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사냥꾼의 사회
4화

평범한 얼굴의 혐오

 

행동하는 노인의 탄생


지하철 노인 전용 좌석을 두고 벌어지는 시비, 법원 앞 도로를 점령한 노인들의 태극기 집회, 퀴어 축제 현장에서 동성애 반대를 외치는 종교인의 피켓 시위, 세월호 유가족에 맞불을 놓는 애국 보수 단체,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남녀 간의 갈등까지. 생활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갈등으로 넘쳐나고 있다. 지금까지 보수와 진보라는 이념은 계급과 세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규칙으로 보였다. 부유층과 기성세대는 보수적이고, 빈곤층과 젊은 세대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빈곤층이 강력하게 보수를 지지하고, 극우 청년이 등장하는 등 이념 갈등이 복잡하게 나타난다.

노인 세대의 기억 속에는 전쟁과 독재 정권의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전쟁과 가난으로 인한 무질서 속에서 자연스럽게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재화했고, 안정과 질서가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남북 분단 이후 생겨난 레드 콤플렉스는 새로운 정치 사회 지형을 갖출 여유를 주지 못했다. 독재가 더 나은 악이라고 판단할 만큼 전쟁으로 체험된 반공주의는 절대적 가치였다.[1] 독재 정권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개인에게 권리를 희생하고 국가에 충성할 것을 강요했다. 노인 세대는 어느 나라에서도 유례가 없는 한국형 산업화의 주인공이라는 자부심을 안고, 미래에는 지금의 노력을 보상받을 수 있으리라는 약속을 굳게 믿고 달렸다.

그런 이들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태극기 집회의 주축은 한국 전쟁, 독재 정권의 산업화 시대를 살아온 50~70대다. 태극기 노인은 ‘박근혜 탄핵 반대’를 주장했고, 지금은 ‘박근혜 석방’을 외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영광스러운 과거를 상징하는 박정희와 동일시된 인물이고, 혼란스러운 세상의 질서와 안정을 되찾아 줄 지도자다. “박근혜 대통령님을 지키자. 오천 년 역사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태극기 부대가 집회에서 내건 구호에는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며 지켰던 정권이 정통성 있고 올바르다는 생각이 녹아 있다. 태극기 노인에게 대한민국의 주적은 종북, 좌파, 빨갱이로 지칭되는 진보 세력, 그들과 결탁한 언론이다. 이들에게 애국은 종북 좌파로부터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지켜 내는 것이다. 종북 좌파는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 체제로의 통일을 지향하는 세력이다.

태극기 집회 구성원의 성별, 학력, 직업, 종교 등은 다양하다. 하지만 통합진보당 해체나 사드 배치 찬성, 국가 보안법 폐지 반대 등의 이슈를 두고 노인 세대의 80퍼센트 이상이 압도적인 지지를 보이는 것을 보면, 이들이 독재 정권하에서의 학습과 기억을 통해 유사한 인식 체계를 습득한 세대 집단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태극기 집회에 참여하는 노인의 다수는 하류다. 하류 노인은 한때 경제 발전의 주역이었지만, 지금은 생산 영역에서 뒷전으로 밀려나고 가족과도 의사소통이 어려운 이들이다. 100세로 늘어난 기대 수명, 치매나 우울과 같은 정신 질환, 고액의 복지 시설, 턱없이 부족한 저축과 노후 연금 등으로 언제든 추락할 수 있는 위험에 놓인 이들이 하류 노인에 해당한다. 상층에 있는 노인도 언제든 하류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기득권 의식과 품위, 체면으로 하류 노인과 자신들을 분리한다. 이런 경계 긋기를 통해 상층 노인은 일자리 도둑, 연금 수혜자, 꼰대라는 사회의 무시와 비하에서 비켜난다.

과거의 기억은 현재의 지평 속에서 재구성된다.[2] 살아남기 급급한 하류 노인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최고의 권위와 지배력으로 분명한 미래와 희망을 제시한 인물이다. 무한한 자유와 불확실성으로 고통스러운 현재와 달리, 과거에는 명료한 질서와 규율이 존재했다. 그래서 태극기 집회의 노인들은 서슴없이 우리나라에는 독재자가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노인의 뇌리 속에서 국가는 아직까지 세습 왕조의 모습을 하고 있고, 지도자는 이들이 말하는 조국의 실체인 것이다.

태극기 노인이 빈곤과 노후 불안을 해결하려면 자신의 노력에 대한 공정한 배분을 요구해야 하지만, 이것은 노인들이 증오하는 진보의 용어라는 점에서 자기모순이다. 노인 빈곤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지적될 때에도 이들은 가난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어려움을 감내해 왔다. 그랬던 노인이 거리로 나온 진짜 이유는 자신들이 희생을 통해 이룩한 과거가 부정당하고, 현재까지 부정당하는 것에 대한 분노다. 자신들의 정체성을 인정받기 위해 노인은 공동체의 집합 기억을 재생하며, 기억의 공동체로 행동한다. 반공의 기억 속에 빨갱이로 뿌리박힌 진보 세력을 몰아내기 위한 혐오 운동은 자신의 훼손된 정체성만큼 강하게 나타난다.

 

가족 국가 노스탤지어


일베 커뮤니티는 태극기 집회와 닮았다. 일베의 구성원은 주로 청년 남성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우상으로 섬기며 국가와 민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젊은 우익으로 불린다. 이들은 외환 위기와 부모의 조기 퇴직, 취업난과 불안정한 일자리, 부모 세대보다 더 많이 배웠지만 더 불안하게 살아가는 세대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일베 청년에게 민주주의는 학생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한자리씩 차지하는 데 기여하고 멈춰 버린 시스템이다.

청년들의 상당수가 정규직의 희망을 포기하고 단기 계약직이나 아르바이트로 살아간다. 청년들은 이를 체념 경제라고 말한다.[3] 누구나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지만 불가능한 상황이니, 하루살이처럼 살자고 체념하는 것이다. 잉여로 규정된 청년들은 과거에서 하나의 낙원을 발견한다. 국가가 개인을 방치하지 않고, 개인이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살아가는 가족주의 국가다.

일베 청년은 가족주의 국가의 재건을 요청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을 부왕(父王)으로 소환한다. 일베에게 박정희는 경험한 적이 없는 시대의 인물이지만, 경제 성장의 상징이라는 선명하고 뚜렷한 이미지로 재현된다. 박정희는 기업의 CEO에 비유되기도 한다.
 
한 CEO가 있었다. 취임 당시만 해도 회사의 재정 상태는 바닥이었다. 그러나 그가 직위에서 물러날 무렵 직원들의 월급은 12배가 올랐고, 취임 당시 업계 순위 72위였던 회사는 17위로 올라섰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직원들이 오랜 패배감에서 벗어나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는 것이다. 이 CEO의 이름은 박정희, 그가 이끈 회사의 이름은 대한민국이었다. (텔○○, 2013년 12월 31일 게시)

일베가 말하는 가족 국가는 이들 세대의 시각으로 구성된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이다. 비교 문화학자 스베틀라나 보임(Svetlana Boym)은 과거에 대한 집단적인 그리움의 배경에는 과거와 현재의 부정합이 있다고 진단한다.[4] 바람직한 과거(경험 지평)와 바람직하지 않은 현재(기대 지평)의 불일치에서 노스탤지어가 비롯된다는 것이다. 노력한 만큼 성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무력하기만 한 현실에서 청년들은 활기차고 번영했던 과거의 인물과 국가를 다시 불러온다.

한편, 보임은 노스탤지어가 과거에 대한 부질없는 집착 이상이라는 점을 설명하고자 재건적 노스탤지어(restorative nostalgia)와 성찰적 노스탤지어(reflective nostalgia)로 그 성질을 구분했다. 재건적 노스탤지어는 귀환(nostos)의 의미를 강조한 것으로, 타락 이전의 과거로 복귀하려는 감정과 닿아 있다. 성찰적 노스탤지어는 고통(algia)을 강조한 것으로, 과거에 열망한 꿈을 새로운 방식으로 건설하려는 감정과 연결되어 있다. 성찰적 노스탤지어에서 과거는 마냥 이상적이지 않다.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꿈을 객관적으로 응시하며 현재의 삶에서 회복해 나가길 희망하는 태도다.

일베의 사고방식은 재건적 노스탤지어에 가깝다. 일베가 열망하는 과거는 개발 독재 시절이며, 이를 절대적인 역사와 전통으로 옹호하려 한다. 이들의 노스탤지어는 잃어버린 과거의 찬란한 시대를 되돌리고 싶다는 감정을 부추기며 폐쇄적이고 자폐적인 성격의 공동체를 재건하고자 한다. 재건적 노스탤지어는 과거 자체를 생각하기보다 전통이나 가족 등 절대적 진리를 비호하고자 한다. 내집단 중심의 폐쇄성은 현재의 타락과 고통의 원인을 내가 아닌 타자, 내부가 아닌 외부로 전가한다.

일베는 현실의 고통이 전통을 부정하는 세력에 의해 시작됐고, 신성한 조국을 되찾는 것이 절대적인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편향된 열망은 고국을 빼앗겼다는 음모론을 경유해 타자에 대한 혐오로 나아간다. 일베에서 박정희와 대립되는 인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일베 공간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키워드로, 진보 인사와 국가 보안법, 북한과 연결된다.

노무현-김대중·박원순(진보)-이석기·이정희·통합진보당(종북)-국가보안법 위반(내란 음모)-김일성·김정일·김정은·북한(공산당)이라는 연쇄적 의미망을 통해 노무현으로 대표되는 진보 세력이 종북과 등치된다. 일베는 5.18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규정하고, 노무현과 김대중의 정치 기반인 전라도 출신 인물들을 이중 국적자라고 부른다. 이중 국적자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북한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대한민국의 순수성을 오염시키는 반역자라는 낙인이다.

진보에 대한 일베 청년들의 반감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난다. 그의 죽음은 애도가 아닌 희화화의 대상이며, 노무현이라는 인물로 대표되는 진보에 대한 조롱이다. 노무현은 국민에게 더 좋은 세상을 약속했지만 전례 없는 실업과 저성장의 고통을 안겼고 그 책임을 자살로 회피한 인물이라는 것이 일베식의 진단이다. 진보가 말하는 민주화가 대중에게는 아무것도 담보하지 못하리라는 비관적인 전망이기도 하다. 일베 시각에서 노무현, 나아가 진보 정치는 고통스러운 현재를 만든 주범이면서 책임은 지지 않는 배신자, 단죄의 대상이다.

현실 공간의 일베 청년에게는 긴장이 있다. 기성 질서가 청년에게 요구하는 모습에 동화하지 않으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긴장, 자율과 독립이라는 청년 세대의 발달 과업을 무사히 이루지 못할 것 같다는 긴장이다. 청년들을 책임지지 않는 사회에서 이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실패한 낙원 레트로토피아(retrotopia)를 재건하고자 한다.[5] 일베 청년이 그리는 낙원은 강력한 독재자가 나타나 삶을 구원하는 것이다. 경제 성장이 활발한 국가에서, 자부심에 찬 성실한 모습으로 온전한 직장에 다니는 모습이다. 이상 속의 자신은 그러한데 현실에서는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해야 하니 수치심과 무력감이 남는다. 수치심과 무력감을 극복하기 위해 고통의 원인을 진보 세력의 탓으로 돌리고, 정체성을 보수로 위치시킨다.

이들은 현실 공간에서 일베 유저라는 점을 밝히는 ‘일밍아웃’을 ‘시전’하는 순간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온라인 공간에서 우회적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는 양상이 더 격렬하고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태극기 집회의 노인들과 일베의 청년들은 세대는 다르나 동일한 시대를 영광스러운 과거로 소환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산업화 전후 세대에게 자유와 평등을 외치는 진보 정권의 시대는 혼란스럽고 무질서했던 과거처럼 회피하고 싶은 시국이다. 외환 위기 이후의 저성장 속에서 자란 젊은 세대는 취업난과 무한 경쟁을 진보주의의 실패로 여긴다. 이들은 한국 사회를 위협하는 대상이 진보 세력임을 분명하게 정의하고, 자신들과 분리하기 위한 혐오의 정치 운동을 전개한다.

 

프레임 전쟁


운동은 자신이 누구인지, 대중에게 무엇이 옳은 것인지 말하는 하나의 방식이다.[6] 진보주의 운동은 공정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를, 보수주의 운동은 권위와 국가에의 충성을 미덕으로 강조했다. 혐오의 정치 운동도 마찬가지다. 태극기 노인과 일베 청년은 옳고 그름의 기준인 도덕을 활용해, 차별과 혐오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들의 운동이 비이성적인 감정의 분출이나 일시적인 패닉이었다면 금방 소멸됐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도덕이라는 가치를 동원해 나와 적을 가르는 프레임을 만들고, 운동에 방향성을 부여한다.[7] 어떤 운동도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 가치와 원리를 동원한 프레임을 구성하지 못하면 확산되기 어렵다. 이들은 다수의 침묵하는 대중에게 사고방식을 새로이 하기를, 감정을 재구성하고 분노하기를 요구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George Lakoff)는 정치 운동에서 활용하는 도덕적 프레임에 두 가지 유형이 있다고 설명한다.[8] 엄한 아버지(strict father) 모형에서는 복종, 위계, 절제, 순수성을 중요한 도덕적 가치로 삼는다. 자애로운 부모(nurturant parent) 모형에서는 공정성과 배려, 자유와 같은 가치가 도덕적인 것으로 자리를 잡는다. 전통과 안정을 중시하는 보수에서는 전자의 가치를,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중시하는 진보에서는 후자의 도덕을 활용해 운동의 프레임을 구성한다.[8]

레이코프의 설명에 따르면 이민자에 대해서도 보수와 진보의 입장이 다르다. 보수는 불법 이민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이민자들이 선량한 다수 국민의 일자리와 세금을 빼앗는 약탈자라는 도덕적 판단을 제기한다. 반대로 진보는 이민자를 억압하는 탐욕스러운 고용주를 부각한다. 이들은 이민자를 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피해자이자 보호의 대상으로 봐야 한다는 도덕적 판단을 제기한다. 프레임은 사람들의 심층에 있는 서로 다른 도덕 감정을 건드려서 부정의한 대상에 대한 분노와 처벌을 요구하는 운동을 만들게 된다.

한국 사회는 분단 이후 급속한 산업화를 위해 엄한 아버지 모델로 대중을 지도하고 통합했다. 이런 시대를 살았던 노인에게 권위와 충성심은 어지러운 세상에 질서를 부여해 주는 가치였고, 처벌은 질서와 규율, 권위에 대한 존경을 가르치려면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규율의 결여와 방종은 가난, 낙태, 이혼 등과 같은 문제를 일으킨다고 여겼다.[9]

이와 같은 프레임을 잘 활용한 집단이 한국의 종교 집단이다. 기독교 우파는 엄한 아버지 모형을 따라 기독교의 가치가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한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인 동시에 반공 기지 역할을 했다. 기독교 우파는 정권의 위기마다 국가주의와 반공을 상징하는 태극기와 성조기를 내세우며 구국 기도회, 시국 집회, 친미 반북 시위 등으로 대중 단합을 이끌었다.

또 한국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가부장제 가치관을 활용해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가장이나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에 가는 딸, 중동으로 떠난 남편 대신 가족을 보살피고 인고하는 아내를 ‘산업 일꾼’이나 ‘책임과 헌신’이라는 말로 이상화했다. 반면 낙태, 동성애는 그동안 선량한 자신들이 지켜 왔던 신념을 무너뜨리는 악으로 간주하고, 구성원들의 긴밀한 단합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한국 사회의 다원화로 엄격한 아버지의 도덕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사건은 이들 집단에게 자신들이 믿었던 보수의 가치가 전복되는 위기이자 충격이었다.

위기의 순간마다 유사한 프레임이 가동된다. 태극기 집회에는 노인 세대는 물론 기독교 우파, 청년 극우 활동가가 가세해 한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종북 세력인 진보뿐만 아니라 성 소수자와 무슬림, 난민 등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부의 적인 북한에서 내부의 적들로 프레임을 전환하고, 이들이 종북 좌파만큼 위험한 대상이라는 의미로 성 소수자에게 종북 게이라는 말을 붙여 혐오 감정을 증폭시킨다. 쇠락해 가는 우리 집단을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더 많은 혐오의 대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극우의 프레임은 세대에 따라 재편되기도 한다. 일베는 태극기 노인과 달리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강조하는 자애로운 부모 모형에 더 익숙한 세대다. 그래서 일베는 충성심(loyalty)이라는 전통 보수의 도덕적 가치를 공정성(fairness)이라는 가치로 확장한다. 일베의 주장에 의하면 취업 준비를 위한 스펙을 쌓아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남성만 군대에 가야 하는 것은 역차별이다. 군 가산점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여성들의 주장은 남성에게만 양보와 배려를 강요하는 불공정한 태도다. 공정성 프레임을 통해 본 여성은 양성 평등을 외치지만 정작 결혼 상대를 고를 때는 집안과 능력을 따지는 속물적 존재(김치녀)다. 아래의 게시 글은 여성에 대한 일베 남성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일베는 여성 비하합니다. 그런데 일반 여성이 아닌 김치녀를 비판합니다. 일베가 말하는 김치녀는 양성 평등을 외치면서 더치페이를 권하는 남자를 쪼잔한 사람 취급하며, 기념일에 자신은 십자수를 주지만 남자는 명품 가방을 사주기를 바라며, 자기 연봉은 2000만 원이지만 남편은 7000만 원 이상 벌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결혼할 때 남자는 32평짜리 전셋집을 마련해야 하지만, 자신은 2000만 원 혼수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여자입니다. 일베는 이런 여자를 김치녀라 부릅니다.
(큰○○, 2013년 5월 29일 게시)

일베 청년들은 자신이 취업을 포기한 이유를 무능한 진보 세력의 탓으로 돌리고, 결혼과 출산 포기는 남성의 노력에 무임승차하려는 정의롭지 못한 여성들의 탓으로 돌린다. 전통적인 진보 세력은 민주화 운동을 통해 한자리씩 차지한 꼰대일 뿐이고, 여성은 남성의 노력에 무임승차해 불공정하게 이득을 챙기는 김치녀다.

남성에게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여성에 대한 갈망은 상대적으로 권리 의식과 자기주장이 확실한 교육받은 동 세대 여성들과의 상호 작용에서 산산이 부서져 나간다. 현실 어디에도 그런 여성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드세고 이기적이며, 성적으로 문란하며, 명품 소비에 몰두하고 남자의 경제력만 따지는 허영심 많은 한국 여성 때문에 한국 남성들이 연애, 결혼 시장에서 배제된다고 인식한다.

도덕은 어떤 사건이나 대상에 대한 옳음과 그름의 직관적 판단 기준이다. 철학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도덕 감정을 정의하며 옳은 것에 대해서는 유쾌한 감정이, 그른 것에는 불쾌한 감정이 생겨난다고 했다. 옳음과 그름의 대립 쌍은 사랑과 미움, 자부심과 소심, 공정성과 부정, 배려와 피해, 충성심과 배신, 순수와 오염 등으로 변형된다.[10] 도덕 감정에 따라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를 불쾌에서 유쾌로 전환하려는 운동을 만들어 낸다.

일베의 프레임에서 선한 가치는 충성심과 공정성, 악한 가치는 타락과 배려다. 충성심과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통해 지켜야 하는 것은 국가, 민족, 전통, 강력한 지도자와 남성 등이다. 남성의 노력에 무임승차하는 여성, 인권을 내세우며 배려를 요구하는 동성애자 등은 타락이라는 악한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

문제는 일베의 프레임에 활용된 도덕이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왜곡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공정성과 배려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정성과 배려는 기본적인 정치의 운영 원리이자 사회나 집단으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한 덕목이다. 그러나 일베는 공정성과 배려를 대립되는 개념으로 독해하고, 공정성은 사회 전체의 형평성을 고려하지 않는 개인 대 개인의 교환 관계로만 상정한다. 배려 없는 공정성은 각기 다른 자원과 능력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에서 약한 사람이 도태될 수밖에 없는 기득권의 구조를 강화한다.

혐오의 정치 운동은 자신들이 구성한 프레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도덕적으로 오염된 적을 분류하고자 한다. 하지만 극우 보수가 활용하는 도덕 프레임 안에는 부정합이 있다. 배려 없는 공정성과 강자에 대한 충성심은 기득권에 동조하고 타자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한다. 문제는 이와 같은 왜곡된 프레임이 많은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노인들은 가짜 뉴스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청년들은 일베를 통해 여성관을 학습하며 사회 전반으로 혐오를 재생산한다.
[1]
윤경로, 〈분단 70년, 한국 기독교의 권력 유착 사례와 그 성격〉, 《한국 기독교와 역사》, 2016, 27-65쪽.
[2]
정근식, 〈한국에서의 사회적 기억 연구의 궤적: 다중적 이행과 지구사적 맥락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2013, 347-394쪽.
[4]
Svetlana Boym, 《The Future of Nostalgia》, Basic Books, 2001.
[5]
지그문트 바우만(정일준 譯), 《레트로토피아》, 아르떼, 2018.
[6]
제프 굿윈·제임스 M. 재스퍼·프란체스카 폴레타(박형신·이진희 譯), 〈왜 감정이 중요한가〉, 《열정적 정치》, 한울아카데미, 2012, 11-78쪽.
[7]
David A. Snow, E. Burke Rochford Jr., Steven K. Worden and Robert D. Benford, 〈Frame Alignment Processes, Micromobilization, and Movement Participation〉,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1986, pp. 464-481.
[8]
조지 레이코프·로크리지 연구소(나익주 譯), 《프레임 전쟁》, 창비, 2007.
[9]
Jonathan Haidt, Jesse Graham and Craig Joseph, 〈Above and Below Left–Right: Ideological Narratives and Moral Foundations〉, 《Psychological Inquiry》, 2009, pp. 110-119.
[10]
알린 스타인(박형신·이진희 譯), 〈수치심을 느낀 사람들의 복수〉, 《열정적 정치》, 2012, 175-200쪽.
[11]
데이비드 흄(김성숙 譯), 《인간이란 무엇인가: 오성 정념 인간 본성론》, 동서문화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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