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B 김세연 전략고문 -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회사 만들기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회사 만들기
DRB 김세연 전략고문


동일고무벨트는 1945년 부산 동래에서 출발한 고무 제품 제조 기업이다. 2024년 연결 기준으로 동일고무벨트를 포함한 DRB 전체 매출은 약 7500억 원이다. 업계에서 80년간 신뢰를 쌓아 왔고 매출도 해마다 늘고 있다. 그런데도 DRB는 기업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관성대로 사업을 이어 가면 가까운 미래에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DRB는 데카르트적 세계관을 폐기하고 회사를 유기체로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 작업을 최근 발행된 《동일고무벨트 방식: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회사 만들기》라는 책에 담았다. DRB 전략고문을 맡고 있는 김세연을 인터뷰했다.
최근 5년간 매출은 50퍼센트, 영업 이익은 70퍼센트 늘었다. 그런데 왜 조직을 바꿔야 하나?

거대한 세 파도가 동시에 밀려오고 있다. ‘후기 노동 경제(post-labor economy)’가 부상하고, 기후 재난이 일상이 되며, 다행성 문명이 현실이 된다. 특히 AI와 로봇이 주도하는 기계 문명의 부상은 우리가 상식으로 여겨 온 거의 모든 것을 바꿀 것이다. 육체노동에 이어 지식 노동도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는 시대가 머지않아 시작된다. 이제까지 해왔던 방식을 고수하면 기업도 인류도 더는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고무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온 세상 걱정을 다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자리 잡은 업종과 직결된 환경 변화만 인식하면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차원의 변화밖에 보지 못한다. 근본적인 대응을 할 수 없다. 인식의 범위를 최대한 확장해야 해결 가능성도 확장된다. 그래서 우리는 개별 기업이 맞이한 위기가 아니라, 인류가 맞이한 위기를 우리의 위기로 인식하고 생존을 위한 변화의 문을 최대한 활짝 열어젖히기로 했다

기존 조직을 고쳐 쓸 수는 없을까?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안정성과 확실성을 전제로 설계된 조직이 가장 먼저 무너진다. 바로 트리 구조의 조직이다. 지금 세계는 기술, 경제, 사회, 정치가 상호 작용하며 예측 불가능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런데 트리 구조는 변화와 무질서를 관리하지 못한다. 위계는 고정된 역할과 경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1차원 조직은 다차원 현실을 감당할 수 없다. 선형적 구조의 기존 패러다임을 해체할 때가 되었다.
책에서 기계적 조직을 해체하고 유기적 조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기적 조직은 위계가 아니라 연결을 중심으로 작동한다. 역할은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이며, 커뮤니케이션은 수평적으로 이루어진다. 정보는 실시간으로 흐르고, 의사 결정은 특정 개인이 내리기보다 전체 시스템이 감응하고 반응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트리 구조에 맞서 1970년대에 이미 ‘리좀(rhizome)’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리좀은 고구마의 뿌리줄기처럼 중심 없이 확산한다. 리좀에는 시작점도 종착점도 없다. 모든 지점이 동등하게 중요하고, 다른 지점과 자유롭게 연결될 수 있다. 앞으로의 조직은 나무가 아니라 리좀이 되어야 한다.

그런 조직이 기술적으로 가능할까?

이 모델이 작동하려면 고도로 연결된 정보 시스템과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리좀 개념이 나온 1970년대에 기업들은 인터넷은커녕 개인용 컴퓨터조차 쓰지 않았다. 지금은 다르다. AI와 클라우드 기반 인프라가 깔리면서, 유기적 조직이 이론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기술적 환경이 만들어졌다. 인터넷과 클라우드, 블록체인은 모두 리좀적 사유와 맞닿아 있다. 이들은 중앙 통제나 위계가 아니라 연결을 전제로 작동하고, 명령보다는 반응과 상호 작용을 통해 조정된다. 조직도 그래야 한다.

리좀 조직은 그럼 어떻게 움직이나?

리좀 조직은 둥둥 떠 있는 수많은 노드(node)와 그 사이를 잇는 엣지(edge)로 구성된다. 인간과 AI, 로봇이 감지한 정보는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새로운 상황이 발생하면 그 일을 가장 잘 아는 노드들이 빛을 내며 떠오른다. 예컨대 신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누구 소관인지 결재를 받았는지 따지는 게 아니라 그 업무에 최적화된 노드들이 반짝이며 서로를 호출하고 즉시 연결된다. 의사 결정은 중앙이 아니라 집단 지성에 의해 이루어지고, 명령은 연결로 대체된다.

전형적인 기업의 모습과 완전히 다르다. 그 조직을 조직도로 표현한다면 어떤 형태가 될까?

이 체계에서는 조직도 역시 어느 순간에도 고정된 형태를 가질 수 없다. 살아 있는 인체가 항상 움직이고 변화하듯, 조직도는 엑스레이, CT, MRI처럼 찰나에 포착한 단면으로만 표현될 수 있다. 정태적이고 절대적인 조직도라는 발상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사유로만 가능한 영역 아닌가? 조직도를 그릴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조직이라면, 구성원조차 자신이 몸담은 조직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책을 아무리 달달 외워도 책으로만 자전거 타기를 익힐 수는 없다. 우리 실험이 현실에서 구현되는 체계와 문화가 되려면 오랜 시간의 반복과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모든 구성원이 같은 속도로 변화에 적응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존 조직을 유기적 조직으로 전환하고 새로운 운영 체계를 본격적으로 가동하기까지 10년의 이행기를 설정했다.

새로운 운영 체계는 어떤 모습인가?

DRB가 만들고 있는 새로운 기업 운영 체계는 ‘생성형 변이 엔진(Generative Mutation Engine)’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조직 내에서 해체해 보관하고 있는 개별 요소들이 이 운영 체계를 통해 자유자재로 편집되고 조합되면서 새로운 개념과 실체가 만들어지게 될 것이다.

해체해 보관하고 있는 개별 요소란 무엇인가?

조직의 모든 지식, 재료, 방법, 설계, 실험, 성공, 실패 데이터를 의미한다. 다양한 원재료의 물성과 가격 정보, 경쟁 제품에 대한 분석, B2B 고객사의 사업 계획, 구성원의 전공과 경력, 새로운 시장, 공법 관련 데이터 등이 모두 노드가 된다. 이 데이터세트에서 AI와 인간 구성원이 노드 간 복잡한 관계를 탐색하고 편집하고 재조합하면 인간의 인지를 초월하는 것들을 광범위하게 생성해 낼 수 있다.

생성형 AI가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방식과 비슷하다.

기술 환경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가설을 세웠다. 제품의 생애 주기 전 과정에서 우리가 축적하는 방대한 데이터를 한곳에 보관하고 이들 간의 새로운 조합을 만든다면, 인간의 상상력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을 광범위하게 생성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DRB는 제조 기업이다. 소프트웨어 기업처럼 실시간으로 제품을 업데이트하고 릴리즈할 수는 없다.

그렇다. 우리의 DNA는 제조에 있다. 노드와 엣지는 AI의 도움을 받아 거의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다. 감각과 판단이 유기체만큼 빨라지는 것이다. 남은 건 행동이다. 감각과 판단이 행동으로 이어지기까지의 리드 타임을 최소화하는 것이 생존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디어와 설계를 프로토타입으로 빠르게 제작하는 물리적 기반도 함께 갖추어 나가고 있다.

2022년 10월에 조직 전환 작업을 시작했다. 3년이 흘렀다. 어떤 변화가 있었나?

퓨처랩스(Future Labs)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기존 조직과 공존하면서 실험과 실증을 반복하며 진화하는 실험적 가상 조직이다.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작고 가볍고 빠르게 시제품을 제작하고 실증하는 빠른 프로토타이핑에 집중한다. 현재 자율주행 지게차를 개발하는 AFL(Autonomous Forklift) 랩, 개인용 호흡 솔루션을 개발하는 아이테르(Aether) 랩, 4족 로봇의 발을 제작하는 로보풋(RoboFoot) 랩 등 10개의 랩이 활동하고 있다.

여러 랩이 자생적으로 생겨나도록 내버려두면, 어느 순간에는 통제하지 못할 정도의 수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새로운 기업 운영 체계의 초기 모델 정착을 위해 당분간은 랩 수를 늘리기보다는, 먼저 초기 10개 랩을 정착시키고 안정화할 생각이다. 중요한 건 랩의 수를 늘리는 일이 아니다. 랩들 사이의 연결과 협업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관찰하고, 그 속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구조와 관계에 적응하는 일이다. 그래야 나중에 랩이 100개, 500개, 1000개로 늘어나도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우리는 성장과 안정의 사이클을 반복하며 종국에는 기하급수적인 확장도 수용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고자 한다.

좋게 말하면 다양한 아이템을 다루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선택과 집중’을 하지 않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

변화가 빠르고 극심한 세계에서 선택과 집중은 위험을 극대화한다. 하나의 선택이 옳다는 것을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씨앗을 수없이 뿌리기로 했다. 다른 기업이 열 가지를 시도할 때 우리는 백 가지, 천 가지를 시도하려 한다. 여기에서 싹이 튼 것들이 서로 교차하고 결합하며 하이브리드가 나오고 시너지가 일어난다.

종의 탄생 과정처럼 조직에서도 다양한 형질이 짝을 이루는 과정에서 변이가 일어나는 것인가?

그렇다. 1945년에 시작한 고무 산업에서 축적한 애플리케이션 경험과 1990년부터 시작한 자동화 및 로봇 사업을 연결해 하이브리드를 만들어 내면 종 다양성이 폭발하는 순간이 올 수 있다. DRB는 다양한 제품, 다양한 공정, 다양한 고객을 보유하고 있다. 예컨대 고객 산업군만 해도 농업, 광업, 건설업, 제조업, 물류, 헬스케어에 걸쳐 있다. 이 ‘잡다함’이 우리의 강점이다.

사실 제조업은 변화에 둔감하다는 인식이 있다.

제조업은 반복을 전제로 최적화된 산업이다. 새롭게 잘하기보다 정확히 잘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더 늦기 전에 시도라도 해볼 수 있었던 것은 수년간에 걸쳐 축적된 사전 정지 작업 덕분이었다. 2010년대 중반부터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문화적 여건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정말 열심히 해왔다.

회사의 기존 주력 사업과 신사업이 충돌할 우려도 있는데.

내부적으로 미주 대륙과 유럽 대륙 비유를 활용한다. 미래 성장 활동을 하는 구성원은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 탐험에 나선 선발대다. 초반에는 선발대가 먼저 상륙하고, 이후 기반이 다져지면 더 많은 이들이 순차적으로 건너가 정착지를 확장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럽 대륙, 즉 기존 고객을 위한 사업 활동이 소홀히 되어서는 안 된다. 유럽 대륙 구성원은 새로운 기술을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고, 신대륙으로 이주한 구성원의 몫까지 유럽 대륙을 수호하고 지속해서 발전시켜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상호 격리된 것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한다.

미주 대륙 이주 작업을 모두 마친 2032년의 DRB는 어떤 모습일까?

알 수 없다. 우리가 만드는 새로운 운영 체계에서는 하나의 방식이나 방향, 중심이 정해져 있지 않다. 조직 내부에서 예상하지 못한 요소들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결합해 새로운 종이 튀어나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10년 뒤 우리가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다. 조직이 방향을 잃어서가 아니라, 정확한 방향을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다. 예측 불가능한 환경에서는 예측 가능한 조직이 가장 취약하다.

글로벌 정치·경제 질서가 흔들리고 기술 발전이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는 대변혁기에, 10년이라는 기간을 설정하고 조직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 시점이 되면 이미 세상이 완전히 달라져 있을 텐데.

우리는 생명체처럼 자극에 반응하는 회사를 만들고 있다. 기존 형질만으로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어렵게 되면, 내재해 있었으나 발현되지 않았던 형질을 끄집어내어 쓰면 된다. 이건 자연에서는 우연한 돌연변이로 나타나지만, 인간이 만든 기업이라는 사회 경제 조직에서는 초기에 인위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번 익숙해지고 나면 훨씬 자연스럽게 전개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플라이휠의 첫 바퀴를 돌리고 있다. 처음엔 1단 기어의 속도로 움직이겠지만, 어느 시점이 되어 6단, 7단 기어로 돌아갈 수 있게 되면, 변화무쌍한 환경에 맞게 우리도 변화무쌍하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1945년에 설립된 회사다. 80년 역사가 조직 전환 작업에 걸림돌이 되지는 않나?

우리는 대기업보다는 빠르고 유연하게, 스타트업보다는 시간을 견뎌 내며 새로운 실험을 감행할 수 있는 중간계에 자리 잡고 서 있다. 이 여정은 절박하지만, 희망은 있다.

기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어려운 작업에 나섰다. 다시 묻는다. 왜 이 일을 하나?

목표는 생존이다. 방법은 반응이다.

글 이연대 에디터
* 2025년 10월 30일(목) 19:00~20:30, 스틸북스에서 《동일고무벨트 방식》 북토크가 열립니다. DRB 전략고문 김세연, 파이오니어팀 신종일, 미래성장부문 이휘정 님이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회사를 만들어 온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저자들을 직접 만나 대화해 보세요. 참가 신청은 여기서 할 수 있습니다.

* 2025년 10월 24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