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행동 황성철, 홍수경 상임활동가 - 숫자로도 기록되지 못하는 죽음

숫자로도 기록되지 못하는 죽음

홈리스행동 황성철, 홍수경 상임활동가


지금 서울역으로 향하는 계단에는 432송이의 장미꽃이 놓여있다. 한 송이, 한 송이에 모두 이름이 적혀있다. 적절한 주거가 없어 사망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홈리스의 생명을 상징하는 장미다. 우리는 그들을 모른다. 그들도 우리를 모른다. 그런데 왜 이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는 것일까. 왜 우리는 이 추모에 관해 보고, 듣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시민단체 홈리스행동의 황성철, 홍수경 상임활동가에게 들어봤다.

홈리스 추모제, 간단히 소개해 달라.

홍수경 (이하 홍) ; 비적정 거처, 즉 열악한 거처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분들을 추모하는 자리다. 그리고 그러한 죽음을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지, 그 대책을 요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빈민 운동 단체들이 기획단 형태로 함께 모여 2001년부터 진행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삶에 무관심한 시대다. 우리가 홈리스의 삶과 죽음에까지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황성철 (이하 황) ; 사실 대한민국에서 주거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부동산은 부의 축적이자 상징이 되어있지 않나. 이런 상황 속에서 주거 문제를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과 홈리스가 사실상 그렇게 다르지 않다.

 ; 예전에는 임시적인 거처라고 여겨왔던 원룸이나 고시원 등이 장기적인 거주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의 비정규직 비율 등을 생각해 보면 쉽사리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이러한 현실은 지금 청년들이 가장 가까이서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거주 문제에 관해서는 우리 모두 당사자다. 같은 당사자로서 거주 문제 탓에 사망한 동료 시민의 죽음을 타인의 죽음으로만 느낄 수는 없지 않을까.
©홈리스행동
청년 세대를 언급해 주셨는데, 홈리스와 청년은 언뜻 생각하기에 잘 연결되는 단어가 아니다.

; 사실, 우리가 홈리스라고 하면 주로 거리 노숙인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노숙인복지법에서 이야기하는 노숙인은 열악한 거처에서 생활하는 사람 전반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쪽방촌이나 반지하, 고시원 등에 거주하는 모든 이를 포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많은 수의 청년이 당사자성을 갖는다고도 볼 수 있겠다.

; 그렇다. 게다가 물리적 거처가 열악할 때 사회적 관계나 정서적 관계까지 약해지고, 끊어진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우리가 모두 다 함께 이야기해야 할 중요한 의제라고 할 수 있다.

; 빈곤의 악순환을 끊을 수 없는 이유는 주거환경에 있다. 홈리스를 단순히 주거가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로만 바라본다면 구조를 바꿀 수 없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 자신이 주거로 인한 빈곤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는 분명 빈곤을 개인의 실패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가난한 삶은 개인의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이라는, 개인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인식이다. 홈리스를 향한 시선에도 분명 그러한 생각이 존재하지 않나?

; 잘 몰라서 그렇다. 그런 시선은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삶의 주름 속에 어떤 상황들이 숨겨져 있는지 몰라서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일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이 있고 정부에서 지원해 주는 일자리가 있지 않냐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런데 집이 없다는 이야기는 밤에 돌아가 몸을 뉘고, 에너지를 충전할 장소가 없다는 뜻이다. 공공 일자리를 아무리 만들어도 성실하게 노동할 수 없는 환경이다. 그래서 주거 지원이 중요하다. (노숙인이) 일자리보다 집을 절실하게 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숙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우리 사회가 만들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 보이지 않는 존재이길 바라는 분위기가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추모제가 열리고 있는 이곳, 서울역만 해도 많은 홈리스가 살고 있지만 그들의 존재는 그저 부정당할 뿐이다.
©홈리스행동
사실, 서울역 주변은 예전부터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 아니었나?

; 맞다. 60년대만 해도 지방에서 갓 올라온 사람들이 처음 밟는 서울 땅이 바로 서울역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동자동 쪽방촌 등이 만들어지고 인력시장도 생겼다. 이 사람들에게는 지역 공동체, 병원 등과 같이 삶에 꼭 필요한 것이 모여있는 장소가 된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장소에서 이들을 못 본 체한다.

서울역뿐만 아니라 역사에서 노숙인을 많이 만나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 서울역, 용산역, 영등포역, 청량리역. 이런 공공 역사가 홈리스 밀집 지역이 맞다. 무방비 상태의 거리보다는 공공 역사가 당사자 입장에서는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어느 정도 외부와 분리되어 있고 화장실도 있다. 또 유동 인구가 많다는 점도 안전상으로는 유리한 부분이다. 그런데 이런 공공 역사가 민자 역사가 되면서 상업 시설이 많이 들어오고, 홈리스를 밖으로 쫓아내는 상황이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상황이 발생하나?

; 용산역 등지에서 홈리스의 짐을 한낱 쓰레기로 치부해서 일괄 회수해 간 사례가 있다. 홈리스에게 있어 짐은 그들의 전 재산이다. 그런데 역사에 근무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저 더러운 것, 청소해야 할 것으로 보일 뿐이다. 만약 홈리스라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되었을까?

이번 추모제에서는 여성 홈리스에 관해서도 자세히 다룬다. 사실 우리가 흔히 노숙인이라고 하면 중년 남성을 떠올리게 되는데?

; 맞다. 서울역 지나가면서 만나는 홈리스도 대부분 중년 남성의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 여성 홈리스는 분명히 있다. 다만 그 존재가 인식되지 못할 뿐이다.
〈여성 홈리스가 나눈 집 이야기〉 전시 중, 사계절의 작품(부분) ©홈리스행동
홈리스는 숫자로도 기록되지 못한다. 그래서 정부의 복지망에서도 탈락하기 일쑤다. 그런데 여성 홈리스는 더하다는 이야기인가?

; 보건복지부에서 5년마다 노숙인 실태조사를 한다. 근데 거리와 쪽방, 시설 등을 중심으로 조사를 시행한다. 그런데 여성 입장에서 거리에서 생활한다면, 그리고 본인의 동선이 드러난다면 폭력에 노출될 확률이 높아진다. 그래서 여성 홈리스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적은 돈을 내고 지낼 수 있는 찜질방 같은 임시 거처를 전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실태 조사 자체가 남성 홈리스의 거처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이들의 존재는 더욱더 보이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통계에는 어느 정도로 잡히나?

; 통계에는 20퍼센트로 잡힌다. 현실은 다르다. 그런데 정책은 통계에 맞춰 나온다. 결과적으로 여성 홈리스를 위한 정책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이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를 꾸준히 하고 있다.

그런데 요구가 쌓여도 달라지는 것이 많지는 않은 것 같다.

; 맞다. 팬데믹 기간을 지나면서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홈리스를 둘러싼 구조적 문제가 많이 드러났고 관심도 높아졌다고 느낀다. 그런데 거기까지다. 달라지는 것이 없다. 과거의 반인권적인 제도를 넘어설 수 있는 확장이 필요하다는 데에 많은 분이 공감대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번 추모제의 슬로건도 “코로나 종식을 넘어, 홈리스 차별과 배제가 종식된 세계로”이다.

사망 이후에도 홈리스는 사람으로서 응당 받아야 할 추모를 받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고?

; 법적으로 무연고자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정말로 연고자가 없는 경우나 연고자를 알 수 없는 경우, 그리고 연고자가 시신 인수를 거부하는 경우를 뜻한다. 그런데 홈리스의 경우 가족과의 연결고리가 이미 끊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되면 지자체에서 보통 장례를 치르게 된다. 그나마 공용 장례 제도조차 없는 지자체도 있다.
 
©홈리스행동
그렇다면 생전에 함께 생활하셨던 분들, 두 분과 같은 활동가 여러분이 추모의 시간을 가질 수는 없나?

; 지자체에 따라 다르지만, 빈소를 차리지 않는다. 그리고 연고자가 찾아오지 않는 이상 화장을 마친 유골을 보여주지도 않는다. 홈리스는 사망한 후 장사법 상으로는 ‘시신 처리’의 대상일 뿐이다. 위생 보건상의 처리 말이다.

결국 홈리스는 사망 후 추모받을 권리도 갖지 못한다는 얘기다.

; 그렇다. 나 또한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았던 분이 돌아가셨는데, 연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제대로 장례를 치러드리지 못했다. 이런 점도 개선할 수 있도록 요구 중이다.

; 홈리스는 동료 시민이다. 그들도 물건을 구입하면 자연스럽게 소비세를 내게 된다. 이들의 장례와 추모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다만, 공영 장례에 왜 세금이 쓰여야 하는지를 묻는 목소리도 있을 수 있는데?

; 장례 문화가 왜곡되어있다. 못해도 천만 원 돈이 들어가는 장례문화는, 사람의 죽음을 사업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생긴 것이다. 공영 장례를 가난한 사람들만 이용하는 것이라고 보는 시선이 몹시 위험하다. 장례와 추모에 공공성을 부여하고 누구나 애도할 수 있으며 누구나 애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홈리스는 적절하지 않은 주거 환경에 사는 모든 사람이라고 강조해 주셨다. 그렇다면 적절한 주거가 가져올 수 있는 변화가 무엇인지, 왜 우리에게 지금 홈리스 추모제가 필요한지 말씀해 달라.

; 할머니 노숙인 한 분에 관한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다. 이분이 원래는 서울역 근처 호텔 화장실에서 지내셨는데, 각종 지원을 받으면서 고시원을 거쳐 결국 공공 임대 주택에 살게 되셨다. 그런데 집이 생기자 이분에게 애착하는 물건이 생기기 시작했다. 정을 줄 수 있는 물건 말이다. 그래서 옷 한 벌도 하나하나 고민해서 구입하기 시작했다. 안정된 거처가 생기고 나니 동네 소식에도 관심을 기울이신다. 지역 커뮤니티에 소속되는 것이다. 자신의 거처가 생긴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신아람 에디터

* 2022년 12월 20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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