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립 노 모어〉를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가면’이다. 펀치드렁크의 다른 공연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펠릭스: 가면은 관객이 군중을 따라가는 대신 자신만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면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본능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람과는 완전히 반대다. 가면은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
[1]의 ‘중립 가면(neutral mask)
[2]’ 개념을 차용한 장치다. 배우의 연기와 상관없이 가면은 개방적이며 무표정하므로 어떤 감정 상태도 담아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관객이 일종의 열려있는 그릇이 되어 공연이라는 파도의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자유로이 서핑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무대 장치와 어우러져 다른 관객들에게는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관객 모두가 공연 속 유일한 관객인 듯한 감각을 얻게 된다.
맥신: 펀치드렁크의 가면에는 다양한 상징이 겹겹이 담겨 있다. 시각적으로 관객과 공연자를 구분하는 동시에 관객을 유령으로 만든다. 존재의 은유적 코러스가 되는 것이다. 가면은 관객의 영화적 렌즈로 기능하는 동시에 극장의 좌석이기 되기도 한다. 투명 망토이면서 관음의 수단이다. 어떤 관객은 가면이 제공하는 익명성 덕분에 우리가 구축한 세계를 더 깊이 파고들고, 그 열병 같은 꿈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자신감을 준다고 증언한다.
〈슬립 노 모어〉 외에도 펀치드렁크의 최신 작품들이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펠릭스: 〈The Burnt City〉는 〈슬립 노 모어〉의 업그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가면을 쓰고 안무 중심의 공연 언어를 사용하는 작품으로, 두 개의 경쟁 관계에 있는 건물에서 진행된다. 반면, 〈Viola’s Room〉은 완전히 새로운 양식을 선보인다. 〈슬립 노 모어〉의 ‘1대1 장면’에서 착안해, 그것만으로 1시간짜리 공연을 만들었다. 관객은 단 6명이고 배우는 오디오를 통해 관객의 귓가에서 속삭인다. 우리 작업 중 가장 친밀한 경험이며, 완전히 새로운 동시에 펀치드렁크 특유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펀치드렁크의 작업은 공연과 가상 기술, 신화와 영화적 매체 등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한다.
펠릭스: 예술가로서 서로 다른 영역을 교차시키고 융합할 때 진정한 마법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마찰은 불꽃을 만든다. 두 재료의 마찰이 만들어 내는 전기적 에너지가 합쳐지면, 부분의 합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온다. 그것이 창작의 묘미이다. 우리는 관객이 놀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도 놀라고 싶다.
펠릭스 배럿의 공간 연출과 맥신 도일의 안무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내고 있나?
펠릭스: 모든 것을 함께 한다. 끊임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예를 들어, 맥신이 리허설에서 아름다운 안무를 짜면, 우리는 그 안무에 맞춰 공간을 만든다. 그다음 안무가 벽과 천장을 타고 공간 속을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다시 공간을 조정한다. 이렇게 서로의 작업이 계속 바통을 주고받듯 이어진다.
맥신: 공간 연출은 곧 안무이다.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협업한다. 펠릭스는 빛과 디자인, 사운드를 큰 그림에서 보고, 나는 배우들과 함꼐 움직임을 창조하며 드라마투르기
[3]에 집중한다. 〈슬립 노 모어〉는 우리의 첫 협업이었고, 겹치는 부분이 정말 많았다. 〈슬립 노 모어〉 출연진의 80퍼센트가 현대 무용수다. 공연 언어에 현대 무용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단, 그들은 동시에 훌륭한 배우이기도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다.
구체적인 협업 방법이 궁금하다. 모든 것을 꼼꼼히 맞추는 편인가?
맥신: 우리의 협업 과정에는 정말 많은 불확실성과 여백이 있다. 예술가라면 알 수 없는 상태를 견디고, 기다리고, 듣고, 놀 줄 알아야 한다. 자신감이 필요한 것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포착하고 다양한 아이디어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협업은 늘 도전적이다. 내려놓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이다.
펠릭스: 정말 많은 것을 계획한다. 그러나 공연의 규모가 클수록 예상치 못했던 발견이 생긴다. 또, 어떤 캐릭터나 스토리를 따라가느냐에 따라서도 돌발 변수가 발생한다. 그래서 최대한 계획하되 열려있는 것, 그리고 창의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작은 기회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특히 주류보다는 실험적 무대를 꿈꾸는 이들이 더욱 그렇다. 청년 예술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원칙이 있다면?
펠릭스: 우리도 최근 이 부분에 관해 다시 사유했다. 개인적으로 받았던 최고의 조언은 “말하지 말고 그냥 하라(Don’t talk about it, do it)”는 것이었다. 대학 진학 전 광고 촬영 현장에서 러너(한국의 경우 PA에 해당)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의 한 사진가가 해줬던 말이다. 아이디어를 말로만 풀면 마치 이미 결과를 낸 것 마냥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현실로 가져와 실행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실행에 꼭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우리도 초창기에는 주말을 쪼개고. 가진 돈을 털고, 친구와 협업자들의 도움으로 공연을 만들어 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관객도 만날 수 있다.
맥신: 나만의 협업 그룹을 만들고, 그 관계를 소중히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작품을 만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예술, 문학, 문화 속에 자신을 흠뻑 담그는 것이다. 다른 문화권의 축제를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을 권한다. 생계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하되, ‘할 말’을 만들어 가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을 권한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은 무언가를 말할 줄 아는 예술가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글
신아람 에디터
* 2025년 10월 10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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