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점의 예술
4화

세 가지 단서

예술하는 인공지능


인공지능에 대한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인공지능을 예술의 장으로 들여오려는 적극적인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린츠(Linz)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페스티벌인 아르스 일렉트로니카(Ars Electronica)의 2017년 주제는 ‘인공지능, 또 다른 나’였다. 주최 측은 에이아이 프로젝트(AI Projects)와 에이아이 룸(AI Room)이라는 공간을 별도로 마련해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몰두한 프로젝트 스무 개를 소개했다. 인공지능 기술을 소개하는 워크숍과 강의, 인공지능의 창의성에 관한 콘퍼런스도 함께 진행되는 등 인공지능 예술을 깊이 있게 다뤘다. 일본 오키나와 과학 기술 대학에서도 2018년 ‘인공지능 예술과 미학’이라는 전시를 개최하며 인공지능을 보조 도구로 사용하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탐구했다. 이 전시를 기획한 인공지능 예술 미학 연구회는 인공지능의 자체적인 예술을 예견하는 〈인공지능 미학 예술 선언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인공지능을 주제로 한 전시가 열렸다. 2016년 아트센터 나비에서 개최하고 국내외 아티스트, 개발자, 프로그래머 등이 참여한 ‘아직도 인간이 필요한 이유: AI와 휴머니티’는 딥드림, IBM 왓슨(Watson), 마젠타(Magenta) 프로젝트의 인공지능이 제작한 창작물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2017년 한국 과학 창의 재단에서 주관한 전시 ‘GAS 2017: 인공지능과 인공적 창의성’은 자연성과 인공성의 구분에 의문을 제기하며, 인공성을 기반으로 한 생명과 지능, 예술을 다룬 작품 아홉 점을 소개했다. ‘서울 미디어시티 비엔날레 2018’에서는 인공지능을 활용한 국내외 작가를 초대했다. 좋은 삶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는 모두를 위한 인공지능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며 우리에게 익숙해지고 있는 인공지능에 대한 불완전함과 문제점을 지적했다. 또 서울대학교 도시 데이터 사이언스 연구소는 ‘A.I.MAGINE’이라는 이름으로 인공지능을 활용, 주제로 삼은 예술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인공지능 기술은 그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2010년대 이후 최신 인공지능 창작 사례 가운데서도 이미 과거가 된 작품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거의 예술 작품으로부터 현대적 인공지능 예술을 읽어 내기 위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우연성, 상호 매개성, 자기 생산성이 바로 그 단서다. 이 개념들은 현대적 인공지능이 등장하기에 앞서 이미 예술의 장에서 논의되었지만, 기술적 한계에 부딪혀 본질을 확인하기 어려웠다. 이제 인공지능 기술로 그 한계를 확장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과거의 예술을 새롭게 다시 보고, 미래의 예술을 상상해 볼 차례다.

 

기계의 우연성


인공지능은 창의적일 수 있는가? 인공지능 창작의 예술적 가능성을 탐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질문이다. 일반적으로 창의성은 “새롭고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 내는 능력”, “전통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비일상적인 생각을 산출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예술 작품 속에서 번득이는 창의성을 마주하고 미적 자극을 받는다. 고대에는 예술적 영감이 예술을 담당하는 아홉 여신 뮤즈(muse)에게서 온다고 묘사되기도 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정의로는 창의성이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는지 실체를 알기 어렵다.

계산주의 심리학 분야를 개척한 학자 마거릿 보든(Margaret Boden)은 창의성을 심리적 창의성과 역사적 창의성으로 구별했다. 심리적 창의성은 개인의 마음속에 독창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 경우를 의미한다. 스스로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아이디어를 조합하거나 떠올린다면, 그 인물은 창의적이다. 과거에 다른 사람이 같은 아이디어를 내놓은 적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반면 역사적 창의성은 인류 역사의 관점에서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은 경우를 말한다.[1] 역사적 창의성은 지금까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예측할 수 없다. 창의성의 가치를 판단할 때는 일반적으로 역사적 창의성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창의성의 원인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어떤 아이디어를 먼저 떠올렸다는 것보다 어떻게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었는지 알아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창의성이 아닌, 한 개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창의성에 기반을 두고 접근할 것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창의성과 뜻밖에 일어나는 현상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무작위성은 종종 창조의 조건이 된다. 여기서 창의적인 행위의 필수 성분으로 여겨지는 개념들이 제기된다. 보든은 창의적인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로 우연성(chance)을 들었다. 플레밍(Alexander Fleming)의 페니실린 발견처럼 사건과 결과에 인과 관계가 전혀 없는 경우를 우연이라고 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우연은 무작위와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데 주사위 놀이를 우연한 확률 게임이라고 부르거나, 원숭이들이 우연히 《햄릿》을 쓰는 일은 없다고 말하는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창의성을 논할 때의 우연성은 무작위나 특별한 노력 없이 얻어지는 우연(세렌디피티, serendipity), 혹은 독립적인 인과 관계가 있는 사건들이 동시에 발생하는 우연(coincidence)을 의미하지 않는다.[2] 진화론자들은 원숭이 여러 마리를 데려다가 타자를 치게 하면 언젠가 《햄릿》을 쓸 수 있을 거란 주장을 펼쳤지만,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원숭이들은 단어 하나도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우연한 발견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플레밍의 페니실린 발견도 세균학에 대해 지식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 이 두 사례는 우연성만 가지고는 창의성이 발현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창의성이 발휘되려면 사물을 알아보고, 기억하고, 인지하는 등 일상에서 필요한 수많은 심리적 행위를 능숙히 수행하는 능력, 즉 복잡한 지적 구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창의성이란 마법 같은 일이 아니라 원료가 되는 아이디어를 결합해 재생산한 결과다. 우연성은 그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제 '인공지능은 창의적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근거를 얻었다. 컴퓨터에게 주입된 지적 구조를 바탕으로 데이터를 선택하고 연결하는 것보다 간단한 일은 없다. 게다가 현대적 인공지능은 방대한 양의 데이터에서 무궁무진한 조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이러한 조합이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초기 인공지능은 수학적 논리를 이용해 답을 추론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머지않아 한계에 부딪혔다. 인공지능의 논리 구조는 문제의 답을 찾는 활동은 할 수 있었지만, 불확실성을 다루는 데는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학자들은 논리적 토대에 통계학과 확률론을 결합했다. 이것이 바로 확률적 프로그래밍(Probabilistic Programming)이다. 정해진 변수 안에서만 계산할 수 있었던 이전의 컴퓨터와 달리 확률적 프로그래밍을 활용한 인공지능은 매우 빠르고 효율적으로 결괏값을 구한다. 잡음과 혼란이 가득한 세계에서 인간처럼 추론하는 인공지능을 만들기 위해, 논리적 프로그래밍과 확률론적 프로그래밍을 통합하는 연구는 현재 학계 최전선에서 진행 중이다.

모차르트의 음악 주사위 놀이는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 확률론적 프로그래밍을 활용한 창작 활동이다.[3] 표로 되어 있는 악보가 있고, 각 마디를 연주하기 전에 주사위를 던져서 나온 숫자에 해당하는 악보를 선택한다. 이 음악 체계를 이용하면 16마디의 미뉴에트(minuet)와 16마디의 트리오trio를 작곡할 수 있다. 미뉴에트와 트리오에는 각각 열한 가지, 여섯 가지의 음형이 있으므로 16마디짜리 미뉴에트와 트리오를 만들 수 있는 경우의 수는 1116x616이 된다. 어마어마한 경우의 수이지만, 그 결과물은 꽤 훌륭하다. 이 음악이 평균적으로 아름답게 들릴 수 있는 이유는 재료가 되는 기본 악보가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모차르트가 모든 음표를 무작위로 선택하는 주사위 놀이를 만들었다면 원숭이가 타자기를 두드린 것 만큼 형편없는 결과물이 나왔을 것이다.

음악 주사위 놀이는 전위적이고 새로운 음악을 찾던 20세기 컴퓨터 음악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우연성을 탐구한 많은 작곡가 중 가장 대표적인 작가는 존 케이지다. 케이지는 우연성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옴으로써 현대 미술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여 우연적으로 선택하는 방법(process)이 그의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바로 이 점에 인공지능 창작의 가능성이 내포돼 있다.

케이지는 기존의 논리성과 합리성에서 벗어나는 음악을 작곡하고자 우연성을 이용했다. 그는 우연성을 위해 체계적으로 다음 세 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첫 번째는 주사위, 동전 던지기, 난수표, 중국의 주역 등을 이용해 악보를 만드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을 이용해 아예 작곡이라는 활동을 지우고자 했다. 두 번째는 악보를 실연하는 과정에서 우연성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소위 케이지의 도형 악보라고 불리는 이 악보에는 세모, 네모, 선 등의 기호만 그려져 있다. 그 기호를 해석하는 자유를 연주자에게 주어 우연적인 영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의도다. 심지어 〈폰타나 믹스(Fontana Mix)〉라는 작업에서는 도형 악보 연주자들의 목에 마이크를 부착하여 기침하는 소리, 물 마시는 소리까지 연주에 포함시켰다. 마지막 방법은 작곡가가 각기 분리된 단편의 음악을 작곡하고, 연주 순서는 연주자의 기분이나 선택에 맡기는 것이다.[4] 이 방법은 음악 주사위 놀이와 유사한데, 주사위의 숫자가 아니라 연주자의 일시적인 기분에 맡겨진다는 차이가 있다. 케이지는 한 인터뷰에서 작품을 쓸 때는 음악을 듣지 않는다고 밝히면서 “아직 들어 본 적이 없는 어떤 것을 듣기 위해 곡을 쓴다”고 말했다. 그에게 우연성은 창의적인 작곡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케이지의 많은 우연성 음악 중 〈상상 풍경 4(Imaginary Landscape No. 4)〉는 작가가 통제할 수 없는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한 작품이다. 여기에는 총 12대의 라디오가 사용된다. 우연성을 획득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던 케이지가 라디오를 선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케이지의 스승인 헨리 코웰(Henry Cowell)이 케이지가 도표를 이용해 작곡한 피아노 곡 〈변화의 음악(Music of Changes)〉을 듣고 “아직도 케이지 자신의 취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라고 평가한 것이다. 케이지는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라디오를 사용해서 작곡하면 아무도 자신의 취향을 식별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했다.[5]

연주를 위해서는 12대의 라디오에 각각 2명씩, 총 24명의 연주자가 필요하다. 연주자는 악보에 따라 라디오 주파수, 볼륨, 톤을 조절하는데, 이들이 보는 악보는 케이지가 동전을 던져 작곡한 12개의 각기 다른 악보다. 또한, 연주 장소마다 청취할 수 있는 라디오 주파수가 다르기 때문에 어떤 소리가 들릴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상상 풍경 4〉에서 우연성은 케이지가 작곡하기 위해 동전을 던질 때, 연주가가 악보를 보고 연주할 때 그리고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라디오에 의해 발생한다. 그리고 이 작품의 데이터베이스가 되는 라디오의 소리에는 케이지뿐만 아니라 연주자, 관람객도 개입할 수 없다.
 
존 케이지의 〈상상 풍경 4〉
모차르트의 음악 주사위 놀이와 케이지의 〈상상 풍경 4〉, 그리고 오늘날 인공지능 창작의 공통점은 창의성을 위해 기계적 우연성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이들 모두 각자의 데이터베이스(음악 주사위 놀이에서는 음형, 케이지의 경우 라디오)에서 창작에 유효한 데이터를 가져오는데 그 방법은 우연성에 기댄다. 기존의 패턴에 새로운 패턴이 더해지고, 둘 사이 적절한 균형이 지켜져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인공지능의 결과물이 창의적으로 보이고, 인공지능을 만든 사람조차 왜 그런 결과물이 나왔는지 투명하게 밝히지 못할 경우, 우리는 그 인공지능을 창의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창작하는 인공지능은 기존의 음악이나 그림을 데이터로 사용하고 내부 알고리즘에 따라 새로운 창작물을 선보였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 다시 말해 확률론적 프로그래밍에 의해 우연성이 발생한 것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정육면체라는 고유의 물질성에 의해 발생하는 주사위의 우연성과 달리, 인공지능의 우연성은 컴퓨터에 의해 가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은 파악할 수 없을 만큼의 방대한 경우의 수를 계산할 수 있고, 창의성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창의성도 아이디어를 결합하고 재생산하는 기계적 행위 속에서 발생한다. 물론 기계적 우연성과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창의성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창의성을 매우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인공지능 역시 데이터를 조합하는 과정을 통해 창의적으로 보이는 결과물을 선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공지능도 인간만큼 혹은 그 이상의 데이터를 구축하고, 이를 절묘하게 조합하는 확률적 알고리즘을 갖추고 있다. 인공지능의 결과물을 인간의 예술과 동등하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기계적 우연성을 바탕으로 한 예술적 가능성을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도구가 아닌 동료로


인공지능이 예술가의 창작을 돕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1970년대에 해럴드 코헨(Harold Cohen)이라는 예술가가 이 질문에 답을 내렸다. 코헨은 영국 테이트 갤러리를 비롯해 여러 박물관에서 전시를 열고, 1966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 영국관의 작가로 뽑히기도 하는 등 세계적 명성을 누리던 추상파 화가였다. 그러다 1968년 미국 실리콘밸리로 여행을 떠난 것이 계기가 되어 새로운 예술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다. 미국으로 건너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기초부터 공부하기 시작한 코헨은 그림을 그리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1960년대에는 단순히 컴퓨터를 사용해 그림을 만들거나 변형하는 것을 컴퓨터 아트라고 불렀다. 그러나 코헨은 자율적으로 작업 과정을 이해하고 그림을 생성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개발하고자 했다.[6] 이러한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코헨은 “이미지를 상기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선과 형태, 색의 관계에 관심이 많았던 코헨은 이미지를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과 관련된 인지 과정을 체계적으로 탐구해 아론(Aaron)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아론은 무엇을 그릴지, 그림 구성을 어떻게 할지 모든 결정을 스스로 내렸다. 1973년에 개발된 이후 코헨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끊임없이 보완되었는데, 한 버전에서 다음 버전으로 발전할수록 창작 능력이 극적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초기 아론은 추상적인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렸다. 종이 위에 임의로 시작점을 설정하고 알고리즘에 따라 그림을 완성했다. 예를 들면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방향으로 그릴지, 하나의 선을 계속 그릴지, 혹은 닫힌 형태의 선을 그릴지 등을 선택한다. ‘추상화 아론’이 완성한 그림에서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형태를 찾기는 어렵다. 마치 상형 문자나 어린이가 그린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음 단계의 아론은 인간의 형상이나 풍경 등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나무와 꽃이 있는 들판에 사람이 서 있는 형태’ 등 여러 주제가 혼합된 형식도 가능했다. 또한 초기 버전은 코헨이 완성한 드로잉에 채색만 하는 수준이었지만, 1995년에 완성된 버전은 직접 선택한 물감을 섞고 칠했다.[7]
해럴드 코헨과 애런의 1982년 작품 〈Untitled Computer Drawing〉(왼쪽), 1988년 작품 〈Meeting On Gauguin’s Beach〉 © Harold Cohen
추상화 아론은 그림 전체를 볼 수 없었으며, 기억력이 없어 자신의 과거 활동을 반영하지 못했다. 반면 발전된 단계의 아론은 그림의 특징을 미리 계획하고, 무엇을 그릴지에 대한 내용과 구도, 양식도 선택할 수 있었다. 예컨대 공을 들고 있는 사람을 사실주의 양식으로 그린다고 가정한다면, 아론은 종이에 시작점을 찍기 전에 중력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게 인물의 구도를 팔, 다리까지 계획했다. 이때 작가 코헨은 참여하지 않은 채, 아론 스스로 그림을 구성한다.
만프레드 모어의 플로터 드로잉
이렇게 그려진 아론의 그림이 보기 좋은 형태에 속할지는 모르지만, 독창성이 드러나는 것인지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아론은 인물이나 풍경 등 한정적인 주제만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아론은 기존의 컴퓨터 아트와는 다르다. 초기 컴퓨터 아트는 컴퓨터 알고리즘이 얼마나 많은 기호를 생성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데 집중했다. 컴퓨터 아트의 선구자로 불리는 만프레드 모어(Manfred Mohr)의 플로터(Plotter) 드로잉도 알고리즘을 이용해 그린 선을 무수히 반복한 이미지였다. 컴퓨터가 인간의 손보다는 빠르고 간편하게 반복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낼 수 있지만,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 때마다 프로그래밍이 필요했다. 아론은 단순 반복을 하는 수준이 아니라 한 유형의 그림을 무수히 많이 그릴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인물화 아론’은 인물이라는 유형을 벗어나지는 않지만, 서 있는 사람, 앉아 있는 사람, 양손을 들고 있는 사람 등 서로 다른 그림을 여러 점 그릴 수 있었다.

특정 유형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조건이 아니다. 아론이 머리를 그리는 데에만 필요한 프로그래밍 규칙이 4000가지에 달한다.[8] 아론은 얼굴에 그려진 코나 눈의 형태가 얼굴의 방향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팔다리가 물체를 집거나 바닥을 디뎠을 때 어떻게 변하는지, 그 바닥이 평평한지 둥근지 등 수많은 정보를 알아야 했다. 채색을 위해서는 색에 대한 지식도 갖춰야 했다. 추상화라고 할지라도 근접한 색들 사이의 조화나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한다. 아론은 이 모든 조건을 달성했다. 1985년 일본 쓰쿠바에서 열린 박람회 동안 아론은 7000점의 그림을 선보였지만 같은 그림은 하나도 없었다. 컴퓨터가 그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림을 칭찬했다. 아론과 과거의 유명 화가들을 비교할 수는 없지만, 아론의 그림에서 미적 감흥을 전혀 느낄 수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아론에게도 넘을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각각의 그림은 해당 버전의 아론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었는데, 추상화를 그리는 아론은 결코 인물을 그릴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추상화가 지겨우니 오늘은 풍경화를 그려 볼까?”하는 식의 변덕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프로그램의 자발적 수정이 불가해 다음 단계로의 발전에는 늘 코헨이 개입해야 했다. 인간 작가가 만든 구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작품을 아론의 창작으로 볼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 이유다.

한 인터뷰에서 코헨은 자신이 아론을 조작하고 있다고 오해할까 봐 관람객들이 아론을 지켜보고 있는 동안은 키보드 앞에 앉지도 않았다고 회상했다. 물론 아직까지 인공지능은 알고리즘 안에서 작동하기에 인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계산 결과를 인간이 모두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론 역시 그림을 완성하는 데 수천 가지 이상의 규칙을 이용하기 때문에 그 규칙을 입력한 코헨도 결과물을 설정하거나 예상할 수 없었다. 엄청난 양의 규칙을 정하고 프로그래밍한 것은 코헨이지만, 결과물은 순전히 아론의 창작물인 것이다.

오랫동안 미술사에서는 창작을 이야기할 때 작가의 의도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인간이 아닌 다른 개체가 창작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각기 다른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창작 과정을 결코 일반화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론이 등장한 1960년대 중후반부터 미니멀리스트들의 작업을 통해 작가의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품의 제작 방식을 ‘탈개성화’했는데, 이에 따라 작가의 의도보다는 작품과 관람객, 공간과 맺는 상호 교환이 중요해졌다. 작가를 축출하자 알고리즘만 남았다. 이제 창작은 작가 외부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솔 르윗의〈벽 드로잉 #150, 여섯 개의 벽 각각에 고르게 분포된 1인치 선 1만 개〉 작업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과 기계를 미학적으로 연결한 인물은 솔 르윗(Sol LeWitt)이었다. 그는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주관성을 제거하기 위해 미리 설정한 방법(프리셋, Preset)으로 작업하는 것을 제안했다. 이제 예술가는 문제 해결을 좌우하는 기본적인 형태와 규칙, 다시 말해 알고리즘을 설정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된다. 〈벽 드로잉 #150, 여섯 개의 벽 각각에 고르게 분포된 1인치 선 1만 개〉는 솔 르윗이 쓴 지시문에 따라 조수들이 만든 작품이다. 분명 솔 르윗이 미리 설정한 방법에 따라 조수가 작업했지만, 미술사가 조명한 건 작가인 솔 르윗과 그가 만든 개념뿐이었다. 작가의 주관성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조수는 알고리즘을 실행만 할 뿐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솔 르윗과 코헨의 차이다. 솔 르윗의 작업에서 작가의 주관성이 사라질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작가가 조수의 창작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코헨은 아론의 창작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 솔 르윗이 창작 과정을 알고리즘화해 제거하고자 했던 주관성을 코헨은 아론과 나눠 가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상호 매개 가능성이 열린다. 상호 매개란 창작 과정에서 인간과 기계가 연합해 결정하는 것이다. 상호 매개를 위해서는 인간과 기계가 미리 결정된 대로 작동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열린 상태여야 한다. 창작을 위해 서로가 필요한 코헨과 아론이 그랬다. 하지만 솔 르윗의 조수는 알고리즘을 벗어날 수 없는 닫힌 상태의 기계에 불과했다. 프랑스의 기술 철학자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은 닫힌 상태에 있는 기계는 피상적인 결과물을 제공하지만, 열린 상태의 기계는 기술적 앙상블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9] 바로 이 기술적 앙상블을 통해 인간은 기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화가 코헨에게는 기술적 대상, 아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아론은 코헨의 노예나 도구가 아니라 코헨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드는 동력이자 매체다. 코헨은 아론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고 아론이 스스로 완전히 창의적인 행동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인간과 기계의 지능을 서로 다른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다른 종류의 것으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기계가 할 수 없는 일을 주장하는 것 대신, 인간과 연결된 기계가 지금까지 인간 혼자 해온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인정해야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10]

코헨과 아론 사례를 살폈다면, 이제 상하 관계에서 벗어나 인공지능을 인간과 평등한 창작 주체로 볼 수 있다. 인간 창작자에게 주어진 역할도 명확해졌다. 인공지능을 서로 연결하고 조합하는 것이다. 마치 여러 악기가 모인 오케스트라를 조율하는 지휘자처럼 말이다.

 

스스로 생산하는 네트워크


예로부터 초상화는 한 사람의 성품, 지위 등을 담기 위해 그려졌다. 동양에서는 초상화를 인물의 정신을 담는 그릇으로 여겼다. 초상화는 명확하게 그려져야 했다. 그림 속 인물의 주체성을 대변했기에 초상화는 그 자체로 누군가를 지칭할 수 있는 기호였다. 피카소의 초상화처럼 대상을 똑같이 모방하지 않는 경우에도 초상화가 지칭하는 인물은 특정한 한 사람이었다. 실존하지 않는 상상 속 인물을 그린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머릿속에 있는 단일 인물을 그리는 것이다.
마이크 타이카, 〈비현실 초상화(Portraits of Imaginary People)〉 © Mike Tyka
마이크 타이카(Mike Tyka)의 작품 〈비현실 초상화(Portraits of Imaginary People)〉 속 인물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아무도 그를 누구라고 단일 지칭할 수 없다.

이 작품의 제작 과정을 보여 주는 애니메이션 〈드림스 오브 이매지너리 피플(Dreams of Imaginary People)〉[11]을 보면 대상의 모호성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영상에서는 아주 작은 픽셀의 움직임을 통해 새로운 초상화가 2~3분 간격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다음 초상화로 천천히 변한다. 여기서 인물은 그려진다기보다는 한 번에 만들어졌다가 무너진다는 표현에 가까운데, 이 때문에 각 인물은 서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마이크 타이카는 이 작품에 생성적 적대 신경망(Generative Adversarial Network·GAN)이라고 불리는 최신 인공 신경망 기술을 사용했다. 생성적 적대 신경망은 두 개의 인공지능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으로, 이미지 생성이나 자연어 처리 과정에서 엄청난 성과를 보였다. 예컨대 이 신경망을 사용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든다면,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생성자(generator)와 이미지가 좋은지 나쁜지 평가하고 구분하는 판별자(discriminator)가 서로 대립(adversarial)하면서 더 나은 이미지를 생성한다. 타이카는 자신의 웹 사이트에서도 어떻게 인공 신경망이 이미지를 생성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요점은 생성자와 판별자 두 인공지능이 얼굴처럼 보이는 이미지를 만들도록 제어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부분이 매우 까다로운 작업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서 인공지능의 자기 생산성이 드러난다. 〈비현실 초상화〉는 온라인 사진 공유 플랫폼인 플리커(Filckr)에 올라온 얼굴 사진을 데이터베이스로 이용한다. 생성자는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미지를 만들고 판별자는 그 이미지를 실제 사진과 비교하며 만들어진 이미지를 구분한다. 이 과정이 반복될수록 생성자는 판별자의 기준을 통과하기 위해 더 진짜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 내고, 판별자는 가짜를 걸러 내기 위해 판별 기준을 더 세밀하게 발전시킨다. 두 개의 인공지능이 참여하는 내부 체계를 통해 이미지를 생성하는 이 작업은 내부의 반복을 통해 자율 생성이 가능했던 인공지능에서 한 단계 나아간 것이다. 작가는 창작 과정에 데이터를 제공하고 알고리즘을 구성할 뿐, 이미지 생성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는다. 작가의 창의성은 창작의 구조인 알고리즘에서, 인공지능의 창의성은 알고리즘과 데이터를 통해 새로운 얼굴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그런데 〈비현실 초상화〉에서는 인공지능이 활용한 데이터, 즉 이미지를 인터넷에 올린 사람까지 창작 주체로 참여한다. 작품 속 인물이 ‘나, 너, 그’가 아닌 비인칭적 주체로 드러나는 이유도 바로 여러 창작 주체가 혼합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주체가 하나로 연결되고 분리할 수 없는 상태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개념이 자기 생산(autopoiesis)이다. 자기 생산은 자기(autos)와 만들다(poiein)의 결합어로, 개체 내부에서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지만, 동시에 그것의 매체가 되는 환경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12]

자기 생산을 쉽게 설명한 그림이 있다. 자신의 꼬리가 나무가 되고 그 나무에 열린 열매를 먹는 도마뱀 그림이다. 도마뱀은 스스로 자신의 양분이 되고 그 양분이 다시 자신이 되는 순환 고리에서 빠져나올 수 없다. 이 그림은 네덜란드의 화가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Maurits Cornelis Escher)의 〈그리는 손〉을 떠올리게 한다. 이 그림에서 무엇이 전체 과정의 기초가 되는지, 서로를 그리고 있는 두 손 중 어느 것이 진짜 손인지 알아낼 길이 없다. 자기 생산은 이처럼 구성 요소들이 순환적으로 생산하는 하나의 체계로, 한 개체 안에서 만들어지는 자율 생성보다 넓은 개념이다.
마투라나의 〈앎의 나무〉(왼쪽), 모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그리는 손〉
〈그리는 손〉은 인공지능 프로그램뿐 아니라 인간의 뇌에서 발생하는 ‘기호의 뒤엉킴’을 상징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 뇌 속의 모든 기호는 위계질서 없이 상호 작용한다. 그리고 두 손이 서로를 그리는 상황이 담긴 에셔의 손처럼, 뒤엉킨 계층 질서 표면 아래에는 무수히 많은 뉴런과 수십억 개의 세포, 그것을 잇는 수천억 개의 신경 돌기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 엉킴이 존재한다. 우리가 〈그리는 손〉을 그린 에셔의 존재를 잊으면, 그림 속 손들이 스스로 그려진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지만 에셔의 존재를 떠올리면 두 손의 모순적인 형태를 이해할 수 있다.[13]

〈비현실 초상화〉에 사용된 생성자와 판별자 두 인공지능을 에셔의 〈그리는 손〉 속 오른손과 왼손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인 타이카가 그림 밖에 존재하는 에셔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일까? 물론 타이카는 인공지능 알고리즘을 만든 핵심적 주체다. 그러나 작가도 어디까지나 그 구조를 만든 개체일 뿐이다. 데이터가 되는 사진도 이미지 생성을 위한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만으로 보이지 않는 층위를 설명하기 부족하다. 그러므로 그림의 창작에 참여하는 주체는 작가인 타이카, 두 인공지능, 플리커의 사진 데이터, 그리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스크린 너머의 관찰자, 모두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 얼굴들은 결코 특정 관찰자를 똑같이 닮을 수 없다. 관찰자는 구조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관찰자는 〈그리는 손〉을 그린 에셔의 손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고 관찰자와 작품의 얼굴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관찰자도 이 작품이 만들어지는 환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관찰자의 얼굴은 상상 속 인물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지만, 결코 상상 속 인물이 닮지 못할 새로운 얼굴이다. 구조 밖에 있는 관찰자는 이 작품에 창의성을 더한다.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다. 네트워크는 그 자체로 자기 생산성을 지닌 환경이다. 작가, 인공지능, 그리고 플리커에 자신의 사진을 올린 사람, 이미지를 보는 관찰자가 모두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이 연결은 각자의 주체성을 보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섞고 혼합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네트워크 또한 재생성된다. 이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이 비인칭적 주체, 다시 말해 ‘누구라 칭할 수 없는 누군가’가 탄생한 것이다. 타이카의 〈비현실 초상화〉에서 작가, 인공지능, 관찰자는 모두 동등하게 작업에 참여했다. 인공지능은 이미 창작의 주체다.
[1]
마거릿 A. 보든(고빛샘 외 譯), 《창조의 순간: 새로움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21세기북스, 2010년, 87-88쪽.
[2]
마거릿 A. 보든(고빛샘 외 譯), 《창조의 순간: 새로움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21세기북스, 2010년, 391-394쪽.
[3]
음악 주사위 놀이는 18세기 말 유럽에서 인기 있었던 오락거리였다. 1792년 《두 개의 주사위를 이용해 왈츠를 작곡하는 방법》이라는 서적이 베를린의 모차르트 서점에서 출판되었으나, 저자가 모차르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David Cope, 《Experiments in Musical Intelligence》, A-R Editions, 1996, p. 7.
[4]
Stanley Sadie, 《The New grove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Grove, 2001, pp. 341-346.
[5]
리처드 코스텔라네츠(안미자 譯), 《케이지와의 대화》,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6년, 109-110쪽.
[6]
이인식, 《사람과 컴퓨터》, 까치, 1992년, 434-435쪽.
[7]
Paul Cohen, 〈Harold Cohen and AARON〉, 《AI Magazine La Canada Vol. 37, Issue. 4》, 2016, pp. 63-66.
[8]
John Schwartz, 〈Is Aaron’s Work Creative Art or Just High-Tech Doodling?〉, 《The Washington Post》, 1995. 4. 10.
[9]
질베르 시몽동(김재희 譯), 《기술적 대상들의 존재 양식에 대하여》, 그린비, 2011년, 13쪽.
[10]
Harold Cohen, 〈A Self-Defining Game for One Player: On the Nature of Creativity and the Possibility of Creative Computer Programs〉, 《Leonardo Vol. 35, No. 1》, 2002, p. 60.
[12]
움베르토 마투라나, 프란시스코 바렐라(최호영 譯), 《앎의 나무》, 갈무리, 2007년, 59쪽.
[13]
더글러스 호프스태터(박여성, 안병서 譯), 《괴델, 에셔, 바흐: 영원한 황금노끈》, 까치, 2017년, 952-9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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