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있는 노동
2화

국가, 시장 그리고 노동; 한국의 노동법

독일 연방사회노동부의 《노동 4.0》 녹서는 노동의 역사를 네 단계로 구분한다. 증기 기관의 발명으로 새로운 생산 방식이 도입되고, 인류가 산업 사회를 맞이한 18세기 후반이 노동 1.0 시대다. 본격적인 대량 생산이 시작되고, 그로 인해 열악한 노동 환경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 19세기 후반이 노동 2.0 시대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는 새로운 노동 문제를 해결하고자 최초로 사회 보험이 도입되었고, 복지 국가의 개념이 탄생했다. 세계 대전을 거치며 시장 경제가 자리를 잡고,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어 오늘날의 표준고용관계가 확립된 1970년대 이후를 노동 3.0 시대로 본다. 그리고 기술 혁신으로 생산 방식에 다시금 전환기가 도래한 현 시점을 노동 4.0이라 부른다. 지금 우리는 디지털화, 상호 연결성, 유연성의 증대로 변화하고 있는 노동에 대한 새로운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1]

한국은 독일과 같은 서구 선진국에 비해 경제 발전이 늦었다. 그러나 노동을 둘러싼 변화의 과정은 큰 틀에서 다르지 않았다. 한국의 노동법은 현대사의 변곡점마다 함께 변화하며 발전해 왔다. 한국 노동법이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정치, 사회, 경제 변화와 노동 관련 법 제도의 변화가 궤를 같이하는 뚜렷한 지점들이 보인다.

어느 국가든 노동법의 발전은 경제 성장 및 민주주의 성숙이라는 두 가지 전제 조건과 떼어 놓을 수 없다. 한국이 해방 이후 고도의 압축 성장기를 지나오며 경험했던 것들은 서구 국가들에서 약 2~3세기에 걸쳐 진행된 것들이었다.

 

노동 1.0 ; 국가의 주도


한국의 노동 1.0은 일제 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을 맞이한 직후부터 전두환 군부 독재 정권의 탄압이 심했던 1980년대 중반의 시기다. 한국은 1953년에 비로소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노동쟁의조정법, 노동위원회법 등의 근대적 법률을 최초로 제정했다. 1953년에 제정된 법률들은 미 군정기 노동 정책하에서 형성된 법적 관행의 일정 부분을 수용하면서 기본적으로는 일본의 노동관계법을 계수한 것으로, 한국 노사관계의 현실을 반영하거나 외국법에 관한 면밀한 조사와 연구를 통해 제정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집단적 노동관계법은 노동조합의 자유 설립을 보장하고 단체교섭과 단체협약에 따라 노사가 근로조건을 만들어 나가는, 노조의 자율성을 최대한 존중하는 집단적 자치 원칙에 비교적 충실한 입법이었다. 그러나 종전 직후 한국의 경제적 토대는 무척 열악했다. 최소한의 생존을 담보하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에서 기업과 노동자 집단이 대등한 위치에서 교섭하는 근대적 의미의 노사관계는 형성될 수 없었다. 법의 실효성을 말하기는 어려웠다.

산업화에 박차를 가한 제3공화국(1963~1972), 정치적 정당성의 결여로 정권 유지가 주요 현안이었던 유신 체제(1972~1979), 권위주의 정부인 제5공화국(1981~1988)하에서도 노동법은 경제 효율성만을 극대화하기 위한 도구적 성격이 강했다. 국민 대다수가 경제 개발과 수출 증대를 위한 산업 역군으로 취급되었다. 1980년에 독재 정권은 협조적 노사관계를 진작한다는 구실로 사용자와 노동자가 함께 참여하는 최초의 노사협의회를 도입했지만, 그 실상은 자율적인 노조 결성을 방해하고 노동3권을 위축시키기 위한 목적이었다. 노사의 집단 자치는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다. 국가가 절대 권력을 쥐고 주도권을 행사하는 가부장적 노사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법 개정에서 개별 노동자에 대한 보호를 일부 강화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사용자가 법을 준수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국가가 수수방관하는 경우도 많았다. 국가의 보호막 아래 경제는 고도성장을 구가했지만, 노동의 목소리는 배제되고 노동조합은 억압받았다.

 

노동 2.0 ; 노동의 부상


6월 민주화 대투쟁과 함께 87년 체제가 형성되었다. 이 시기부터 1997년까지가 한국의 노동 2.0에 해당한다. 정치 민주화에 힘입어 그동안 억눌려 왔던 국민의 경제적, 사회적 요구가 봇물처럼 터졌다. 제한된 형태로나마 노동의 목소리가 부상하고 노동법이 제도화되었다. 1987년에서 1997년까지 노동법의 개정 과정은 그 이전과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정부가 경제 효율성 외에도 사회 형평성을 모색하기 시작한 것이다. 권위주의 정부 밑에서 비정상적 입법 기구들을 통해 개악을 거듭해 왔던 노동관계법은 내용 및 절차에서 정상화 과정을 밟아 나갔다. 기존의 저임금 장시간 노동 구조의 해체를 외치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일부 받아들여지면서 임금이 큰 폭으로 상승했다. 1989년 노조 조직률은 19.8퍼센트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2] 절차 측면에서는 처음으로 정상적인 입법 기관에 의해 여야의 토론과 합의를 거쳐 법 개정이 이뤄졌다.

90년대 들어 세계 경제 질서가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로 재편되고 한국이 ILO에 가입하면서 세계화, 국제화의 시각에서 노동법을 재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아울러 노동계의 법 개정 요구도 이어졌다. 사용자 측에서도 노동 유연성과 기업 경쟁력을 강화하는 방향의 노동법 개정을 강력히 주장했다.

이에 따라 김영삼 정부는 노사관계 개혁위원회(노개위)를 발족했다. 양대 노총을 포함한 노동계 대표의 참여가 보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사관계 개혁 관련 주요 현안들에 대한 협의가 실질적으로 이뤄졌다. 노개위에서 여러 논의와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집단적 노동관계법 영역에서 위헌성 논란이 있었던 법률들이 상당 부분 개선되었고, 개별적 근로관계법 영역에서는 노동 유연성을 제고하는 규정이 도입되었다. 합리적으로 제도를 개선한 부분도 상당수 발견되었다. 노개위의 성과에는 사회적 협조주의의 효시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한국의 노동 2.0은 87년 체제의 형성과 함께 노동법이 절차 및 내용 면에서 정상화 과정을 밟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사조와 한국 사회의 민주화 욕구가 갈등하면서 한국적 노사관계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이다. 국가는 노사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수용할 수 없었지만, 노조는 강한 전투성을 바탕으로 대기업 중심의 기업별 체제에 안주하려는 경향을 띠기도 했다.

 

노동 3.0 ; 시장의 지배


1997년, 한국은 해방 이후 초유의 경제 위기에 직면했다. 노동의 민주화, 정상화 과정을 밟았던 한국의 노동법은 다시 변곡점을 맞았다. WTO 체제를 중심으로 한 신자유주의 돌풍은 한국 사회에 탈규제화와 노동 유연성이라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퍼부었다. 불가피하게 많은 법 개정과 변화를 겪은 이 시기를 한국의 노동 3.0이라 할 수 있다.
국가적 위기 속에 대량 실업과 임금 저하 현상이 속출했다.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는 IMF 극복을 위한 노사정 협의회의 구성을 공식적으로 제안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이듬해 노동계, 사용자 단체, 정치권과 정부 등의 사회적 합의 기구인 노사정위원회의 발족으로 이어졌다. 노사정위원회의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 협약 체결을 계기로 노동법은 상당 부분 변모했다. 대대적인 노동법 개정은 2000년대 노동법제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를 바탕으로 현재 노동법의 주요 골격이 형성되었다.

먼저 근로기준법에 정리해고 관련 규정이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다만 기업이 정리해고를 실시하고자 할 때는 법으로 정하는 엄격한 요건을 충족하도록 했다. 정리해고를 원하는 사용자는 우선 사업의 양도, 인수, 합병 등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를 입증해야 한다. 또한 해고 회피 노력을 의무화했고, 해고 대상자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으로 정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남녀 차별이 없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해고 전에 반드시 시간을 두고 통보하도록 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인원을 해고하려 할 때는 노동부 장관에게 신고하도록 했다. 추후 회사의 사정이 나아져서 신규 채용이 가능해질 경우, 정리해고되었던 근로자를 우선적으로 재고용하는 방안도 의무화했다.

근로자 파견 제도도 처음으로 도입되었다. 파견 기간은 1년 이내로 하되, 당사자 간 합의가 있을 경우 1년 더 연장하는 것으로 했다. 2년 이상 파견 근로를 한 경우에는 해당 노동자를 고용한 것으로 간주하도록 했다.[3] 사용자가 파산하더라도 체불 임금 및 퇴직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임금채권보장법도 제정되었다. 교원의 노조 설립, 공무원의 직장 내 단결 활동 일부 보장, 노조의 정치 활동 확대 등의 변화도 있었다. 직장 내에서 남녀 차별 행위와 성희롱을 금지하는 고용의 양성 평등 실현을 위한 제도까지 실질적으로 구축되었다. 2001년 근로기준법 개정을 통해 출산휴가를 기존의 60일에서 90일로 확대하였고, 2007년에는 기존 ‘남녀고용평등법’의 명칭이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로 변경되며 배우자 출산휴가,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 제도 등이 도입되었다.

노사정위원회 구성 이후의 법 개정은 노사 간 이해 절충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노동 유연성의 제고와 노동 기본권 보장을 양축으로 노동계와 경영계의 요구는 거부되기도,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입법 과정에서 제도적으로는 노동의 발언권이 보장되었지만, 국민의 정부와 그 뒤를 이은 참여정부는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신자유주의, 시장 우위의 정책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노동자의 권익 보장보다는 유연 안정성 확보와 인적 자원 개발을 중시했다.

IMF 외환 위기는 한국만의 특수한 노동 환경을 만들어 냈고, 그것은 현재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노동자들은 상시적 구조조정의 위기를 몸으로 체감하며 불안정한 노동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 아웃소싱 등의 경영 전략으로 고용을 감축하고, 외주화하는 균열 일터(fissured workplace) 현상[4]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노동 3.0 시기에 나타난 경제, 사회 문제들이 현재 우리 노동 환경에서 분출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법은 경제, 정치, 사회 맥락의 복합적 산물이다.
[1]
독일 연방사회노동부(경제사회발전 노사정위원회 譯), <노동 4.0>, 2015.
[2]
고용노동부, 〈2017 전국 노동조합 조직 현황〉, 2018.
[3]
현행 파견법에서는 기존의 고용간주 조항을 직접 고용의무 조항으로 개정하였다. 파견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6조의2 참조.
[4]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깊게 벌어지는 바위틈처럼 일터의 균열도 깊어진다는 뜻으로, 미국 버락 오바마 정부의 노동부 근로기준 분과 행정관을 역임한 데이비드 와일(David Weil) 교수가 제시한 개념이다. 기업이 비용 절감을 위해 과거와 같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는 대신 하청, 파견, 프랜차이즈, 제3자 경영 등을 활용해 하위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노동 조건이 더욱 불안정해지는 현상을 일컫는다.
데이비드 와일(송연수 譯), 《균열 일터: 당신을 위한 회사는 없다》, 황소자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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