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갈등의 구조
1화

프롤로그; 왜 금융 위기 이후의 미·중 관계인가?

최근 국제 관계에서 가장 큰 관심사는 미국과 중국 두 나라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은 중국을 미국의 가치와 이익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규정했다. 중국의 위협에 강력하고 공세적인 대외 전략으로 대응하겠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실제로 중국에 대한 군사적 압박이 강화됐고, 남중국해에서 긴장이 고조됐다. 2018년부터 극한 대립 양상으로 전개돼 온 양국의 무역 전쟁은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서 나타난 변화는 미국의 정권 교체나 동아시아 지역의 단기 정세 변화만으로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미국이 중국을 강하게 압박하는 최근의 현상은 과거 동아시아 전략과 단절하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재의 미·중 갈등의 핵심 쟁점, 미국이 사활을 걸고 지키려는 이익과 미국의 전략 기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7~2008년 금융 위기에 주목해야 한다.

2007년 서브프라임(subprime) 모기지 사태로 시작된 금융 위기는 순식간에 실물 경제로 전염됐고, 2008년 글로벌 경제 위기로 확대됐다. 미국의 정책 결정자들이 1930년대의 대공황에 버금가는 최악의 사태라고 판단할 정도로 금융 위기는 심각했다. 헤게모니 국가 미국에서 금융 위기가 발생하자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1] 이로 인해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기도 했다. 미국의 쇠퇴를 점치는 이들은 미국식 자본주의 모델이 정당성을 상실했으며, 기축통화인 달러의 지위마저 위협받을 것이라고 비관했다.

하지만 금융 위기를 단순히 미국의 쇠퇴로 해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금융 위기 이후 안전 자산 선호(flight to quality) 현상 속에서 달러가 강세로 반전되는 역설이 나타났고, 미국 경제의 경착륙 징후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양적 완화 정책과 적자 재정 정책 등 이례적인 정책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위기에 대응했고, 이를 위한 국제적인 공조도 효과적으로 조직했다.

그렇다고 미국의 높은 기술 수준이나 제도적 효율성과 같은 구조적 우위를 근거로 쇠퇴론을 반박하는 논의들을 지지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시각 역시 금융 위기의 함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미국 경제가 규모나 기술 수준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장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 경제의 취약성이나 헤게모니 쇠퇴의 징후를 설명할 필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금융 위기의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금융 위기가 발생한 과정과 이후 미국의 대응 전략에서 드러난 미국의 우위와 취약성 모두에 주목해야 한다. 이를 위해 1980년대 이후 나타난 미국 헤게모니 변화의 연장선에서 금융 위기가 갖는 함의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를 의미하는 이중 적자(twin deficit)와 금융 불안정성의 심화 등 미국 헤게모니 위기의 근거로 제시되는 쟁점들은 1980~1990년대에 통화·금융 권력을 토대로 미국 헤게모니가 재편되며 등장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헤게모니 위기에 직면했던 미국은 1980~1990년대에 헤게모니 부활에 성공했다. 부활의 토대가 된 것은 기축통화 발권력과 금융에서의 우위, 즉 통화·금융 권력이었다. 통화·금융 권력으로 헤게모니의 쇠퇴를 역전시키려는 미국의 전략은 이중 적자의 누적과 자본 수입(capital import)의 증가, 금융 불안정성의 심화로 귀결되는 수밖에 없다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만성적으로 이중 적자가 누적되는 상황에서도 미국 금융 시장에는 외국 자본이 계속 유입됐다. 이를 통해 미국은 긴축 조치 같은 국내 경제의 조정을 회피하고 경기를 부양할 수 있었다. 글로벌 불균형 구조는 미국이 통화·금융에서 갖는 우위를 잘 보여 줬지만, 동시에 금융 불안정성과 미국 경제의 대외적 취약성이 더 커졌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금융 위기는 이와 같은 모순이 응축돼 폭발한 사건으로, 미국 헤게모니의 변화에서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금융 위기는 미국 헤게모니의 쇄신을 가능하게 했던 금융 세계화의 한계를 드러냈다. 과도한 대외 부채가 누적된 상황에서 잉여 달러 환류 메커니즘이 교란되거나 미국이 달러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경우 미국 헤게모니의 핵심인 통화·금융 권력이 소멸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미국은 통화·금융 권력의 산물인 동시에 금융 위기를 야기한 취약점이었던 이중 적자와 글로벌 불균형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조정하는 것을 국가 안보에 직결되는 과제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달러 발권력을 유지하고 금융 세계화를 지속해야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세계 전략에서 동아시아 지역이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이 지점에서다. 금융 위기 이후 집권한 오바마 행정부는 미국을 태평양 국가로 규정하고, 아시아-태평양을 최우선시하는 새로운 세계 전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의 세계 전략 전환은 2011년 아시아-태평양 재균형(rebalancing) 전략으로 공식화됐다. 그 결과 경제, 군사·안보, 외교 등 대외 전략의 전 영역에서 광범위하고 실제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미국 세계 전략의 핵심은 글로벌 불균형의 조정을 통해 통화·금융 권력을 유지하고, 이를 위한 지정학적 환경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은 이런 목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2000년대 이후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으로 상품을 수출해 축적한 수출 달러(exports dollar)를 다시 미국의 금융 시장에 투자함으로써 미국이 통화·금융 권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금융 위기 해결을 위한 국제 공조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 또한 미국 국채 최대 보유국인 중국과 일본이었다.

기축통화 달러는 수익성은 낮지만 가장 안전한 자산이다. 동아시아 국가들은 다량의 달러 자산을 축적했고, 달러화가 안정적인 가치를 유지하기를 바라게 됐다. 또 기축통화 발행국 미국의 구매력으로 인해 수출 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 국가들은 미국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막대한 이중 적자의 누적에도 불구하고 저축과 투자 없이 외부로부터 유입된 자본으로 생산 이상의 소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금융 위기 이후 동아시아 전략의 전환은 단기적인 외교 정책이나 특정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지역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체계 수준의 전략적 환경 변화를 반영하는 근본적인 전환이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의 부분적인 조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금융 위기 이후 변화한 세계 전략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미국에 가장 중요한 고려 대상은 동아시아, 특히 중국이다.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지역 경제가 세계 경제 성장을 주도한 2000년대 이후 중국은 미국에게 가장 중요한 파트너이자 경쟁자였다. 동아시아 경제가 금융 위기 이후에도 상대적인 안정성을 유지하면서 위기 해결에 기여하자 동아시아의 중요성은 더 커졌다. 동시에 중국의 지정학적 팽창이 지속되면서 동아시아는 전략적 요충지가 됐다.

금융 위기 이후 중국은 G2의 일원으로서 미국과 함께 세계적인 의제를 논하는 국가로 성장했고, 미국은 국제 정치경제 질서의 안정을 위해서 중국의 협력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은 국제 통화 기금IMF의 자본 확충에 협조하는 등 금융 위기 해결을 위한 노력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중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미국 헤게모니가 쇠퇴하고, 중국이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기도 했다.

중국의 부상은 과거의 사례들로 설명되지 않는 새로운 쟁점을 제기한다. 중국 역시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처럼 미국 주도 세계 체계에 순응하는 전략을 통해서 발전을 도모했고, 수출 달러 환류를 통해 미국의 통화·금융 권력 유지에 복무했다. 그러나 중국은 과거 미국의 통화·금융 권력을 지탱했던 핵심 국가들과 달리 미국에 군사·안보적으로 종속되어 있지 않고, 미국과 동맹을 맺고 있지도 않다. 게다가 글로벌 불균형의 크기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기 때문에 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과 긴장도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단기간에 위안화가 달러화를 대체하거나, 세계 경제가 중국을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그러나 미국의 구조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외환 보유고가 증가하면 중국의 협상력도 커진다. 금융 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동아시아 주요 채권국들의 협력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미국에 의존하는 만큼 미국도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최근의 미·중 무역 전쟁이 보여 준 것처럼 미·중 관계의 변화나 지역 정세 변화에 따라 미·중 양국의 갈등, 나아가 동아시아 지역 전체의 긴장이 증폭될 위험도 없지 않다. 위안화를 국제화하려는 시도나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을 둘러싼 갈등은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의 표현대로 미국이 “아시아-태평양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동아시아의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아시아-태평양이라는 지역 관념을 더 확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인도-태평양의 꿈(Indo-Pacific Dream)”이라는 새로운 비전은 과연 동아시아와 한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미국은 위기에 직면해 있지만 통화·금융 권력을 토대로 한 구조적 우위를 가지고 있고, 군사력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헤게모니를 강화할 수 있는 대안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2000년대 미국과 동아시아, 특히 미·중 관계의 경제적 구조가 얼마나 더 지속될 수 있을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금융 위기 이후 미국 헤게모니의 변화, 여기서 동아시아 지역이 갖는 중요성을 고려할 때 미국이 강력한 동아시아 전략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글로벌 불균형의 조정은 상당한 정치적, 경제적 비용을 유발하기 때문에 당사국들 사이의 첨예한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역사의 전개 방향을 예측하기는 쉽지 않다. 분명한 것은 2007~2008년 금융 위기가 미국 헤게모니의 변화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이며, 동아시아와 세계의 미래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과 지역 국가들의 상호 작용, 특히 미·중 관계의 동학이 야기하는 불안정성 속에서 결정될 것이라는 점이다. 금융 위기 이후 미국의 세계 전략 전환, 이에 대한 핵심 국가들의 대응은 미국 헤게모니의 진로는 물론, 세계 체계의 변화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1]
헤게모니 개념은 리더십을 지칭하는 그리스어 헤게모니아(hegemonia)에서 유래하며, 국제 관계론에서는 특정 국가가 가진 우월한 능력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 사회과학에서 헤게모니 개념이 널리 사용되는 데 기여한 그람시(Gramsci)는 헤게모니 개념을 문화적·도덕적 지도력과 이데올로기적 동의를 중심으로 정의했고, 이것이 1970년대 이후 세계 체계에 관한 분석으로 확장되었다. 헤게모니는 흔히 ‘패권’으로 번역되기도 하지만 그럴 경우 물리적인 지배력의 측면만 강조되면서 헤게모니의 다층적인 의미가 파악되기 어렵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헤게모니라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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