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임소연 작가 - 신비롭지 않은 모두를 위하여

신비롭지 않은 모두를 위하여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임소연 작가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어떤 책인가?

여성의 관점에서 과학을, 과학의 관점에서 여성을 얘기한 책이다.

페미니즘과 과학기술학이 만나는 지점을 다뤘다. 생소한 분야인데, 페미니즘 과학기술학이란 무엇인가?

우선 과학기술학은 과학 기술과 인문 사회학의 융합 학문이다. 과학자들이 과학 지식 자체를 연구하는 반면, 과학기술학자들은 인문학이나 사회학의 관점으로 과학 기술을 조망한다. 그 중에서도 페미니즘 과학기술학은 여성학의 시각으로 과학 기술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과학사나 과학철학과도 비슷해 보이는데, 과학기술학은 어떤 점이 다른가?

과학기술학의 핵심은 동시대성이다. 예컨대 과학사에선 몇 십 년 전 사료들이 중요하다. 반면 과학기술학에선 지금 당장의 과학 기술이 어떻게 생산, 유통 및 소비되는지에 주목한다. 방법론의 차이도 있다. “과학에서 실험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고 가정하자. 이에 답할 때 과학철학은 철학적인 계보 속에서 개념 중심으로 설명을 이끌어간다. 반면 과학기술학자들은 직접 실험실로 가서 과학자들을 직접 만나고 질문을 던진다. 당위나 규범이 아닌 현상과 현장성에 집중하는 편이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목차
목차 또한 그런 이유에서 이론적 계보가 아닌 특정 이슈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것 같다.

그렇다. 예컨대 3장 〈장은 생각한다〉는 최근 학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장-뇌 축(Gut-Brain Axis)을 다뤘다. 장에도 뇌만큼 신경 세포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핵심이다. 장-뇌 축은 단순히 장을 연구하자는 취지가 아니다. 생물학적 성차를 사회적 성차의 원인으로 볼 것인가, 결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뇌나 생식 기관이 사회적 성차가 발생하는 원인으로 꼽히는 것과 달리, 장의 성차는 한 인간이 자라나는 과정에서 결과로 빚어지는 것이다. 즉 우리 몸 속 기관을 사회적, 정치적 성차를 정당화할 근거로 삼는 시각에서 벗어나려는 최근 학계의 움직임을 담았다.

독특한 시각이다. 뇌나 호르몬이 아닌 장을 연구할 때 기대되는 효과는 무엇인가?

뇌가 중심이 되던 생물학 연구가 새롭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인간의 뇌를 기계화한 인공지능을 살펴보자. 인간의 외형을 갖추고 뇌만 인공지능인 존재는 인간인가 아닌가? 다양한 신체 기관을 연구할 때 이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즉 ‘장에 집중하자’가 아니라, 전형적인 뇌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자는 것이 핵심이다.

9장, 〈진화론과 화해하는 법〉에선 “페미니즘과 진화론의 결합이 서로에게 유용한 자원이 될 가능성”을 다룬다. 양극으로 대립할 것 같은 두 학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상호작용할 수 있는지 궁금하다.

진화론에서는 ‘남자는 사냥을 잘 하도록, 여자는 수렵과 채질을 잘하도록 능력이 발달했다’와 같이 성차에 따른 분류가 전형적이다. 그게 오히려 진화론의 학문적 자유도를 막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한 페미니즘의 비판을 수용할 때, 진화론은 인간의 성장과 발달을 비롯해 인류라는 종 자체에 대해 지금과는 다른 폭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대로 페미니즘은 진화론에서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나?

진화론과 페미니즘 모두 ‘시간’을 중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페미니즘에서 ‘되기(becoming)’란 핵심적인 개념이다. 몸을 비롯해 여러 규정과 규범에 다양한 문제의식을 제기한다. 마찬가지로 진화론에서도 종은 고정된 개념이 아닌, ‘되어 가는’ 개념이다. 진화론의 시간 개념을 적극 차용한 철학자 엘리자베스 그로츠의 《Becoming Undone(2011)》이 좋은 예다. 다양성 또한 두 학문의 중요한 접점이다. 진화론에서 수컷 공작새가 암컷에게 잘 보이고자 장식을 달고 구애하는 것처럼, 종의 관점에선 생존에 불필요한 특징들이 전체 종의 다양성을 증가시키는 데 기여한다. 페미니즘에서도 인간 문화에서 나타나는 비생산적인 욕망 등을 설명할 때 그 방법론으로서 진화론을 활용할 수 있다. 다만 기존의 남성 중심적 생물학에 대한 견제가 전제될 때, 진화론의 통찰이 페미니즘에서도 유의미하겠다.

11장 〈21세기 사이보그의 형상〉에선 사이보그를 “기술과 결합한 생명체”로 넓게 정의했다. 누구나 크고 작은 의학 기술을 경험하는데, 대부분의 현대인은 사이보그라는 의미인가.

그렇다. 우울증 약을 먹고, 성형 수술을 하는 등 기술의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모두 넓은 의미의 사이보그다.

사이보그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돌봄’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도나 해러웨이는 〈사이보그 선언〉에서 기술과 결합하는 쾌감을 강조한다. 그게 SF영화에선 짠 하고 사이보그가 탄생하는 장면으로 구현된다. 수술한 바로 다음날 이질적인 두 존재가 태연하게 결합해 사이보그의 몸으로 살아간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작은 수술 하나를 하더라도 그 수술이 아물 때까지 실밥을 풀고 약을 먹는 등 많은 시간이 걸린다. 아문 뒤에도 염증이 나거나 부작용을 겪는 등 많은 사람들은 기술과 결합한 몸을 갖고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특히 여성이 그렇다. 우리는 기술이 제공하는 멋진 결합의 순간에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그 전후의 과정을 돌볼 필요가 있다.

일례로 성형 수술, 난임 치료, 우울증 치료 등을 다뤘다. 생각해 보면 여성의 몸과 관련된 의료 과학의 부작용이 기술적 해결이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성형 수술에 실패하면 희화화되고,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라 치부되는 일은 흔하다. 난임 치료, 우울증 치료 또한 부작용을 돌보는 과정이 ‘선택’이라는 이름 하에 쉽게 외면 받는다. 정말로 그 기술을 선택한 것이 100퍼센트 본인의 선택인가? 기술이 적용된 몸을 돌보는 과정은 개인들의 책임이 아닌 사회적 논제로 재조명해야 한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민음사, 2022.
지난달 말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낙태권 폐지 판결을 내렸다. 페미니즘과도, 과학과도 맞닿아 있는 이슈인데 한 명의 학자로서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하다.

처음엔 가짜 뉴스인가 싶을 정도로 믿기지 않았다. 여성으로서 덧붙일 말은 많지만 연구자로서 첨언한다면, 임신 중단을 논의할 때 과학이 좀 더 개입했으면 좋겠다.

어떤 형태의 개입인가?

현재는 임신 중단이 페미니즘 이슈로만 비친다. 주로 여성의 몸 결정권과 같은 권리로서 논의된다.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얘기지만 거기에 과학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좀 더 있다고 생각한다. 4장 〈신비롭지 않은 임신을 위하여〉에서 ‘태반’을 짚은 것도 그 때문이다.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다는 건 추상적인 권리나 신성함의 영역이 아니다. 여성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임신 중단 이슈는 여성과 아이를 대치시키고 양자택일처럼 논의를 이끌고 가지만, 사실 과학의 시선으로 보면 출산은 여성의 몸속에 하나의 장기가 생겼다 사라지는 과정이다.

임신과 출산을 지금보다 생물학적인 과정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

그렇다. 현재의 과학은 프로라이프(pro-life)를 지지하는 쪽에만 무게가 실려 있다. 엄마 뱃속에서 움직이는 태아의 형체라든지, 태아가 언제부터 생각을 갖기 시작한다든지에 주목한다. 반대로 여성의 생물학적 몸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길 바라고, 그러기 위해선 과학자들과 의사들이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

혹자는 ‘왜 과학 기술을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봐야 해?’라고 질문할 수도 있겠다. 과학 기술은 가치 중립적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 아닌가.

과학 기술은 전 인류적으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지식이라는 믿음이 있고, 여기에 페미니즘이라는 관점이 섞이면 과학의 가치 중립성을 훼손할 것이라 우려한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반대다. 페미니즘 과학 기술학이 존재하는 이유는 기존의 과학 기술의 편향된 부분을 바로잡기 위해서다. 역사적으로 의학은 남성의 몸을 표준으로 두고 발전해 왔다. 기술의 사용자도, 지식의 소비자도, 연구의 대상도 모두 남성이었다.

과학 기술의 중립이 자칫 위험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기술의 부작용을 사회가 아닌 개인의 책임으로 보는 시선도 여기서 기인하지 않을까.

그래서 과학 기술은 ‘가치 중립’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치적이어야 한다. ‘어떤 가치를 지향할 것이냐‘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 필요한 영역이다. 지금까진 백인 중산층 남성의 가치를 중심으로 연구를 이뤄왔다면, 이제는 페미니즘 시각에서의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

페미니즘 과학기술학은 아직 주류 학문으로 주목 받기 이전의 단계다. 향후 우리나라에서 페미니즘 과학기술학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신생 학문이 성장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라고 생각한다. 대학에 학과 혹은 전공 과목이 개설되는 것이다. 네이밍의 힘도 크다.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라고 본인을 정체화하지 않더라도 페미니즘과 과학 기술을 접목시켜 연구하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지금까진 흩어져서 연구되던 것들의 하나의 구심점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말씀을 듣고 보니 여성학은 대체로 철학, 사회학, 인류학 등 여러 전공 속에 흩어져 있다.

여성학 연구는 주류 학문 내에서 소수 분과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실상 페미니즘 연구자들은 모든 분야에서 소수다. 물론 여성철학회, 여성사학회처럼 독자적인 학회를 가지면 좋겠지만 그게 어렵다면 서로 연결되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기술학자들과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연결되고, 여성 과학자와 여성 공학자들이 연결되는 것이다.

과학기술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후배 여성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우선 이 학문이 얼마나 재미있는 분야인지를 말해 주고 싶다. 아직 제도권 내 주류로 안착하진 못했으나, 그만큼 우리가 새롭게 시도할 수 있는 방법론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또한 본인이 살면서 갖고 있던 문제 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분야도 바로 페미니즘 과학기술학이다. 연구와 삶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큰 동력이 되고, 심리적 안정감으로도 이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다.

학창 시절 과학고등학교를 졸업해, 과학기술학자가 아닌 과학자로서 커리어를 시작하셨다. 과학 자체를 전공하는 여성들에겐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 궁금하다.

이공계의 능력주의 신화에 본인을 너무 혹사시키진 않았으면 좋겠다. 일과 삶의 구분도 없이 24시간 내내 수학 문제를 풀고 프로그래밍을 하는 것이 곧잘 과학자로서의 이상적인 삶처럼 그려진다. 많은 분야가 그렇겠지만, 과학은 특히 본인이 엄청나게 창의적이지 않으면 ‘이 길이 과연 내 길이 맞는 걸까’ 의심하게 만드는 분위기가 만연하다. 그런데 실제 과학자들의 삶을 살펴보면 실험실 생활을 충실히 하고, 묵묵히 논문을 쓰고, 스스로를 꾸준히 훈련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좋은 과학자로 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 소모적인 걱정은 이젠 접어두고, 오히려 주변 여성 과학자들과 교류하고 연결됐으면 좋겠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은 작고 컴팩트한 책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으며 추가적으로 궁금한 내용, 아쉬운 지점들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며 많은 부분 해소됐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오랜 연구 공력이 돋보이는 두꺼운 책을 내고 싶어한다. 나라고 왜 안 그랬겠나. (웃음) 그러나 그렇게 총체적인 내용을 아우르는 책을 쓰려면 10년은 걸릴 것이다. 완벽한 책이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시점에 질문을 던지는 책을 쓰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도구다. 혼자서 음미하며 읽는 책 말고, 지금을 살아가는 후배 및 동료 여성들이 함께 읽고 질문을 던지는 책인 동시에 서로 연결되는 매개가 됐으면 한다.

이다혜 민혜린 


* 2022년 8월 2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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