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사냥꾼의 사회
3화

벌레 공화국과 불행 배틀

 

수치심 감소의 정치


수치심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생겨나는 사회적 감정이다. 타인과의 상호 작용 과정에서 자신이 하찮고 무력하며, 어리석고 거부당한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그런데 남들과의 차이가 무조건 수치심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전통 사회에서 가난은 단지 개인의 불운일 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로 넘어온 뒤에야 가난이 개인의 무능과 방종의 결과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가난한 자는 실패자가 됐고, 부자는 빈자를 자선과 죄책감의 대상이 아니라 경멸의 대상으로 보게 됐다.[1] 빈자는 가난이 자신의 결함이라는 사회적 평가를 내면화하면서 수치심을 느낀다.

수치심은 타인이 자기에 대해 내린 부정적 평가를 인식한 결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치심을 숨기려는 경향을 보인다. 수치심을 느낀 이에게는 자신의 감정이 외부로 드러나 남들이 알게 되는 상황이 극단적인 공포다. 사람들은 자신의 수치심을 들킬까 봐 먼저 공격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하고, 수치심에 동반되는 열등감을 견디지 못해 ‘부끄러운 것은 내가 아니라 너’라는 식으로 상대방을 경멸하고 공격하기도 한다. 수치심은 이처럼 자주 다른 감정으로 대치되며, 분노나 혐오도 수치심 방어의 일환으로 나타난다.

사회학자 알린 스타인(Arlene Stein)은 수치심으로 응축된 불만을 목적 있는 분노로 전환하고자 하는 운동을 ‘수치심 감소의 정치(The Politics of Shame Reduction)’라고 명명했다.[2] 사회 운동가들은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악덕한 고용주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제기하며 분노를 일으켰다. 그동안의 고통을 모두 고용주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과 유사한 분노를 느낀 사람들과 함께 고용주를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운동을 만들었다.

혐오의 정치 운동도 유사하다. 자신이 느끼는 고통, 즉 수치심을 제공한 대상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분노해야 할 논리를 세우며, 운동에 공적인 목소리를 부여한다. 그러나 혐오 운동은 본질적으로 수치심을 회피하려는 목적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기성의 사회 운동과는 다르다.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그것을 안겨 준 대상과 직접 마주하기보다는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인접한 곳에서 쉽게 이길 수 있거나 굴욕감을 줄 수 있는 타자들을 찾는다. 수치심을 회복하고 치유하기 위해 타자에게 보복하고, 자신의 우월한 정체성을 억지로 되찾으려 한다는 것이다.[3]

한국 사회에서 실업과 빈곤 문제로 고통받는 청년 세대와 노인 세대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재의 고통과 수치심을 유발한 원인 진단 자체는 왜곡되지 않았다. 청년들이 당면한 가장 큰 고민은 눈앞의 현실이다. 등록금, 취직, 주택, 출산 등 돈과 결부된 문제가 발목을 잡고 있으며, 열심히 노력해도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은 미래가 불만이다. 삶이 힘든 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청년들은 소득의 양극화와 사회 안전망의 해체, 경쟁 위주의 사회 분위기라고 진단한다.[4] 이는 전문가들이 말하는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지적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청년 세대는 사회 구조에 저항하는 대신, 기성세대를 비하하고 적대적 대결 구도를 형성한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청년들이 느끼는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다. 20대 여성인 주인공은 대학을 졸업하고 어렵다는 취직에 성공하지만, 인간성이나 존엄을 생각할 수 없는, 사축(社畜·가축처럼 일하는 직장인을 뜻하는 신조어)이 되어 가는 현실에 절망하고 ‘탈조선’을 실행한다.[5] 탈조선의 이유는 한마디로 ‘한국이 싫어서’다. 사투를 요구하는 경쟁 시스템으로 무장한 한국 사회가 싫은 것이고, 정글 같은 세상에서 사자의 표적이 되는 톰슨가젤 신세가 될까 두려운 것이다.[6] 패배의 길만 남은 것 같은 두려움은 곧 무력감과 연결된다.

같은 작가의 소설 《표백》은 청년들이 위대한 좌절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선언한다.[7] 이전 세대가 만들어 놓은 완벽한 ‘그레이트 빅 화이트 월드’, 즉 위대한 사상이나 문제에 대한 답이 이미 나와 있는 잘 설계된 세상에서는 자신들이 더 달성해야 할 과업도, 획기적인 진보를 이룰 수도 없다는 무력감이 있다는 것이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란 질문에 대해 재빨리 정답을 내놓는 것이고, 누구보다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 체화하는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려 놓은 밑그림 속에서 시시하게 사는 세대다. 이런 젊은 세대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죽을 각오로 절실하게 도전하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가르침에 꼰대라는 말로 적의를 표출한다. 변혁과 도전 정신, 노력의 주체로 규정당한 청년 세대는 노력을 요구하는 기성세대의 말에 청년의 열정을 착취하려는 의도가 은폐되어 있음을 알고 분노와 수치심을 느낀다.

일제 강점기의 압제와 전쟁을 견디고 살아남아 경제적 풍요를 일궈 냈다는 긍지를 지닌 산업화 세대의 정서도 청년 세대의 상실감, 분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경제적, 정치적 성장의 주역이라는 자부심 대신 자원이 넘쳐나는 시대에 태어나 손쉽게 권리를 얻고, 부동산 가격을 올려 청년들을 주거 난민으로 만들었으며, 자녀의 사교육에 과몰입해 무한 스펙 경쟁을 불러왔다는 비판에 비애를 느낀다.

청년 세대에게 노인들은 기득권자요, 꼰대일 뿐이다. 그러나 청년 세대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상당수는 성장의 결실을 되돌려 받지 못한 채 조기 퇴직과 빈곤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살고 있다. 한국보다 먼저 고령 사회에 진입한 일본에서는 1990년대 독신 고령자와 고령 이혼의 증가, 친지들과 연락이 끊어진 중·장년, 노년층이 사망 후 한참이 지나서야 시신으로 발견되는 일이 빈번해지며 무연(無緣) 사회가 키워드로 떠올랐다. ‘하류 노인’, ‘과로 노인’, ‘폭주 노인’ 등의 키워드에는 노인들의 박탈감과 피해 의식이 응축되어 있다.

하류라는 용어는 단순히 먹고살 것이 없는 빈곤층이 아니라 노동 의욕, 소통 능력, 윤리 의식, 정신 건강 등 총체적 생활 역량을 상실한 바닥을 지칭한다. 실제로 이들은 연금 액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경제적으로 힘든 자식과 손자를 부양하거나 병든 부모를 간호하기 위해 노년에도 일해야 하는 신세다.[8] 이들에게 주어진 일자리는 택시 운전사, 택배 배달원,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같이 고단하고 무시당하기 십상인 일뿐이다. 노인 세대의 정서에는 평생 참고 희생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빈곤과 가족과의 단절, 사회로부터의 비하와 비난이라는 압도적인 피해 의식과 우울감이 녹아 있다.

청년 세대와 노인 세대는 서로를 비난하며 경계의 벽을 높이지만, 이들의 정서는 세 가지 측면에서 매우 닮았다. 첫째, 미래를 꿈꿀 수 없다는 무력감, 둘째, 사회적 관계 단절에 따른 고립감, 셋째, 자신의 삶과 현재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상실감이다. 이런 상황은 생존 불안으로부터 안정감을 찾고, 전체 중 일부로 강력한 유대감을 가질 수 있는 공동체, 무력감에서 벗어나 자기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출구를 갈구하게 한다.

에리히 프롬(Erich Fromm)에 따르면, 사람들은 스스로가 무력하다고 느낄 때 이에 대한 반동으로 보상적 폭력을 보인다. 보상적 폭력은 자신의 삶이 완전히 무기력해지거나 불구 상태가 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사실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집요하고 강력하게 나타난다.[9] 타자로부터의 수치심과, 벗어날 수 없는 무력감을 인식한 결과이기에 수치심 감소의 정치와도 일맥상통한다. 무력감을 넘어서기 위해 불안으로부터 구원을 약속하는 사람이나 집단에 복종하고, 이들의 질서에 동화하여 낙인찍힌 집단에 분노를 쏟아 낸다.

철학자 르네 지라르(Rene Girard)는 《성스러움과 폭력》에서 강자에 동조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희생양으로 삼는 것이 공동체 내의 불만을 잠재우고 유대를 강화하는 분명한 효과를 낳는다고 말한다.[10] 자신이 희생양으로 지목되지 않기 위해 지배 질서라는 상위 분류에 과잉 동조해야 한다.[11] 학교의 왕따 현상을 보면, 피해자 학생을 바라보는 이들은 침묵하거나 가해 집단에 동참해 더 가혹하게 업신여기고 괴롭힌다. 이들의 동조에는 왕따가 되지 않기 위해 강력한 대상과 일체가 되고, 그들의 영광에 참여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다. 독립성과 자유를 버리는 대신, 자신이 몰입한 대상에 의지해 무력감에서 오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안정성을 보장받는 것이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일간 베스트(이하 일베), 태극기 집회, 극우 개신교, 애국 보수단 등이 벌이는 극우주의 운동은 현실의 비참한 생활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기득권, 국가, 민족, 종교 등과 같은 강력한 대상에 동화한다. 그리고 집단에 몰입하고 유대를 강화하기 위해서 여성이나 성 소수자와 같은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이들의 운동은 수치심을 보상하기 위해 타자를 향한 폭력을 택한다는 점에서 수치심 감소의 정치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왜 현재 많은 정치 운동이 보수화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단서이기도 하다. 이들의 운동은 기득권에 동화해 기득권의 입장에서 지배 질서를 강화하고자 한다. 인접 집단에서 더 많은 희생양을 발굴, 차별을 심화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극우적이다. 이들의 정치 운동은 자유를 포기하고서라도 나를 안전하게 보호해 줄 민족, 국가, 인종, 신 등에 자신을 맡기려는 현상으로 거대한 퇴행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12]

극우주의 운동은 일관된 논리 체계를 갖춘 것이 아니라 역사를 선과 악, 순수와 타락의 이항 대립으로 해석하고 결집하는 운동이다. 로버트 팩스턴(Robert Paxton)은 저서 《파시즘》에서 파시즘 운동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설명했다. 사람들은 1차 세계 대전 이후 극도의 혼란을 자유주의 국가의 실패라고 생각했다. 대중의 마음속에는 자유가 자신이 속한 집단과 공동체의 가치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자리했다. 이 두려움은 폭력을 써서라도 공동체를 더 긴밀하게 통합하고 안전을 보장해 줄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갈망을 만들어 냈다. 자신의 분노를 표출할 외부의 적이 필요했기에 자유주의자와 이주 노동자, 유색 인종과 이교도 등이 공격의 대상이 됐다.[13]

태극기 집회의 노인들과 극우 청년에게 악마화된 적은 현실의 공포와 불안, 수치심, 무력감 등을 목적 있는 분노로 전환하는 역할을 한다. 활기 없는 나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부심과 긍지를 제공한다. 한편, 젠더를 축으로 나타나고 있는 메갈리아, 워마드 같은 남성 혐오 운동은 세대의 위치(청년)에 젠더의 위치(여성)가 겹쳐진 복잡한 지형 위에 있다. 이들의 언어는 여성을 피지배층으로 규정해 온 지배 질서와 쉽게 동화할 수 없다. 그래서 강력한 대상을 찾기보다 남성들의 혐오를 미러링하는 방식의 운동을 전개한다. 기존의 정체성 운동인 여성 운동에서 분리된 새로운 젠더 활동은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를 표출한다는 점에서 극우 운동과 유사하다. 세부적인 논리의 차이는 있지만, 타자에 대한 혐오를 내세우는 정치 운동은 현실의 온갖 불만과 불안을 끌어들이는 블랙홀로 기능한다.[14]

 

벌레 공화국과 불행 배틀


당신도 벌레일 수 있다. 2016년 발표된 조남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이 육아를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1500원짜리 커피를 마시다가 남편이 벌어 오는 돈을 축내는 맘충이 된 것처럼 말이다.[15] 누군가는 진지하게 설명을 한다고 진지충, 설명충이 되고, 사법 고시나 의학 전문 대학원 입학시험 준비를 하다 사시충, 의전충이 된다. 나이가 들고 보니 틀니 딱딱거리며 훈계하는 틀딱충이 된다. 수시 전형 또는 지역 균형 선발로 대학에 입학했다고 수시충, 지잡충, 지균충이 되고, 지방 대학이나 유명 대학 분교 캠퍼스에 다닌다고 분캠충이 되며, 사회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고 꿘충, 급식을 먹는 학생이라고 급식충이 된다.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해도 페북충이 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벌레가 만들어진다. 이대로라면 우리는 누구나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처럼 편치 않은 꿈에서 깨어난 어느 날 벌레가 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혐오 감정을 인간다움을 파괴하는 감정으로 규정한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의 말[16]을 원용하면 ‘충’의 남발로 대변되는 혐오 감정의 배설은 신종 벌레들을 만들어 내며 즐기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사회다움을 파괴하는 집합 감정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충’은 뻔뻔하고 몰상식한 행위를 일삼는 ‘민폐족’을 비판하고 비하하기 위해 탄생한 용어였다. 언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구조주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주장처럼, 벌레라는 호칭은 대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가진 혐오의 감정이 벌레라는 ‘극혐’ 대상들을 창조해 낸다. 혐오 감정의 집단적 배설 욕구가 벌레 공화국을 만든 것이다.

특정 집단을 벌레로 규정하는 것은 각종 집단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할 수 있는 상징 표적을 만드는 일이고,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는 죗값을 물어 상대를 처벌할 이유를 만들어 내는 일이다.[17] 남성은 여성을, 여성은 남성을, 하류층은 상류층을, 상류층은 하류층을, 청년은 노인을, 기성세대는 청년 세대를, 보수는 진보를, 진보는 보수를 단죄하려는 집합 심리가 거대한 벌레 공화국을 만들고 있다. 너도나도 벌레가 된 세상은 서로를 갉아먹는 병든 사회다.

게다가 이제 벌레라는 말은 상대를 공격하고 폄하하는 의도를 넘어 자학적 표현으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누구라도 공격하고 차별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살벌한 상황에서 벌레처럼 짓밟히지 않기 위해서는 벌레라는 공격을 받기 전에 먼저 스스로를 벌레로 규정해 버리는 자학 전략을 구사해야 하는 것이다.[18]

혐오를 동력 삼아 벌레를 만들어 내고 있는 사회를 이해하려면 벌레 담론 생산의 주체인 청년들의 감정 구조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시와 모욕으로 인한 수치심, 생존 불안으로 인한 무력감 등으로 인해 청년 세대는 스스로를 잉여로 규정하고, 잉여 문화를 양산했다. 웹툰 〈이말년 씨리즈〉로 표상되는 ‘병맛’ 코드를 향한 청년 세대의 열광은 세대적 감수성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19] 기성세대로부터 88만 원 세대라고 규정당한 청년들은 세대 담론을 비웃고, 유머를 통해 소극적으로 저항한다. 절망감은 ‘흙수저 빙고 게임’과 같은 병맛 놀이로 표출되기도 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 돌고 있는 흙수저 빙고 게임은 자신에게 해당되는 수저 계급의 위치를 가늠해 보는 빙고 게임을 통해 희망을 잃어버린 자신을 확신하게 되는 슬픈 유희다.

불행 배틀은 온라인 게시판이나 소셜 미디어에 자신의 상황이 얼마나 불행한지를 올리면, 다른 사람이 경쟁적으로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하는 놀이다. 점차 불행의 강도가 세지다 불행의 ‘끝판왕’이 나오면 놀이도 끝난다. 배틀을 통해 가장 불행하다고 인정받은 자만이 신세타령을 할 권리를 얻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노오력’할 것을 요구받는다.[20]

한국의 청년 세대는 자신이 큰 꿈을 가질 수 없는 이유가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 방식은 우울한 처지를 유희적 농담으로 희화화하거나 기성세대를 비하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이다. 《경향신문》 취재 팀이 청년들을 만나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진행한 결과에 따르면 유희의 저변에는 막막한 현실이 두렵고 답답한 나머지, 분노의 발화점에 도달해 있는 심리가 응축되어 있었다.[21]

스스로를 벌레로 그리는 자학의 정서도 현실의 자신과 이상의 괴리에서 오는 수치심과 관련이 있다. 기성세대는 식민지, 전쟁과 폐허, 군부 독재라는 역사적 터널을 통과하면서 청년 세대에 온갖 종류의 사명감을 투사했고, 이렇게 투사된 청년의 가치가 현재의 청년들에게도 비교 준거로 제시된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이상적 청년과의 괴리감에서 세대적 좌절과 수치심을 느낀다.[22] 노인 세대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젊은 시절을 국가에 헌신하며 더 나은 미래를 꿈꿨다. 하지만 현실은 비루하고, 사회에는 노인들에 대한 비난이 난무한다. 두 세대가 공유하는 수치심에는 숨겨져 있거나 침묵하고 있는 분노가 있다.[23]

오늘날에는 특별한 지도자가 없어도 불만과 분노를 공유할 수 있는 다양한 무대 뒤 공간이 존재한다. 인터넷, 문자 메시지, 소셜 미디어 등을 통해 수월하게 불만을 표출할 수 있다. 그런데 온라인 공간도 모든 이들을 구분 없이 연결하지 않는다. 비슷한 감정과 신념, 세대 감수성을 공유한 집단들이 더 밀접하게 연결된다. 수치심을 갖고 있는 이들은 끊임없는 접촉(perceptual contact)을 통해 자신과 유사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과 공감하며[24] 수치심을 유발한 타자들에 대한 분노가 정당한 것이라는 신념을 확고히 해 간다. 수치심을 간직한 이들은 소위 ‘끼리끼리’의 상호 작용에 집중하는 경계가 분명한 유대(bounded solidarity)를 만들어 낸다.[25]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수치심과 분노의 운동은 또 다른 운동을 낳는다는 것이다. 청년 세대의 분노는 여성 혐오를 주장하는 정치 운동으로 전환되고, 또 이에 대응해 남성 혐오를 주장하는 정치 운동이 생겨난다. 여성 혐오의 정치 운동은 일시적으로 퍼졌다가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극우 보수를 지향하는 이들의 감정 논리는 노인들의 정치 운동에서 재현되고 있다. 사회학자 랜들 콜린스(Randall Collins)의 말을 인용하자면 “운동 동학은 일시적일 뿐만 아니라 환생한다.”[26]
[1]
알랭 드 보통(정영목 譯), 《불안》, 은행나무, 2011, 109쪽.
[2]
Arlene Stein, 〈Revenge of the Shamed: The Christian Right’s Emotional Culture War〉, 《Passionate politics: Emotions and social movements》, 2001, pp.115-131.
[3]
알린 스타인(박형신·이진희 譯), 〈수치심을 느낀 사람들의 복수〉, 《열정적 정치》, 한울아카데미, 2012, 175-200쪽.
[4]
이선희, 〈청년이 생각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들〉, 《월간 참여사회》, 2015. 10.
[5]
청년들은 “스펙을 쌓던 몸은 회사의 부속품이 됐고, 계약만큼만 돈 받고 계약보다 훨씬 많이 일한다”고 생각한다. 사축은 저녁도 없고 미래 전망도 없는 하루를 살면서 회사에 길들여져 가는 자신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향신문 특별 취재 팀, 《부들부들 청년》, 후마니타스, 2017, 39쪽.
[6]
김문조·김남옥, 〈내부자적 시각으로 본 한국 사회의 계급 갈등〉, 《담론201》, 20권 2호, 2017, 7-42쪽.
[7]
장강명, 《표백》, 한겨레출판, 2011.
[8]
NHK 무연 사회 프로젝트 팀(김범수 譯), 《무연 사회》, 용오름, 2012.
후지타 다카노리(홍성민 譯), 《2020 하류 노인이 온다》, 청림출판, 2016.
[9]
에리히 프롬(황문수 譯), 《인간의 마음》, 문예출판사, 2004.
[10]
르네 지라르(박무호·김진식 譯), 《폭력과 성스러움》, 민음사, 2000.
[11]
고모리 요이치(배영미 譯), 《인종 차별주의》, 푸른역사, 2015, 74-76쪽.
[12]
에리히 프롬(김석희 譯), 《자유로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2012.
[13]
로버트 팩스턴(손명희·최희영 譯), 《파시즘》, 교양인, 2005.
[14]
야스다 고이치(김현욱 譯), 《거리로 나온 넷우익》, 후마니타스, 2013.
[15]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16]
마사 누스바움(조계원 譯), 《혐오와 수치심》, 민음사, 2015.
[17]
김문조·김남옥, 〈내부자적 시각으로 본 한국 사회의 계급 갈등〉, 《담론201》, 20권 2호, 2017, 7-42쪽.
[18]
양기민, 〈‘존중의 원체험’ 있어야 ‘벌레 공화국’ 벗어난다〉, 《시사IN》, 2015. 12. 23.
[19]
김수환, 〈웹툰에 나타난 세대의 감성 구조: 잉여에서 병맛까지〉, 《탈경계인문학》, 4권 2호, 2011, 101-121쪽.
[20]
최서윤·이진송·김송희, 《미운 청년 새끼》, 미래의 창, 2017.
[21]
경향신문 특별 취재 팀, 《부들부들 청년》, 후마니타스, 2017, 15-17쪽.
[22]
김남옥, 〈80년대 청춘의 초상(肖像): ‘386’세대 정체성과 문학적 노스탤지어〉, 《사회사상과 문화》, 2016, 233-265쪽.
[23]
Helen B. Lewis, 〈Shame and Guilt in Neurosis〉, 《Psychoanalytic Review》, 1971, pp. 419-438.
[24]
Christan Licoppe, 〈‘Connected’ Presence: The Emergence of a New Repertoire for Managing Social Relationships in a Changing Communication Technoscape〉, 《Environment and Planning D: Society and Space》, 2014, pp. 135-156.
[25]
리치 링(배진한 譯), 《모바일 미디어와 새로운 인간관계 네트워크의 출현》, 커뮤니케이션북스, 2009.
[26]
랜들 콜린스(박형신·이진희 譯), 〈사회 운동과 감정적 관심의 초점〉, 《열정적 정치》, 한울아카데미, 2012, 48-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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