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은 왜 그래?》 김선영 저자 - 싸가지 없음에 대하여

싸가지 없음에 대하여
《의사들은 왜 그래?》 김선영 저자


의사 신분으로 의사 사회를 이야기하는 것에 부담은 없었나. 자칫 의사 집단을 강변한다는 오해도 살 수 있었을 텐데.

부담이 아주 컸다. 책의 프롤로그에도 썼지만, 의사 사회 안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입장과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수도권 종합 병원에서 일하는 내가 모든 의사를 대표한다고 볼 수도 없다. 굳이 앞장서 나를 포함한 의사 집단을 옹호하려던 것도, 그렇다고 소위 ‘내부에 총질하는’ 사람이 되려던 것도 아니다. 그저 한 명의 시민이자 직업인으로서 바라본 의료 체계 차원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의료 현장 일상에 스며있는 부조리를 조목조목 짚으면서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풀어내고자 했다.

주로 어떤 문제와 부조리를 다뤘나.

책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을 다소 거칠게 표현하면 ‘의사들은 왜 그렇게 싸가지 없어졌는가’이다. 사람 생명을 구하는 필수 진료과에는 눈길을 안 주고, 진료실에서는 환자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서둘러 진찰을 마치기 일쑤이며, 입원 병실엔 코빼기도 안 비치는 등등의 이야기다. 의사의 엘리트주의나 권위주의, 탐욕처럼 더 받아들이기 편한 키워드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기저에 의료 제도의 모순이 있음을 말하고 싶었다. 저수가(低酬價)를 기반으로 과로와 번아웃을 바퀴 삼아 굴러가는 의료 시스템이 환자, 시민과 대화하는 법을 익히지 못한 의사를 양산한다는 게 나의 해석이다. 의사 집단이 좀처럼 신뢰를 얻지 못하니, 이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한 공감대 역시 형성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많은 환자가 의사를 불친절하고 싸늘하다고 느끼는 건 특히 짧은 진료 시간 때문일 거다.

기본적으로 종합 병원의 외래 진료는 사립 병원, 공공 병원 할 것 없이 5분 정도의 간격으로 잡힌다. 의사가 그렇게 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무과에서 그렇게 예약을 받는다. 진료실에 들어오고 나가는 시간을 제외한다면 실제 체감 시간은 3분이 채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 건강 보험 제도하에서 외래 진료의 가격은 3분을 진료하든 20분을 진료하든 같다. 때문에, 병원에서는 의사가 환자를 많이 볼수록 이익이다. 여기에 건강 보험에서의 진료 가격, 즉 수가가 본인 부담금과 건강 보험 부담금을 합쳐 1만 원에서 2만 원 사이인데, 한 사람당 15분 정도를 쓰는 선진국식 진료를 한다면 의료 기관 운영의 수지 타산을 맞추기 어려워 진다.

진료 시간이나 의사당 환자 수를 강제할 수는 없는 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진료에 필요한 최소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의사가 하루에 몇 명을 진료하는 것이 적정한지에 대한 전문가들 간의 합의가 없다. 그러니 진료 시간은 적정한 진료의 질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얼마큼의 수익을 내는 것이 적절한 것인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물론 환자 수를 제한하는 의사도 있지만, 그것은 경력이 많은 대가나 할 수 있는 선택이다. 만약 혼자만 환자를 적게 보겠다는 주니어급 의사가 있다면, 옆에서 과로하는 동료들의 시선이 곱지 않을 것이다. 즉, 동료 간 무언의 압력(peer pressure)도 짧은 진료 시간에 작용되는 셈이다.

경험적으로도 3분 진료가 어제오늘만의 문제는 아닌데, 왜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을까?

결국은 돈이 문제다. 진료 시간을 늘리려면 돈이 든다. 2021년 현재 5분 진료의 재진 진찰료가 상급 종합 병원 기준 1만 5000원 정도이므로, 만약 환자 한 명당 15분 간격으로 본다면 적어도 진료비가 4만 5000원 정도는 되어야 병원이 현재의 매출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돈을 더 많이 내고 더 세심한 진료를 받겠다는 합의가 우리 사회에 있는가, 하면 아직은 아닌 것 같다. 그건 증세와 관련된 논쟁과 같이, 중요하지만 아무도 건드리고 싶어 하지 않는 문제다. 건강 보험 제도하의 의료 서비스의 가격은 병원이 아니라 의료인, 정부, 기업계, 노동계, 소비자단체 등이 협의하는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에서 결정되는데, 진료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의료인 외에는 아무도 선호하지 않는다.

한계를 극복할 방안은 없나?

최근 여러 형태의 진료가 도입되고 있는데, 다학제 진료가 그 예이다. 3인 이상의 의사가 모여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함께 논의하는 진료로, 진료비가 10~20만 원 정도다. 또 15분 이상의 진료에 약 10만 원의 수가를 제공하는 심층 진찰이 시범 사업으로 시행되고 있는 점 등을 상기하면 그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는 할 수 있다. 다소 고가이지만 충분한 시간과 자세한 상담을 제공하는 진료에 대해 환자들의 만족도가 높고, 상당 부분을 건강보험공단이 지급하므로 본인 부담금 자체가 높지 않아 가격에 대한 저항감도 크지 않다. 물론 이런 진료를 더 많은 영역에 도입하려면 결국 보험료 인상의 이슈를 논의할 수밖에 없다. 결국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진료의 질을 높이는 것에 돈을 투자할 것인가, 아니면 이대로 가성비 의료인 3분 진료에 만족할 것인가.

한편으로 ‘의사 수를 늘리면 상황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의사 단체에서는 의대 정원 확대나 공공 의대 설립 등에 반대하지 않나? 밥그릇 챙기기라는 비판이 꼬리표처럼 붙는 이유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의대 정원 확대에 반대하지 않는다는 점을 먼저 밝혀 둔다. 고령화, 지역 및 계층 간의 의료 공급 불균형, 감염병 대응 등 의사 인력 공급 자체가 늘어야 할 요인은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단지 의사 면허 소지자를 늘리는 것에 그친다면 그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이 없다. ‘독’은 주로 인력이 부족한 종합 병원, 특히 환자들이 몰리는 상급 종합 병원이다. ‘물’은 의사 면허를 갓 딴 젊은 의사들이다.

젊은 의사들은 대개 상급 종합 병원에서 수련을 받는 전공의가 된다. 병원들은 정규직인 전문의를 고용해 독 안에 담아 두기보다는, 비정규직이면서 인건비가 싼 전공의를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을 선호한다. 즉, 독의 바닥이 뚫렸어도 계속 물이 찰랑거릴 수 있는 환경을 원하는 것이다. 의사 협회와 달리 병원 협회가 의대 정원 확대에 찬성하는 이유다. 그러나 물을 아무리 부어 봐야 전공의 대부분은 3~4년 정도 일하다 밖으로 나가 개원가에 흡수된다. 그곳에서는 피부 미용, 성형 등의 비급여 진료 외의 상당수 의료 영역이 고사한 상태다. 동네 의원 폐업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기사도 아마 익히 접했을 것이다.

결국 의사의 일자리 문제와도 연결된 셈이다.

수련을 마치고 전문의 면허를 취득한 의사들을 더 많이 고용할 수 있는 여건, 즉 일자리를 비롯한 의료 인프라에 투자하지 않은 채 의대 정원부터 늘린다는 것은 밑 빠진 독은 그냥 둔 채 물만 더 붓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안정적으로 전공의, 즉 비정규직을 채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의료 인프라에 대한 투자 의지가 별로 없다는 것은 정부 예산만 봐도 알 수 있다. 메르스 이후 계획됐던 감염병 전문 병원의 설립 좌초가 대표적인 예시다. 감염병 전문 병원은 현 정부의 국정과제로도 꼽혔으나 코로나19 판데믹이 시작된 지 1년 반이 지난 현재까지도 완공된 곳은 한군데도 없다. 상황이 이러니 ‘의료 인프라에 대한 투자 없이 의사 면허 소지자만 늘려 각자도생하게 할 것’이라는 의사 사회의 의심도 무리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도 ‘아무렴 의사인데 일반인보다 상황이 낫겠지’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지난해 정부가 의료인 수에 대해 일방적으로 정책을 발표하면서 젊은 의사와 의대생이 느낀 박탈감은 매우 심각했다. 물론 그들은 사회에서 혜택받은 사람들이고 의사 면허가 있는 한 어떻게든 먹고사는 데 지장은 없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좋은 병원’, 즉 대학 병원이나 평판이 좋은 종합 병원에 취업하지 않아도 그들이 개원가, 요양 병원, 건강 검진 센터 등에서 개원의나 봉직의로 살며 중산층 이상의 지위를 누리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니까.

그러나 그들을 자극한 것은 아마도 밑 빠진 독에 부어져 새어 나와 땅을 적시는 물 취급을 받는다는 느낌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즉, 내 삶의 목적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소모된다’는 느낌, 그것은 누구에게라도 불쾌한 것이지만 전문직에는 특히나 매우 큰 모욕이다. 독에 채울 물을 늘리는 것도 필요하겠으나 지금 당장 해야 할 것은 물을 붓기 전에 독 밑바닥을 메우고 여분의 독을 더 준비하는 등의 작업이지 않을까.

듣다 보니, 개별 병원이나 의사 개인이 노력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진료 시간이 지금보다 늘어나야 하고, 1인당 적어도 10~15분은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개선돼야 하지 않을까 한다. 최근 보건의료노동조합에서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를 법제화하도록 요구했는데, 이뿐만 아니라 의사 1인당 환자 수 역시 제한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어느 정도가 적정한지에 대한 기준조차도 없다. 의료법 시행 규칙에 인력 기준이 있긴 하지만 워낙 헐렁한 기준이라 큰 의미는 없는 상황이다. 하루 100명의 외래 진료를 본다고 하면 봉직의나 교수는 인기 많은 명의라고 칭송될 것이고 개원의는 이른바 잭팟이 터졌다고 환호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명실상부하게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우리나라 수준에서 이런 것은 환자들이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진료가 아니다. 환자가 소외되지 않는 환자 중심의 진료를 구현하려면 적정한 진료 시간, 적정한 의료 인력당 환자 수를 논의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시스템 정비와 별도로 의사 집단 내부에서 해야 할 노력은 없나? 의사에 대한 신뢰 회복 차원에서 말이다.

사실 나는 2000년의 의약분업 파업, 2020년의 공공 의대 파업 모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은 소위 아웃사이더 의사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의사 집단이 해야 할 노력’에 대해 말할 지분도 별로 없다고 느낀다. 다만 현재의 의사 단체가 변화할 거라는 기대는 솔직히 하지 않는다. 처음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목소리를 내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작년 파업 이후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해 느꼈던 환멸과 애증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하고 설명하고 싶다는 것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이렇게나 욕은 좀 먹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의사들은 대개 진료실에서도 그렇지만 사회를 향해서도 경청하는 자세가 부족하다. 주로 말을 하는 것에 익숙하고 듣는 것은 낯설다. 나부터도 그렇다. 짧은 진료 시간 동안 내 할 말을 하기 바쁘다 보니 듣는 훈련이 잘 안 되어 있다. 또 환자가 약을 잘 안 먹거나 담배를 계속 피우거나 하며 의사의 권고를 지키지 않으면 쉽게 ‘환자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대개 ‘순응도가 나쁜 환자’라고 표현한다. 그런 생각의 버릇들은 진료실을 벗어나 사회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의사들의 정당한 주장을 ‘엘리트주의’라고 매도한다며 억울해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바로 엘리트주의임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신뢰 회복의 시작이지 않을까.

20년 넘게 병원을 지켜 온 의사로서, 우리나라 의료 체계 개선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신뢰 회복은 가능하다고 보나?

사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조금씩 나아져 간다고 믿는다.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지위는 지금도 썩 좋지 못하지만 20년 전의 그것과는 비교하기 어렵다. 의료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20년 전의 병원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환자가 존중받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밤에 식도 정맥류로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하며 내원한 환자가 있어도 아침에 내시경실이 열리기 전까지는 수혈로 버텨야 했다. 응급 내시경 당직 의사를 부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심근경색 환자가 와도 막힌 혈관을 뚫어주는 심혈관조영술을 할 수 있는 시설과 인력이 부족해 골든타임을 놓치기 일쑤였으며, 환자 동의 없이 연구용 혈액을 뽑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다.

사실 질병의 치료 성적 또는 생존율 등은 비약적으로 발전해왔는데, 환자가 존중받고 만족할 수 있는 진료를 제공하는 환경 측면에서는 아직 한계가 있는 셈이다. 다만 의료진의 친절과 감정 노동만을 요구하는 대신, 그들이 실제로 처한 노동 환경이 개선될 때 진료의 질도 올라간다는 공감대가 형성된다면 이 역시 더 나아진다는 희망을 걸어볼 수 있지 않을까. 현재 우리 의료 시스템에 대한 최소한의 문제의식과 공감대를 만드는 데 조금이나마 기여하고 싶었던 마음이 이 책을 쓴 계기이기도 했으니.

끝으로, 이 책은 누가 읽으면 좋을까?

많은 나라에서 의료 제도는 정치적 이슈가 된다. 건강에 대한 책임을 개인과 사회가 어느 정도의 비율로 나누어서 져야 하느냐는 결국 중요한 철학적, 정치적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논쟁이 좀처럼 잘 이뤄지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의사라는 전문가 집단에 대한 짜증과 분노가 의료를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 국가에 대한 분노를 넘어서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의사들에 대한 비난을 넘어 그들이 왜 그리 욕먹을 짓을 반복하는 것인지 궁금한 분이라면 이 책에서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전찬우 에디터

* 2021년 10월 5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