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생산적인 생산의 시간
8화

불규칙한 삶에는 철두철미한 자세가 필요하다

불규칙한 삶에는 철두철미한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는 한 집단의 일원이 되어 소속감을 느끼고 그곳에서 지위를 갖는 것을 일반적인 삶의 형태로 여긴다. 학교, 회사 등 소속 집단에서 요구하는 반복적인 사이클에 따라 사는 삶이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그 지루함에 정비례하는 어느 정도의 안정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감독 지망생들은 이와 다르다. 특정 시스템의 제어나 요구를 받지 않는다. 자유로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정신 상태, 시간 그리고 자금까지 모든 부분이 온전히 자신의 책임과 관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뜻한다.

준성: 예전에 목표가 서른 전에 입봉하는 거였어요.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이 되자. 응원해 주시는 사람들도 많았고. 그런데 ○○○ 감독님이 술 먹다가 저한테 그런 얘기를 해주셨어요. 너는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 걱정되는 것은 너무 빨리 날려고 하다가 떨어지면 다시는 못 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자기는 멀리멀리, 오래오래 나는 새가 되고 싶다고. 처음에는 되게 날개도 예쁘고 멋지게 날아갈 수도 있지만 바로 추락해 버리면 그 이후에 너무 힘든 삶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너만의 사상, 너의 중심, 이런 것들을 가지고 조급하지 않게 출발했으면 좋겠다.

(영화를 한 편만 찍고 싶다고요?)
주현: 그니까 한 편만 찍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다음은 모르겠고. 어떻게 되겠지, 뭐. 그것까지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요. 오히려 꿈을 꾸고 계획을 세우면 되게 상처받는 게 이쪽 일인 것 같아요. 지금 현재를 살지 않으면, 되게 힘든 것 같아요.

 멘탈을 관리하는 능력은 감독 지망생들이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었다. 준성은 빠르게 목표를 이루려고 하기보다 장기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주현은 꿈을 꾸기보다 단기적인 계획을 성취해 나가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이 둘의 이야기는 언뜻 상반되어 보이지만, 둘 다 좋아하는 일에 대한 들뜬 마음을 다스리고 냉정하게 미래를 내다보려 한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윤아: 지금 바로 눈앞의 플랜들은 어찌어찌 만들면서 하는데, 과연 이게 생각한 대로 될 것이냐가 문제예요. 그리고 사실 나이가 많아지면 다른 일을 곁들여서 하더라도, 그 직업군에서도 전문성을 요구할 텐데, 이런 곁다리로 그런 걸 충족할 수 있을까. 그런 것도 개발을 같이 해야 되나. 그런 고민?
(고민이 되게 구체적이신 것 같아요. 꿈꾸는 미래도 그렇고.)
막연하면 불안해요.

신희: 일단 돈을 벌어야만 이거를 할 수 있죠. 아사(餓死)할 수 없으니까. 적어도 내가 친구들이랑 만났을 때 뭐 술이라도 한잔 하려면 그렇고. 아무것도 안 할 수 없으니까. 그러면 내가 정말로 쓸모없는 인간이 되는 건데.

윤아는 합리적이고 철두철미한 자세가 비단 작품 제작뿐 아니라 생활 전반에 필요하다고 말한다. 신희의 말처럼 돈이 있어야 작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기관에서 영화 제작비를 지원받는다고 할지라도 그 비용은 작품만을 위한 것이다. 제작 지원은 큰 규모의 비용을 지원하지만 감독이 가져갈 수 있는 돈은 없다. 지망생이 언급한 한 지역 영상위원회의 규정을 보면 스태프 인건비가 20퍼센트 이상이어야 하고, 최저 임금을 준수해야 한다는 규정은 있지만, 감독의 임금은 포함되지 않는다. ‘지원 신청자의 인건비로는 사용이 불가’하다고 직접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한 지망생은 이 점이 이상하다고 말했다. 물론 자신의 영화이기는 하지만, ‘감독은 정말 자기 영화로는 돈을 벌 수 없는 존재구나, 나의 수고는 나 혼자만의 것으로 남는 것이구나’ 하는 체념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경제적인 문제로 영화를 포기해야 하거나 정신적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상황에 이르지 않도록 시간과 돈을 통제해 나갈 수 있는 철저한 계획이 필요한 이유다.

지망생들은 자발적으로 정해진 생활 체계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이들의 생활 사이클은 크게 작업에 쓰는 시간과 생업에 쓰는 시간으로 나뉘었다. 사이클 관리의 핵심은 작업과 생업을 적절한 비율로 배분하여 각각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지망생의 표현을 빌려, 너무 작업에 치우치면 아사하게 되고, 너무 생업에 치우치면 배보다 배꼽이 커져 버리게 된다. 지망생들의 1~2년 단위 생활 사이클은 그 비율을 조절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두 유형이었다. 여섯 명의 지망생들은 작업에 몰입하는 기간과 생업에 집중하는 기간이 완전히 나뉘었고, 일곱 명의 지망생들은 작업과 생업을 병행하고 있었다.

한 번에 하나씩 헤쳐 나가는 스타일인 지망생들은 몇 개월 단위로 영화 작업에 필요한 돈을 바짝 벌어 두고, 작업을 할 시기가 되면 오로지 영화에만 몰두한다. 이들은 주로 생업을 위한 커리어가 따로 있거나 상업 영화 연출부를 하고 있었다. 지망생들의 ‘생업용 커리어’는 주로 웹 드라마 연출이나 시간 강사로 영화 작업만큼이나 창의성과 노력을 요하기 때문에 사실상 병행이 불가능했다. 상업 영화 연출부의 경우는 3개월가량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 한다.

윤아: 근데 또 경제적으로 해결을 하고 써야 되니까, 또 일을 완전 그만둘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드라마 일은 또 해야겠고. 최대한 (영화에) 도움이 되는 쪽으로 드라마 일을 하고, 그렇게 해서 모아 놓은 돈으로 다시 생활하면서 시나리오 쓰고, 그러려고요.

   

작업의 규칙들


작업에 쓰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 만큼 지망생들은 이 시간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꾸려 나가야 한다. 작업의 세부 규칙이 필요한 이유다. 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만드는 작업은 단순 노동과 달리 일정한 생산성을 지속하기 쉽지 않다. 아이디어를 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고민해야 하고 작품 감상이나 학습 등 새로운 자극이 필요하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체되기 쉬운 과정이어서 지망생들은 작업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저마다의 노하우를 개발하고 있었다.

지망생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방법은 ‘데드라인 만들기’였다. 지망생들은 혼자서만 확인할 수 있는 데드라인을 정할 경우 기한을 어기기 쉽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교사가, 직장에서는 상사가 관리·감독을 하는 이유다. 지망생들은 소속되어 있는 시스템이 없는 대신 공모전이나 제작 지원, 영화제 등의 일정을 마감일로 잡았다. 영화 제작 지원금이 달린 기회인 만큼 스스로 강제할 수밖에 없는 일정이다.

신희: 졸업하고 나서 영화를 찍으면서도 절대 내 돈으로 찍으면 안 되겠다. 남의 돈으로 찍어야 된다. 그런 생각이 좀 확고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제작비를) 잘 거둬들일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특히 단편은 어디 개봉관이 있는 게 아니라서 영화제에 입상해서 상금을 엄청나게 받거나 하는 게 아니면 본전 회수가 어려우니까. 어쨌든 남의 돈으로 찍어야 된다. 이런 생각이 있어서 이번 영화도 지원을 다 찾아봤죠. 재단이나 지원 사업 이런 데 다 넣어서.

윤진: (시나리오 작업을) 평소엔 슬금슬금 하는 거 같아요. 과외 할 때, 학생이 고민하는 시간이 있잖아요. 걔를 기다리는 시간 동안 연습장에 또 쓰는 거예요. 아까 얘기했던 (시나리오) 이야기를. 내가 쓰고 있더라고요. 머릿속에서 이렇게 계속 굴리다가 영상위원회 공고가 떠서 ‘아, 저런 거 내야겠다’ 할 때 본격화시키는 거죠. 데드라인도 있어야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찍을 사비가 안 되니까, 제작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거든요.

소영: 제가 학교를 안 다니니까 (생업에 종사하지 않을 때) 정해진 데드라인이 없잖아요. 그래서 강압적으로 영화제에 참가한다고 생각하고, 영상위에서 제출하라는 시간에 맞춰 내고, 전주(영화제)에 맞춰 내고. 그런 식으로 편집 빡세게 했다, 느슨해지다, 빡세게 했다, 느슨해지다 하는 것 같아요. 약간 공모 인생처럼 된 것 같아요.

(시나리오를 쓸 때 최소한의 규칙이 있을까요?)
지윤: 규칙이라 하면, 글쎄요…… 저한테 마감을 스스로 주는 것? 그 정도? 저도 마감이 있어야 쓰는 면이 있어서, 아카데미 장편 과정도 물론 하고 싶어서 지원한 것이지만 마감 역할도 해주거든요. 가끔 친구한테 나 며칠까지 너한테 메일 보내는 것을 마감으로 해달라, 이런 식으로 하기도 해요.

데드라인 준수는 영화 작업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이자 혼자서 진도를 수행해 나가는 데 강력한 동력이다. 지윤의 경우, 공모전 같은 공식적인 데드라인이 없으면 친구와의 약속을 통해서라도 사이클을 만들려 하고 있었다.

데드라인을 지키기 위해서는 매일매일의 작업을 진척시키는 것 또한 중요하다. 24시간을 스스로 관리해야 하는 만큼 지망생들에게는 한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큰 고통이었다. 소영은 “9시까지 어딘가에 출근하고 퇴근을 하는 삶이 주는 어떤 안정감은 분명히 있다”고 말하며 시간에 대한 책임이 온전히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압박과 우울감이 온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지망생들이 시간 낭비와 스트레스를 막기 위해 글을 쓸 때 스톱워치를 사용하고 있었다.

주현: 그냥 안 써져서 힘들어요. 되게 고통스러워요. 한 시간 쓰고 나서, 쓰지 못한다고 괴로워하고 있던 여덟 시간을 후회하고 있고…… 그런 것들에 고통받죠.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왜냐면 시간 관리를 내가 다 해야 하는데. 만약에 하루를 그냥 허송으로 보내면 되게 스트레스를 받죠. 그래서 스톱워치를 샀어요. 장강명 소설가가 그렇게 글 쓴다고 하더라고요. 하루에 몇 시간 일했는지 확인하고, 나 스스로 압박하기 위해서.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결과 대부분의 지망생들이 지속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방법은 느슨하지만 확실한 규칙을 세우는 것이었다. 매일매일 나태해지지 않도록 지켜야 할 최소한의 사항들이 그들의 생활 패턴을 지탱했다.

규칙의 첫 유형은 작업 장소에 관한 것이다. 작업을 위해 특정한 장소에 반드시 나가고, 돌아오지 않는 식으로 자신을 통제한다. 이런 작업 장소는 카페가 가장 많았고, 동료들과 함께 쓰는 작업실인 경우도 있었다. 한 장소에 마치 출근하듯 나가는 것이다.

지윤: 시간을 딱히 정하진 않았지만 하루에 한 번은 가려고 해요. 안 빠지려고 하고. 좀 규칙적으로 생활을 하는 시기에는 12시 전엔 나갔던 것 같아요, 보통 밤 12시까진 있는 편이고. 근데 그렇게 쭉 있을 수 있는 날은 일주일에 3일 정도? 아시겠지만 작업실이라는 공간이 되게 편한 공간이라서 거기서 노는 것뿐이고요. 집이 아닐 뿐이죠. (실제로 쓰는 시간은) 짧게는 한 시간에서 길게는 다섯 시간 정도?

두 번째 유형은 시나리오 작업 시간 혹은 분량을 정해 두는 것이다. 
 
태식: 저도 그렇고 주위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면. 하루에 실제 컴퓨터 앞에 앉아서 키보드 두드릴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는 것 같아요. 그니까, 제가 키보드 앞에 오래 있는다고 뭐가 나오는 게 아니라, 중요한 거는 그래도 하루에 세 시간, 네 시간이라도 그 시간을 정해서, 그게 낮이 됐든 아침이 됐든, 밤이 됐든 그걸 계속 손에 잡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준호: 급할 때는 48시간을 그냥 쓰기도 하죠, 급할 때는. 내야 되니까. 그렇지 않을 때는 하루에 한 신 이상만 쓰려고 해요. 그걸 목표로. 왜냐하면 사색만, 고민만 하다 보면 진짜 한 글자도 못 쓸 때가 많거든요. 그럴 때 느끼는 자괴감, 환멸감, 이런 게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하루에 한 글자라도, 쓰는 시늉이라도 하자.

시나리오 작업은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결과물이 나오지 않는다. 매일 마음에 드는 결과물을 내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오히려 성과가 안 나오는 날들이 반복되면서 사이클이 망가질 수 있다. 따라서 지망생들은 매일 써야 하는 분량을 과도하게 설정해 두기보다는 현실적으로 최소한의 시간과 분량 목표를 세우고, 매일 꾸준하게 지속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준호는 이러한 규칙을 통해 패턴이 망가지는 것을 방지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괴감이나 환멸감으로부터 정신 건강을 지킬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시간 단위로 생활 규칙을 만들어 자신을 통제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울: 자는 시간도 일어나는 시간도 불분명하지만, 자고 일어나는 목표는 있어요. 여덟 시간 이상 자면 안 되는 기준을 잡아 놓고 그것만 지켜요. 여덟 시간. 인간적으로 최소한만 하고 살자. 약간 이런. 왜냐하면 제가 이렇게 안 살았는데, 대학 졸업하고 나니까 패턴이 망가지더라고요. 이렇게 살면 죽겠다, 폐인이 되겠다, 이런 생각이 확 들어서, 여덟 시간만 지키면 제가 좀 괜찮겠다 싶어서 여덟 시간만 자고.

주현: 아침에 한두 시간 쓰다가, 뭔가를. 그냥 두 시간 쓰고, 두 시간 뭔가를 하고, 두 시간 쓰고, 두 시간 뭔가를 하고. 그냥 청소를 한다든가. 운동을 한다든가. 잠깐 누구를 만난다든가. 두 시간 간격으로 계속 뭘 하죠.

진우: 매일 네 시간 이상 써야 되는 것 같고 매일 두 시간 정도는 운동을 해야 될 것 같아요. 네 시간 쓰고 두 시간 운동하고 이거는 비법, 이런 게 아니라 유일한 방법? 운동을 병행하지 않으면 가망이 없는 것 같아요. 물론 체력도 관련이 있고 건강도 관련이 있는데, 일단 정서 상태? 이런 것들이 운동이 병행되지 않으면 자존감을 유지하기가 되게 어려운 것 같아요.

지망생들이 스스로 관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사실상 없어 보였다. 지망생들은 세상의 법칙에 따르지 않는 대신, 자신이 선택한 길을 책임지기 위해 철저해져야 했다. 자유로운 만큼 스스로 노력해야 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개인이 자유의 짐으로부터 도망쳐 새로운 의존과 종속을 통해 심리적 안정감을 찾는 존재라고 말한 바 있다. 의존할 곳 없이 매 순간을 자신의 선택과 책임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들이 세우는 규칙들은 단순히 결과물과 생산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정신적 안녕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등을 맞댄 동지들


윤아: 심리적으로? 어…… 저 섬 같아요. (웃음) 어차피 다 제가 해야 되는 거라서, 누가 해결해 줄 수는 없어서. 그런 생각이 드는 거죠. 결국 쓰는 거는 개인 작업이니까요. 작업이 잘돼서 집중할 때도 섬이 되는 거고, 잘 안되고 힘들 때도 섬이 되고.

소영: 연출 지망생들은 아무래도, 조금 개인적인…… 항상 쓰는 내내 누군가 옆에 있을 순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아무리 열심히 같이 해보려고 해도 개인적인 싸움이 될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감독이 되는 과정은 혼자만의 일이다. 소영이 말하듯, 시나리오란 아무리 다 같이 열심히 하고자 해도 자기 자신과의 싸움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망생들은 이 모든 과정을 완전히 홀로 견디지는 않았다. 공부와 연습을 함께하는 스터디도, 작업실을 공유하면서 모여 있는 형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태식은 영화 지망생들의 집단성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태식: 자존심이 세다고 해야 되나? 약간 ‘따로 또 같이’ 같은 그런 느낌이에요. 근데 뭔가 같은 일을 하고 있고, 같은 고민이 있고 그런 것들을 굳이 서로 털어놓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과 같이 있고 커뮤니티를 유지하고 그런 집단에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심리적 치료가 되는 것 같아요.

‘따로 또 같이’라는 태식의 표현은 지망생들이 모여 있는 형태를 잘 설명한다. 지망생들은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다 함께 손잡고 걸어 나가는 끈끈한 집단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맞대고 각자의 길을 걸어 나가고 있었다. 감독 지망생들의 작업실 또한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윤아: 아카데미 동기들이 학교 졸업하고서 다 작업실이 필요하니까, 잠깐 시나리오 쓰려고 품앗이 같이 돈을 분담해서 구했어요. 그냥 다들 자기 작업하는 곳이에요.
(영화를 하는 데 있어서 이 모임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영화를 할 때요? 부모님이나 다른 형제자매한테는 항상 걱정을 끼치기 마련이잖아요. 거기에서 벗어나야 작업에 몰두, 집중을 할 수 있는 거고. 근데 그런 생활이 지속되면 가족이랑은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그러면 이제 작업 공간을 같이 쓰는 사람들이 약간 다른 의미에서 가족이 되는 거죠. 오히려 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죠. 전우애 같은 느낌?

소영: 그런데 또 그런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만약 너무 철저하게 혼자서 한다면, 그게 너무 힘들고. 그래도 주위에 같이 이렇게 하는 사람들? 같이 영화를 하고 있고, 돈 없고, 상황이 안 좋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친구들이 주변에 있으면 그래도 조금 위로가 되고, 좀 더 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 계속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소영은 동료들과 월세를 분담하는 작업실을 같이 쓰지만 실질적으로 무언가를 같이 하지는 않으므로 룸메이트라고 표현한다. 지망생들은 서로에게 조금 다른 의미의 가족이기도 하며, 함께 싸워 나가는 전우이기도 하다.

서로의 작업에 개입하거나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어려움을 헤쳐 나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에게 심리적으로 큰 위안이 되어 주고 있었다. 지망생의 느슨한 연대는 긴 항해를 견뎌 낼 수 있게 하는, 없어서는 안 될 원동력이었다.

사실상 지망생들이 겪는 과정의 가치를 전적으로 알아주고 이해해 주는 것은 다른 지망생뿐인 듯하다. 사회의 시선은 말할 것도 없고, 가족들마저 그들의 선택을 완벽하게 지지해 주지는 못한다. 그들이 불안 혹은 소외를 겪고 있다면 그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프레카리아트라서가 아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지 않는 사회의 시선이 그들을 더욱 외롭게 하고, 믿고 있는 가치마저 의심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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