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휴먼 시대의 노화
완결

포스트휴먼 시대의 노화

육체를 디자인하는 시대


오늘날 의학 기술은 소설과 영화의 상상력을 따라잡고 있다. 1997년 개봉한 영화 〈페이스 오프〉에 등장하는 안면 이식 수술은 의학의 발달로 이미 현실이 되었다. 나이 든 어머니의 자궁을 난임인 딸에게 이식하거나, 한 유명 여배우처럼 유방암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멀쩡한 가슴을 절제하는 일도 가능하다. 청각 장애가 있는 레즈비언 부부가 아이와의 친밀한 의사소통을 위해 5대째 청각 장애를 가진 사람의 정자를 제공받아 인공 수정으로 자신들의 소원을 이룬 사례도 있다.

고통을 줄이고 병을 치료하는 데 중점을 두었던 의학 기술은 이제 치료를 넘어 예방이나 신체 기능의 향상을 위한 의료 행위를 발전시키는 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간의 몸은 더 이상 뼈와 살만이 아닌 실리콘, 인공 심장 판막, 인공 관절 등 다양한 이물질로 구성된다. 현대의 의학 기술은 이미 노화를 방지하거나 지연시킬 단서를 발견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분투한다. 이처럼 인간의 ‘향상’을 위한 의학 기술의 발전은 질병, 장애, 노화, 죽음에 대한 인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향상에 대한 욕구가 충족될수록, 우리는 기존에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새로운 윤리적 문제들과 마주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얼굴을 이식받아도 계속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유방암에 걸릴 가능성 때문에 건강한 가슴을 절제하는 것이 정당화된다면, 여자 육상 선수가 기록을 높이기 위해 가슴을 제거하는 경우는 어떤가? 부모가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태어날 아이를 디자인하는 것을 허용할 수 있는가? 이런 행위가 자신의 취향, 교육관, 종교관에 맞춰 아이를 양육하는 것과 본질적인 차이를 갖는다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기술의 발전은 반드시 윤리적 논란을 동반한다. 이미 현실을 덮친 변화의 파도가 일상으로 밀려오기 전에, 우리는 각자의 해답을 마련해야 한다.

 

의사인가, 엔지니어인가?


“네 몸이 망가지면 난 고칠 수 없어.” 최근 개봉한 영화 〈알리타: 배틀 엔젤〉에서 의사가 사이보그인 주인공에게 한 대사다. 의사가 사이보그화한 인간의 몸을 치료할 수 없다면, 미래 사회에서 의사의 임무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또 의사의 자격은 어디까지 확대되어야 하는가? 가까운 미래에 의료와 IT 기술이 융합하면서 디지털 의사가 나타나거나, 의사 면허가 없는 엔지니어와 같은 직군이 의료인 자격을 부여받을 가능성도 있다. 의료 행위의 대상인 신체, 그 주체인 의사, 의료 행위가 이뤄지는 공간인 병원 모두 과학 기술의 발달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몸은 생물학적 몸을 가리킨다. 지금까지 의학 연구와 시술의 대상은 생물학적 몸이었고, 의사의 역할 역시 육체의 고통을 완화하고 병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인간의 몸은 점점 사이보그와 같이 변하고 있다. 이미 미국 인구의 약 10퍼센트는 전자 심박 조절기, 인공 관절, 체내 이식형 약물 전달 장치, 이식형 각막 렌즈, 인공 피부를 가진 기술적 의미의 사이보그로 추정된다.[1] 인류가 인공 지능, 로봇, 인지 과학, 바이오 공학 등 기술이 신체 기능을 원래대로 되돌리거나 보완하는 단계를 넘어 인간보다 나은 인간인 포스트휴먼으로 ‘향상’하리란 추측도 나온다.

일상에서 향상은 대개 긍정적인 의미로 활용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건강 상태, 자아실현 정도, 삶의 질, 인간관계가 과거보다 개선되었음을 뜻하고,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정치 상황과 정책, 경제 수준이 나아졌을 때 사용한다. 이제 기술의 발달로 인체의 형태, 다양한 활동 분야에서의 신체적·정신적 기능 또한 향상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일상에서와 달리, 향상이 의료 문제에 개입되는 경우는 많은 우려가 발생한다. 다수의 이론가들이 의학 기술과 자본의 결합 아래, 인간 향상 기술이 오용되는 것을 걱정한다. 향상의 정도가 극단적이지 않다는 점과 그것이 개인의 자율적인 선택이라는 점을 전제로 해도 이러한 우려를 불식하기에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인류 역사상 인간은 더 나은 상태로 변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도구를 사용해 왔다. 생존을 위해, 기호에 맞게 주변 환경과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고 향상시키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향상을 이루기 위한 수단과 방법은 무수히 존재하고, 활용할 수 있는 도구에는 인간의 몸도 포함된다. 프랑스의 종교 사회학자 마르셀 모스(Marcel Mauss)는 인간의 몸은 “첫 번째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도구”라고 말했다. 인간은 이미 자신의 가장 일차적인 도구를 연마하기 위해 신체적 형태나 기능의 향상을 위한 의료적인 개입, 약물 복용과 수술 등을 용인해 왔다.

그렇다면 향상을 이루는 과정에서 윤리적인 문제가 대두되는 경우는 언제일까? 치료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의료적 처치가 이루어질 때다. 고통이나 치명적 위험을 제거하는 목적이 아닌, 몸의 형태나 기능의 향상을 목적으로 수술을 받거나 약물을 복용할 때 비판이 제기되곤 한다. 향상을 이루는 자연적이고 관습적인 방법인 운동과 정신 수련, 교육 등의 수단이 아닌, 비자연적이고 낯선 수단을 동원할 경우 윤리적 재고를 요구하는 것이다. 주의력이 산만한 아이를 꾸중과 체벌로 교화하는 대신 리탈린을 복용하게 하거나, 종교적 믿음이나 생활 패턴의 개선으로 우울증을 이겨 내는 대신 병원에서 프로작을 처방받는 등 이미 보편화된 향상 약물의 처방에조차 여전히 이견이 존재하는 이유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


향상은 치료의 목적이 아닌 의학적 개입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하느냐에 따라 두 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완만한 향상과 급진적 향상이다. 완만한 향상은 이미 인간에게 존재하는 특성을 점진적으로 강화하고자 하는 반면, 급진적 향상은 현재 인간 종의 일반적인 특성과 한계를 극복하려 한다. 다시 말해, 급진적 향상은 “여태까지 우리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관습적 수단으로는 불가능했던, 일반적인 경계를 넘어서는 정도”[2]를 의미한다.

완만한 향상은 인간 종 내에서의 변화를, 급진적 향상은 인간 종을 넘어서 현 상태의 형태나 능력보다 더 나은 상태로의 변화를 추구한다. 전자를 올림픽에 참가한 육상 선수가 현재 최고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선수보다 얼마나 더 빨리 뛸 수 있는가의 문제라고 한다면, 후자는 인간이 사이보그와 같은 새로운 형태와 기존에 없던 능력을 획득하는가의 문제다. 독일의 철학자 루드비히 집(Ludwig siep)은 “과거와 비교해 오늘날 우리가 상상하는 향상된 인간의 모습은 현격히 다르다. 사람들은 인간에게서 인간이 아닌 존재나 기계의 능력을 추구한다. 그동안 지향했던, 인간의 신체 기능이 강화되는 것과는 다르다”고 지적한다.[3]

향상에 관한 논의에서 다뤄지는 대표적인 시술로는 성형 수술, 운동 능력이나 기록을 개선하기 위한 도핑, 집중력 향상을 위해 쓰이는 리탈린, 성적 기능을 보조하는 비아그라, 우울한 기분을 상쇄하는 프로작, 노화로 인한 외모적·정신적 기능의 퇴화 속도를 늦추거나 젊음을 되찾기 위한 안티에이징 시술 등이 있다. 이 중 도핑은 불법으로 취급되고, 성형 수술과 안티에이징 시술을 받는 이들은 선천적 미인과 비교되며 비난받는다. 향상 약물의 처방에 관해서도 찬반이 극명히 갈린다. 세 경우 모두 인위적이고 급작스러운 변화보다 자연스럽고 점진적인 개선, 혹은 순응을 선호한다. 향상에 제기되는 윤리적 질문들은 아직 완만한 향상의 영역에서 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다양한 의료 시술들은 결국 불가능의 영역을 개척할 것이다. 미래에 실현 가능할 만한 몇몇 시나리오에는 인간 수명의 연장도 포함된다. 이미 2001년 《네이처(Nature)》에 유전적인 개입과 칼로리 섭취량 제한으로 쥐의 수명을 70퍼센트나 증가시켰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었다.[4] 우울증을 치료하거나,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약물을 복용하는 것을 넘어, 인간의 공격성이나 폭력성을 감소시키는 것도 가능해질 것이다. 쥐와 여우 집단을 대상으로 한 동물 실험에서 높은 공격성과 낮은 공격성을 띠는 별도의 유전자 풀을 배양하는 데 성공한 것은 2000년 이전의 일이다.[5] 미국의 뇌 과학자 테오도르 버저(Theodore Berger)는 알츠하이머 등 기억력 손상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위해 손상된 해마에 마이크로 칩을 삽입하는 뇌 임플란트(brain implant)가 2023년까지 실현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6]

 

치료와 향상,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향상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의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건강한 사람의 몸에 개입하고, 그 깊이를 심화시킨다. 건강한 사람의 몸에 의학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다양한 측면에서 논란을 야기한다. 향상의 목적이 무엇인가, 수단과 방법이 옳은가, 인간 본성을 위배하는가 등의 문제가 그것이다.

먼저 향상의 목적에 대해서는 동일한 의료적 개입임에도 그 목적이 치료인가 향상인가에 따라 윤리적인 논란의 유무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비아그라가 고혈압과 협심증을 치료할 목적으로 사용될 때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성기능 향상을 위해 복용할 경우는 찬반의 대립이 생긴다. 마찬가지로 에리스로포에틴(erythropoietin)은 화학 요법 후 생긴 빈혈을 치료하기 위해 사용되지만, 자전거 경주에서 동일한 약물을 투여하는 것은 금지된다.[7] 이처럼 의료 행위의 목적은 윤리적 판단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의학적 개입의 목적이 치료를 넘어 향상을 향할 경우, 바로 그 점이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 행위를 비판하는 이론가들은 치료와 향상을 구분하는 데 집중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일반적으로 치료는 필요나 급박성을 담보하고, 향상은 바람이나 욕구와 연관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필요와 바람의 경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를 당한 경우 의학의 도움을 받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교통사고는 의학적 도움을 가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 것이라는 필요성과 급박성을 동시에 충족한다. 하지만 누군가 지방 흡입술을 원한다면, 반드시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나 지금 바로 해야 한다는 급박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당사자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일일 수 있다. 치료와 향상, 필요와 바람의 구분선은 의학의 발전 정도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흐려질 수 있다.

다음은 수단과 방법의 문제다. 향상을 위한 방법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자연스러움’이 강력한 잣대가 된다. 다수의 현대인이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혹은 집중력의 향상을 위해 습관적으로 에너지 드링크, 콜라, 커피, 술을 즐겨 마시고 담배를 피운다. 이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향상의 수단에는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약물 복용으로 동일한 목적을 이루려고 하면 반대하거나 두려워한다. 의학 기술의 발달은 향상의 수단과 방법을 대폭 늘렸고, 이는 대체로 기존의 것보다 효과나 효율성이 월등한데도 말이다. 일례로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는 프로그래머는 흐트러진 집중력을 회복하기 위해 열심히 운동과 명상을 하고 커피를 마실 수도 있지만, 리탈린을 복용함으로써 집중력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자연스러움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예는 일상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운동으로 좋은 몸매를 갖는 것은 지방 흡입술을 받는 것보다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때로는 옳다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음식이나 화장품도 자연의 재료, 자연적인 방법에 의해 생산된 상품이 선호된다. 대중은 자연적인 방법, 지금까지 해오던 관습적인 방법을 더 쉽게 수용하고 의학 기술이라는 새로운 수단에는 어색함과 혐오감을 느낀다. 성형 미인보다 자연 미인을, 성전환 수술을 통해 남성이 된 경우보다 선천적인 남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숭배는 안락사와 같이 의학의 발달로 가능해진 시술이 반대에 부딪히거나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인간이 자연에 개입할 가능성이 커질수록 자연의 개념은 불명확해진다. 과학 기술의 발달은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의 도움으로 생명을 유지하는 환자는 분명 인위적인 도구를 활용해 비(非)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연명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이유로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한다면, 이 또한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인공호흡기가 자연스러운 의료 시술의 일부로 정착하기도 했다. 《인간보다 나은 인간》의 저자 앨런 뷰캐넌(Allen Buchanan)의 말처럼 향상을 위한 의료적 개입에 대해 “그냥 안 돼, 이유 없이 안 돼”라고 말하기엔 이미 늦었다.

 

기술의 발전과 디지털 고려장


“육체는 버리지만 뇌는 살아 있습니다. 늦기 전에 부모님께 영생을 선물하세요.”
“뇌세포의 시냅스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전환! - 99% 싱크로율”
뉴스에선 두뇌 디지털화 반대 시위 소식을 알려 주고 있었다.

김동식의 소설집 《회색 인간》 중 〈디지털 고려장〉의 도입부다. 소설은 항노화 기술의 발달을 넘어 노쇠한 육체를 버리고 정신적 영생을 누리는 미래를 그리고 있다. 두뇌 디지털화를 통해 노인은 가상 세계에서 건강한 신체를 얻고,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노년층의 생물학적 유지비는 절약된다. 이런 모습의 미래는 어떤가? 디지털 고려장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까?

노화는 세포의 재생 능력이 사라져 정신적·육체적 능력이 저하된다는 점에서 향상과 대척점에 있는 퇴행이다. 노화와 죽음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인간 향상의 가장 궁극적인 욕구일지 모른다. 노화를 나이가 들면 당연히 수반되는 생물학적인 현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의학이 이를 보강할 수 없을 때에만 해당한다. 그렇다면 노화를 막기 위해 의학 기술의 힘을 빌린다면 이는 치료의 목적인가, 향상의 목적인가? 현대 의학의 발달은 이미 이 질문에 확답을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발전했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전환할 당시 약 48세였던 인간의 기대 수명은 현재 여성은 85세, 남성은 79세에 이른다. 2010년 기준 우리나라 인구의 평균 수명은 80세에 육박하고,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전체의 11퍼센트를 차지한다.[8] 현세대는 늙어 가는 것을 숙명으로 알고 그에 순응하며 노년을 보내 왔던 앞선 세대와 달리, 늙어 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을 겪고 있다. 주름이 연륜의 상징이 아닌 자기 관리의 부재로 보이는 시대에 노화와 관련한 향상 기술에 대한 관심은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노화를 거부하며 각종 의료 사업을 부흥시킬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절대 다수가 노화를 당연한 삶의 과정으로 간주하고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시술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수명이 늘어나면서 노년기 역시 과거보다 배 이상 연장되었다. 노인으로 보내야 할 세월이 길어지면서 적응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노인의 성생활이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60세인 시대라면, 왕성한 성적 활동이 점점 줄어드는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가 상대적으로 쉬울 것이다. 늙어 가는 몸을 자연적인 것으로 여기며 5~6년 정도 성적 쾌락을 포기하면 된다. 하지만 100세 시대를 논하는 현대에 최소 30~40년 동안 성적 쾌락을 포기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런 문제는 성생활뿐 아니라 늙어 가는 우리 모두의 직장, 경제, 여가 생활 전반에 적용되며, 삶의 질과 직결된다.

섹스는 친밀감이나 성적 욕망을 위한 행위다. 소화력이 떨어지면 음식에 대한 욕구가 감소하듯, 늙어 감에 따라 성적 욕망이 어느 정도 줄어들 수는 있겠지만 아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아그라와 같은 향상 약물이 노년의 섹스 도움이 된다면 반대할 이유가 무엇인가? 약물을 활용한 섹스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늙어서도 섹스를 해야 한다는 강박을 심어 줄 수 있다는 이유가 반대의 논거로 충분한지 의심스럽다. 50년 동안 성적 쾌락을 즐기고, 나머지 40년을 수도자처럼 살 수는 없다. 흰머리를 염색하는 사람을 한심하게 여기거나, 젊음에 대한 강박의 희생양으로 보는 사람은 없듯 노년의 욕망을 충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를 이어 가야 할 것이다.

 

향상은 불평등을 강화하는가?


의료화로 인한 불평등은 인간 향상 기술에 제기되는 문제 중 가장 중요한 고민이다. 생명 의료 기술을 활용한 향상에 반론을 제기하는 이론가들은 향상을 도입하는 것이 현존하는 불평등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한다. 뷰캐넌은 모두가 향상의 혜택을 누릴 수 없다고 해서 어느 누구도 향상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정당한가에 의문을 던진다. 반대자들의 논리대로라면 누구나 평등한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면 대학을 없애야 하고, 의료 서비스는 모두 평준화해야 할 것이다. 향상에 대한 접근 가능성이 가난한 사람들에 비해 부유한 사람들에게 더 열려 있다는 점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향상의 도입 자체를 막을 근거로 작용할 수는 없다.

뷰캐넌은 이 문제에 대해 색다른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부자들을 자발적인 기니피그 즉, 위험을 감수하는 선구-자원봉사자(volunteer risk-pioneers)로 비유하며 이렇게 말했다. “부자들은 높은 가격을 지불하고 혁신의 1세대 버전을 산다. 그 제품들은 종종 결함이 있고, 가끔은 위험하다. 나중에 오류가 제거되고 안전 문제가 해결되면, 우리는 개선된 버전을 낮은 가격에 산다. 그러한 거래는 어떠한가? 만약 당신이 생명 의료 향상이 나쁜 결과를 가져올 것을 걱정한다면, 선구-자원봉사자가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실험이 엉망이 된다면 그 폐해는 그들에게 한정될 것이다. 부자들은 우리보다 앞서 이득을 얻지만, 더한 위험과 비용을 감수한다.”[9]

부유한 계층은 새로운 혁신을 누릴 가능성이 훨씬 크다. 하지만 부자들만 생명 의료 향상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반대하는 것은 오히려 분배적 부정의의 문제를 악화할 수 있다. 향상은 현존하는 불평등을 완화시킬 단서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제 사정으로 매일 아르바이트를 해야 하는 학생과 온종일 도서관에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학생이 있다고 하자. 인지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약물은 둘 사이의 격차 즉, 공부할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의 부족으로 인한 격차를 완화시킬 수 있다. 이에 대해 뷰캐넌은 “의학적인 혁신은 장애, 그리고 장애가 낳은 불평등을 제거하거나 개선할 수 있다.”[10]고 서술한다.

향상 기술은 동안과 같은 외모적 우월성의 격차를 줄이는 데도 활용될 수 있다. 노화 현상은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지연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많은 부분이 유전적 요인에 근거한다. 한국 사회는 미의 문제에 있어 후천적 요인보다 선천적 요인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동안을 권하는 사회에서 선천적 동안이 우위를 차지하는 외모적 불평등 완화에 의학이 개입하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향상에는 ‘사회적 로또’, ‘선천적 로또’에 대한 저항을 지지하는 부분이 분명 존재한다.

 

늙음과 젊음, 향상에 대한 편견


늙음은 출생일과 사망일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모습은 다양하다. 그러나 우리는 늙음을 두 가지 측면에서만 바라본다. 한편으로는 늙음을 연륜이나 평온함, 지혜처럼 긍정적인 이미지와 연관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결핍, 비정상, 불안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늙음의 스펙트럼은 매우 넓고 다양하지만 오늘날 빠르게 늙어 가는 사회에서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부각되곤 한다.

노년만큼이나 젊음의 스펙트럼 역시 그 폭과 깊이가 다양하지만, 지금의 노화 담론에서 젊음의 의미는 단지 아름다움, 탄력 있는 몸의 의미로 축소된다. 누군가가 젊어지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이는 단지 다시 예뻐지거나 건강해지고 싶다는 의미와 동일시된다. 늙음만큼이나 젊음도 억울한 상황이다. ‘성공적인 노화’의 의미 또한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두 가지 측면을 내포한다. 노화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긍정적인 역할, 결국에는 의료 산업화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노화마저도 성공적으로 이뤄 낼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부정적인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다. 노화에 대한 저항을 포함한 인간의 향상 욕구는 양 극단 사이에서 표류하면서 다양한 오해를 야기하고 있다.

향상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중 하나는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적 개입이 전지전능하다고 여기고 그 결과를 과대평가하는 것이다. 의료적 개입은 향상을 위한 다양한 수단과 방법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의 육체가 삶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향상을 위한 목적으로 개발된 시술들이 우리의 몸을 완벽하게 만들더라도 우리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주변 환경까지 변화시킬 수는 없다. 인간의 생은 생물학적 요소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가 처한 주변 환경의 영향력도 간과할 수 없다.

섣부른 오해로 향상이 원래 추구하려던 목적이나 특성을 잘못 인식하고 결과에 대해 무조건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일, 반대로 허황된 기대를 갖게 하는 일은 지양해야 한다. 눈부시게 발전하는 의학 기술에 대한 막연한 희망과 기대도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마찬가지로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나 선입견 때문에 우리 삶에 유용할 수 있는 기술을 배제하는 것 역시 옳다고 보기 어렵다. 에틸에테르(ethyl ether)라는 새로운 약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인간이 수백 년간 마취를 하지 못한 채 수술대에 올라야 했음을 상기한다면 해답은 보다 명확해질 것이다.
[1]
노대원, 〈한국 문학의 포스트휴먼적 상상력 - 2000년대 이후 사이언스 픽션 단편 소설을 중심으로〉, 《비교한국학》, 23(2), 2015, 339쪽.
[2]
Bernward Gesang, 《Perfektionierung des Menschen》, Walter de Gruyter, 2009, p. 222.
[3]
Ludwig siep, 〈Die biotechnische Neuerfindung des Menschen〉, 《Nobody is perfect》, Transcript, 2006, p. 27.
[4]
Michael Fuchs, 〈Biomedizin als Jungbrunnen? Zur ethischen Debatte ueber kuenftige Optioen der Verlangsamung des Alterns〉, 《Zeitschrift für medizinische Ethik》, Vol. 52, 2006, p. 37.
[5]
Le Roy Walters, Julie Gage Palmer, 《The Ethics of Human Gene Therapy》,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p. 124.
[7]
Simon Hornbergs-schwetzel, 〈Therapie und Enhancement. Der Versuch einer wert vollen Unterscheidung〉, 《Jahrbuch für Wissenschaft und Ethik》, Walter de Gruyter, 2008, p. 200.
[8]
김진경, 〈고령화 사회의 노인 치료를 위한 윤리적 토대 구축〉, 《한국의료윤리학회지》, 15(3), 2012, 306쪽.
[9]
앨런 뷰캐넌(심지원·박창용 譯), 《인간보다 나은 인간》, 로도스, 2015, 129쪽.
[10]
앨런 뷰캐넌(심지원·박창용 譯), 《인간보다 나은 인간》, 로도스, 2015, 1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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