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8화

에필로그 ; 다가올 충격의 시대를 살아가는 법

이 책에서 트럼프 시대와 그 이후에 대해 단순한 저주나 낙관적 환영이 아니라 다양한 분기점의 가능성과 복잡성을 드러내고자 노력했다. 트럼프에 대한 오해를 살펴보면서 트럼프를 보다 넓은 맥락인 자본주의 평형의 붕괴와 제국의 쇠퇴라는 조건하에서 들여다보려고 했다. 과연 우리는 오바마와 트럼프 시대를 넘어 자유 민주주의의 성취를 간직하면서도 레닌과 슈미트의 자유주의 한계에 대한 통찰을 결합할 수 있을까? 과거 민중들의 소비에트라는 발명품은 재난을 낳았지만, 블록체인과 결합한 민주주의는 새로운 창조적 발명품으로 탄생할 수 있을까? 나의 정치적 상상력으로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트럼프와 그 이후 시대에 대한 상상력은 새로운 시야와 태도를 가져야만 열린다는 점이다.

트럼프에 대한 리포트가 우리에게 주는 직간접의 시사점은 무엇일까? 나는 트럼프 시대의 충격과 불안이야말로 성찰적 질문을 통해 모든 기존 가정을 돌아보고 새롭게 생각 근육을 단련하는 소중한 건강 검진의 기회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 스스로 점검하고 있는 태도 몇 가지를 소개한다.

1. 무지에 대한 겸손한 태도로 부단히 질문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비록 인류가 낳은 가장 걸출한 천재 이론가이지만 스스로의 지식을 해변가의 조약돌 하나에 비유한 바 있다. 오늘날 새로운 우주론이 제기되고 양자 이론이 여러 영역으로 확산되는 지적 폭발과 문명 전환의 시점에서 마르크스의 겸손함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트럼프라는 블랙 스완과 카오스의 등장은 우리가 부단히 자신의 ‘심리적 고물’을 내다 버리기 위한 성찰적 질문의 모드로 움직여야 함을 시사한다. 한국 사회는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질문하지 않고 배우지 않는다. 과거에는 개발 도상국이라는 콤플렉스에서 선진국의 답을 조야하지만 치열하게 모방하기도 했다. 이제는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에 무지하고 세상의 경이로움을 느끼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경이로움과 호기심을 잃으면 트럼프 이후에도 계속 닥쳐올 블랙 스완 현상 속에서 쉽게 길을 잃을 수 있다.

특히 걱정이 되는 현실은 오늘날 나와 같이 한국의 지적 허리를 형성해야 하는 세대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모르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오늘날은 우주, 문명, 인간, 죽음, 노동, 자본, 정치 등 모든 근본 개념의 내용이 다 흔들리는 시대이기에 이러한 무지는 더욱 위험하다. 오늘날은 지식인이든 일반 시민이든 모두가 겸허한 태도를 가지고 부단히 배워 나가야 한다. 평생에 걸친 호기심과 배움의 태도야말로 트럼프와 그 이후 시대 최고의 재산이 될 것이다.

2. 다양한 미래에 대한 열린 사고로 부단히 질문하라.

지적 겸손함은 미래에 대한 열린 태도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트럼프 집권기와 그 이후의 세상에 대해 세밀한 정밀화를 묘사하는 이는 신빙성이 의심스럽거나 신이거나 둘 중 하나이다. 다양한 미래 시나리오에 대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다층적 판단과 개입이 필요하다. 이미 혁신적 글로벌 기업은 시나리오 기법을 바탕으로 한 의사 결정에 익숙하다. 트럼프와 트럼프 이후 시대 정부와 개인은 모두 다층적 판단의 마인드 세트로 무장해야 탄력적으로 생존할 수 있다. 한국의 정부나 지식인들은 단선적인 미래에 대한 자기 확신이 너무 강하다. 이번 하노이 회담이 유익한 교훈이 되면 좋겠지만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앞으로도 한국의 진보와 보수 지식인들 중 “단언컨대”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이들의 비율은 줄어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나는 그 담대한 용기와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탁월한 미래학자인 박성원이 2019년 2월 19일 경희대 강연에서 소개한 미래학의 선구자인 피터 왁(Peter Wack)의 에피소드는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변화하는 실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왁에게 어느 스님은 대나무 숲에 돌을 던져 소리를 들어 보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무수히 돌을 던져도 소리가 잘 들리지 않자 스님은 대나무의 정중앙을 향해 돌을 던져 보라고 다시 조언한다. 변화의 실체를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보이지 않는 숲의 대나무 정중앙을 향해 부단히 질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조금씩 진리에 접근해 가는 건 아닐까?

3. 개연성이 아니라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좌파 잡지 《자코뱅(Jacobin)》의 편집장 피터 프레이즈(Peter Frase)는 인간의 집단적 실천으로 만들어 낼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이 개연성이 높은 미래에 수동적으로 임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한다.[1] 왜냐하면 다양한 미래의 잠재성은 이미 우리 현실 속에 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여러 가지 잠재성 중에서 단 10퍼센트의 가능성만 예견되는 시나리오라 하더라도 정말로 바람직한 미래라면 굴하지 않고 현실로 전환시킬 초월적 역량을 가지고 있다.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전 체코 대통령은 이를 가능성의 정치에 대비하여 ‘불가능의 기예(Art of the Impossible)’라 정의한 바 있다. 이탈리아 철학자 프랭코 버라디(Franco Beradi)는 이를 ‘미래력(Futurability)’이라 부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태도는 바로 이 이상주의적 현실주의다.

트럼프 현상이라는 병리적 징후나 트럼프 이후 시대의 비관적 개연성은 우리를 비관주의에 젖게 한다. 한반도에서 미·중 간의 패권 갈등이 격화되는 현실은 미래를 우울하게 만든다. 하지만 미래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능동적 개입으로 구성되는 열린 시나리오일 뿐이다. 트럼프 시대의 비관주의적 분위기야말로 오히려 능동적 실천의 필요성을 보여 준다. 전 지구적 퇴행 현상을 거슬러 촛불 혁명이 발생한 한반도야말로 개연성이 아니라 가능성에 도전할 수 있는 시공간이다. 냉전의 어두운 접경으로만 보이는 한반도는 사실 버라디가 말한 미래력이 가장 풍부한 밝은 전위(vanguard)다.

4. 현장에서 위험을 감수하며 단련한 지식(Skin in the Game)이 중요하다.

나심 탈레브는 현장에서 근육이 단련된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2] 연구실의 연구자는 진리 자체의 탐구와 훌륭한 논문 성취라는 보람된 미션에 충실해야 한다. 이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인류에 대한 기여이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 연구에는 조금 다른 방법론이 필요하다. 백면서생의 마인드로는 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은 트럼프와 이 카오스 시대를 이해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트럼프는 연구실에서 《뉴욕타임스》를 읽거나 통계 패키지를 돌리는 시간에 러스트 벨트의 노동자들과 맥주잔을 기울일 때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일본 기자가 현장의 땀 냄새 나는 인물들을 만나면서 쓴 《르포 트럼프 왕국》은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리버럴이 쓴 어떠한 칼럼보다 더 깊이 있는 통찰력을 제공한다.[3]

지금은 리스크를 가진 사람이 강점을 가진다. 트럼프 자체를 떠나서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과 혼돈의 시대에는 과감히 리스크를 건 개입 속에서 실패해 가면서 많은 지식이 축적되는 법이다. 나와 같은 안전하지만 한편으로는 무기력한 정년 교수의 위치보다는 긴장감을 가진 전업 르포 작가의 위치에서 트럼프가 더 잘 보인다. 나는 용기가 없어 이 리스크의 강점을 주장한 나심 탈레브의 책을 분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말이다. 앞으로 한국에서는 진리 탐구의 연구실도 중요하지만 긴장의 현장 속에서 이론을 연마하는 지식인들이 훨씬 더 많이 나와야 한다. 탈레브가 말한 ‘지적인 바보(Intellectual Yet Idot)’의 위험성을 경계해야 한다.

5. 글로벌 담론에 익숙해져야 한다.

트럼프와 트럼프 이후 시대를 이해하려면 단지 신문 기사를 넘어 글로벌하게 진행되는 담론 지형과 논쟁에 익숙해야 한다. 트럼프의 메시지 및 대항 담론은 글로벌 지형을 표현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트럼프의 무식해 보이는 저돌적인 USMCA 협정에는 미국 보수주의자들의 ‘경쟁적 자유주의’ 담론이 스며들어 있다. 혹은 반트럼프 진영의 기후 변화 노선에는 우리가 그저 환영만 하기에는 두려운 미래 전략이 스며들어 있다. 이 진영에는 오카시오 코르테즈 그룹의 이상주의적인 포스트 자본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다. RE100과 같이 신재생 에너지로 새로운 헤게모니를 추구하는 리버럴 기업가들의 어젠다도 섞여 있다. 이미 이러한 흐름은 신재생 에너지 방식으로 생산된 부품만 수용하는 동맹이 결성되는 등 현실화되며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에 족쇄로 작용하고 있다.

언제나 제국의 희생양이었던 한국은 제국을 운용했던 일본이나 영국 등에 비해 글로벌 담론 지형에 어두울 때가 많다. 글로벌 담론의 맥락과 지형을 깊이 있게 이해할 때에만 머리 위에서 트럼프를 들여다보고 트럼프와의 협상은 물론 그 이후 미국의 포석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에는 강하게 우려하는 지식인들이 늘고 있다. 예를 들어 중국에 대해 항상 유익한 통찰력을 던져 주는 중국 산둥山東대의 우수근은 신간 《한중일 힘의 대전환》에서 한반도 주변 4강과 비교해 우리가 가장 닫힌 사회라고 신랄하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다. 이러한 바람직한 성찰의 기운은 새로운 지적 풍토와 시스템 구축으로 이어져야 한다. 나는 이를 과학 기술 정책 연구원 김석현 박사의 표현을 빌어 ‘인텔리전스 레짐(intelligence regime)’이라 부른다.

6. 대전환기에 걸맞은 ‘인텔리전스 레짐’이 시급하다.

서구의 분과 학문 체제 및 신문사의 대학 평가 시스템에 포획된 한국의 지적 공동체가 보여 주는 미래는 매우 우울하다. 물론 고등 교육 이전의 초중등 교육은 수능과 학종의 미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트럼프 시대라는 대전환기는 근대 후발자 시기에 형성된 지적 콘텐츠 생산, 유통 시스템의 전면적 전환을 요구한다. 정부의 미래에 대한 예방적 개입 기능 강화와 이에 근거한 초당적 중장기 다면 플랜 및 국정 운용도 이루어져야 한다. 새로운 지각 변동으로 돌입하고 있는 아태 지역에 대한 내실 있는 지역 연구소는 물론이고 대학 및 대학 외부의 민간 싱크 탱크를 획기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초당적 노력이 시급하다. 트럼프의 자국 제조업 보호주의 광풍에 흔들리다가 최근에는 애플 등의 신재생 에너지 동맹에 좌절하는 모습은 우리 사회에 축적된 인텔리전스 수준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이 인텔리전스 레짐은 한편으로 적실성 있는 담론과 분석을 생산해 내면서도 동시에 시민들과 적극 소통하고 협력하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시민 지성들의 지적 수준은 매우 높다. 한국의 고등 교육은 상아탑의 고립을 벗어나 대중들과의 접점을 능동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시민 교육 및 시민과의 소통은 이제 고등 교육의 중요한 책무로 인식되어야 한다. 결국 시민 공동체의 지적 수준이 상승될 때 변화의 근본 동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7. 서구 자유주의와 중국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생태 문명대의 비전이 필요하다.

트럼프 현상은 서구 자유주의의 무능과 부작용의 결과다. 아직 자유주의는 새로운 생명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소비에트 붕괴 후에 오랜 안락한 세월을 보내서인지 상상력이 말라붙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상하는 중국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보편의 매력을 가지기에는 권위주의적 요소가 너무 강하다. 야심 찬 일대일로의 비틀거림은 중국 사상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트럼프 시대는 우리에게 단지 서구 자유주의의 새로운 모색을 기다리거나 흉내 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들은 미국의 제3의 길이나 그 이후 임금주도 성장론 등의 궤적을 따라갔다. 레프트들은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 궤적을 추적했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라는 카오스와 전환의 장은 상상력을 앞선다. 자유주의자들의 현상 유지 편향의 정치 시스템은 기후 변화와 양극화라는 난제를 풀 능력을 이미 상실해 버렸다. 우리는 민주주의 이념을 넘어 이 두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계관과 국제 협력 거버넌스, 그리고 창의적 정치 제도의 창출 실험으로 앞서가야 한다. 한반도의 대전환은 단지 기존 통일 노선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새로운 사상의 랩(lab)이어야 한다. 이 랩을 통해 벼려진 사상은 미․중 간의 패권 다툼을 견제하는, 새로운 보편주의 담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지구의 권리와 공존하는 지구법적 지대를 만드는 작은 실험은 어떨까? 나아가서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거버넌스에 생태 연방주의적 상상력을 스며들게 할 수는 없을까? 이를 통해 우리는 전 세계 그린 뉴딜과 그린 지구 운동 흐름과 접속하고 함께 발전해가야 한다.

8. 미래 세대 중심의 세대 공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

미래를 알기 어려운 혼돈의 전환기일수록 부상하는 세대에게 배우고 협력하려는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소중하다. 하지만 한국은 서구 선진국에 비해 이들 미래 세대를 수년간 ‘스카이 캐슬’ 경쟁에 소진시킨다. 그리고 기성세대들은 미래 세대로부터 배우려는 태도가 결여되어 있다.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미래에 이미 도달한 세대에게 배우지 않는 나라는 ‘심리적 고물’에 갇히게 된다.

미래 세대 중심주의 선언이 타 세대에 대한 배척을 의미하지 않는다. 불확실한 세상은 상상력과 경험의 융합을 통해 헤쳐 나갈 수 있다. 경험이란 점에서 다양한 세대들의 상호 학습은 매우 중요한 지적 자원이 아닐 수 없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에 대해 경멸적 태도를 보였던 미국의 일부 리버럴들은 그들의 분노와 좌절 속에 담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한다. 다양한 세대와 그룹들은 저마다의 진실이 있다. 이를 공통된 감각으로 통합해 나가는 것이 정치여야 한다.

한국판 코르테즈가 나와야 한다. 단 더 넓고 통합적인 비전으로 국내는 물론 전 세계 시민 사회와 함께 새로운 길을 열어야 한다. 박노해 시인이 2018년 나눔 문화 후원 모임에서 지적한 것처럼 촛불 혁명은 끝이 아니라 30년간의 미래를 만들어 가는 시작이다. 질서 이탈 시대의 끝에는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다.


트럼프는 혼돈의 시대에 등장한 조커다. 조커는 디스토피아의 미래 공간에서 우리에게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조커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은 무엇인가? 그저 오바마와 같은 다크 나이트가 다시 출현하면 그걸로 충분한가? 조커와 다크 나이트의 교착 상태와 무기력 분위기를 넘어서는 새로운 길은 불가능할까? 우리는 이미 현존하는 미래와 대화하고 새로운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1]
Peter Frase, 《Four Futures: Life After Capitalism》, 2016.
[2]
Nassim Taleb, 《Skin in the Game: Hidden Asymmetries in Daily Life》, 2018.
[3]
가나리 류이치(김진희 譯), 《르포 트럼프 왕국》, AK 커뮤니케이션즈,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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