펀치드렁크 펠릭스 바렛 예술 감독, 맥신 도일 안무가 - 〈슬립 노 모어〉는 권력을 얻는 경험이다

가장 연극적인 경험으로의 초대
펀치드렁크 펠릭스 바렛 예술 감독, 맥신 도일 안무가


연극을 관람하는 관객에게 선택지는 없다. 공연은 이미 짜여 있고, 관객은 응시할 뿐이다. 철저한 수용자다. 현실이 늘 그렇듯, 상황의 주도권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주인공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예술의 미덕은 의심하고 전복하는 것이다. 영국의 이머시브 공연 창작 집단인 ‘펀치드렁크’는 극장의 무대와 객석 사이의 권력관계를 의심하고 전복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의 배경을 1930년대 스코틀랜드로 옮긴 연극 〈슬립 노 모어〉를 통해 관객이 권력을 쥔 연극을 선보인 것이다. 대사 한마디 없이 진행되는 이 연극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이 없다. 건물 전체가 무대인 동시에 객석이다. 배우들은 말 없이 공간 곳곳을 누비고 캐릭터의 서사를 전개한다. 관객은 〈슬립 노 모어〉의 세계를 배회하며 자신이 선택한 서사를 만난다. 2003년 런던에서 시작해 2011년에는 뉴욕에 자리를 잡았고 14년간 공연이 이어졌다. 전 세계 누적 관객 265만 명을 기록했다. 그리고 2025년 8월 옛 대한극장 건물에서 새로운 〈슬립 노 모어〉가 시작되었다. 펀치드렁크의 예술 감독이자 〈슬립 노 모어〉의 연출을 맡고 있는 펠릭스 바렛(Felix Barrett)과 공동 연출 및 안무가인 맥신 도일(Maxine Doyle)에게 규칙을 깨고 새로운 예술의 방법을 창조한 이유와 방법에 관해 질문했다.
〈슬립 노 모어〉를 관람한 관객들은 낯선 경험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무대와 관객의 경계가 사라지는 경험이다.

펠릭스 바렛(이하 펠릭스): 관객들에게 권력을 돌려주고 싶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16세기 중반)의 런던에서는 무대가 만족스럽지 않을 경우 관객이 양배추를 집어 던지곤 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공연했던 글로브 극장에서 말이다. 현대의 런던은 다르다. 연극 무대 앞에서는 정해진 규칙을 따라야 한다. 공연이 재미없다고 느껴도 자리를 떠날 수조차 없다. 상식적이지 않다. 권력이 창작자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진 것이다. 나는 관객을 중심에 두고 싶었다.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것을 찾을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싶었다. 다양한 취향을 가진 관객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연극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펀치드렁크는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re)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대중에게 선사했다. 이 장르만의 특별함은 무엇일까?

펠릭스: 관객이 스스로 ‘권한을 쥐고 있다’라는 감각이다. 이 연극을 관객 자신이 통제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는 이야기를 따라간다. 다른 누군가는 연극의 세계관을 탐험하거나 감각적인 바에서 멋진 밴드 공연을 선택하기도 한다.
〈슬립 노 모어〉의 관객들은 보는 대신 체험한다. 버려진 창고를 낡은 호텔로 개조한 공연장에는 100개가 넘는 방이 있고, 관객들은 돌아다니며 배우들의 퍼포먼스를 감상한다. 배우 옆에 바짝 붙어 서도 되고, 방 안에 있는 소품을 만지거나 냄새를 맡아도 된다. 시각, 청각은 물론 후각과 촉각까지 자극하는 공연은 관객의 몸에 생생한 경험으로 각인된다. (《SLEEP NO MORE》 中) ⓒ 미쓰잭슨
펀치드렁크는 무대와 객석 간의 권력관계를 전복해 왔다. 창작자로서 공연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맥신 도일(이하 맥신): 퍼포먼스, 조명, 사운드, 디자인, 관객의 몰입 모두 우리 공연에서는 중요한 요소다. 덜 중요한 것은 없다. 이 모든 것이 관객은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우리는 관객이 이 공연을 ‘자신만의 경험’으로 느끼길 바란다. 스스로 선택할 권한을 갖고, 게임을 하듯 참여한다. 길을 잃고, 익숙한 영역을 넘어선다. 관객이 스스로를 수동적인 관람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펠릭스: 우리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권력을 얻는 경험’이다. 관객이 자신의 경험을 직접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경험이 각자의 삶 속에서도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슬립 노 모어〉는 기쁨, 슬픔, 질투 등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담고 있다. 관객이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훌륭한 예술은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 공연 역시 그러하길 바란다.

〈슬립 노 모어〉는 초연 당시 아방가르드 실험극으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곧 〈슬립 노 모어〉를 비롯한 펀치드렁크의 공연들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전환점이 있었나?

펠릭스: 국립 극장의 후원과 홍보가 계기였다. 당시 우리는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 언더그라운드였다. 그런데 국립 극장이 우리를 인정해 줬고, 새로운 관객들과 만날 기회가 되었다.

맥신: 맞다. 2006년 작품 〈파우스트(Faust)〉였다. 당시 영국 국립 극장의 지원으로 2주간의 기획 기간을 갖게 되었고, 이를 통해 공연자들과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었다. 또, 리허설을 할 시간이나 펠릭스와 함께 사전 작업을 할 시간도 확보했다. 공연이 개막했을 땐 국립 극장 차원에서 마케팅을 진행해 더 많은 관객층에 우리 작업을 소개할 수 있었다. 다만, 당시 국립 극장을 찾은 관객 중 많은 이들이 작품을 보자마자 ‘이건 진짜 연극이 아니다’라고 외치며 자리를 떴던 기억이 난다.

아쉽지는 않았나?

맥신: 그럼에도 공연은 6개월간 이어졌다. 우리 관객층도 크게 확장할 기회가 되었고, 펀치드렁크의 코어팬이 생겨난 계기였다.

런던에서 뉴욕으로 옮겨오면서 블록버스터 공연으로 거듭났다.

맥신: 〈슬립 노 모어〉의 세 번째 버전이 뉴욕 공연이다. 보스턴의 ART(American Repertory Theatre)가 제작한 버전에서 발전한 것이다. 보스턴은 뉴욕 공연을 가능케 한 일종의 디딤돌 역할을 해 줬다. 당시 뉴욕에는 이 정도 규모의 몰입형 공연이 없었지만, 관객들은 새로운 경험에 대한 갈증과 호기심이 있었다. 우리 공연의 반복적인 내러티브 구조, 관객이 가면을 쓰고 참여하는 설정, 기묘하지만 아름다우면서 역동적인 캐릭터들, 그리고 그들이 따라가며 거대한 건물 속에서 길을 잃도록 초대받는 형식 등은 매우 독창적이었다. 특히 가면은 펀치드렁크의 공연을 상징하는 최고의 마케팅 포인트가 되었다. 공연은 입소문을 타게 되었고, 별다른 홍보 없이 뉴욕에서 가장 잘 알려진 ‘비밀’이 됐다. 공연장 내의 바에서 유명 배우나 뮤지션도 자주 목격되었다. 무엇보다 우리 공연은 ‘쿨하고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펠릭스: 사실, 런던에서 작업할 때는 예산 부족으로 공연을 몇 주밖에 이어가지 못했다. 건물 사용 기간도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뉴욕은 달랐다. 처음으로 장기간 건물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것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공연이 입소문을 타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새로운 관객이 점점 더 많이 유입되었다. 우리 작업에서 건물이라는 요소는 매우 중요하다.

뉴욕뿐만 아니라 전 세계 관객들에게 〈슬립 노 모어〉는 매우 독창적인 경험이다. 관객이 자유롭게 공간을 이동하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경험한다. 그런데도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은 잃지 않는다. 어떻게 가능한가?

맥신: 리허설 전부터 꼼꼼히 계획을 세운다. 종이에 설계도를 그린다. 공간 속을 이동하는 관객의 흐름과 서사의 극적 전개를 서로 조율하기 위함이다. 완성된 각 캐릭터의 선형적인 서사가 각 층에 겹겹이 쌓여 동시에 펼쳐진다. 관객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게임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특정 캐릭터를 따라간다면, 그 인물의 이야기 전체가 드러난다. 하지만, 〈슬립 노 모어〉를 가장 잘 즐기는 방법은 논리를 내려놓는 것이다. 뒤죽박죽 얽힌, 마치 꿈속을 탐험하는 것과 같은 〈슬립 노 모어〉의 본질을 탐험할 때 이 공연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펠릭스: 먼저 전제를 하나 두고 싶다. 공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스토리가 아니다. 핵심은 ‘탐험’이다. 관객은 공간 속에서 각자의 모험을 선택한다. 〈슬립 노 모어〉는 무대 위에서 선형적으로 진행되는 일반적인 공연과는 다르다. 어둠 속에서 잊힌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깝다. 원래 우리는 관객이 그들의 본능을 따라 탐험하길 권했다. 관객 스스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따라가도록 말이다. 〈슬립 노 모어〉는 원작(셰익스피어의 희곡 《맥베스》)에서 영감을 받은 개별적인 에피소드들로 구성한 설치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관객이 개별 캐릭터를 따라간다면,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경험하게 된다. 그 인물의 서사가 1시간 동안 완결된다. 그래서 이 공연은 선형적인 동시에 비선형적이다.

관객의 경험을 돕기 위해 여러 장치가 사용된다. 음악은 특정 방향으로 관객을 유도하고, 조명은 복도를 따라 시선을 끈다. 배우들은 관객의 손을 잡고, 때로는 곁을 스쳐 지나간다. 이런 단서들을 따라가며 관객은 자신이 원하는 ‘극적 경험’을 완성한다.

런던에서 시작해 뉴욕과 상하이, 그리고 이제 서울이다. 한국을 선택한 이유는?

펠릭스: 서울은 정말 놀라운 도시이고, 한국은 예술의 나라다. 예술의 각 분야에서, 그리고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한국이 만들어 낸 콘텐츠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다. 우리 작업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열광할 수 있는 훌륭한 관객이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믿어 왔다. 지난 몇 년간 서울에서 〈슬립 노 모어〉에 딱 맞는 건물을 찾아 공연을 선보이고자 노력해 왔다.

맥신: 한국이 우리를 선택했다. 서울 공연 제작사인 미쓰잭슨(Ms.Jackson)의 박주영 대표가 뉴욕에서 〈슬립 노 모어〉를 경험한 뒤 큰 영감을 받았고, 한국 관객에게 공연을 소개하겠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서울 공연의 무대는 ‘매키탄 호텔’이다. 뉴욕 공연에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버티컬〉에서 따 온 ‘매키트릭 호텔’이 무대였다. 여기에 대한극장의 ‘한’을 조합해 ‘매키탄’이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 미쓰잭슨
다른 장소에는 다른 문화와 취향이 깃든다. 서울에서 펼쳐지는 〈슬립 노 모어〉에는 특별한 요소가 존재하나?

맥신: 서울의〈슬립 노 모어〉는 출연진과 제작팀, 그리고 옛 ‘대한극장’ 건물의 조합에서 고유의 독창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뉴욕 공연을 기반으로 제작했지만, 서울 공연은 독특한 공간의 정체성에 맞춰 새롭게 준비한 디자인, 안무, 조명, 사운드를 통해 진화했다. 한국의 멋진 배우들은 캐릭터에 독자적인 스타일과 미학, 인간성을 불어 넣었다. 한국과 해외의 아티스트가 조화를 이룬 출연진이 특히 훌륭하다.

펠릭스: 관객이 공연의 균형을 바꾼다는 점이 우리 작업의 묘미다. 우리는 늘 공연을 수정하고 발전시킨다. 관객이 건물로 들어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무엇을 하는지 지켜본다. 그리고 그에 맞춰 눈에 띄지 않게 공연을 바꿔나간다. 관객이 배우와 캐릭터를 따라다니듯, 우리도 관객을 따라다니며 경험을 진화시킨다.

한국에서도 〈슬립 노 모어〉는 큰 관심을 받고 있다. 특히 젊은 관객의 반응이 열광적이다. 게임과 디지털 콘텐츠에 익숙한 세대로 언급되곤 하는데, 이런 부분이 공연 제작에 영향을 미치나?

펠릭스: 그렇다. 이제는 모든 연령대가 게임을 즐긴다. 우리 작업과 게임 사이의 공통점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이유다. 최근 비디오 게임의 메커니즘을 차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슬립 노 모어〉의 출발점이 《맥베스》라면, 이번에는 특정 게임을 모티브로 삼는 것이다. 올해 연극과 비디오 게임을 결합한 첫 결과물을 선보일 예정이다.

사실 펀치드렁크는 경계 없이 시도해 오지 않았나. 게임은 물론이고 TV, 패션 등 다양한 산업과 협업을 망설이지 않았다.

펠릭스: 협업 작업에서도 우리의 목표는 늘 한결같다. 관객을 사건의 중심에 놓는 것, 작품이 관객의 ‘심장을 울리는 경험’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달라지는 것은 방식이다. 협업의 분야에 따라 방식을 바꾸게 된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관객들은 공연을 즐기기 위해 다음 관문을 거쳐야 한다. 바로 가면을 쓰는 일이다. 가면을 쓰는 순간 관객은 외모나 국적에서 자유로운 유령이 된다. 가면을 쓰는 행위는 이 공연을 보려는 관객이 지켜야 할 의무이자 규칙이지만, 펀치드렁크가 관객에게 선물하는 권력이기도 하다. (《SLEEP NO MORE》中) ⓒ 미쓰잭슨
〈슬립 노 모어〉를 상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가면’이다. 펀치드렁크의 다른 공연에도 자주 등장하는데?

펠릭스: 가면은 관객이 군중을 따라가는 대신 자신만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가면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본능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람과는 완전히 반대다. 가면은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1]의 ‘중립 가면(neutral mask)[2]’ 개념을 차용한 장치다. 배우의 연기와 상관없이 가면은 개방적이며 무표정하므로 어떤 감정 상태도 담아낼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관객이 일종의 열려있는 그릇이 되어 공연이라는 파도의 가장 높은 곳과 낮은 곳을 자유로이 서핑할 수 있기를 원한다. 그리고 무대 장치와 어우러져 다른 관객들에게는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관객 모두가 공연 속 유일한 관객인 듯한 감각을 얻게 된다.

맥신: 펀치드렁크의 가면에는 다양한 상징이 겹겹이 담겨 있다. 시각적으로 관객과 공연자를 구분하는 동시에 관객을 유령으로 만든다. 존재의 은유적 코러스가 되는 것이다. 가면은 관객의 영화적 렌즈로 기능하는 동시에 극장의 좌석이기 되기도 한다. 투명 망토이면서 관음의 수단이다. 어떤 관객은 가면이 제공하는 익명성 덕분에 우리가 구축한 세계를 더 깊이 파고들고, 그 열병 같은 꿈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자신감을 준다고 증언한다.

〈슬립 노 모어〉 외에도 펀치드렁크의 최신 작품들이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펠릭스: 〈The Burnt City〉는 〈슬립 노 모어〉의 업그레이드라고 할 수 있다. 가면을 쓰고 안무 중심의 공연 언어를 사용하는 작품으로, 두 개의 경쟁 관계에 있는 건물에서 진행된다. 반면, 〈Viola’s Room〉은 완전히 새로운 양식을 선보인다. 〈슬립 노 모어〉의 ‘1대1 장면’에서 착안해, 그것만으로 1시간짜리 공연을 만들었다. 관객은 단 6명이고 배우는 오디오를 통해 관객의 귓가에서 속삭인다. 우리 작업 중 가장 친밀한 경험이며, 완전히 새로운 동시에 펀치드렁크 특유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펀치드렁크의 작업은 공연과 가상 기술, 신화와 영화적 매체 등 이질적인 요소를 결합한다.

펠릭스: 예술가로서 서로 다른 영역을 교차시키고 융합할 때 진정한 마법이 일어난다고 믿는다. 마찰은 불꽃을 만든다. 두 재료의 마찰이 만들어 내는 전기적 에너지가 합쳐지면, 부분의 합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온다. 그것이 창작의 묘미이다. 우리는 관객이 놀라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만큼 우리도 놀라고 싶다.

펠릭스 배럿의 공간 연출과 맥신 도일의 안무는 어떻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시너지를 내고 있나?

펠릭스: 모든 것을 함께 한다. 끊임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예를 들어, 맥신이 리허설에서 아름다운 안무를 짜면, 우리는 그 안무에 맞춰 공간을 만든다. 그다음 안무가 벽과 천장을 타고 공간 속을 움직이는 것을 보면서 다시 공간을 조정한다. 이렇게 서로의 작업이 계속 바통을 주고받듯 이어진다.

맥신: 공간 연출은 곧 안무이다.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을 갖고 협업한다. 펠릭스는 빛과 디자인, 사운드를 큰 그림에서 보고, 나는 배우들과 함꼐 움직임을 창조하며 드라마투르기[3]에 집중한다. 〈슬립 노 모어〉는 우리의 첫 협업이었고, 겹치는 부분이 정말 많았다. 〈슬립 노 모어〉 출연진의 80퍼센트가 현대 무용수다. 공연 언어에 현대 무용의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 단, 그들은 동시에 훌륭한 배우이기도 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이야기를 이끄는 힘’이다.

구체적인 협업 방법이 궁금하다. 모든 것을 꼼꼼히 맞추는 편인가?

맥신: 우리의 협업 과정에는 정말 많은 불확실성과 여백이 있다. 예술가라면 알 수 없는 상태를 견디고, 기다리고, 듣고, 놀 줄 알아야 한다. 자신감이 필요한 것이다. 함께 하는 사람들의 재능과 에너지를 포착하고 다양한 아이디어에 귀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다. 협업은 늘 도전적이다. 내려놓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순간들이다.

펠릭스: 정말 많은 것을 계획한다. 그러나 공연의 규모가 클수록 예상치 못했던 발견이 생긴다. 또, 어떤 캐릭터나 스토리를 따라가느냐에 따라서도 돌발 변수가 발생한다. 그래서 최대한 계획하되 열려있는 것, 그리고 창의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깨닫게 되었다.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작은 기회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특히 주류보다는 실험적 무대를 꿈꾸는 이들이 더욱 그렇다. 청년 예술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원칙이 있다면?

펠릭스: 우리도 최근 이 부분에 관해 다시 사유했다. 개인적으로 받았던 최고의 조언은 “말하지 말고 그냥 하라(Don’t talk about it, do it)”는 것이었다. 대학 진학 전 광고 촬영 현장에서 러너(한국의 경우 PA에 해당)로 일한 적이 있다. 그곳의 한 사진가가 해줬던 말이다. 아이디어를 말로만 풀면 마치 이미 결과를 낸 것 마냥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현실로 가져와 실행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실행에 꼭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우리도 초창기에는 주말을 쪼개고. 가진 돈을 털고, 친구와 협업자들의 도움으로 공연을 만들어 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든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관객도 만날 수 있다.

맥신: 나만의 협업 그룹을 만들고, 그 관계를 소중히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작품을 만들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예술, 문학, 문화 속에 자신을 흠뻑 담그는 것이다. 다른 문화권의 축제를 찾아 여행을 떠날 것을 권한다. 생계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하되, ‘할 말’을 만들어 가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을 권한다. 지금, 이 순간, 세상은 무언가를 말할 줄 아는 예술가를 절실히 원하고 있다.

신아람 에디터

* 2025년 10월 10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1]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 16세기 중반에 시작해서 17세기 중반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18세기까지 전 유럽에 걸쳐 유행한 연극의 한 형태로, 이탈리아의 가면 희극이다. 최초의 전문 배우 집단에 의해 이루어진 연행이었으며, 정해진 대본 없이 간단한 줄거리에 배우들의 훈련된 연기 기술과 기지가 더해져 즉흥적으로 상연되었다.
 
[2]
중립 가면(Neutral Mask): 코메디아 델라르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각자의 특징적인 가면을 쓰고 나와, 이름과 성격이 정형화된 ‘유형’으로 인식된다. 배우가 이 가면을 쓰면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신체 움직임과 호흡, 리듬, 공간 인식으로만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 가면의 목적은 ‘의도되지 않은 중립 상태’로, 자기 자신도, 캐릭터도 아닌 순수한 존재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3]
드라마투르기: 18세기 중반 독일의 극작가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이 처음 선보인 개념으로, 작품의 시공간적 배경, 그리고 사회문화·역사적 배경이 망라된 자료를 분석, 제공함으로써 창작자가 캐릭터를 깊이 이해하여 새롭게 창조하고 재현해 내는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다.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