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나 유럽도 아닌 ‘대만’의 디지털 민주주의라니 생소하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대만은 국가 지도자인 총통을 직접 선거로 선출한 지 3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 신생국인 셈인데요, 오히려 그 덕분에 디지털 민주주의에서 앞서가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전통이나 관행이 적으니 그만큼 파격에 가까운 시도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대만의 디지털 민주주의를 소개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오드리 탕(Audrey Tang) 디지털 장관입니다. 그는 2016년 35세의 나이로 장관에 임명됐습니다. 대만 역사상 최연소이자 첫 트랜스젠더 장관입니다.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마스크 재고 현황을 보여 주는 앱을 만들어 ‘T 방역’을 주도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3]
오드리 탕은 시빅 해커(civic hacker·공공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커) 출신입니다. 공직에 입문하기 전에는 ‘
거브 제로(g0v)’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정부의 공공 정보는 모두에게 공개되어 있지만, 공개를 위한 공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렵사리 원하는 정보를 찾아내도 로우 데이터 수준이라 정보에 담긴 의미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죠.
2012년 오드리 탕을 비롯한 시빅 해커들은 ‘그림자 정부’ 사이트를 만들어 정부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방대한 정보를 재분류하고 검색 편의를 높였습니다. 정부 공식 사이트의 도메인은 government의 약자인 gov로 표시하는데요, 알파벳 o 대신 숫자 0을 넣어 g0v를 입력하면 그림자 정부 사이트로 연결되게 했습니다.
대만 정부의 예산 정보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PDF 파일로 공개됩니다. 국가 예산을 감시하는 시민 단체나 행정학자에게는 유용할지 몰라도 일반 시민에게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림자 정부 사이트에서는 예산 정보를 시각화해 제공하고 부처 간 비교, 추세 등 다양한 측면을
표시합니다. 자연스럽게 시민들이 정부의 예산 계획을 모니터링하게 됩니다. 같은 데이터지만 보여 주는 방식에 따라 활용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죠.
오드리 탕과 시빅 해커들은 민주주의를 사회적 기술로 간주한다고 전병근 저자는 말합니다. 한번 만든 다음 그대로 사용하는 정부 사이트와 달리 그림자 정부 사이트는 시민의 참여로 날마다 개선됩니다. 이게 바로 시빅 해커들이 말하는 참여 민주주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