 등장하지만, AKB48은 아이돌과 팬이 함께 미완성을 완성으로 키워 나가는 성장 스토리를 만든다. 말하자면 기존의 ‘잘 다듬어져 완성된 아이돌’로는 소비자의 눈길을 오랫동안 잡아 둘 수 없다는 점에 착안한 역발상 전략으로 성공을 거둔 것이다.

다음은 지난 2013년에 발매된 평론가 다하라 소이치로(田原総一朗)와 아키모토 야스시의 대담을 엮은 책 《AKB48의 전략(AKB48の戦略)》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다하라: 미완성이란 극단적으로 말하면 서투름이다. 그런 서투름에 사람들이 질리지 않을까?
아키모토: 비록 서툴더라도 ‘열심히 하고 있다’라는 점이 중요하다. ‘AKB가 그렇게 어설플 줄이야’로 충분하다. 중학교 시절의 문화제를 떠올려 보라. 모두 어설픈 밴드에게 ‘와우!’라고 했지 않은가. 열심히 하면서 흘리는 땀을 보고 싶은 거다. 밴드 활동을 하다 싱글을 내면 ‘이야, 이전보다 좋아졌잖아’라고 생각한다. 그게 바로 AKB다.
 
⑨ 겸임 및 이적 제도
AKB48을 비롯해 일본 국내에 여섯 개, 해외에 두 개의 자매 그룹을 보유하는 이 걸 그룹에는 특유의 겸임 및 이적 제도가 존재한다. 겸임(兼任)이란 글자 그대로 특정 그룹에 등록되어 활동하면서 다른 그룹의 겸임 멤버로도 활동하는 것을 말한다. 또 이적(移籍)이란 걸 그룹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현재의 소속을 떠나 다른 그룹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계열사로 적을 옮기는 것과 유사한 형태다. 특수한 사례이기는 하지만 지난 2014년에는 AKB48과 노기자카46 상호간의 ‘교환 유학’이라는 형태로 해당 그룹 멤버 두 사람이 겸임을 맡은 적도 있다.[4] 각 도시 거점별 활동과 멤버의 겸임 및 이적이라는 운영 방식은 개방성과 확장성이라는 측면에서 AKB48의 큰 강점으로 꼽을 수 있다.

⑩ 무한 콘텐츠 생산
AKB48은 멤버 개개인이 콘텐츠(sources)이자 생산자(producer)이며 동시에 이를 유통시키는 발신자(distributer)이기도 하다. 그룹에 소속된 약 300명의 멤버들은 SNS(블로그, 트위터, Google+ 등)를 활용해 수시로 팬들에게 콘텐츠를 전달하고 있다. 팬들과의 접촉 기회를 넓히는 한편으로 소비자(팬)가 별도의 비용 부담 없이 문화 소비를 이어 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멤버들은 자신의 꿈을 펼치고자 필사적으로 고객이 원하는 질 좋은 콘텐츠를 창출한다. 물론 콘텐츠를 작성하는 시간에 어떤 금전적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유명 예능인을 목표로 하는 멤버들의 미래가 달려 있는 일이기 때문에 보다 공격적으로 무료 콘텐츠를 생산하고 제공하게 된다.

300여 명의 생산자들이 매일 쏟아 내는 다양하면서도 엄청난 분량의 콘텐츠는 제아무리 핵심 팬일지라도 전부 소비하지 못한다. 바로 이 점이 AKB48이 가지는 파워다. 콘텐츠가 너무도 다양해 팬들이 식상해할 틈이 없다. 이는 자신이 지지하는 아이돌의 정보를 적극 섭렵하게 만드는 팬 유인책으로도 작용해 고도의 심리 전략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AKB48 전략의 핵, 선발 총선거

 
근래 국내 TV의 음악 방송이나 예능, 각종 시상식 등에서 가장 빈번하게 접하는 아이돌의 하나로 워너원(Wanna One)을 꼽을 수 있다. 워너원은 2017년 8월 데뷔한 11인조 보이 그룹으로 엠넷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즌2〉(2017년 4~6월 방영)를 통해 태어났다. 가요 기획사 소속 남자 연습생 101명이 치열한 경쟁을 펼친 다음, 시청자 투표 순위에서 1~11위에 들어간 연습생이 워너원으로 데뷔했다.

사실 국내 가요계에 대국민 투표를 접목시킨 원조는 다름 아닌 AKB48이다. AKB48은 매년 일본 국내외 팬들을 대상으로 ‘선발 총선거’를 열어 최고 인기 멤버 16명을 뽑고 멤버별 순위를 매긴다. 총선거는 결과에 따라 센터 포지션(무대 앞줄 중앙)에 설 멤버와 싱글 타이틀곡에 참여할 멤버를 결정하는 한 해 최고의 이벤트이다. 순위는 100위까지 발표되지만, 100위에 오르는 것도 그렇게 녹록한 일만은 아니다. 아키하바라 전용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AKB48을 비롯해 자매 그룹인 NMB48, HKT48, NGT48, STU48 등의 멤버와 정식 데뷔를 하지 않은 연구생까지 합치면 입후보자 수는 300명을 훌쩍 넘는다.

총선거는 지난 2009년에 처음 실시되었고 이후 매년 한 차례 개최되고 있다. 총선거의 정식 명칭은 ‘AKB48 ◯th 싱글 선발 총선거’이며 통상적으로 ‘제◯회 AKB48 선발 총선거’라고 불린다. 매번 부제(서브 타이틀)가 바뀌어 가며 붙는데 항상 튀는 문구로 장식된다. 지난 2015년의 부제는 ‘순위 예상 불가능, 거친 하룻밤(順位予想不可能、大荒れの一夜~)’, 2016년은 ‘우리들은 누구에게 붙어 가는 게 좋을까?(僕たちは誰について行けばいい?~)’, 2017년은 ‘우선은 싸우자! 얘기는 그 다음부터다(まずは戦おう!話はそれからだ~)’였다.
2017년 AKB48 선발 총선거 포스터
총선거 일정이 발표되면 멤버들은 출마 선언을 하고 포스터를 제작해 지정된 장소에 부착한 뒤 유튜브를 통해 정견(공약) 방송을 내보낸다. 입후보자의 표심 잡기는 국회의원이나 지자체장 선거를 뺨칠 정도다. 자신이 지지하는 멤버를 당선시키기 위해 음반(CD) 수십, 수백 장을 사재기하는 일은 다반사이며, 특정 팬들이 모여 선거 대책 본부를 출범시키는 진풍경도 연출된다.
2018년 AKB48 선발 총선거를 앞두고 공개된 멤버들의 출마 포스터
지난 2017년 제9회 AKB48 선발 총선거를 예로 들어 설명해 보자. 투표 기간은 2017년 5월 30일(화) 오전 10시부터 6월 16일(금) 오후 3시까지로 하루에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보름 이상에 걸쳐 진행되었다. 개표는 2017년 6월 17일(토) 일본 남쪽 오키나와(沖縄)의 해안 공원 도요사키 츄라 썬비치(豊崎美らSUNビーチ)에서 이루어졌다.

개표는 실제 선거처럼 지상파 TV에서 생중계될 정도로 현지의 엄청난 관심 속에서 진행된다. 일본 정부의 실제 총선거보다 AKB48의 총선거에 더 많은 관심이 몰린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AKB48의 총선거에 일본 열도가 들썩거린다’는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더욱 놀라운 것은 총선거 직후 일본의 스포츠 전문 매체인 닛칸스포츠가 호외(號外)를 발행한다는 사실이다. 아무리 인기가 높다고는 하지만 걸 그룹의 인기투표 결과를 몇 년째 호외로 뿌릴 정도면, AKB48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데뷔 초기 AKB48 운영진은 많은 인원 때문에 모든 멤버의 방송 출연이 어려워지자 10~20명 안팎의 멤버를 선발해 출연시켰다. 선발 총선거가 개최되기 이전까지는 프로듀서 등의 운영진이 싱글곡마다 선발 멤버를 선택했었다. 그러나 이런 운영진 주도의 멤버 선출 방식은 멤버와 팬들로부터 “항상 그 멤버만 선발되는 건 불합리하다”, “왜 저 멤버는 선발되지 않는가?” 같은 항의를 받았다.

이러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그렇다면 팬 스스로 센터를 결정해 보라’는 운영진의 도전적 제안이 선발 총선거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마침내 대중이 AKB48의 프로듀서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총선거는 단순히 AKB48 그룹 팬들과 감동을 공유하거나 관계를 심화시키는 데 머물지 않는다. 그룹 간 또는 멤버 간에 서열화와 경쟁의식을 심어 자신의 끼와 재능을 개발하고 키워 나가는 구도를 만든다. 인간은 조직에서 자신의 위치와 서열을 깨닫는 순간 본연의 분발 의지가 자극되어 자율 시스템(autonomous system)이 작동한다.

총선거가 현재와 같은 대규모 이벤트로 발전하게 될 것이라고는 프로듀서도 멤버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총선거가 시작되기 전 아이돌 그룹 내에서 멤버의 인기를 표출하거나 서열화하는 것은 금기(禁忌) 중의 금기였다. 여럿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조화를 의미하는 ‘와(和)’를 중시하는 일본에서는 더욱 금기시되어 왔다. 총선거는 지금껏 금기시되어 왔던 멤버의 서열을 놀라울 정도로 간단하게, 그러면서 대대적으로 언론에 노출시켜 버렸다. 이런 과감한 시도가 팬은 물론 그동안 무관심했던 대중까지도 열광하게 만들어 의도하지 않은 큰 성과와 파장을 함께 몰고 왔다.

대중의 실제 관심도는 투표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2017년 AKB48 선발 총선거에서는 총득표수가 338만 2368표나 될 정도로 팬들의 참여 열기가 뜨거웠다. 그렇다고 총선거가 모든 멤버들을 만족시켜 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투표 결과, 순위가 낮거나 예상에 못 미치는 결과가 나온 멤버들은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이를 대비해 운영진에서는 임상 심리 전문가와 카운슬러로 팀을 꾸려 멤버들을 대상으로 한 체계적인 심리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5] 총선거를 통한 서열화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1인 다표제의 경제학

 
AKB48 싱글 선발 총선거의 투표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총선거의 경우 다음 항목 어딘가에 해당하는 경우에 한해 투표권이 주어진다. 팬들이 투표권을 손에 넣는 방법은 크게 일곱 가지다.

① CD 구입
② 각 그룹의 모바일 회원
③ 각 그룹의 모바일 이메일 월액 회원
④ AKB48 공식 팬클럽 ‘니혼하시라회’(二本柱の会) 회원
⑤ 각 그룹의 DMM LIVE!! ON DEMAND 월액 회원
⑥ AKB OFFICIAL NET 회원
⑦ 총선거 당일 콘서트 입장객

위에 제시한 일곱 가지 투표권의 특징을 상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 CD 구입
1646엔(약 1만 6000원)에 구입할 수 있는 2017년 5월 31일 발매 AKB48 48th 싱글에는 일련 번호가 기재된 투표권이 들어 있다. 특설 사이트에 접속한 후 일련 번호를 입력하고 원하는 멤버에게 투표하면 된다. AKB48 48th 싱글은 발매 첫날에만 무려 121만 7000장 팔렸다.

② 각 그룹의 모바일 회원
각 그룹 모바일 회원은 1표를 행사할 수 있는데, 회원은 월 324엔의 회비를 지불해야 한다. CD를 구입하는 것보다 저렴해 처음 투표하는 사람들이 주로 활용하는 방법이다. 투표만 하고 회원을 탈퇴하는 경우도 많다. 투표는 각 그룹의 모바일 회원이 소속된 사이트에 접속해 스마트폰이나 휴대폰으로 하게 된다.

③ 각 그룹의 모바일 이메일 월액 회원
각 그룹의 모바일 이메일 회원은 1표를 행사할 수 있는데, 회원은 월 324엔의 회비를 지불해야 한다. 투표는 회원이 소속된 사이트에서 이루어지며, 동일 그룹 서비스 내에 복수로 등록했더라도 한 명의 회원이 투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1표뿐이다. 다만, 다른 그룹에 회원으로 여럿 가입해 있다면 그 수만큼 투표권이 부여된다.

④ AKB48 공식 팬클럽 ‘니혼하시라회’ 회원
공식 팬클럽의 회원이 되면 1표를 행사할 수 있으며 연회비는 480엔, 입회비는 1000엔이다. 투표는 ‘니혼하시라회(二本柱の会)‘ 회원 사이트에서 한다. 또한 니혼하시라회의 ID는 등록 메일 주소를 바꿔 복수로 만들 수 있어 그 수만큼 투표가 가능하다.

⑤ 각 그룹의 DMM LIVE!! ON DEMAND 월액 회원
DMM LIVE!! ON DEMAND는 각 그룹의 극장 공연을 실시간으로 송신하는 서비스로 월 3066엔의 구독료를 지불해야 한다. 회원이 되면 1표를 행사할 수 있다. 투표는 각 회원 사이트에서 이루어진다.

⑥ AKB OFFICIAL NET 회원
AKB48 공식 인터넷 서비스로, 회비는 월 1480엔이다. 회원이 되면 AKB OFFICIAL NET 사이트에서 1표를 행사할 수 있다.

⑦ 총선거 당일 콘서트 입장객
총선거 주간에 개최되는 AKB48 그룹 콘서트에 참여하는 모든 입장객에게는 투표권 한 장이 부여된다.

누구나 총선거의 유권자 자격을 가지지만, 아무나 투표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유권자로 참여하려면 투표권이 필요하고, 그 권리는 지불한 금액에 비례해 차별적으로 주어진다. 즉, 팬은 구입한 CD 수만큼 투표권을 가질 수 있고, 각 그룹의 회원으로 복수 가입하거나 공식 팬클럽 회원으로 ID를 여러 개 가지면 그에 해당하는 수만큼 ‘1인 다표’(多票)의 권리를 누릴 수 있다. 1인 다표는 총선거 시스템을 특징짓는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총선거의 가장 대표적인 투표권이라면 역시 ‘CD에 든 투표권’이다. 논쟁과 비판이 가장 많이 집중된 투표권이기도 하다. 이 투표권은 팬이 구입한 수에 비례해 권리(투표)를 행사할 수 있어 여타 투표권과 사뭇 다른 성격을 지닌다. 주식(株式) 보유 수만큼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주주(株主)의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싱글 음반 1장에는 투표권 1장이 들어 있는데 이를 활용해 1표를 행사하게 된다. 가령 투표권 100장을 확보했다면 무려 100회 투표할 수도 있다. 자신이 응원하는 멤버가 상위 16인에 들도록 몰표를 주기 위해 팬 한 명이 CD를 수백 장에서 수천 장을 사재기하는 일들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이유다.

실제로 팬들의 사재기는 AKB48 음반의 밀리언셀러 달성에 지대한 공헌을 한다. 공략 대상도 10대 청소년이 아닌, 구매력을 가진 성인 남성이다. 그런 측면에서 총선거라는 형태의 이벤트는 인간의 경쟁 심리를 너무도 정확히 읽어 낸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똑같은 음반을 수십 혹은 수백 장씩 구매하게 만드는 AKB48의 판매 전략에 대한 대중의 시선이 마냥 곱지만은 않다. 총선거 투표권은 사회적으로 불합리한 행위이자 빗나간 ‘AKB 상술’이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는다.

음악 평론가 도미사와 잇세이(富澤一誠)는 총선거를 가리켜 “CD 불황 속에서 나온 비즈니스 아이디어로 평가할 수 있다”면서도 “특정의 팬 등 이른바 ‘취할 수 있는 곳에서 취하는’ 발상이 지나치게 전면에 나서면 음악 이외의 요소로 순위 및 매출이 높아져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는 작품은 태어나기 어렵다”고 비판했다.[6]

일본 현지 뮤지션들 사이에서도 투표권이라는 특전을 가지고 싶어서 한 명이 여러 장의 CD를 구입한 다음 곧바로 그 CD를 폐기하는 것은, 음악 애호가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성토의 목소리가 나온다. 또 그런 일들이 횡행하면 음반 시장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AKB 상술을 강하게 비난한다.

AKB 상술은 그 외에도 다음과 같은 지적을 받는다. 첫째, 총선거 결과가 인기 순위가 아닌 자금력 순위라는 비판이다. CD 1장에 투표권 하나라는 시스템하에서는 평소 인기가 높지 않은 멤버가 백만장자의 후원을 받으면 선발 1위로 등극해 센터 포지션을 차지할 수 있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결국 특정 멤버의 인기가 아니라 팬들의 자금력이 어느 정도냐를 판가름하는 선거가 될 수 있다.

둘째, 음반 시장을 왜곡시킨다는 지적이다. 일부 광팬들은 총선거 투표권을 목적으로 음반을 대량 구매해 티켓만 빼내고 음반은 곧바로 중고 가게나 온라인 경매에 저가로 내놓아 가요 시장을 교란시키기도 한다.

셋째, 신인 아이돌 탄생을 저해한다. 대규모 인원을 멤버로 꾸려 시장을 독과점(獨寡占) 상태로 만들고, 팬의 규모가 한정된 가요계에서 다른 아이돌 그룹이 설 자리를 빼앗는다는 비판이다.

 

로컬화와 라이벌 전략; AKB48의 미래

 
AKB48이 공들여 추진해 온 전략 가운데 근래 그 성과가 확연한 것이라면, 단연 로컬화 전략과 라이벌 전략을 꼽을 수 있다. 두 전략을 통해 AKB48 그룹의 미래상을 진단해 보자.

아키하바라를 거점으로 활동하는 AKB48을 시작으로 일본 현지에는 2008년 SKE48, NMB48, HKT48, NGT48, STU48 등의 자매 그룹이 존재한다. 각 지역에 거점을 두고 활동하는 AKB48 자매 그룹은 단순히 해당 지역 대표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일본 전국적으로도 지명도가 급상승하고 있다. 해외 거점의 자매 그룹 결성을 추진하면서 글로벌화(globalization)에 경도되는 듯 보였던 그룹 전략이 예상을 뛰어넘어 로컬화(localization)에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17년 선발 총선거에서 팬 투표로 선발된 멤버 16명의 재적 그룹을 집계해 보면, AKB48 소속이 4명, 나고야의 SKE48이 5명, 오사카의 NMB48이 2명, 후쿠오카의 HKT48이 2명, 니가타의 NGT48이 3명 등으로 일본 전국에 걸쳐 골고루 분산되어 있다. 이는 로컬화 전략이 성공적으로 뿌리내리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로컬화 전략의 성공에는 다음의 두 가지가 주효했다. 첫째는 도쿄 아키하바라에 거점을 둔 AKB48의 인기 멤버를 지역 그룹으로 파견해 해당 지역 그룹을 활성화시키는 전략이다. 실제로 지난해 총선거에서 24만 6376표를 얻어 1위로 선발된 사시하라 리노(指原莉乃)는 HKT48과 AKB48의 멤버를 겸임하고 있다. 둘째는 팬들의 소속감을 자극한다는 것이다. 팬은 자기 지역 그룹을 적극 지지하게 되고, 그 그룹 멤버가 선발 멤버에 들어가길 간절히 응원한다. 그런 팬 의식을 최대한 활용해 다른 지역 그룹과 경쟁하게 함으로써 총투표수의 확대를 도모하고 있다. 무엇보다 총투표수 확대는 음반 판매 증가로, AKB48의 이익(매출)으로 직결된다.

이처럼 AKB48 그룹의 로컬화 전략은 체계적이면서도 치밀하다. 일본 현지에서 중앙 정부의 지방 자치 단체 부흥 전략보다 지역 활성화에 훨씬 더 공헌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다.

그러나 ‘AKB 신드롬’으로 불릴 정도로 일본 전역을 뜨겁게 달구었던 초기의 총선거와 비교하면 근래 AKB48의 기세는 주춤한 듯 보이기도 한다. 몇 년 전만까지만 해도 AKB48의 얼굴이었던 마에다 아쓰코(前田敦子)와 오시마 유코(大島優子)가 에이스 자리(센터 포지션)를 두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이 연일 미디어를 장식하면서 AKB48 그룹을 국민적 아이돌로 끌어올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지난 2013년 이후 투표수에 조금씩 기복이 발생하고 있다.

지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행해진 총선거의 투표수 추이를 살펴보자. 2013년까지 꾸준히 상승했던 투표수는 2014년 주춤했다. 2015년 투표수는 다시 급증하지만 2016년에는 오히려 감소했고, 2017년은 다시 증가세를 이어갔다.

모든 제품은 수명 주기(Product Life Cycle·PLC)를 가지고 과정별로 서로 다른 특성을 보인다. 제품이 시장에 처음으로 투입되어 일반인들에게 인식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고(도입기), 어느 정도 보급되기 시작하면 가속도가 붙어 매출액이 급속하게 증가한다(성장기). 그러나 영원히 성장만을 거듭할 것 같은 제품도 일정 시점부터 다수의 경쟁자가 출현하면서 수요는 포화 상태에 이른다(성숙기). 그리고 어느 순간 제품은 서서히 쇠락해 간다(쇠퇴기). AKB48 선발 총선거의 총득표수 추이에 이런 PLC의 개념을 대입해 보자.

AKB48가 결성된 직후인 2005~2010년을 도입기, 2010~2015년을 성장기, 그리고 2015년부터 현재는 성장이 멈추는 성숙기에 진입했다고 판단된다. 매년 투표수를 늘려 왔던 2015년까지와 비교해 2016년과 2017년의 최근 2년은 투표수의 증가율 둔화가 뚜렷하다.

성숙기의 가장 큰 특징은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고 매출액 증가세가 둔화되기 시작하면서 이른바 정점에 이르는 시기이다. 때문에 AKB48이 과거처럼 활동 영역을 크게 확장시킨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상황이다. 성숙기에 필요한 전략은 특별 부양책을 강구해 정점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고 쇠퇴는 늦추는 전략이 최선책이다.

지난 1997년 일본에 데뷔한 ‘모닝구 무스메(モーニング娘。)’는 2000년대 전반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중반부터 침체기에 빠지면서 PLC의 쇠퇴기로 모두가 판단하였다. 그러다 2011년 이후 돌연 부활하면서 현재까지 높은 인기를 유지해 오고 있다. 이처럼 PLC에서 보여 주는 각 단계가 모두가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며, 얼마든 다른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다만 AKB48는 모닝구 무스메처럼 성장기와 성숙기를 거쳐 쇠퇴기에 이르고, 자체적으로 다시 부활하는 시나리오를 상정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그 증거가 지난 2011년 데뷔한 노기자카(乃木坂)46이다. 노기자카46은 프로듀서 아키모토가 성숙기로 가던 인기 절정의 AKB48에 맞붙인 강력한 대항마다. 노기자카46의 46이라는 숫자는 AKB48보다 멤버수가 적을지언정 결코 밀리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아 아키모토가 붙인 이름이다. AKB48의 공식 경쟁자(competitor)를 만들어낸 것이다.

라이벌 관계에 있는 아이돌 그룹을 새로 만들어 치열하게 경쟁시킨다는 전략이었다. 아키모토의 노림수는 ‘강한 경쟁자 덕분에 다른 것들의 활동 수준이 높아져 전체 분위기가 활성화된다’는 이른바 메기 효과(catfish effect)[7]라 할 수 있다.

강력한 라이벌이 존재하면 기존의 시장 지배자(leader) AKB48도 긴장할 수밖에 없고, 새로 등장한 라이벌(challenger) 역시 시장 지배자를 뛰어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어느 한쪽이 시장에서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동안은 라이벌도 쉽게 퇴색되지는 않을 거라는 판단에서다.

프로듀서의 의도는 적중했다. 현재 AKB48 그룹의 자매 그룹인 노기자카46, 케야키자카(欅坂)46 등이 상승세를 타고 있다. 특히, AKB48과 노기자카46의 경쟁은 오리콘 차트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17년 한해 오리콘 차트 싱글 순위를 보면, 1위에서 4위까지를 AKB48의 싱글이 차지했고, 이어 5위에서 7위까지를 노기자카46의 싱글이 차지하고 있다.

두 그룹의 관심도 경쟁도 치열하다. 구글 트렌드에 따르면 AKB48의 관심도가 시장에서 차츰 감소하고 있는 반면, 노기자카46은 꾸준히 상승세를 이어 가다 2016년 무렵 AKB48을 앞질렀다. 노기자카46이 아직 AKB48의 인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급속히 그 뒤를 쫓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인스턴트 아이돌에서 간판 아이돌로

 
지난 2010년경부터 일본 현지에서는 AKB48의 인기에 편승해 그 이름을 모방한 ‘알파벳 약자+숫자’ 이름을 신제품이나 광고, 작품 등에 사용하는 오마주(hommage)가 다양하게 등장했다. 또한 AKB48 선발 총선거의 시스템을 모방하거나 타이틀에 ‘총선거’를 가져다 붙인 인기투표 기획도 줄을 이었다. AKB48의 성장 과정을 분석하면 일본 경제의 흐름만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현상, 나아가 비즈니스 전략까지도 꿸 수 있다는 주장들이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경제학자 다나카 히데토미(田中秀臣)는 AKB48은 불황에도 강한 ‘디플레이션 문화’의 하나라고 주장하며, 디플레이션이라는 일본 경제 상황에 적응하고자 태어난 것이 바로 AKB48의 전략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아베노믹스를 통한 일본 경제 회복에 발맞춰 디플레이션이 해소되고 인플레이션이 도래하면 AKB48의 인기는 후퇴 또는 종언을 맞을 것이라는 견해도 내놓고 있다. 조만간 일본은 디플레이션과의 오랜 싸움을 끝낼 것으로 보이는데 AKB48의 인기가 실제 하락세로 돌아설지 초미의 관심사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소비자의 식상함과 피로감은 콘텐츠 생산자에게 가장 큰 압력이자 두려움이다. 오랜 기간 정상의 자리를 유지해 오면서 점차 대중에서 소수의 오타쿠 위주로 팬이 결집되고 있다는 시장의 따가운 지적은 AKB48 그룹이 극복해야 할 과제다.

프로듀서 아키모토로 대표되는 기업 AKS는 시장의 목소리를 적극 수렴해 멤버를 수시로 교체하면서도 노기자카46 같은 전혀 다른 아이돌 그룹을 결성하는 등 새로운 콘텐츠 창출을 위한 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설령 AKB48 그룹 위상에 금이 가더라도 이를 대체할 아이돌 그룹을 이미 확보한 상황이라 당분간 AKS의 미래상이 크게 위축되는 일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일 합작의 〈프로듀스48〉은 지금껏 시도된 적이 없는 대단히 흥미롭고 놀라운 기획임에 분명하다. 전 세계 60퍼센트를 차지하는 범아시아 시장에서 경쟁력과 포용성을 함께 지닌 아시아 콘텐츠를 만들 수도 있다. 한일 문화 교류 차원은 물론 양국에 걸친 거대한 프로젝트라는 점에서도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s) 창출의 기대감은 어느 때보다 높다.

끝으로 AKB48의 운영 시스템과 전략이 케이팝(K-pop)에 던지는 시사점은 이렇다. 우선 AKB48의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세밀히 분석해 취사선택 과정을 거친 다음, 케이팝에 맞게 적용하는 운용의 묘가 필요하다. 대중의 취향이 끊임없이 다변화하고 새로운 아이돌이 줄지어 데뷔하는 가운데 단기간에 수명을 다하는 ‘인스턴트형 아이돌’이 아니라, 오랜 기간 정상을 유지하면서 케이팝을 이끌고 그 붐을 세계로 전파하는 ‘간판 및 장수(長壽)형 아이돌’ 육성 시스템과 전략이 요구된다.
[1]
ORICON NEWS, 2017. 9. 5.
[2]
총선거의 의미를 포털 네이버에 비유하자면, 페이지 순위에 해당된다. 네이버 검색 첫 번째 페이지의 노출도는 매우 높은 반면, 두 번째 페이지 이후는 사람들이 잘 보지 않는 것처럼 득표 상위 멤버 위주로 대중에 인지되고 노출된다.
[3]
다마고치는 1997년 출시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휴대용 전자 애완동물 사육기이다.
[4]
교환 유학은 AKB48의 마쓰이 레이나(松井玲奈)와 노기자카46의 이코 마리나(生駒里奈) 두 사람을 대상으로 이루어진 사례가 있다.
[5]
秋元康․田原総一朗, 《AKB48の戦略!秋元康の仕事術》, 2013.
[6]
〈AKB商法席巻〉, 産経新聞, 2012. 1. 29.
[7]
과거에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해역에서 청어를 잡아 수조에 넣어 육지로 운반해 오는 도중 청어들이 많이 죽었다. 한 어부는 육지에 도착해서도 살아 있는 싱싱한 청어를 운반하는 비결을 깨우쳐 많은 돈을 벌게 된다. 비결은 청어보다 덩치가 큰 메기를 수조에 넣는 것이었다. 물론 청어 일부는 메기에게 잡아먹혔지만 다른 청어들은 배가 육지에 도착할 때까지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이처럼 강한 경쟁자 덕분에 구성원들의 활동 수준이 높아져 전체 분위기가 활성화되는 것을 ‘메기 효과’(catfish effect)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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