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5화

트럼프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내가 너의 아버지다.”
영화 〈스타워즈5: 제국의 역습〉에서 루크 스카이워커를 향한 다스베이더의 대사

 

끈질기게 부활하는 어두운 그림자


미국 대통령제 역사에서 트럼프는 블랙 스완 현상으로 일컬어진다. 정치가로 훈련받지 않은 일개 부동산 사업가가 위대한 링컨 대통령 이래 유수한 역사를 자랑하는 공화당을 접수한 사례는 전무후무하다. 트럼프는 도대체 어디에서 솟아난 것일까? 그는 어떠한 DNA를 물려받은 걸까? 물론 우리는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안다. 그렇다면 정치적 아버지는 누구일까?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은 오늘날 오바마 시대에 팽배해진 진보주의에 대한 낙관과 리버럴 진영의 자신감을 하루아침에 완벽히 산산조각 내버렸다. 오바마 정치 질서(political order)는 과연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어떤 특징으로 기록될 수 있을까? 한 가지 독특한 점은, 오바마 시기는 시대를 주도하는 집권 정치 세력 및 스페이스X 등 선도적 기업가들의 자신감과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가 최고조에 달한 시기라는 점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오바마의 당선 직후 드디어 탈인종주의 시대(post-racial era)가 도래했다는 낙관론에서부터 혁신주의 시대(progressive era)에 비견되는 신진보주의 시대(new progressive era)가 개막되었다는 선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미국 리버럴 진영의 대표적 전략가인 스탠리 그린버그(Stanley Greenberg)는 2015년 《상승하는 미국(America Ascendent)》이라는 저서에서 오바마 시대 이후 미국의 경제·사회·문화 전반에 신진보적 경향이 확고히 자리 잡았다고 주장했다. 또한 유발 하라리(Yuval Harari)가 신간 《호모데우스》에서 지적했듯이 구글, 페이스북 등의 가공할 정보 분석 기술의 혁신은 지금의 기술 유토피아주의가 가져올 미래에 대한 무한한 낙관론을 끊임없이 양산해 냈다. 이와 같이 팽배한 낙관주의는 미국 현대의 어떤 대통령도 피해 가지 못한 레임덕의 저주에도 퇴임 직전까지 50퍼센트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한 오바마의 인기가 가능했던 기본 토양이었다.

오바마의 낙관주의 시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트럼프라는 블랙 스완이 탄생하자 미국의 미디어는 충격에 빠졌다. 하지만 트럼프의 새로운 충격에 대한 미디어의 과장된 소동에서 벗어나 차분히 미국 역사를 돌아보면, 미국 정치에 면면히 흐르는 극단적인 인종주의 정치 세력의 지속성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한동안 미국 정치학계에서 잊혔던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의 저명한 논지가 도움이 된다. 호프스태터는 사회적 질서가 동요하는 시기에는 백인 기독교 문명에 위협을 줄 수 있는 타자에 대한 공포에 소구하는 반지성주의 태도의 참주 선동가형 리더가 등장한다고 오래전에 주장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전통적 백인 토박이 보수 세력에게는 흑인, 월스트리트 은행가, 유대인, 가톨릭 등 타자의 ‘침입’에 대한 병적인 두려움(paranoid)에 기초한 음모 이론이 내재되어 있다.

타자에 대한 일반 백인 중하층의 공포심을 자극하는 운동은 타자의 침입을 방조, 혹은 촉진하고 자신들의 전통적 삶의 가치와 민생을 파괴하는 정부 및 전문가 등 워싱턴의 엘리트층 전반에 대한 강렬한 분노를 동원하게 된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적 태도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미국 혁신주의 시대 정부 역할의 강화나 그 이후 뉴딜 시기 정부 역할의 비약적 증대 과정에서 리버럴 전문가들의 영향력 확산은 반지성주의 세력에게 큰 위협으로 다가왔다. 보수주의 진영 내에서 리버럴 엘리트 진영에 대한 적대적 낙인찍기로 흔히 동원되는 표현인 ‘리무진 리버럴’은 반지성주의 흐름이 성공적으로 정착시킨 담론 전략이다. 이 공포와 배제의 극단적 운동은 1840년대 무지당(無知黨·The Know Nothing Party)에서부터 1960년대 조지 월리스의 백인 우월주의 운동, 1990년대 팻 부캐넌(Pat Buchanan)의 공화당 예비 경선 도전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재생산되어 온 미국 정치의 어두운 그림자다.

이러한 고전적 논지를 상기할 때 우리는 미국 미디어의 표피적 묘사나 과장 어법을 넘어 다음의 질문을 차분하게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트럼프 현상은 진정으로 미국 정치에 새롭게 등장한 사건인가? 둘째, 만약 아니라면 과거의 병적인 두려움 및 반지성주의 현상과의 연속성과 단절성은 무엇인가? 셋째, 이 역사적 측면의 비교가 오늘날 미국 정치의 미래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위 세 가지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시대적 맥락은 다르지만 트럼프 현상과 가장 유사한 특징을 보인 바 있는 조지 월리스 현상에 주목하고자 한다. 과거 뉴딜 정치 질서에 도전했던 조지 월리스 전 앨라배마 주지사는 백인 기반의 극우 인종주의 제3당 후보(미국 독립당)로서 1968년 대선에 야심 차게 도전해 지금의 트럼프 현상만큼이나 큰 충격을 던진 바 있다. 극단적 스타일의 월리스에 대한 리버럴 엘리트들의 지독한 경멸에도 불구하고 당시 어느 백인 노동조합원이 “노동자 계급을 위해 일어선 유일한 정치가”라 칭한 것처럼 오늘날 트럼프 또한 백인 노동자층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더 나아가 월리스와 트럼프는 단지 스쳐 지나가는 운동이 아니라 보수주의 지형의 재편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서 시공간을 거슬러 비교할 만하다. 이토록 유사한 월리스와 트럼프 현상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트럼프 현상의 역사적 뿌리를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고 새로운 차이점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진보주의 시대의 트럼프, 월리스


미국 진보주의의 황금기인 뉴딜과 트럼프 현상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하지만 뉴딜 시기에도 트럼프 현상은 존재했다. 1930년대부터 1968년까지 지배한 뉴딜 정치 질서는 기본적으로 고도로 발달한 금융의 투기적 행태에서 나온 경제 대공황, 소비에트 경제 모델의 매력이라는 위협에 직면한 리버럴 정치 세력이 남부의 보수적 정치 세력, 제너럴 일렉트릭 등 일부 기업, 백인 노동계와의 연합을 통해 새로이 형성한 정치 체제다. 마이크 데이비스(Mike Davis)가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에서 지적했듯 애초 이 뉴딜 체제에 흑인들의 자리는 없었다. 1936년 흑인들은 루스벨트를 지지하기 위해 대거 공화당을 이탈했지만, 루스벨트는 남부 백인 민주당 의원들을 고려해 흑인 투표권을 지지하지 않았다. 결국 당시 새롭게 추가된 흑인 투표자는 25만 명을 밑돌았다.[1] 진보적 백인과 흑인 시민 운동, 흑인 노동자 운동의 격렬한 투쟁 및 전쟁에서의 희생, 소비에트와의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더 이상 흑인 배제가 어려운 상황이 되고서야 뉴딜 질서는 본격적으로 민권 이슈를 다루기 시작했다. 존슨 시기의 민권 법안 통과는 바로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는 민주당의 새로운 지지 기반 형성 및 뉴딜 연합 내 균열의 시작이었다.

과거 경제적 역동성을 가지며 황금기를 구가하던 뉴딜 시대는 1960년대 중후반 정점에 도달했다. 점차 인플레이션과 증세의 시기가 되었고 중산층과 노동자 계급의 임금은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상황에서 뉴딜 연합에 흑인이 포함되었다는 것은 곧 생산되는 경제적 파이의 배분 투쟁을 의미했다. 단적으로, 1961~1968년 사이 백인들의 전체 수입이 56퍼센트 증가한 반면 비백인의 수입은 110퍼센트 증가했다. 뉴딜 리버럴 집권 시기에 흑인의 물질적 상태가 개선되자 그들이 백인 거주 지역 주변으로 이주하면서 인종 갈등은 더욱 격화됐다. 즉 과거 남부 일부에 국한된 것처럼 간주되었던 인종 분규 이슈가 점차 북부를 포함한 미국 전역의 주요 이슈로 부상한 것이다. 이제 물질적 배분 투쟁은 라이프 스타일 등의 가치 문제와 결부되어 타자에 대한 분노나 인종적 낙인의 투쟁으로 더욱 첨예해졌다. 당시 갤럽 여론 조사에 따르면 남부의 인종 격리 조치에 분노하던 북부 지역 백인들도 그것이 자신의 이웃 문제로 비화하자 점차 인종주의적 태도를 노골화했다.

공립 학교 인종 통합 반대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월리스 앨라배마 주지사의 정치적 부상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물질적·정치적 영향력 강화에 대한 백인들의 점증하는 공포를 배경으로 했다. 그는 전국적 위협 인물로 부상했다. 더 이상 남부의 극단적 백인 지배 체제 아래의 비주류 이단아가 아니었다.  당시 월리스가 전국적 인물로 부상하면서 내세운 구호는 ‘미국을 위해 일어나라(Stand Up for America)’였다. 이는 트럼프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와 궤를 같이한다.

월리스의 등장에 따라 견고해 보였던 뉴딜 정치 연합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원래 뉴딜 정치 질서의 핵심 지지 세력은 일부 자본 분파와 백인 노동계였다. 하지만 기존 금권 체제 등으로 이루어진 인사이더에 대한 분노를 선동하는 아웃사이더 영웅 월리스의 등장에 대한 백인 노조원들의 강력한 지지는 심지어 ‘월리스 감염 현상(Wallace Infection)’이라 불리며 뉴딜 정치 연합의 균열 가능성을 보였다. 월리스의 포퓰리즘이 백인 노동계를 흔들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의 노선이 단지 인종주의만으로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1968년 캠페인에서 앨라배마주에서의 진보적 업적을 강조한 바 있다. 즉 교육, 복지, 도로, 농업 부분에서 뉴딜 민주당으로서의 진보적 성취를 강조하며 뉴딜 지지 연합에 소구하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포퓰리즘을 단지 KKK단과 같은 주변 인종주의 세력으로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2] 뉴딜 민주당원에 대한 월리스의 소구력은 1968년 9월경 진행된 미국 노동 총연맹–산별 노조 협의회(AFL-CIO)의 비공개 설문 조사에서도 드러났다. 이에 따르면 노동조합 조합원의 3분의 1이 월리스를 지지했다. 《시카고 선타임스(Chicago Sun-Times)》의 같은 시기 여론 조사에서도 시카고 백인 철강 노조원의 44퍼센트가 월리스를 지지했다. 당시 뉴딜 정치 질서의 계승자이자 친노동계 민주당 1위 후보였던 험프리(Hubert Humphrey)는 백인층에서 겨우 30퍼센트의 지지세를 획득했다. 전국 지지율에서도 월리스는 20퍼센트를 기록, 27퍼센트를 기록한 민주당 험프리 후보에 대한 본격적인 위협 세력으로 등장했고 심지어 추세의 역전까지 예상됐다.

백인 저소득층 노동자들에게 큰 인기를 끈 월리스의 선거 유세 스타일은 호프스태터가 말한 전형적인 반지성주의 경향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민주당의 주류 정치가들은 케네디와 같은 지성주의 전통에 서 있었다. 케네디 가문은 동부 엘리트주의 흐름의 지적인 상층 라이프 스타일을 상징했다. 1968년 대선에서 민주당의 주류 후보였던 험프리나, 그에 대항하며 부상한 유진 맥카시(Eugene McCarthy) 모두 케네디 스타일의 지성주의 캠페인을 전개했다. 심지어 맥카시는 선거 유세에서 군중들이 달아오르자 본인이 먼저 열기를 가라앉히려 노력하기까지 했다.

월리스는 민주당의 주류 정치가뿐 아니라 전통적인 보수주의 진영의 태도와도 사뭇 달랐다. 미국의 전통적 보수주의 지성을 상징하는 《내셔널 리뷰(National Review)》의 월리엄 버클리(William Buckley)가 벌인 지식인 운동이나 새로이 신우익으로 부상하던 애리조나주 상원의원 배리 골드워터(Barry Goldwater)는 모두 이념주의적 보수로 구분할 수 있다. 특히 갈수록 영향력을 강화해 나간 골드워터는 후에 레이건에 의해 계승된 작은 정부론 등 시장주의 교조에 충실했고, 뉴딜 복지 체제를 정면 공격한다는 점에서 월리스보다는 더 정제된 이념주의적 입장을 보였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대학 교육을 받은 중산층 활동가에 기반한 지성주의적 운동이라는 특징이 있다. 나중에 레이건은 골드워터의 지나친 이념적 지성주의 운동을 탁월한 할리우드식 역할 수행(performance)에 기반한 ‘대중적 보수주의(popular conservatism)’ 운동으로 전화한다.

월리스의 유세는 케네디는 물론이고 골드워터와도 달랐다. 그는 타자에 대한 극단적인 막말과 부흥회를 연상시키는 강력한 원초적 에너지를 특징으로 했다. 월리스에게 전형적인 타자란 법과 질서를 어지럽히는 히피, 민권 ‘선동가들’, 복지 수혜자들, 무신론자, 비트닉스(beatniks)[3], 반전 시위대, 공산주의자, 거리의 건달들이었다. 월리스는 특히 동부 엘리트에 대한 대중적 반감을 선동하면서 반전 시위자들도 미국의 전통적 문화 가치를 부정하는 ‘금수저 출신 자식들’이라고 경멸적으로 불렀다. 월리스는 유세에서 이들이 어린 시절 브로콜리를 충분히 먹지 못해 강간과 살인 성향을 띤다고 자극적인 막말을 늘어놓았고, 이에 대해 백인 지지자들은 열광적 에너지로 반응하곤 했다. 그의 유세를 본 한 관찰자는 마치 정치 버전의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콘서트와 같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지성적 성향의 기자들은 충격을 받곤 했다.[4] 당시 전국적 미디어들은 월리스가 단지 인기를 추구하는 사기꾼인지 아니면 미국에 무솔리니 스타일의 파시스트가 등장한 것인지에 대해 심각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는 오늘날 진보 일각에서 트럼프를 파시스트로 생각하는 경향으로 재현되고 있다.

지금은 잊혀진 존재인 월리스는 기껏해야 과거 인종주의 시대 주변부의 이단아 정도로만 기억된다. 하지만 월리스가 남긴 흔적은 생각보다 매우 깊다. 과거 강경 보수주의 색채를 완화해 뉴 닉슨 전략으로 1968년 선거를 이끌었던 닉슨(Richard Nixon)은 월리스의 영향으로 인종주의 색채를 강화했다. 예를 들어 과거 학교의 인종 분리에 대해 위헌을 선언한 브라운 판결을 미온적이나마 지지했던 닉슨은 선거 캠페인에서 인종 통합 조치들에 대한 강력한 인종주의적 발언들을 했다. 닉슨이 선거 캠페인에서 주로 내세운 ‘법과 질서’의 대통령 및 ‘침묵하는 다수’를 위한 캠페인은 월리스가 자극적으로 일깨운 백인 노동자층의 분노를 동원하는 전략의 재현이라 할 수 있었다. 닉슨은 마치 월리스처럼 “그건 모두 법과 질서(이슈), 빌어먹을 깜둥이, 푸에르토리칸 그룹” 때문이라고 막말을 했다.

닉슨의 ‘월리스 따라하기’는 이후 월리스 에너지의 주류 내 편입을 유발했다. 월리스의 자극적 어젠다가 닉슨에 의해 수렴되면서 월리스는 투표 당일 힘을 잃어버렸다. 또한 닉슨과 험프리 간 지지율 격차가 좁혀지자 백인 유권자들은 월리스에 대한 지지로 민주당 주류인 험프리가 당선될 가능성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벤 와텐버그(Ben Wattenberg)라는 여론 조사가에 따르면, 5명 중 4명의 남부 닉슨 지지층은 월리스가 없다면 닉슨을 선택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더구나 월리스가 당시 극단적 호전주의자로 악명 높았던 르 메이(Curtis Le May) 공군 참모총장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한 것은 여성층을 비롯한 유권자들에게 위험한 인물이라는 인상을 줬고 지지율 추락을 불렀다. 결국 닉슨은 월리스의 힘을 흡수해 43.4퍼센트 대 42.7퍼센트로 험프리에 힘겹게 승리를 거둔다. 월리스는 대선을 두 달여 앞둔 9월까지 험프리를 앞설 기세였지만, 결국 투표 당일 13.5퍼센트의 득표로 만족해야만 했다.

1968년 대선은 뉴딜 정치 질서가 최종적으로 붕괴하고 레이건 보수주의의 토대를 낳았다는 점에서 결정적 재편(realignment)을 가져온 중대 선거(critical election)로 평가할 수 있다. 월리스는 비록 닉슨의 ‘침묵하는 다수’ 담론으로 그 에너지가 흡수되었지만, 월리스의 인종주의 레토릭은 이후 월리스보다 더 온건한 스타일로 대중성을 갖고 본격적인 보수주의 정치 질서를 연 레이건 시대 소위 ‘레이건 민주당원’ 현상으로 이어진 바 있다. 레이건의 유명한 인종주의 낙인인 ‘복지 여왕(welfare queen)’[5]은 이미 월리스 단계에서 전형적으로 사용되던 담론이었다. 닉슨과 레이건을 거치며 공화당은 백인 저소득층 노동자의 계급적 분노와 타자에 대한 적대감 및 반지성주의를 체계적으로 이론화하고 이를 선거 전략에 활용하는 데 출중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 첫 계기는 공화당 전략가인 케빈 필립스(Kevin Phillips)의 부상하는 공화당 다수파(emerging Republican majority) 이론이다. 당시 구가한 포퓰리즘은 마이클 카진(Michael Kazin)이 지적한 것처럼 ‘기성 엘리트층 대 평범한 시민들의 적대감’이라는 이원적 대립 구도를 활용해 리버럴 엘리트를 기득권으로 낙인찍었다. 트럼프는 월리스를 계승해 포퓰리즘 전략을 탁월하게 구사하며 미국 정치의 주류에 본격적인 도전장을 던졌다.

 

공화당은 21세기의 무지당이다


월리스가 뉴딜 정치 질서의 자본 분파, 리버럴과 개혁 보수주의자 등 인사이더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면 트럼프는 레이건 정치 질서 및 그 이후 오바마의 신진보주의 질서를 포함한 인사이더들에 대한 정면 도전이라 할 수 있다. 골드워터와 월리스의 ‘침묵하는 다수’ 백인 운동의 수렴으로서 닉슨과 레이건은 원래 보수주의의 대혁명이라는 기대감 속에서 출범했다. 특히 스커러닉(Stephen Skowronek)에 따르면, 레이건은 기존 정치 질서를 전면 재편하는 재구축(reconstructive)의 리더십이라 불린다. 하지만 닉슨은 당선 직후 민주당과 타협을 통해 환경청 설치 및 기본 소득 등 복지 노선을 추구하고 ‘악의 세력’인 중국과의 수교로 보수 진영을 충격에 빠뜨린 바 있었다. 레이건도 과장된 보수주의 어법을 내세우면서도 실제 정책 수행에서는 실용주의자로서 국내외 노선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민주당 및 당내 온건 보수주의자들과 타협을 통해 진행했다. 예를 들어 국제 안보 노선에서 신보수주의자들의 강력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서기장이 이끄는 소비에트와의 공존 노선을 선택했다. 국내 노선에서도 팁 오닐(Thomas Tip O’Neill) 하원의장이 이끄는 민주당과 예산 등에서 타협을 통해 정국을 운영했다.

닉슨과 레이건 이래로 이어진 공화당의 주류 엘리트 실용주의를 전면 거부하기 시작한 분기점은 1995년 깅리치 하원의장의 ‘미국과의 계약’이다. 토마스 쉘러(Thomas Schaller)에 따르면 당시 공화당은 레이건의 당이 아니라 깅리치의 당이었다. 깅리치 이후 공화당은 개혁적 보수주의자들을 거의 다 쫓아내고 백인 집토끼에 호소하는 강경 보수주의자들의 전투적 운동 정당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의회를 장악하고 입맛대로 선거구를 조정해 강경 보수주의자들이 집토끼만으로 안전하게 당선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점차 공화당 내 예비 경선에 참여하는 유권자층의 색깔도 보수화됐다. 다양한 이념 성향이 포괄된 본선 유권자층과는 사뭇 달라졌다. 결국 공화당 지지층과 본선 유권자층의 갭은 이들이 지역 선거에서는 승리하고 백악관은 계속 놓치는 사이클을 공고히 해버렸다. 과거 월리스는 정당의 예비 경선에 강력하게 도전하기 어려웠지만 트럼프는 깅리치 이후 이 변화된 내부 지형 속에서 대선 후보로까지 부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월리스 시절보다 트럼프 운동이 더 강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지 깅리치 혁명이 만들어 놓은 당내 역학 관계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오늘날 미국은 과거 월리스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확신이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역동적 가능성이 존재하면 인간은 희망을 찾는다. 반면 긴 터널의 끝이 잘 보이지 않으면 절망적 운동에 호소하게 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디턴(Angus Deaton)이 분석한 것처럼, 약물 중독 등으로 인한 백인 중년층 사망률이 선진국 중 유일하게 상승하고 있다는 지표는 이들 백인 중년층의 절망감을 시사한다.

과거 레이건 보수주의 및 그를 계승한 조지 부시 시대를 종료하고 1992년 서민에 기초한 경제 노선(Putting people first economy)을 펼칠 것으로 기대한 클린턴 시대도 결코 백인 저소득층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지는 못했다. 클린턴은 레이건 정치 질서 아래서 더 이상 달콤한 뉴딜 민주주의 시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냉정한 현실과 자본이 주도하는 지구화의 힘을 일찍부터 깨달은 네오 리버럴이다. 클린턴 등이 주도하는 젊고 야심만만한 새 정치 그룹은 남부의 보수적 민주당 계파 및 동부의 진보적 리버럴 계파들을 적당히 어우르며 리버럴들의 대안적 문제 해결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클린턴은 루스벨트를 계승하는 대신에 레이건 보수주의 시대의 리버럴 노선에 충실했다. 그는 균형 예산을 통해 다시 자본의 힘을 강화하면서도 일부 소득세 최고 세율 인상 등을 통해 극단적 힘의 불균형을 완화하고자 했다. 기존 뉴딜 시대에 노동의 반격 속에서 70퍼센트에 육박하던 최고 세율이 다시 자본의 반격 시대에 28퍼센트로 인하됐는데, 클린턴은 이를 겨우 39.6퍼센트로 인상하는 데도 공화당의 극렬한 저항에 직면해야 했다. 이 요란했던 소득세 전투를 제외하고 클린턴은 전반적으로 자본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비전에서 공화당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는 1997년 자본 이득세를 20퍼센트 인하했고, 뉴딜 정치 질서의 핵심인 금융 규제를 강화하는 글래스 스티글 법(Glass-Steagal Act)[6]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자본과 노동의 격차가 증대하는 가운데 삶의 질이 악화된 중산층과 하층을 주택 소유의 꿈으로 달랬다. 라구람 라잔(Raghuram Rajan)이 《폴트 라인(Fault Lines)》에서 분석했듯이, 부시가 이후 ‘소유자 사회의 꿈’을 설파하며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유발시킨 비극의 씨앗은 이미 클린턴 시기에 뿌려졌다. 카터가 레이건을 준비했듯이 클린턴은 부시의 등장을 예고한다.

오바마 시대는 1992년 클린턴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기대감에서 출발했다. 클린턴은 레이건 보수주의의 자장하에서 움직였지만, 오바마는 경제 대공황 이후 새로운 정치 질서를 여는 ‘재구축(reconstructive)’의 리더십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는 《불평등의 대가(The Price of Inequality)》에서 아메리칸 드림의 부활을 약속한 오바마의 임기 중에 벌어진 아이러니들을 분노에 찬 어투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금융 위기 타개책 이후 오바마 임기 초반 여론 조사에서 이미 거의 절반의 미국인이 미국 경제 시스템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불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불공정한 느낌보다 더 화가 나는 사실은 그 결과 살림살이가 더 나빠졌다는 점이었다. 상위 1퍼센트의 실효 소득세율이 중위계층보다 낮다는 어처구니없는 부정의의 결과로 2002~2007년 상위 1퍼센트는 국민 소득의 65퍼센트를 가져갔다. 구제 정책 혜택의 상당수가 이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그토록 기대하던 오바마 임기 중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또한 2009년 대비 2010년에 추가로 창출된 소득의 93퍼센트를 상위 1퍼센트가 가져갔고, 반면에 대부분 주택 형태로 부의 비율이 구성된 중위 계층은 2007~2010년 사이에 자산이 거의 40퍼센트나 감소했다고 스티글리츠는 고발했다. 중하층의 현실은 더 기막히다. 하위 25퍼센트의 평균 자산이 경제 위기 이전에는 마이너스 2300달러였지만 경제 위기 이후에는 마이너스 1만 2800달러로 무려 여섯 배나 하락했다. 이 중산층과 하층의 자산 감소가 청년층의 등록금 부담과 결합하면 가계 부채 악화와 청년층의 미래가 저당 잡히는 현실로 비화된다. 2005~2010년 사이에 공립 대학교 수업료는 평균 17퍼센트 증가하였다. 2007~2008년부터 2012~2013년 사이에 물가 상승률을 감안한 등록금 인상률은 2년제 공립의 경우 104퍼센트, 4년제는 74퍼센트나 됐다. 오바마의 등장으로 아메리칸 드림이 부활하기는커녕 완전히 문이 닫히는 디스토피아가 시작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등장한 티 파티 운동 등 보수 포퓰리스트 운동들은 미국 풀뿌리 차원에 전통적으로 흐르는 반연방주의, 작은 정부론, 동부 엘리트 혐오론 등의 인화성 연료를 기반으로 오바마의 개혁 조치에 대한 강력한 반발을 드러냈다. 단일한 중앙 집중식 지도부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풀뿌리 차원에서 분산된 개별 운동의 느슨한 네트워크로 전개된 이 시민 정치 운동 흐름의 본질은, 리버럴 어젠다를 혐오하는 보수적 이념에 모든 기성 엘리트에 대한 적개심이 결합된 ‘보수 포퓰리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기존 공화당을 뒷받침하는 억만장자 코크 형제(Charles and David Koch) 등 거대 자본들은 흐뭇하게 이 열정적 운동을 반기며 배후에서 다양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거리의 티 파티 시민 정치 운동에서 나아가 의회를 점령하려는 ‘오큐파이 펜실베이니아 애비뉴(Occupy Pennsylvania Avenue)’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흐름에 힘입어 2016년 트럼프와 선두를 다툰 대선 후보 테드 크루즈(Ted Cruz) 텍사스 상원의원, 티 파티의 여왕인 미셸 바크먼(Michele Bachmann) 미네소타 하원의원, 마코 루비오(Marco Rubio) 플로리다 상원의원, 랜드 폴(Rand Paul) 켄터키 상원의원 등 스타들을 만들어 내며 그 힘의 절정기인 2010년 중간선거에서 30명이나 되는 ‘티 파티의 아이들’을 의회에 입성시키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배후에 각 지역구의 강력하고 전투적인 시민 정치 운동 세력을 보유한 이들의 막강한 힘 때문에, 심지어 미치 맥코넬(Mitch McConnell) 같은 강경 보수 지도부조차 자기의 참모를 임명할 때 티 파티의 눈치를 볼 정도였다. 이 당시 맥코넬의 경험은 이후 티 파티의 계승자인 트럼프에게 꼼짝 못하고 충성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티 파티 운동은 이후 백만장자 포퓰리스트인 트럼프의 자장에 수렴된다. 트럼프는 포퓰리즘의 본질에 더욱 충실하다. 그의 발언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기득권의 카르텔을 거부하기도 하고, 부자 증세를 말하기도 한다. 마치 월리스가 당시 금권 정치 체제를 비판한 것처럼, 트럼프 또한 금권 정치를 강력히 비판한다. 정치적 후원을 받는 젭 부시나 다른 후보들 앞에서, 트럼프는 당신들의 후원자에 대항하는 발언을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본인은 자기 돈으로 선거 운동을 하는 반(反)금권 정치의 대표 주자라고 주장했다. 백만장자가 반금권 정치라니 아이러니하고 기괴한 논리였지만 유권자들에게는 먹혔다. 이것은 과거 1992년 대선에서 개혁당 로스 페로(Ross Perot) 후보가 이미 보여 준 백만장자 포퓰리즘의 한 유형이다.

트럼프가 의료 보험 개혁 반대 등에서 주로 불이 붙은 티 파티 운동보다 더욱 위력적일 수 있었던 이유는, 월리스류의 인종주의 및 반이민 정서를 가장 강력히 대변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빵만 먹고 살지 않기에 단지 경제적 양극화만이 적대적 정치를 양산하지는 않는다. 이 문명 충돌의 주 전선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이민이다. 아브라자노와 하이날(Marisa Abrajano and Zoltan Hajnal)은 2012년 하원 선거의 프리즘으로 보면 이제 이민이 계급, 세대, 성별 지수보다 더 중요한 균열점이 되었다고 선언한 바 있다. 유권자들이 어떻게 투표하고 어떤 정당과 연결되는지 판단하는 핵심 준거가 계급이 아니라 이민이라는 얘기다. 사실 이는 비단 하원 선거에만 국한된 가설이 아니다. 오바마의 2008년 집권 이후 4년 만에 열린 2012년 대선은 미국 역사상 인종적으로 가장 양극화된 선거라 할 수 있었다. 위의 분석에 따르면 2012년 대선에서 인종(41퍼센트)은 수입(18퍼센트)이나 세대(20퍼센트) 범주보다도 두 배는 더 큰 영향을 미쳤다.[7] 이 대선에서 흑인 93퍼센트, 히스패닉 71퍼센트, 아시안 73퍼센트가 민주당을 선택했고 백인 56퍼센트가 공화당을 선택했다.

물론 아브라자노는 여전히 미국에서 태어난 백인이 인구의 63퍼센트이고 특히 실제 표로 그 효과가 나타나는 선거에서 유권자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8] 하지만 21세기 중반으로 가면 백인은 소수로 전락한다는 점에서 미래는 백인 정체성 편에 있지 않다. 그들은 지금 황혼기에 있다. 특히 그간 정치적 권리 행사에서 ‘잠자는 거인’이었던 히스패닉은 기존 소수계의 대표인 흑인을 대체하는 가장 큰 집단으로 부상하였다. 과거 인종 이론에서 흔히 분석의 틀로 등장하는 백인 대 흑인의 이원론은 이미 오래전부터 낡은 이론이 되었다. 오히려 지금은 히스패닉이 새로운 반이민 세력의 선동 소재로 빈번하게 등장한다.[9] 즉 이들이 투표에서 앞으로 영향력을 더 거세게 행사할수록 미국이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테제가 실감 나는 세상으로 변모해 가는 셈이다.

위의 현실 인식과 달리 강준만 교수 등 일부 학자들은 트럼프 현상을 진단하면서 미국의 양당이 서로 본질적 차이가 없기에 사소한 차이를 과장해서 서로 적대성을 부각시킨다고 본다.[10] 하지만 월리스 시대에도 그러했듯이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새로운 미래에 대한 공포는 실존하는 공포이다. 미국의 지성주의적 리버럴들은 도대체 이 소설 같은 이야기가 왜 아직도 공화당 대선 후보들에 의해 공론화되는지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흔들어 댄다.

일부 전략가들이 사소한 차이를 침소봉대해서 현재의 적대적 갈등이 생긴 것이 아니라, 오늘날 트럼프 지지자들은 ‘문명의 충돌’ 차원에서 자신들과 엘리트들의 대립을 이해한다. 헌팅턴류의 문명의 충돌론자들은 자신들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시대를 복원하기 위해 어떤 극단적 아이디어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간 미국의 주인이라고 자부해 왔던 자신들의 지위가 흔들린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다. 이들에게는 그간 공화당이 주도권을 유지해 온 의회도 성에 차지 않는다. 지난 30년간 하원 민주당 코커스(Caucus)가 두 배 더 진보적으로 변모했다면, 공화당의 코커스는 여섯 배나 더 보수화되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목이 마르다.[11] 공화당 예비 경선에서 티 파티 출신 루비오 상원의원이 이민 개혁 법안에서 민주당과 타협을 시도했다는 이유로 심한 비난을 받은 예는 매우 상징적이다. 과거 월리스 시대에는 그래도 정당 내 온건파들에 의한 교차 연합이 가능했지만, 오늘날 민주당과 공화당은 정당 내 튼튼한 규율을 가지고 문명적 차이로 서로를 이해하고 있다. 개혁 보수주의자였던 존 매케인(John McCain) 상원의원은 트럼프 시대를 맞아 이민에 대한 강경한 입장으로 전환해 버렸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은 토박이들이 중시하는 가치와 삶의 태도가 낡은 것으로 부정되는 상황에 직면하면서 소수계 이민자들에게 분노를 쏟아 내고 있다. 지금 보수적 백인 남성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만이 아니라 잠자던 거인인 히스패닉이 깨어나자 공포에 몸을 떤다. 이미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미래 전시관이다. 과거 반이민 운동의 성지였던 이곳은 유권자 중 히스패닉 수가 임계점을 넘어 민주당과 소수계의 가치와 이익이 강력히 지배하는 지역이 됐다. 21세기 중반이 되면 미국에서 백인은 소수 인종이 된다. 월리스가 여전히 주류인 백인 보수주의 진영으로서 부상하는 흑인들에 대한 경계이자 위기감을 표출한 운동을 벌였다면, 트럼프는 다시 좋았던 과거 백인(특히 남성) 지배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들의 절망적 황혼기 몸부림이다. 바로 이 차이가 월리스는 주변부 운동에 머물게 하고 오늘날 트럼프를 제3당 운동 정도가 아닌 대통령으로 만들어 냈다. 가정이지만 만약 트럼프가 제3당 운동을 전개했다면 그는 단순 다수제의 미국 선거 특성상 지금만큼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트럼프는 월리스와 달리 공화당 점령 운동이라는 대담한 길을 선택했고, 본선에서도 보수적 백인층을 적극 동원하는 전략으로 결국 월리스가 갖지 못한 대통령직을 거머쥐었다.

과거 월리스와 오늘날 트럼프 현상의 또 다른 결정적 차이는 뉴 미디어를 활용한 포퓰리즘이다. 트럼프라는 백만장자 포퓰리스트는 미국이라는 토양에서 특히 매력적인 ‘셀러브리티 포퓰리즘(celebrity polulism)’을 보여 줬다. 미국은 자수성가한 영웅이 지배하는 나라다. 모든 역경을 겪고 결국 부를 성취한 이를 미국만큼 동경하는 나라는 없다. 트럼프는 〈어프렌티스(The Apprentice)〉라는 유명한 리얼리티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보여 준 “너는 해고야(You are fired).”라는 발언과 수많은 기행으로 이미 대선 전부터 초특급 스타였다. 미국인들에게 성공한 괴팍한 기업가 트럼프의 정치 도전기는 그 어떤 리얼 서바이벌 게임보다 흥미롭다. 그들은 이제 정치적 올바름을 벗어던지고 공적인 장에서 마음껏 붉은 피를 보고자 한다. 〈파이트 클럽〉의 주인공이 철철 흐르는 피를 보며 살아 있다는 실감을 느끼듯이, 미국의 일부 유권자들은 트럼프의 에너지 넘치는 난투극을 보며 자신의 존재감을 리얼하게 확인한다. 트럼프는 때로는 라스베이거스 특설 링에서의 권투 경기처럼, 때로는 에너지 드링크 브랜드 판매 사원처럼 자신을 교묘하게 판매한다.

반지성주의적 월리스와 유사하게도 트럼프와 지지자들에게 중요한 점은 ‘팩트 체크’가 아니라 분노의 랩이다. 특히 월리스가 살았던 모던 시대에 비해 포스트모던 시대인 지금은 진실의 가치가 더 낮다. 오히려 양극화된 대결에서 내 편 선수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케네디와 닉슨의 우아한 지성주의적 대결로 상징되었던 미국 대선 토론은 이제 뉴 미디어 시대에 링에서의 난투극이나 트위터에서의 격정 토로 정도로 변질되었다. 반지성주의가 지성주의를 압도하는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오늘날 자극적인 뉴 미디어의 시대에 지성주의적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갈수록 잃고 있다. 과거 월리스가 결코 쟁취하지 못한 지성주의와의 대결에서의 승리를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에 트럼프가 얻어 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월리스 현상보다 트럼프 현상이 더 위력적인 이유는 트럼프 현상이 단지 반인종주의 지형만이 아니라 지구적 경제 대위기 및 극우 포퓰리즘 운동의 번성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월리스 시대에는 유럽 차원에서 진보적 운동이 상승하는 흐름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 등지에서도 반이민 선동의 보수 포퓰리즘 운동이 번성하고 있다. 물론 스페인의 포데모스(Podemos)나 미국의 샌더스 현상처럼 진보 측의 포퓰리즘 운동도 동시에 일어나지만, 전반적으로는 경제 대위기, 저성장, 인공지능 시대 일자리 위협, 테러 공포 등을 배경으로 타자를 배척하는 보수 포퓰리즘 번성의 토양이 더 비옥하다. 트럼프 현상은 이 지구적 보수 포퓰리즘 운동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월리스 현상과는 사뭇 궤를 달리하고 있으며, 그 파장도 훨씬 더 지구적이다.

트럼프의 정치 운명은 4년의 임기로 끝날지 모르지만, 트럼프주의 현상은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아메리칸 드림의 퇴색과 새로이 주류로 등장하는 히스패닉 등의 상승세, 신진보주의적 가치의 득세가 존재하는 한 소수화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필사적인 반격은 불가피하다.

과거 20세기 백인 우월주의 운동의 상징인 월리스가 이후 태어난 닉슨과 레이건 보수주의 운동의 산파였다면, 21세기 트럼프 현상은 이후 보수주의의 산파가 될 것이다. 지금 공화당은 이 트럼프 현상의 지지자들이 대거 유입되어 기존 인사이더들과의 대립 구도가 더욱 공고해졌다.

공화당은 두 가지 선택의 길 앞에 놓여 있다. 하나는 새로이 유입된 강력한 트럼프 지지자들에 기반한 ‘침묵하는 다수’ 운동으로 가는 길이다. 다만 닉슨과 레이건이 그러했듯이 트럼프의 자극적 레토릭을 완화한 새로운 세련된 트럼프의 등장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길게 보면 이 길은 과거 월리스를 계승한 닉슨의 운명보다는 훨씬 암울하다. 백인은 인구학적으로 침묵하는 다수가 아니라 침묵하는 소수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중장기적으로 당의 미래를 고민하는 공화당 전략가들은 이 절망적 인구 분포 경향에 기초한 전략 효용성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다. 이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이 내부에 존재하는 히스패닉 그룹에 대한 분할 전략을 통한 트럼프 진영의 집권을 고민한다.

또 하나의 길은 오늘날의 공화당을 붕괴시키고 문화 인종 다원주의 시대에 조응하는 새로운 보수 운동으로 재편해 나가는 길이다. 히스패닉계 등 새로운 주류로 부상하는 젊은 인물군 및 이들에 의해 새 시대에 적응한 세련된 가치 운동을 전개하는 길이 공화당이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리버럴 정권에 빼앗겼던 백악관을 우연히도 트럼프 덕분에 다시 찾은 공화당이 이 노선을 선택할 가능성은 당분간 거의 없다. 트럼프 현상이 생기기 전부터 공화당은 이미 지나칠 정도로 깅리치와 트럼프의 정당으로 고착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지금 공화당은 완전히 트럼프의 당이다. 데이비드 브룩스(David Brooks)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같은 바깥의 지성주의적 보수 운동은 과거 저명한 보수 지성인이었던 버클리(William Buckley)의 시대와 달리 자극적인 텔레비전과 뉴 미디어의 시대에 그리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앞으로 위기가 크게 닥치거나 대선에서 패배한 후에야 공화당은 심각하게 이후 진로에 대한 논쟁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월리스, 깅리치, 트럼프로 이어지는 흐름은 완전히 미국 정치의 주류가 되었다. 공화당은 이제 21세기의 무지당이 되었다.
[1]
마이크 데이비스(김영희·한기욱 譯),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창작과비평사, 1994, 132쪽.
[2]
John Judis, 《The Populist Explosion》, 2016, p. 34.
[3]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는 1920년대 대공황이 있었던 상실의 시대(Lost Era)에 태어나 2차 세계 대전을 직접 체험한 세대로서, 전후 50년대와 60년대 삶에 안주하지 못하고 사회로부터 ‘매정한 대접(beating)’을 받았던, 특히 동시대의 사회와 문화 구조에 저항한 특정한 문학가와 예술가의 그룹을 의미한다. 비트 세대에 의한 비트 문화 운동은 1950년대에 시작되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노스비치, 캘리포니아의 베니스 웨스트, 뉴욕시의 그리니치빌리지 등지의 보헤미아 예술가 그룹들이 그 중심이 되었다. 이 운동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스타일을 ‘비트’라고 자처했으나 사람들은 그들을 비트닉스(beatniks)라는 조롱조의 명칭으로 불렀다. 그들은 자신들이 관습적이고 획일적인 사회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한결같이 허름한 옷과 태도, 그리고 재즈 음악가들에게서 빌려온 히피 어휘를 받아들였다. 일반적으로 정치와 사회적 문제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마약, 재즈, 섹스, 선불교(禪佛敎)의 수양 등으로 생기는 고도의 감각적 의식을 통한 개인적인 해방·정화·계시를 주창했다.
〈비트 세대〉, 《문학 비평 용어 사전》.
[4]
John Judis, 《The Populist Explosion》, 2016, p. 346.
[5]
복지 여왕은 가명으로 위조 신분증을 만들어 정부의 복지 혜택을 수급하고 고급 승용차 캐딜락을 몰고 다닌다는 흑인 여성에게 레이건이 붙인 별명이다.
[6]
공식적으로 은행법이라 불리며, 상업 은행과 투자 은행을 분리해 각각 고유의 업무에만 종사하도록 규제한 법이다.
[7]
Marisa Abrajano and Zoltan L. Hajnal, 《White Backlash: Immigration, Race, and American Politics》, 2015, p. 210.
[8]
Marisa Abrajano and Zoltan L. Hajnal, 《White Backlash: Immigration, Race, and American Politics》, 2015, p. 2.
[9]
Marisa Abrajano and Zoltan L. Hajnal, 《White Backlash: Immigration, Race, and American Politics》, 2015, p. 86.
[10]
강준만, 〈트럼프〉, 《인물과사상》, 2016.
[11]
 마이크 데이비스(김영희·한기욱 譯),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창작과비평사, 1994, 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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