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이 두려워하는 것
2화

벨라루스의 반란과 나발니 독살 테러

러시아 통치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사건들

권위주의적 안정성의 모델이었던 러시아 서쪽 나라 벨라루스가 격동하고 있다. 지난 8월 9일 벨라루스 시민들은 독재자 알렉산드르 루카셴코가 다시 한 번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는 공식 발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러시아 극동 지역 거리에서는 7월부터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크렘린의 축복 없이 당선된 하바롭스크 지역의 주지사가 모스크바의 명령으로 체포된 뒤, 2000년대 초에 저지른 살인 혐의로 기소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카리스마 있는 반정부 지도자인 알렉세이 나발니에게 시위는 희망의 조짐이었다. 그는 오는 9월 지방 선거에서 러시아 정권에 대한 확실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극동 지역의 소요는 그의 전략에 효과가 있었음을 보여 줬다. 하지만 나발니는 현재 혼수상태에 빠져 베를린의 병원에 누워 있다. 지난 8월 20일 러시아에서 신원 미상의 사람들에 의해 독극물 공격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세 가지 사건이 맞물리면서,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은 집권 이후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한 상황에 처했다.

의사들이 혼수상태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불특정 신경 독소는 나발니가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도중에 주입된 것으로 보인다. 이 공격을 누가 실행했든, 나발니의 독일 이송을 막으려는 시도, 독극물 공격에 대한 조사 거부, 그리고 상황을 호도하려는 움직임 등 크렘린은 명백한 책임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공모의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지난 몇 년 동안 푸틴은 계속해서 법정에 세우고, 단기간 투옥하고,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등 국가의 권력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나발니를 괴롭혀 왔다. 하지만 그를 완전히 침묵시키지는 못했다. 대통령은 강력한 자신감을 과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나발니가 언젠가 반란을 주도할 가능성을 넌지시 내비쳤다. 푸틴과 상호 의존 관계인 엘리트들의 지지를 보장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 정치판에서 나발니를 제거하는 것은 오히려 대통령이 더 이상 지지 세력을 통제하지 못한다거나, 진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실제로 서쪽 국경 너머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만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구타와 고문을 포함한 보복으로 최소한 다섯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는 소식에도 (그리고 어느 정도는 그 소식 때문에) 벨라루스의 시민들은 때가 왔다고 느끼고 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반란이 푸틴에게 중요한 이유는 그가 루카셴코에게 특별히 의존하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그렇다고 두 나라가 1996년 이후로 “국가 연합(Union State)”이라는 이름의 양국 공동 시장(common market)에 참여해 왔기 때문만도 아니다. 푸틴이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해 온 수많은 전술의 본보기 역할을 해왔던 벨라루스의 루카셴코가 이제는 정통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푸틴은 루카셴코와 같은 수준의 독재자는 아니지만, 루카셴코에 비해 겨우 몇 발짝 뒤떨어진 수준이었다.

그들 사이의 연관성은 상당히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지난 8월 15일, 루카셴코는 지지를 얻기 위해 텔레비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는 더 이상 벨라루스에 대한 위협만이 아니다. 지금 벨라루스를 지키는 것은 국가 연합을 지키는 것과 다름없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본보기이기도 하다.” 본보기가 필요한 다른 이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나발니에게 우호적인 러시아 사람들이다. 나발니의 수석 참모인 레오니드 볼코프(Leonid Volkov)는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소총을 든 루카셴코와 독약을 든 푸틴, 둘 중에 누가 더 미쳤나? (…) 현재 벨라루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머지않은 미래에 러시아 사람들에게 닥칠 일들에 대한 몇 가지 단서를 준다.” 하바롭스크 거리에서는 벨라루스의 반란을 지지한다는 시위대의 외침이 시작됐다.

 

헬리콥터 아래에서


벨라루스 사람들은 진정한 각성을 경험하고 있다. 지난 8월 23일, 당시로서는 가장 거대한 규모였던 수십만 명의 시위대가 민스크의 독립 광장(Independence Square)에 나왔고 1918년부터 1919년까지 짧은 기간 존재했던 벨라루스 인민 공화국(Belarusian People’s Republic)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흰색 깃발로 광장을 뒤덮었다. 첫 번째 시위와 같은 극도의 폭력 행사를 자제해 온 관계 당국은 경찰 순찰대를 배치했고, 건물 옥상의 스피커로 2차 세계 대전 시절에 불렸던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노래를 틀었다. 시위에 나선 사람들은 고함을 지르고, 북을 두드리고, 구호를 외치면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날의 분위기는 프라이드 퍼레이드(Pride parade) 초기와 묘하게 비슷한 점이 있었다. 억압돼 왔던 무언가가 분출되는 가운데 스스로에 대한 자각에 놀라면서도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각성에 구심점은 없다. 야권 지도자의 부재는 루카셴코가 반대파를 억압해 온 오랜 세월을 증명하고 있다. 시위대는 만약 대선 투표가 공정하게 집계되었다면 스베틀라나 티하놉스카야(Svetlana Tikhanovskaya) 후보가 쉽게 당선되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는 선거 운동이 시작되었을 때만 해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남편인 세르게이(Sergei)는 유명한 동영상 블로거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서 루카셴코를 박살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가 투옥됐다. 그래서 티하놉스카야가 직접 후보로 나섰다.

“스스로의 존엄성을 일깨우는 것 이외에는 다른 계획이 전혀 없었습니다.” 티하놉스카야의 선거 운동을 이끈 두 명의 여성 중 한 명인 마리아 콜레스니코바(Maria Kolesnikova)의 말이다. 그는 현재 티하놉스카야를 포함한 세 사람 가운데 이 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티하놉스카야는 8월 11일 리투아니아로 피신했다. 정부가 그를 사실상 인질로 붙잡고 시위대를 비난하는 성명을 읽도록 강요한 이후의 일이다.
세 개의 노선/ 블라디미르 푸틴/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알렉세이 나발니/ 출처: AP, 게티이미지
루카셴코는 충격에 빠진 것 같다. 1994년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치렀던 네 차례의 선거는 모두 그에게 75퍼센트에서 85퍼센트 사이의 득표율을 안겨 주었다(그는 16년 전에 대통령 연임 제한을 철폐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그 수준보다) 더 높지 않게 잘 조작한다면, 연임이 확실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그가 80퍼센트를 득표했다는 결과가 절차에 따라 발표되자,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지난 8월 23일 그는 열다섯 아들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시위대 위를 날면서 거리를 향해서 비난을 퍼부었다. 착륙할 때 반자동 소총을 들고 나타났는데, 이상하게도 탄창은 장착되어 있지 않았다. 그는 병력 수송 무장 차량을 탄 채로 거처를 지키고 있는 시위 진압 경찰들을 향해서 총을 흔들며 응원을 보냈다. “감사합니다. 당신들은 멋집니다. 우리는 시위대를 처리할 것입니다.” 이 장면은 무장 병력에게 결의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와 아들의 아슬아슬한 광기는 의도했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방해가 되었던 것 같다.

러시아의 정치적, 수사적 지원이 없었다면 루카셴코는 지금쯤 쓰러졌을지 모른다. 러시아의 외무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Sergei Lavrov)는 러시아가 벨라루스를 지지하는 것은 서방 적들의 침투에 대항해서 구 소비에트 연방의 모든 영토를 지켜낼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의 이유는 지정학적인 문제보다는 국내의 권력 유지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

루카셴코와 푸틴은 공통점이 거의 없다.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푸틴의 후견인이었던 보리스 옐친(Boris Yeltsin)은 소비에트라는 과거에 대한 부정을 정통성의 근거로 삼았다. 독불장군인 루카셴코는 소비에트로의 회귀를 기반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어떠한 시장 개혁 조치도 없었고, 대형 국영 기업 중 어느 것도 민영화하지 않았다. 그는 낮지만 거의 평등한 수준으로 임금을 유지했다. 그의 비판자들과 반대 세력들은 사라졌다.

대부분의 벨라루스 사람들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개혁으로 경제가 흔들리고 생활이 뒤바뀌어 버린 일부 러시아 사람들은 국경 너머에 있는 예전 방식의 집단 농장과 지저분하지만 기능적인 공장과 깨끗한 거리를 향수 어린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1996년에 국가 연합(Union State)을 창설하기 위한 협상을 할 때 러시아의 옐친 대통령은 분투하고 있었다. 루카셴코는 단순했던 과거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으로 자신이 러시아와 벨라루스 두 나라의 지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1999년에 옐친이 푸틴을 후계자로 지명했을 때, 그 결정은 명백히 과거로의 회귀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KGB 출신인 푸틴의 임무는 러시아 신흥 엘리트의 부를 보호하고 안전을 지키며, 옐친의 개혁을 보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권력의 기반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푸틴은 루카셴코가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정서에 호소했다. 그는 1990년대에 패배했다고 느끼는 사람들을 옹호했고, 그런 사람들이 소중히 간직했던 과거의 상징들을 제공했다. 마치 루카셴코가 초록색과 붉은색으로 만든 소비에트 시절의 벨라루스 깃발을 복원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푸틴은 사람들이 자신과 푸틴을 동일시하기를 바랐고, 그렇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화답하고자 했다. 2001년 러시아가 스탈린 시절에 만든 소비에트 연방 국가(國歌)를 다시 복원하는 문제로 비판받았을 때[1],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와 국민들이 아마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푸틴이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 버린 러시아 국영 미디어는 이런 동일시 전략을 강화하고 나섰다.

 

종신 대통령이 되는 방법


푸틴은 새롭게 등장한 엘리트들을 싫어하는 국민 여론에 주로 경제적 착취가 아닌 정치적 거세로 대응했다. 소비에트 해체 이후 부를 축적한 이들 엘리트는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푸틴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한 보호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체제의 편입을 망설이는 이들을 거리낌 없이 교도소로 보냈다.

안정된 권력을 갖게 된 푸틴은 헌법에서 정한 대통령의 연임 제한 규정을 피하기 위해 2008년에 드미트리 메드베데프(Dmitry Medvedev)에게 대통령 업무를 맡기고 총리 자리로 물러났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다시 자리를 바꾸기로 한 2012년의 결정은 새롭게 형성되고 있는 불만을 반영하지 못했다. 푸틴의 통치하에서 잘 지내는 것 같았던 도시 중산층은 저항하기 시작했다.
야권 지도자 알렉세이 나발니의 사진을 들고 있는 러시아 시민
저항 운동은 나발니가 주요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쌓은 계기가 되었다. 그전까지는 주로 반부패 활동가이자 블로거로 알려져 있었던 그는 이제 야권의 주요 인사가 됐다. 러시아를 근대 민족 국가로 보는 그의 비전은 1990년대의 월권행위들은 물론 점차 제국주의로 치닫고 있는 푸틴의 전제 정치에도 대안을 제시했다.

벨라루스였다면, 나발니는 이유도 모른 채 실종됐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독재 국가가 아닌 전제 정치 체제다. 러시아의 엘리트와 지역 지도자들, 그리고 민간 부문의 지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뭔가 민주적으로 보이는 정당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크렘린은 2013년 나발니의 모스크바 시장 선거 출마를 허용했다. 동시에 날조된 횡령 혐의로 나발니를 압박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열성적인 법원이 선거 직전 나발니에게 5년 형을 선고하면서 이런 전략은 역풍을 맞았다. 수만 명의 모스크바 사람들이 나발니의 석방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다. 공식적인 집계에 따르면, 그는 27퍼센트의 표를 얻었다.

2014년 2월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대통령 빅토르 야누코비치(Viktor Yanukovych)가 국민의 저항으로 쫓겨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친러 성향의 폭력배 집단이 새로운 체제에 반대하며 들고 일어났는데(러시아 언론들은 우크라이나의 신임 정권을 파시스트로 묘사했다), 푸틴은 폭력배들을 부추겼고 갈등을 이용해서 크림반도를 합병했다. 푸틴의 인기는 크게 상승했다. 반대 세력들을 몇 년 동안 밀려나 있었다. 2018년 푸틴은 대통령에 재선되었고, 나발니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했다.

하지만 그 시점에서 푸틴은 한 가지 문제에 직면했다. 러시아 헌법은 대통령의 다섯 번째 임기를 금지하고 있다. 만약 다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없다면, 레임덕(lame duck, 집권 말기의 지도력 공백 현상)에 처할 수 있었다. 그는 루카셴코가 1990년대에 품었던 생각을 반대로 뒤집어서 부활시키는 것을 고려했다. 러시아와 벨라루스를 합병해서 푸틴에게 유리하게 개정한 헌법의 혜택을 받는 새로운 국가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는 구상이었다. 루카셴코는 이런 아이디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항함으로써 벨라루스 국민을 자국 깃발 아래 결집시키고자 했다(지금 모든 시위 참여자가 흔들고 있는 흰색과 붉은색의 깃발이 아닌, 그가 1995년에 도입한 녹색과 붉은색의 깃발이다).

완전히 새로운 국가 전선으로 인해 좌절을 겪은 푸틴은 결국 헌법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 개헌안은 국민 투표라는 이름하에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대단치 않은 작은 변화들을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와 함께 묶어 제안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이런 전략은 루카셴코가 1996년 의회 탄핵 이후 새로운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활용했던 것이다.

 

밀려오는 물결


이런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발니는 계속해서 조직화를 추진했다. 2017년 크림반도 합병 직후의 희열이 대부분 사라지고 경제가 악화하면서 그는 새로운 기회를 감지했다. 국가의 통제를 받는 텔레비전과는 다른 인터넷이 정보를 찾는 수단으로 부상하는 사회의 분위기였다. 메드베데프의 요트와 궁전에 대해 자세히 다룬 유튜브 동영상은 동쪽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서쪽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까지 이어지는 시위를 촉발시켰고, 90개가 넘는 도시를 집어삼켰다.

나발니 스스로도 깜짝 놀랐다. 당시 그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위에 나설지 예측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나와달라고 부탁한다고 거리로 나오지 않는다. 2017년의 시위대는 2011~2012년보다 더 분노했고 더 가난했으며, 절반이 30세 이하였다. 그들을 거리로 나오게 한 것은 불투명한 미래라고 나발니는 말했다.

나발니는 그러한 공허함을 미국식 낙관주의와 자신감으로 채우고자 했다. 그는 분열을 촉발할 수 있는 이념적인 문제들은 피하면서, 소득, 건강, 교육, 법치에 대한 열망 등 사람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주제에 집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학습된 무기력”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정당을 만들 수도 없고 2018년 대통령 선거에서 출마 자격도 박탈당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12만 명의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면서 어마어마한 캠페인 조직을 구축했다. 그는 지방 선거에서 “현명한” 투표 전략을 제시했다. 정당과는 상관없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거나 관심이 가지 않는 인물이라 할지라도, 크렘린이 내세운 후보를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투표를 하자는 것이었다.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집회에서 그는 자신이 할 일은 크렘린에 가능한 한 많은 압박을 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2019년 여름, 압박은 수면 위로 드러났다. 현명한 투표를 두려워했던 크렘린은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모스크바 지역 의회 선거에서 모든 무소속 후보들의 출마 자격을 박탈했다. 시위가 벌어졌다. 크렘린은 폭력으로 대응했다. 하지만 국가 전역에 확산된 공감대는 대부분 시위대의 편에 있었다.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한 것은 역효과를 낳았다. 지난 한 달 동안 하바롭스크에서 경찰의 폭력이 거의 없었던 것은 아마도 지난해의 교훈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시위의 성공에 장기적으로는 푸틴의 인기가 하락하고 있다는 증거가 맞물리면서, 나발니는 2021년 총선의 예행연습이라고 할 수 있는 오는 9월 13일 지방 선거에 더 힘을 쏟고 있었다.

나발니의 매력적이고 정교한 전략에 벨라루스 시위가 겹쳤다. 그동안 푸틴이 야당 지도자를 내버려 둔 것은 반대 세력을 별로 걱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측면이 있었다. 이제는 그런 선택의 안전성에 대한 푸틴의 계산에 변화가 생겼을 수 있다. 민스크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경찰의 폭력이 지닌 한계를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전력을 다한다고 해도 재앙에 가까울 정도로 추락한 루카셴코의 정당성을 만회할 수는 없었다. 폭력은 오히려 추락을 가속화했다. 야당 지도자 한 명을 지금 잔인하게 처리하는 것이 나중에 국민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었다.

(나발니가 공격당한) 이 상황이 예상보다 더 큰 격랑을 일으키면서 결국 정권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나발니는 러시아에서 크렘린과 협상하면서 거리 시위를 통제할 수 있는 마지막 야당 지도자일 수 있다. 그가 없다고 해서 시위가 일어날 가능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황은 훨씬 더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푸틴은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루카셴코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1]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스탈린 시절이던 1944년에 소비에트 연방 국가(State Anthem of the Soviet Union)를 만들었다. 이후 1990년 러시아가 새로운 국가를 제정하고,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면서 이 노래는 잊히는 듯 했으나, 푸틴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2000년부터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 국가의 가사를 수정해서 제2의 국가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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