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정지우 - 유예된 청춘의 글쓰기

©사진: 이지윤 도안사진 대표

유예된 청춘의 글쓰기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 정지우 작가


SNS 속에서 우리는 매일 수많은 타인을 마주한다. 그 속의 삶은 완전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오해하며 각자 크고 작게 왜곡된 세상을 살고 있다. 누구라도 알 수 있지만, 그 누구도 모르는 시대, 우리는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야 할까. 신간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를 출간한 정지우 작가를 만나봤다.

신간 《내가 잘못 산다고 말하는 세상에게》은 어떤 책인가.

26살에 첫 책 《청춘 인문학》을 쓰고, 서른이 되기까지 계속해서 책을 냈다. 어느 순간 사회 비평만으로 공허하다 느꼈다.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를 내고 청년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다. 그때마다 “비평에 대한 공감은 되는데 이 책에서 답을 얻진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살아야 되나요?” 라는 질문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비판했던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견뎌왔는지를 나름대로 치열하게 담고자 했다. 숱하게 들어왔던 질문들에 대한 답일지도 모르겠다.

10년 차 작가다. 책 쓰기가 일상이 됐을 것 같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결혼을 했고 아이가 태어났다. 로스쿨 수험생활까지 시작하면서 현실적으로 책 쓰기가 불가능했다. 공부하다 쉬는 시간에 잠깐, 아이를 재우면서 잠깐, 떠오르는 생각을 글로 옮겼다. 그러다 보니 순간의 생각들이 담겼다. 한 명의 생활인으로서 했던 파편적인 사유가 모인 셈이다. 사실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지 않나. 그래서 이번 책에 독자들이 더 공감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작가가 아닌 생활인 정지우는 어떤 사람인가.

36살에 신입사원이 됐다. 지난해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회사에 입사한 지 3개월 차다. 이 나이쯤 되면 대리나 팀장인 경우도 많다. 나는 청년 시절을 오래 살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청년 시절을 유예 시켜볼까 하는 고민뿐이었다. 대학원도 가고 작가도 하다, 뒤늦게 만학도 로스쿨생이 됐다. 유예된 청춘을 살았다. 

청춘이 단어의 뜻풀이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청춘을 유예시키고 싶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나와 가장 어울리는 삶을 살고 싶었다. 자유롭게. 첫 이상은 자유로운 작가가 되어 세계를 여행하듯 사는 것이었다. 《청춘 인문학》에 썼지만 “회색 도시의 메마른 직장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이상과 열망이 있었던 것 같다.

회색 도시의 직장인이 됐다. 정지우의 청춘은 지났나.

청춘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즘 드는 생각은 그렇다. 스스로가 청춘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청춘으로부터 가장 큰 단절점은 아이의 탄생이다. 아이가 태어난 후, 나의 감각과 욕망을 위해서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이 줄었다.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젊은 정지우에게 자유는 이상이자 강박이었나.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할까, 더 만족할까, 스스로에게 고도로 몰입했다. 어쩌면 강박처럼. 지금은 나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것 같다. 타인의 행복을 살피게 됐다. 나만이 아닌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에 대한 고민을 더 하게 됐다. 나 자신에 대한 집착을 버렸을 때 더 행복해지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랬을 때, 결과적으로 나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오는 편안함을 말하는 건가.

김진영 철학자를 좋아한다. 그분의 유고 에세이집 《아침의 피아노》에 좋아하는 구절이 있다. “나만을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약해진다. 타자를 지키려고 할 때 나는 나날이 확실해진다.” 공감했다.

얼마 전, 북저널리즘에서 〈연애의 조건〉이란 포캐스트가 발행됐다. ‘요즘 연애의 조건은 정치 성향’이란 오해에 관한 내용이었다. 관계 맺기가 쉽지 않은 요즘인데 이유가 뭘까?

우리 사회에 범람하듯 넘쳐나는 오해가 있다면, ‘타인은 완전한 존재’라는 가정이다. 행복한 사람은 완전한 행복을 갖고 있고, 불행한 사람은 완전한 불행을 갖고 있고, 정의로운 사람은 완전한 정의감을 갖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은 없다.

무엇이 오해를 만든다고 생각하나.
 
온라인 문화가 미치는 영향이 크다. 온라인에서 마주하는 건 타인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지만, 매도하기엔 너무 쉬운 환경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특히 지금 우리 사회는 타인을 완전한 악마로 가정하는 걸 즐기는 것 같다. 저격 문화, 사이버 렉카 등이 그렇다. 이런 것들이 우리 사회와 문화 전체를 망가뜨리는 것 같다. 사실 평생을 바쳐도 타인을 다 알 수 없지 않나.

온라인 문화가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알고리즘 시대는 가만히 있어도 즐길 거리가 넘쳐난다. 요즘 그런 말 많이 하지 않나. 약속이 취소되면 오히려 좋아. 이걸 두고 내향인의 성향이라고 말하지만, 이 문장은 시대현상 같다. 도파민 보상기제가 스마트폰에 다 있으니까 약속이 취소되면 오히려 좋은 것이다. 만나러 나가는 건 귀찮고 스마트폰에서 얻는 만족이 훨씬 크니까.

한편으론 ‘갓생’이란 말도 있지 않나. 스마트폰을 줄이고 현실의 삶에 더 몰두하겠다는 뜻으로 쓰이는데.

에리히 프롬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내용으로 자발성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청년 세대가 애용하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글이 공유됐는데, 달리는 댓글이 비슷했다. 나는 자발적으로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반성한다, 자발적으로 살겠다 등등. ‘갓생’은 ‘노오력’에 대한 반작용 같다. 스마트폰에 종속되어버린 것에 대한 반성, 그것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발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아닌가 싶다.

최근 변호사가 된 것도 ‘갓생’을 살기 위함인가. 이유가 궁금하다.

하나로 딱 잘라 이야기하기 힘들다. 이 질문은 작년부터 거의 모든 강연과 인터뷰에서 듣고 있다. 그때마다 답이 약간씩 달라진다. 인생의 결정을 어떤 하나의 이유로 단정 짓는 것도 스스로에 대한 폭력이라 생각한다. 

그 중 하나만 말해준다면?

현실적인 이유를 말하자면, 작가로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컸다. 책을 팔아서 일정한 소득을 유지한다는 건 나에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경제적 지위의 불안정성이 심해지면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청춘 내내 불안정하고 불안한 사람이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그걸 극복하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서 안정적인 직업이 필요했다. 유예된 청춘을 살며 이것저것 도전해본 결과다.

유예된 청춘이라 말하지만, 여전히 청춘을 대표하는 작가로 소개되고 있다.

미디어에서 종종 나를 청년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규정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진짜 청년’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줄 통로가 너무 적다. 언론 등은 기성세대가 장악하다시피 했다. 기성 담론 시장에 청년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전달자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의무감도 있다. 

글 말고도 기울이는 노력이 있나.

개인적으로 청년 작가나 청년 지식인을 발굴하는 데 관심 있다. 최근 운영하는 ‘세상의 모든 문화’라는 뉴스레터에도 데뷔하지 않은 청년 작가들의 글을 싣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것 같다.

청년 세대와 기성 세대, 세대 간의 연결고리가 부재한 것 같다.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기성 세대가 선례가 되는 데 완전히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급격한 산업화, 독재 정권의 폭력적인 문화 안에서 그들에게도 많은 어려움과 힘겨움이 있었을 거다. 그 속에서 민주화를 쟁취하는 등 중요한 일을 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청년 세대가 살고 싶은 삶의 선례가 되지 못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주변에 “엄마아빠처럼 살고 싶은가” 물었을 때,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청년들은 드물 거다. 선례의 부재가 저출생에도 굉장히 큰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례가 없는 청년 세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선례의 부재가 청년 세대에게 기회일 수 있다. 새로운 가치를 기준으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문화 부흥도 전쟁 이후 폐허에서 이뤄진다. 청년 세대가 따르고픈 선례는 없는 사회지만, 동시에 자신들의 세상을 새로이 건설할 수 있다는 창조적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아주 좋게 해석한다면. 

그 과정 중에 기성 세대를 품으려는 시도도 포함될까.

결국 자신을 알기 위해서는 부모를 알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자기 부모로부터 불가피하고도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을 부정하면 오히려 삶이 진실되지 않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 내 안에는 나의 부모도 스승도 친구도 있다. 분명 수많은 타자들이 있다. 그걸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나에게 영향을 준 모든 타자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그래야 한다. 나아가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부모 세대, 기성 세대를 이해해야 한다.

나를 알기 위한 수단으로 글쓰기가 장려되기도 하는데.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라는 책도 내지 않았나.

‘나를 알기 위한 글쓰기’, 글쓰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흔한 캐치프레이즈다. 한편으로 추상적인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심리학적인 이야기다. 글쓰기에 대해 현실적인 이야기를 한다면, 이미 있는 나를 알아간다기보다 반대로 나라는 존재 자체를 만들어가는 여정이다. 내 인생을 서사화하고 구축해 나가는 작업으로써 글쓰기의 역할이 크다고 느낀다. 

독자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게 있다면?

글쓰기 모임이나 독서 모임의 힘이 생각보다 어마어마하다. 많은 모임에서 참여자들이 인생의 경험이라고 한다. 어떤 분은 죽기 전에 떠오르는 순간 중 하나일 것 같다는 말씀도 주신다. 각자 시끄러운 삶을 살다가 고요한 공간에 모여 서로의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귀하다. 지금은 그런 기회가 너무 없다. 타인과 관계를 쌓을 수 있는 모임을 추천한다.

청년이 아닌 작가 정지우는 앞으로 어떤 글을 쓰게 될까.

모든 작가가 같은 말을 한다. 더 이상 쓸 말이 없다, 뭐 쓰지, 맨날 했던 말 또 하는 것 같다 등. 물론 조금씩 변주는 있지만 결국 크게 봐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아닌 타자를 향한 글을 쓰고 싶다. 신생아를 키울 때, 노키즈존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평소의 나 같았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고, 주변의 다양한 아이들을 보며 아동혐오에 저항하는 명료한 주장을 하고 싶었다. 일종의 타자를 향한 글쓰기였다. 그 경험으로 깨달았다. 나를 위해 쓰면 약해지고 남을 위해 쓰면 강해진다.

정원진 에디터

* 2022년 7월 19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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