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는 기회다
1화

불가능은 이미 일어났다

두려움 속 변화의 가능성


재난은 갑자기 시작되고, 절대 완전히 끝나지 않는 법이다. 다가올 미래는 여러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코로나19 발병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특히 우리의 경제와 우선순위, 세상을 향한 인식은 올해 초와 다를 수밖에 없다.

구체적 면들을 살펴보면 더욱 놀랍다. GE와 포드(Ford) 같은 기업들은 인공호흡기를 생산하기 위해 설비를 개편했다. 사람들은 보호 장비를 차지하려고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한때 북적이던 도시의 거리는 조용하고 텅 비었으며, 경제는 급격히 침체되고 있다. 멈춰서면 안 됐던 것들이 멈췄다.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일들, 가령 노동자 권리와 혜택이 늘어나고, 수감자가 석방되고, 미국에서 수조 달러에 이르는 돈이 유통되는 상황이 이미 일어났다.

‘위기(crisis)’라는 단어는 의학적으로 환자가 맞닥뜨린 갈림길, 즉 회복하거나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지점을 의미한다. ‘긴급(emergency)’은 ‘탈출(emergence)’ 혹은 ‘나오다(emerge)’에서 파생된 단어로, 누군가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급박하게 재정비할 필요가 있는 상황을 뜻한다. ‘재앙(catastrophe)’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갑작스러운 전복을 의미한다.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정상이라고만 여기던 상황에서 벗어나게 됐다. 갑자기 상황이 뒤집어졌다. 지금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게 무엇이며, 또 어떤 일들이 가능할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최소한 아프지 않고, 코로나 방역의 최전선에 서 있지 않으며, 생계나 주거의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재난(disaster)은 원래 ‘박복하거나(ill-starred)’, ‘운이 없다(under a bad star)’는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최근에는 세상과 재난을 보는 관점이 바뀌고 있다. 관심을 갖고 중요하게 여기던 사안들도 달라지고 있다. (코로나라는) 새로운 압박에 허약한 것들은 무너지고 강한 것만 버티며, 숨겨져 있던 면이 드러나고 있다. 변화가 단순히 일어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를 휩쓸어 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자각하고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치며 우선순위를 바꾸고 있다. 심지어 학교 친구나 직장 동료와 떨어져 지내며 새로운 현실을 낯선 사람들과 공유하는 상황은 ‘우리’라는 단어의 정의조차 바꿀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스스로를 느끼고 살아간다. 하지만 바로 지금, 모두가 각자 다른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판데믹이 일상을 뒤엎으면서 내 주위의 사람들은 “집중력과 효율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토로했다. 집중력 저하는 지금과 다른, 보다 더 중요한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병이 낫거나 임신했을 때, 아니면 유년기의 급격한 성장이 일어날 때 육체는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아 보일 때에도 특히 그렇다.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도 몸은 성장하고, 치유하고, 재생하고, 변화하고, 일하고 있다. 우리가 코로나라는 끔찍한 재난의 과학과 통계를 알아 가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정신은 그에 준하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엄청난 사회·경제적 변화에 적응하고 재난이 주는 교훈을 깨달아 가며, 스스로를 예상치 못한 세상에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재난이 보여 준 권력의 민낯


재난이 가르쳐 준 첫 번째 교훈은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재난은 연결의 충돌 과정이다. 198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지진부터 9.11 테러와 허리케인 카트리나,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크고 작은 재난에 대해 글을 쓰면서 알게 된 점이다. 엄청난 변화의 순간이 오면,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뿐 아니라 생태계 시스템까지도 더 명확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 안에 들은 강한 것과 약한 것, 썩어 버린 것,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까지 알아챈다.

나는 종종 이러한 변화의 시기가 봄철 해빙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얼음이 부서지고 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해, 배들이 겨울 동안 닿을 수 없었던 곳들을 오가는 것과 같다. 여기서 얼음은 안정되고 이익 집단이 쉽게 바뀔 수 없다고 여겨지는 권력 구조의 현재 상태(status quo)다. 이 구조가 빠르고 극적으로 변한다면, 짜릿하거나 두려울 수 있다. 아니면 두 가지 느낌을 모두 가질 수도 있다.
2005년 9월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발생한 미국 뉴올리언스 홍수 ©Justin Sullivan/Getty Images
권력 구조가 무너지면 그동안 가장 많은 혜택을 누렸던 사람들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기보다 그 상황을 유지하거나 그대로 다시 세우는 데에 더 집중한다. 미국 보수주의자와 대기업들은 (코로나 확산에도 불구하고) 주식 시장을 위해 노동자들이 직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자의 죽음은 주식 시장을 살리기 위해 치를 만한 대가쯤으로 여겼다. 또 위기 상황에서 권력자들은 더 많은 권력을 잡으려 하고, 부자들은 더 많은 부를 추구하기도 한다. 미국 트럼프 정권의 법무부는 코로나 사태가 벌어지자 국민들의 헌법상 권리를 제한하려고 했다. 미국 공화당 소속 상원의원 두 명은 코로나 확산과 관련한 내부 정보를 활용해 주식 시장에서 부당 이득을 얻으려고 해 비난을 샀다(두 의원은 모두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재난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사회 지도층의 공황 상태(elite panic)’라는 용어가 있다. 사회 지도층이 일반 시민들은 잘못된 행동을 할 것이라고 가정하고 대응한다는 의미다. 사회 지도층이 공황 상태가 지속되고 약탈이 일어나고 있다고 표현하는 거리를 보자. 실제로는 평범한 시민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나 다른 사람을 보살피기 위해서 필요한 행동을 하는 경우가 많다. 때에 따라 위험한 상황에서 재빨리 빠져나오려고 하는 게 현명한 행동일 수 있고, 배급 물자를 모으는 행위가 이타적일 수도 있다.

사회 지도층이 인간의 생명과 공동체보다 자신의 이익과 재산을 우선시하는 경우가 있다. 1906년 4월 18일 대지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하고 며칠이 지나자, 미군은 평범한 시민들이 위협적이며, 무질서의 원인이라는 확신을 갖고 시내로 진격했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시장은 약탈자들을 ‘죽이기 위한’ 사격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은 스스로 질서를 바로잡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군인들이 실제로 했던 일은 도시 전체에 화재가 번지도록 하고, 명령을 어긴 시민들을 향해 총을 쏘거나 폭력을 휘두른 행위에 불과했다. 심지어 주민들의 집과 마을이 불타게 놔두라는 명령도 있었다. 이런 일은 99년 후에도 그대로 반복됐다.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상처 속에서 뉴올리언스의 경찰과 백인 자경단은 재산과 권위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흑인들을 사살했다. 지방과 주 정부, 연방 정부는 대부분 가난하고 흑인이었던 고립된 주민들을 도움이 필요한 재난의 희생자가 아니라, 억누르고 통제해야 할 위험한 적으로 여겼다.

또 주류 언론은 앞다퉈 카트리나 직후 일어난 약탈 상황을 집중 보도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 때문에 대기업 체인점에 쌓인 각종 제품들은 음식과 깨끗한 물이 필요한 사람들이나 지붕에 매달린 채 남겨진 할머니들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보였다. 당시 재난에 휩싸인 15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은 허리케인이 아니라 잘못된 정부 탓에 목숨을 잃었다. 육군 공병대가 쌓은 제방이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시 차원의 대피 계획은 없었다. 게다가 조지 W. 부시 정부도 신속하고 효과적인 구호 활동을 하지 못했다. 문제는 현재에도 그때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브라질의 한 야당 의원은 우파 성향인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Bolsonaro) 대통령에 대해 “수익 유지만 걱정하고 국민의 생명에 전혀 관심이 없는 그릇된 경제 단체들의 이익만 대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우소나루 대통령은 노동자와 경제를 함께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예품 프랜차이즈 기업 하비라비(Hobby Lobby)를 소유하고 있는 한 억만장자 전도사는 코로나로 영업 중지 명령이 내려졌을 때 직원들을 일터에 두라는 신의 인도를 받았다고 주장했다(10월 현재 모든 점포의 영업은 중단됐다). 트럼프 대통령의 후원자인 억만장자 리차드 울레인(Richard Uihlein)과 리즈 울레인(Liz Uihlein)이 소유한 기업 유라인(Uline)은 위스콘신의 직원들에게 “여러분의 증상과 추측을 동료들에게 말하지 마십시오. 직장을 불필요한 공황 사태에 빠뜨릴 수 있습니다”라고 공지했다. 급여 관리 회사 페이첵스(Paychex)의 설립자인 억만장자 톰 골리사노(Tom Golisano) 회장은 “경제를 지금처럼 폐쇄적으로 유지하면서 일어날 수 있는 (금전적) 피해는 사람을 조금 더 잃는 것보다 심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골리사노 회장은 이후 자신의 발언이 잘못 전해졌다며 사과했다.)

역사적으로 이 세상에는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산업계 거물들이 늘 있어 왔다. 이들은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위험한 탄광으로 내몰았다. 심지어 아이들까지도 죽을 만큼 힘든 노동 현장으로 내보내는 사업체를 제약 없이 운영하기 위해 뇌물을 뿌려 댔다. 또 어떤 이들은 기후 변화 위기를 알면서도 무시하며, 화석 연료를 추출하고 사용했다. 부(富)는 세상의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줬다. 적어도 사회 전반의 모습과 분리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했다. 그래서 부자들은 보수 성향을 갖기 쉽고, 보수주의자들은 본인의 경제적 지위와 상관없이 부자들의 뜻에 동조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은 보수주의자들에게 모욕적이다. 보수주의자들은 개척자들이 가진 ‘각자도생’이라는 환상을 따르기 때문이다. 가령, 자동차와 굴뚝 매연이 장기적으로 농작물과 해수면 상승, 산불 발생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세상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다는 기후 변화의 과학적 논리야말로 보수주의자들에겐 엄청난 모욕인 셈이다. 만약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면, 모든 선택과 행동, 발언이 낳을 결과까지 고려해야 한다. 통상 이런 생각은 실천적 사랑(love in action)으로 여겨지는데, 보수주의자들은 이를 절대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주의자들의 자유는 사리사욕 추구에 절대 제한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근본적으로 보수주의자와 기업의 리더 상당수는 과학을 알기 싫은 성가신 존재쯤으로 여기고 있다. 심지어 그중 일부는 과학적 규칙과 사실들도 자유 시장에 나온 상품처럼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뉴욕타임스》의 캐서린 스튜어트(Katherine Stewart) 기자는 “이렇게 과학과 비판적 사고를 부정하는 종교에 독실한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의 견해가 현재 미국의 코로나 위기 대응에서 문제시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국과 영국, 브라질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은 판데믹의 불길한 징조를 깨달으려는 의지가 거의 없다. 방역이라는 가장 중요한 일을 실패한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이제 실패를 부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또 경제 붕괴를 필수적으로 동반하는 판데믹이 필리핀, 헝가리, 이스라엘과 미국에서는 권위주의적인 권력 장악의 기회가 되고 있다. 이는 현재 가장 큰 문제와 해결책 역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변화의 힘


폭풍이 지나가면 시야를 가리고 있던 먼지들이 모두 깨끗이 씻겨 나가, 그 어느 때보다도 멀고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코로나라는 지금의 이 폭풍이 걷히면, 심각한 질병이나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처럼 우리가 어디에 있었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단단한 얼음에 갇혀 있던 현재 상태에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방식으로 자유롭게 변화를 추구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개인과 공동체, 생산 시스템, 그리고 미래에 대해 완전히 다른 감각을 갖게 될 것이다.

많은 선진국 국민들은 생활 공간에서 가장 즉각적인 변화를 느끼고 있다. 사람들은 집에만 머무르며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해 왔다. 학교부터 직장, 회의, 휴가, 운동 시설, 볼일, 파티, 술집, 클럽, 교회, 이슬람 사원, 유대교 회당까지 사람들은 바쁘고 분주한 일상과 거리를 뒀다. 철학자이자 신비주의자인 시몬 베유(Simone Weil)는 멀리 사는 친구에게 “우정으로 촘촘히 엮인 이 거리를 사랑하자.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헤어져 있지도 않으니까”라고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은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서로에게서 물러났다. 그리고 물리적 거리 두기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사회적 취약 계층을 도울 방법을 찾아냈다.

친구이자 기후 운동가인 레나토 레덴토 콘스탄티노(Renato Redentor Constantino)는 필리핀에서 이렇게 보내 왔다. “지금 우리는 인류를 이렇게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게 해줬던 사랑의 표현을 매일 목격하고 있다. 우리 주변은 물론 다른 도시와 여러 나라들에서 용기와 시민 의식이 불러일으킨 대단한 행동들을 접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폭력과 무관심, 오만한 태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사람들이 (소위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일부 반사회적인 행동들을 결국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우리 모두는 어떻게 연결돼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움직였을까. 우리에게 필요한 여러 제품들은 어떻게 여기저기를 오갔을까. 더 이상 코로나 감염을 피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될 때, 이런 의문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지 궁금하다. 아마도 우리는 대면 접촉의 가치를 더 인정하고 감사히 여길 것이다. 각자의 발코니에서 함께 노래를 부르거나 의료진에게 박수를 치던 유럽인들은 교외에 모여 노래하고 춤을 췄던 미국인들과는 다른 종류의 소속감을 갖게 될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만들고 식탁에 가져다주는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존경심을 갖게 될 수도 있다.

멈춰진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다시 바쁘게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정적이 흐르는 지금 세상의 분위기가 더 지속될 수도 있다. 의약품, 의료 장비와 같은 필수 방역품들이 다른 대륙에서 생산되는 시스템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제때 물건이 도달하지 않는 불안정한 공급 체계도 다시 따져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를 특징짓는 민영화 물결은 인간이 더 이기적이 되고 공동체 의식과 사회적 유대감에서 멀어지면서 시작됐다. 다함께 코로나와 맞선 경험이 민영화의 물결도 바꾸길 바란다. 각자가 어떻게 이 세상에 속하고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새롭게 깨닫게 되면, 기후 위기를 막을 의미 있는 행동이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갑작스럽고 엄청난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배웠기 때문이다.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는 200여 년 전에 “우리는 모으고 쓰며 우리 힘을 낭비한다”고 썼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음식과 옷, 쉼터, 의료 교육이 충분한지는 개인이 어떤 일을 하고 얼마나 돈을 버는지에 달려 있지 않다. 어쩌면 지금이 이런 사실을 깨닫는 순간일 수 있다. 아직도 이를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코로나 확산이 보편적 의료 시스템과 기본 소득의 필요성을 보여 주고 있을 것이다. 재난의 여파 속에서 의식과 우선순위의 변화는 강력한 힘을 가진다.
1972년 니카라과의 수도 마나과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인한 피해 ©AP
 

절대 일어날 수 없었던 일들


이제껏 대부분 20세기 재난에 대해 썼지만,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흑사병과도 비교할 수 있다. 흑사병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전멸시켰고, 영국에서는 전쟁세와 임금 제한에 항의하는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졌다. 노동자들의 봉기는 결국 진압됐지만,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권리와 자유를 가져다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1] 마찬가지로, 지난 3월 미국에서 통과된 긴급 법안을 통해 많은 노동자들이 병가와 관련한 새로운 권리를 얻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노숙자 숙소 제공 등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던 많은 일들이 이뤄졌다.

아일랜드는 병원을 국유화했다. 아일랜드의 한 기자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라고 언급했던 사안이다. 캐나다는 실직자들을 위해 4개월 치의 기본 소득을 마련했다. 독일은 그보다 더 많은 기본 소득을 제공했다. 포르투갈은 판데믹 동안 이민자와 망명 신청자들을 온전한 시민으로 대우하기로 결정했다. 미국에서 우리는 강력한 노동 항쟁과 그 결과가 나타났다. 홀푸드(Whole Foods), 인스타카트(Instacart), 아마존(Amazon)의 노동자들은 판데믹 동안 안전하지 않은 환경에서 일하도록 강요하는 회사 방침에 항의했다. 덕분에 홀푸드는 코로나 검사에서 양성 반응을 보인 직원들에게 2주간의 전액 유급 휴가를 제공했다. 인스타카트는 직원과 손님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변화를 주었다고 발표했다. 아마존은 안전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따르고 있다고 밝혔다. 50만 명에 이르는 크로거(Kroger) 식료품점 직원들을 포함하여 일부 노동자들은 새로운 권리와 임금 인상을 얻었다. 15개 주 법무장관들은 아마존에 유급 병가 확대를 요구했다. 이러한 구체적 상황들은 우리 사회가 가졌던 재정 여건이 충분히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1381년 영국 농민 반란 ©Pictorial Press Ltd/Alamy
그러나 재난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즉각적이거나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을 때가 많다. 2008년 금융 위기는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 시위로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은 주택 담보 대출과 학자금 대출, 영리 목적의 대학 교육, 의료 보험 제도 같은 경제적 불평등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새롭고 정밀하게 조사하도록 이끌었다. 또한 민주당이 미국을 더욱 공정하고 평등하게 만들 수 있는 진보적인 정책을 내도록 한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과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의 지명도를 높이는 결과도 나타났다. 전 세계의 ‘점령하라(Occupy)’ 운동과 ‘자매 시위’들이 촉발한 사회적 대화들은 지배 세력에 대한 보다 비판적이고 세밀한 조사와 함께 경제 정의에 대한 더 강한 요구도 불러일으켰다. 공공 영역의 변화는 개인의 내면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세상의 변화는 개인의 자아 감각, 우선순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의 범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이제 겨우 코로나라는 재난의 초기 단계에 있다. 아직도 낯선 정적만 흐른다. 독일군과 영국군이 하루 동안 전투를 중단하고 총을 내려놓은 채 자유롭게 어울렸던 1914년 크리스마스 휴전과 흡사하다. 전쟁이 잠시 멈춘 것이다. 우리가 모으고 쓰는 행위는 지구에 대한 일종의 전쟁이었다. 코로나 발생 이후 탄소 배출량은 급감했다. 보도에 따르면 로스앤젤레스, 베이징, 뉴델리 상공의 공기는 기적적으로 깨끗해졌다. 미국 전역의 공원이 시행한 방문객 출입 금지 조치는 야생 동물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2018~2019년 미국 연방 정부가 일시적으로 폐쇄(government shutdown)됐을 당시 샌프란시스코 북쪽의 포인트 라이스 국립 해안(Point Reyes National Seashore)의 빈 해변은 코끼리물범(elephant seal)들이 차지했다. 코끼리물범들은 아직도 짝짓기와 출산을 할 때마다 그 해변을 이용하고 있다.

 

고통과 공존하는 희망


다른 비유도 있다. 애벌레는 번데기에 들어가면 스스로 녹아 액체가 된다. 애벌레였다가 나비가 되려고 하는 순간의 상태는 애벌레도, 나비도 아닌 일종의 ‘살아 있는 수프’다. 이 ‘살아 있는 수프’ 안에는 애벌레가 날개 달린 성체로 변태할 수 있도록 촉진시키는 성충 세포가 있다. 우리 중에서 가장 선견지명이 뛰어나고 포용적인 누군가가 성충 세포 역할을 하기를 바란다. 지금 우리는 수프 속에 있다. 재난의 결과는 미리 정해지지 않는다. 얼음처럼 단단하게 결속돼 있던 것들이 유동적으로 변하면서, 최선과 최악의 결과가 모두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우리는 멈춰 있는 동시에 엄청난 변화의 상태에 놓여 있다.

지금 시기는 주로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고, 예상치 못했던 세상을 내다보는 이들에게는 깊이 있는 시간이다. 사람의 감정은 선과 악, 행복과 슬픔으로 쉽게 나눠진다. 마찬가지로, 얕고 깊은 감정으로도 나눌 수 있다. 행복 추구는 내면의 삶과 주변의 고통으로부터의 도피로 여겨진다. 불행은 실패로 간주된다. 하지만 슬픔과 애도, 비통함처럼 공감과 연대에서 생겨난 감정들은 고통뿐 아니라 의미도 담고 있다. 슬프고 겁에 질린 감정은 마음을 쓰고 있고 정신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표시다. 2020년이 갑자기 어떤 과정과 연유로 우리 모두를 늪과 같은 새로운 곳으로 데려왔는지 이해하려 한다면 수십 년의 연구와 분석, 토론과 고찰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7년 전 패트리스 쿨러스(Patrisse Cullors)는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BLM)’ 운동의 사명 선언문에서 “집단의 변화와 혁신을 달성하려는 모두의 힘을 쌓기 위해 집단행동의 희망과 영감을 제공하자”며 “슬픔과 분노에 뿌리를 두었지만, 미래와 꿈을 향한다”고 적었다. 이 문장은 아름답다. 희망적이라서가 아니다. BLM을 시작하고 변화를 촉발했기 때문도 아니다. 희망이 어려움, 고통과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깊은 슬픔과 솟구치는 분노가 희망과 양립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복잡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희망은 모든 일이 다 괜찮을 것이라는 낙관론이 아니다.

희망은 앞으로 닥칠 불확실성 속에서도 명확한 시각을 제공한다. 함께할 가치가 있는 갈등이 있고, 그중 일부는 이길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희망의 가장 위험한 면 중 하나는 재난이 닥치기 전에는 모든 것이 괜찮았고, 과거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 실수에 빠지는 것이다. 판데믹 이전의 평범한 삶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절망과 배척의 시기였고, 환경과 기후의 재앙이자 불평등의 근원이었다. 비상사태가 끝난 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하는지 찾고, 결정할 수는 있다. 우리 중에 여러 사람이 이미 그럴 준비를 하고 있다고 믿는다.
[1]
1381년 세금 인상에 항의하며 일어난 영국 농민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파급력은 컸다. 이후 영국의 농노제 폐지에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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