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는 슬럼프로 만들어진다
8화

메타인지; 원인을 파악하고 동기를 부여하라

슬럼프는 누구에게나 온다. “1200만 원짜리 선수든 5억 원짜리 선수든 경기장 안에서는 다 같은 야구 선수”라는 1995년도 신인왕 이동수의 말처럼, 모든 선수에게 슬럼프는 피해 갈 수 없는 선수 생활의 흐름 중 하나다. 레전드라고 예외는 아니다. 김용수는 야구 인생에서 언제가 가장 큰 슬럼프의 순간이었냐는 질문에 “야구하는 인생 자체가 곧 슬럼프”라고 답했다. 그는 슬럼프라는 것은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모두가 겪는 일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슬럼프라는 거는 사실 모든 사람한테 다 오는 거고… 다 겪어야 되는 거지. 야구하는 자체가 슬럼프의 연속인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고통을 즐긴다고, 그런데 이거를 즐기다 보니까 여유로움이 생기더라구요. 남들은 힘들 때 괴로워하지만, 저는 그거를 이기니까 더 즐거워요. 운동장에서 선수들이 힘들다고 불평할 때 저는 그렇게 말해요. 고통을 즐겨라. 힘든 거를 즐겨라. 그래야 너희 안에 뭐가 들어가도 한참 많이 들어간다. 너희를 발전시킬 수 있는 무언가로 가득 채울 수 있어진다. 그 공간을 만들어라. 힘들 때 죽겠다 싶어서 안 하면 결국 너희에게 돌아가는 거는 선수 생명 단축이다. 그게 야구다. 이게 제가 야구를 하면서 깨달은 저만의 철학이에요.
 
슬럼프는 언젠가는 지나간다. 15타석 무안타의 부진에 빠진 타자도 언젠가는 잃어버린 타격감을 되찾을 것이고, 부상으로 2군에서 재활 중인 투수도 언젠가는 다시 1군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인고의 시간 동안 선수들이 겪는 고통과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다. 스포츠 심리학자인 글렌 리처드슨(Glenn Richardson)에 따르면, 슬럼프의 발생은 분열(disruption)을 유발한다.[1] 여기에서 분열은 개인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패러다임의 변화이다. 슬럼프로 인해 각자가 가지고 있던 자기 자신, 세상, 미래에 대한 도식이 무너져 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만났던 프로 야구 선수들은 슬럼프의 종류를 막론하고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던 순간, 인지적, 정서적, 신체적으로 다양한 고통을 경험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부정하기도 했고, 야구 인생이 이대로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빨리 슬럼프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시달렸다.
 
허… 나를… 왜 이러지? 저 사람이 나한테 왜 이러지? 나는 지금 나가도 충분히 홈런 30개씩, 가만 놔두면 그렇게 할 수 있는데, 슬럼프 아닌데 왜 그러지, 왜 그러지? 그렇게 계속 의심하고 불만만 쌓이는 거예요.
NC 다이노스 내야수 이호준
 
너무 무서웠어요. 야구 자체가… 거기에서 끝났어요, 제 야구는…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그런데 심리적으로 완전히 끝나 버렸다고 생각했죠.
SK 와이번스 2군 작전 및 주루 코치 백재호
 
동료들 그렇게 놀 때 전 죽어라 연습한 거죠. ‘내가 쟤들을 이기고 말겠다’ 그 생각만 했어요. 그런데… 그래도 걔네들이 더 잘하더라구요. 너무 화가 났어요. 여자애들 만나러 다니고, 미팅하러 다니고. 그런데도… ‘나는 죽어라 연습만 하는데 왜 그런 거지? 내가 더 잘해야 해. 잘해야 해’ 강박 관념에 시달렸어요.
SBS 스포츠 해설위원 이종열
 
식욕이 저하되고 불면증에 시달리고 원형 탈모증을 겪은 선수들도 있었다. 선수들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면서 절망했고 무기력해졌다. 단순히 ‘슬럼프에 빠졌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그야말로 인생의 깊은 수렁에 빠진 것이다. 그렇다면 깊은 수렁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은 슬럼프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하느냐다. 레전드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식은 단순하고 분명했으며, 명쾌했다.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통한 동기 부여는 레전드가 슬럼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난 인지적 전략 특성이다. 여기서 동기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부여하는 가치, 그 일에서 기대하는 성공의 정도, 성공에 필요한 것을 자신이 가지고 있다고 믿는 신념, 그리고 과업의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어떻게 인지하느냐 하는 문제에 따라 결정된다. 레전드들이 슬럼프에 빠졌음에도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슬럼프를 성공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던 데는 자기 성찰이 큰 영향을 주었다. 즉 자신의 생각, 감정, 행동을 반복적으로 살피는 과정이 슬럼프를 극복하는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성찰은 메타인지의 사용을 통해 나타난다. 메타인지(meta-cognition)는 ‘인지에 대한 인지’를 의미하는데, 자기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자기의 문제점이 무엇이고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를 파악하는 것이다.[2] 메타인지는 자신의 인지 활동을 통제하고 평가하는 전략적 기능을 수행하며,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계획, 점검, 조절을 담당한다.[3]

레전드는 슬럼프를 헤쳐 나가기 위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지금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야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자문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자신의 인지와 감정을 조절하기 위한 전략들을 점검했다. 이러한 점검(monitoring)은 자신의 주의 집중을 추적하면서 이해 정도를 확인하는 인지 활동으로, 메타인지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레전드는 슬럼프의 원인을 파악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성장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자부심을 경험했다.

박정태는 야구를 하면서 정말 힘든 순간들이 많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러한 어려운 환경이 성공하는 데 있어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됐다고 말했다. 동기가 있으면 누군가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가 알아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기 부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내가 성공해야만 하는 이유, 야구를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이 중요하다고 했다.
 
운동하는 데는 그런 동기 부여가 정말 중요해요. 저는 환경이 그런 역할을 했고, 지금 선수들은 지도자가 얼마만큼 동기 부여를 만들어 주는가, 그게 급선무입니다. 백날 이렇게 끌고 가고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저 선수를 어떻게 하면 자기가 알아서 하게끔 할 수 있는가’ 그게 중요합니다.
 
박정태는 슬럼프라는 현실을 직면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슬럼프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긍정적 재평가(positive reappraisal)란 자신이 처한 사건을 다각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해석해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문제 해결책을 찾도록 돕는 인지적 과정이다.[4] 긍정적 재평가는 우선 ‘왜 이러한 사건이 자신에게 일어났는지’, ‘왜 자신에게 이러한 고통이 주어지는지’ 등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하고 답을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겨난다. 이러한 물음은 슬럼프 직후의 초기 인지적 처리 과정에서는 침투적이고 자동적인 반추(rumination)[5]적 사고로 나타날 수 있다.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부정적인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자신의 답답한 감정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박정태도 슬럼프의 발생으로 인해 고통을 겪는 중에 또 다른 슬럼프를 겪는 연속적인 슬럼프 상황에서 이러한 반추적 사고를 했다. 어린 시절 그는 야구를 지속하기 힘들 정도의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힘들어하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하며 독하게 야구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가정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박정태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 ‘도대체 내 삶은 왜 이런가’라는 생각이 끊임없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고 했다.

그러나 박정태는 이러한 사고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성찰로 승화시키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박정태가 긍정적 재평가를 할 수 있었던 계기는 동기 부여였다. 더 큰 심리적 고통에 빠지기 전에 심리적 회복을 유발하는 동기 부여의 대상을 찾았다. 어머니가 바로 그 대상이었다. 학교 체육부실 식당에서 동료들이 먹은 급식판을 치우시던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야구에 전념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 재활 불가 진단을 받았을 때도 그는 자기 성찰을 통해 슬럼프의 원인을 찾고 스스로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자기 성찰을 통한 동기 부여는 김종모의 슬럼프 극복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 특성이다. 그는 자신의 현재 상황을 슬럼프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메타인지적 사고를 거듭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발전 없이 정체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 부상 이후에 타성에 젖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김종모는 ‘이러한 모습으로는 더 이상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메타인지적 경험이다. 자신의 현재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개선해야겠다는 필요와 욕구를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어느 누구의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닌 자기 성찰과 깨달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김종모는 자신이 슬럼프에 빠졌음을 인지하는 과정에서뿐만 아니라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전향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는 과정에서도 자기 성찰을 했다. 고교 2학년 진급을 앞둔 시점, 정체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김종모는 혼자만의 연습에 돌입하기로 결정하고 그 길로 숙소로 들어갔다. 코치가 시킨 것도 아니었고 선배나 동료를 따라 한 것도 아니었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자기 성찰 끝에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그는 밤새 연습하고 나서도 피곤을 느끼지 못했다고 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 연습 요령을 터득했다. 이 모든 것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기 성찰의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습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연습을 거듭할수록 배움에 대한 갈증은 커져만 갔다. 당시만 해도 감독이나 코치들이 투수가 던지는 공의 경로에 따라 타자가 어떻게 준비하고 쳐야 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지도하지 않았다. 그는 타격에 대한 기본적 지식조차 습득하기 어려운 현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춥고 외로웠다. 겨우내 훈련으로 스스로 성장했음을 느꼈지만 2학년에 올라가고 나서도 한동안은 선배들 꽁무니만 따라다녔다. 경기 출전은 남의 얘기였다.

“나는 그냥 전령이었지, 전령. 감독이 뭐라 뭐라고 명령 내리면 선배들한테 가서 전해 주고.” 그는 고교 시절을 그렇게 회상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인간은 무기력의 늪에 빠진다. 그 역시 육체적으로 지치고 심리적으로 불안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내가 야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자문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한 번 더 생각한 게 뭐냐 하면, ‘내가 이걸 지금 왜 하지? 내가 한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나하고 대화를 했다고. 거울을 보면서. 그러면서 스윙을 돌리고 땀이 나면… 너무너무 기분이 좋아. ‘또 해보자! 되겠지!’ 이런 거 있잖아. 그러면서 내 자신이… 아~ 내가 정말 뭐랄까… ‘야, 김종모! 너 대단한 놈이다’ 뭔가 그렇게 좀 생각을 많이 했었지.
 
태어날 때부터 잘하는 선수는 아무도 없다. 노력에 정신력이 더해져야 한다. 훈련이 힘들면 호흡이 약해지고 마음까지 약해진다. 정신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 김종모는 정신력은 키우면 키울수록 강해진다고 말했다. 무한대인 인간의 능력을 어떠한 방식으로 끌어내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종모는 그 해답을 바로 자기 성찰에서 찾았다. 시켜서 하는 연습은 노동과도 같으며 한 번을 스윙하더라도 ‘생각’하면서 연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는 강조했다.
 
스윙을 할 때도 코치가 그냥 하라니까 하고… 그건 아니라는 거야. 그건 자기한테 전혀 도움이 안 되잖아, 시켜서 그냥 하는 건. 그래서 나는 지금도 선수들에게 말해. 그렇게 하는 연습은 노동이다! 그럴 거면 하지 마, 그냥 쉬어. 정말 신경 써서 열 개를 하든지, 그러고 가서 쉬어. 그렇게 시간 때우려고 하지 마. 그 시간이면 차라리 다른 걸 해. 스트레스 받지 말고.
 
김용수는 프로 입단 5년 차이던 1989년, 해외 훈련에 참가해서 선배들과 함께 러닝을 하던 중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대만에서 캠프를 하는데, 고참들하고 뛰면서 얘기하고 하면, 그때 (젊은 선수들이) 다섯 바퀴 돌면 나이 많은 사람들은 세 바퀴? 한 달 넘게 계속 그렇게 해왔어요. 아무 생각 없었던 거죠. 그런데 어느 날 저도 모르게 ‘어! 지금 내가 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딱 들면서, 더 이상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딱 드는 거예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내가 왜 이 사람들이랑 이렇게 뒤에서 따라가야 하지?’ 그때 선두랑 두 바퀴 차이 났었어요. 그때부터 뛰기 시작했어요. 결국 열 바퀴 뛰는 동안 오히려 제가 한 바퀴 추월했어요. 그때부터였어요. 아무도 내 길을 못 막아, 아무도 못 막아.
 
김용수는 무엇을 하든 ‘자신의 생각을 스스로 살피며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으로 이 일에 임하고 있는가?’ 그는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동기를 부여하는 경우에는 옆에서 조금만 도움을 줘도 변화가 일어나지만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아무리 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했다. 자기가 깨달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시켜서 하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역효과만 난다는 것이다.
 
자기가 열심히 하지 않는 이상은 아무리 누군가 시켜도 안 되는 거예요. 결국은 못하면 나가야 되니까, 아무도 굳이 뭐라고 하진 않죠. 그 대신 발전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당연히 옆에서 서포트 해주죠. 아무리 시켜도 스스로 안 하는 이상 누가 시킨들 할 거냐, 안 한다는 거예요. 본인 스스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기를 들여다보고, 절실히 깨닫고 해야지. 마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해봤자 오히려 역효과만 생기는 거죠.
 
메타인지를 통한 레전드의 자기 성찰은 특히 성적 하락, 즉 경기에서 오는 슬럼프를 극복하는 과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동안 내가 만났던 몇몇 선수는 시즌 중 갑작스러운 슬럼프에 빠진 적이 있는데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더 힘들었다고 했다. 연습 부족, 가벼운 부상, 타격 폼의 변화 등 뚜렷한 원인이 있으면 고칠 수가 있는데,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면서 슬럼프에 대한 구체적인 극복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고 계속적인 시행착오를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레전드는 달랐다. ‘왜 내가 슬럼프에 빠졌는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이들은 이유 없는 슬럼프는 없다고 단언했다. 다만 본인이 지각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레전드들은 슬럼프에 빠진 선수들이 오랫동안 그 원인을 찾지 못할 때는 성공으로 인한 교만함, 더 큰 성공에 대한 욕심, 자신의 경기력에 대한 자만, 명성으로 인한 잡념 등 심리적인 문제들이 근본적 이유인 경우가 많다고 했다. 박정태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슬럼프를 겪은 적이 있느냐고 묻자 다음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저 같은 경우는 거의 4년에 한 번씩 슬럼프가 오더라구요. 교만함이죠. 올라가다가 결국은 피로가 쌓이고, 그래도 자길 돌아보지는 않거든요. 그렇게 쌓이다 보면… 슬럼프에 빠지죠. 그럼 1년 정도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되고, 노력하면 그다음 해에 또 성적이 올라가요. 사람이 겸손해야 되는데… 아무래도 잘되면 준비가 덜해지고 그게 조금씩 쌓이다 보니 피로도 누적이 되고. 그러면 4년째 성적이 다운되더라구요. 그래도 그런 것도 경험이니까… 두 번째는 3, 4년째 해가 되면 미리 신경을 쓰죠. 마음을 다잡는 거죠. 슬럼프라는 게 결코 갑자기 오는 게 아니에요.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그렇게 오는 건데 그 시점을 잘 살피지 않으면, 이유도 알 수 없어요.
 
심리적인 요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연습이나 웨이트 트레이닝을 게을리하는 것, 동료나 지도자와의 갈등, 부상 등은 주변 사람도 쉽게 눈치챌 수 있지만, 심리적인 요인은 자기 자신도 알아채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자기 성찰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에 대한, 그리고 야구에 대한 끊임없는 점검과 성찰은 수행의 향상에도 중요하지만, 수행이 하락한 순간 이를 빠르게 극복해 내는 데에도 중요한 영향을 준다. 메타인지의 사용을 통한 자기 성찰은 문제 해결 과정에서 계획, 점검, 조절의 주요 기능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슬럼프 극복을 위한 적응적 행동으로도 이어진다.

박정태의 독특한 타법으로 알려진 ‘흔들 타법’이 적절한 예다. 흔들 타법은 박정태가 자신의 신체적 조건을 고려해 만들어 낸 타격 폼으로 메타인지적 조정의 결과이자 위험을 감수한 도전의 산물이다. 박정태는 이 타법이 보기에는 독특하지만 실제로는 치열한 고민과 연구 끝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조금만 준비가 소홀해도 금방 무너질 수 있는 폼이라고 했다.
 
흔들 타법. 그거 저도 처음부터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2, 3년 진행 과정에서 그래 된 거죠. 어쨌든 저는 흔들 타법으로 굉장히 유명하지만, 그것도 다 피나는 노력에 의해서 그래 된 거니까. 저는 (주변) 상황을 안 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부분, 그것도 개성이라면 개성이지만, 그냥 하고 싶은 걸 하죠. 물론 그건 제가 연구해서 하는 부분이라, 기본이 우선 받쳐 줘야 되고, 그리고 그 뒤에 내 폼을 내 신체적 조건에 맞게 조금씩 바꾸면서 그래 된 거 같은데. 어쨌든 중요한 건 노력이 뒷받침되니까. 그리고 늘 내 스스로가 내를 관찰하고 어떤지 살피니까. 어떤 상황이든 이겨 낼 수 있죠. 안 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어요. 그러면 끈질기게 이유를 찾고, 그렇게 프로 환경에 적응을 해야죠. 저는 몸이 좀 작다 보니까 흔들흔들하는 부분은, 몸에 힘을 좀 싣는 거예요. 유연성하고 발란스를 보고. 힘이 있는 애들은 제자리에서 칠 수 있는데 우리 같은 경우는 체중을 안 싣게 되면 힘이 있는 타구가 안 나오니까. 사실 그런 폼들이 위험하긴 하지만, 잘만 정리해 놓으면 훨씬 더 강한 타구를 보낼 수 있는 부분이 되니까. 준비를 안 하면 발란스가 금방 깨져요. 다른 선수들보다. 그래서 연습도 남들보다 더 많이 할 수밖에 없어요.
 
레전드의 연습, 훈련은 메타인지를 통한 자기 성찰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과정이다. 연습과 훈련은 슬럼프를 극복하고 최선의 경기를 펼치기 위한 기본적인 전략이지만, 동시에 슬럼프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선수들이 가장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기도 하다. 연습과 훈련이 슬럼프를 극복하는데 왜 중요한가? 연습과 훈련, 그리고 자기 성찰은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

레전드는 ‘반드시 한 번의 결정적인 기회가 오며, 준비된 자는 절대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하나의 신념처럼 마음속에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신념은 레전드가 메타인지를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이들은 부상 후 고통스러운 재활 과정이나 지도자와의 갈등으로 인해 경기에 출전하기 못하는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기보다는 ‘지금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인가?’를 스스로 묻고 성찰했다. 그리고 고독한 연습과 훈련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렇듯 연습과 훈련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실천할 수 있다면 그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어떤 선수에게나 야구 인생의 전환점이 되는 결정적 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레전드뿐 아니라 다른 선수들에게도 연습과 훈련은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회를 잡는 선수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선수가 있다. 레전드는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슬럼프를 돌파해 나간다. 스스로 질문하고 성찰하면서 연습과 훈련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면 당신은 결국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가게 된다.
요기 베라
[1]
Richardson, G. E., 〈The metatheory of resilience and resiliency〉, 《Journal of Clinical Psychology》, 58, 307-321. 2002.; Richardson, G. E., Neiger, B. L., Jensen, S., & Kumpfer, K. L., 〈The resiliency model〉, 《Health Education》, 21, 33–39. 1990.
[2]
Flavell, J. H., 〈Metacognitive aspects of problem solving〉, 《The nature of intelligence》, 231-236. 1976.
[3]
Schoenfeld, A. H., 〈What’s all the fuss about metacognition?〉, 《Cognitive science and mathematics education》, 189-215. 1987.; Schneider, W. & Lockl, K., 〈The development of metacognitive knowledge in children and adolescents〉, 《Applied Metacognition》, 224-257. 2002.
[4]
긍정적 재평가(positive reappraisal)란 자신이 처한 사건을 다르게 해석하여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문제 해결책을 찾아 나가는 인지적 과정이다. 즉 이미 발생한 사건에 대한 인지를 재구성하여 발생한 상황에 대한 이해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긍정적 재평가를 하는 사람은 어떤 일에 실패하더라도 우울감을 덜 경험하고 빠르게 실패 상황을 극복해 나갈 수 있다.
[5]
반추(rumination)는 자신이 환경을 통제할 수 없다고 인식될 때 불안의 핵심으로 작동한다. 사건과 관련된 부정적인 생각에 빠져,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대신 그 사건과 관련된 부정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춰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과 부적절감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을 의미한다. 반추적 사고는 문제 해결적 사고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생각을 하는 대신 그 문제의 의미와 결과에만 초점을 두고 생각을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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