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주의의 발명
완결

백인주의의 발명

17세기 이전에는 스스로를 백인종이라는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백인주의라는 발상이 발명되자, 그것은 세계를 빠르게 재편하기 시작했다.

버지니아주 크로커에 있는 전직 미국 대통령들의 조각상 ⓒPhotograph: Randy Duchaine/Alamy
2008년, ‘백인이 좋아하는 것들(Stuff White People Like)’이라는 풍자적인 성향의 블로그가 비록 잠시이긴 했지만 세간의 선풍적인 이목을 끌었다. 그곳에는 직설적인 비유가 있었는데, 백인들이 좋아하는 항목들을 136가지나 열거해 놓고, 각 항목이 가진 인종적인 매력을 설명하는 내용을 마치 그것이 인류학적인 사실인 것처럼 함께 적어 놓고 있었다. 그러한 항목들 중에는 41번의 인디 음악이라던가 10번에 있는 웨스 앤더슨(Wes Anderson) 감독의 영화처럼 조금은 뻔한 것들도 있었고, “무언가에 대한 의식”(18번)이나 “어른들이 아이들처럼 노는 것”(102번)처럼 다른 곳에서 영감을 받아서 작성한 것도 있었다. 이 글은 순식간에 인기를 얻었다. 불과 두 달 만에 ‘백인이 좋아하는 것들’ 블로그는 400만 명의 방문자가 몰렸으며, 곧이어 이 블로그에 실린 글을 바탕으로 만든 책은 뉴욕타임스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블로그를 만든 사람은 코미디언 지망생이자 박사 과정을 중퇴한 크리스찬 랜더(Christian Lander)였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에서 광고 카피라이터로 일하면서 충동적으로 이 사이트를 개설했다. 여러 인터뷰에서 랜더는 자신의 풍자가 계급에 대한 것만큼이나 인종과도 어느 정도는 관련이 있다는 점을 언제나 인정하고 있었다. 그는 이 블로그의 대상이 자신과 같이 부유하고 학력 수준이 높은 도시인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백인주의(whiteness)가 아무런 의미 없는 하나의 정체성에 불과하다는 가정에 기댄 유머를 추구하고 있었지만, 그 블로그의 인기가 백인이라는 인종에 대한 노골적인 축원과 관련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별로 없다. “백인이라는 사람들은 자신이 매달리고 싶은 무언가를 필사적으로 찾으려 합니다.” 그가 2009년에 한 말이다. “저와 함께 자란 거의 모든 백인들이, 그러니까, 제2의 언어를 사용하는 다른 민족의 가정에서 자랐으면 하고 바라고 있었습니다.”

‘백인이 좋아하는 것들’ 블로그의 현재 모습을 다시 살펴보면, 비교적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의 독특 아이러니함은 여전하고 주요 이용자층의 일반적인 특성도 바뀌지 않았다. 지금도 여전히 시간이 엄청나게 많고 가처분 소득도 엄청나게 많은 백인들이 들락거리고 있다. 그리고 그들 중 상당수가 지금도 요가(15번)와 베스파(Vespa) 스쿠터(126번)를 좋아하고, “흑인들이 더 이상 듣지 않는 흑인 음악”(116번)을 좋아한다.

그러나 바뀐 것도 있다. 즉, ‘백인이 좋아하는 것들’도 분명하게 나이가 들었음을 보여 주는 방식으로 바뀐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문화적인 배경이다. 10년 전, 백인주의는 주류 문화에 마치 안개처럼 퍼져 있었다. 즉, 어디에나 퍼져 있을 정도로 팽배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랜더가 백인들에 대해 쓰는 글에서 백인을 말할 때는, 그 주제가 옹호와 어색함 사이의 좁은 범위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이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과 그에 따르는 특권을 나누어주기 위해서 떠들어댄 것이 아닌 것처럼, 그러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토론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특히 한때는 자신들을 랜더가 만든 블로그의 열렬한 팬으로 생각했을 것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백인주의의 대중적인 의미에 대한 거의 전면적인 재평가가 진행되었다. 백인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농담처럼 말하는 일종의 카타르시스 행위였지만, 이제는 신자유주의나 포퓰리즘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문화 및 정치 현상의 중심 동력으로 진지하게 언급되고 있다. 2008년에 랜더가 백인주의를 문화적으로 단조로운 혼합물이고 그것의 가장 큰 죄악은 재미없다는 점이라며 조롱하는 내용으로 쓴 책이 베스트셀러에 등극할 수 있었던 반면에, 불과 9년 후에는 타네하시 코츠(Ta-Nehisi Coates)가 백인주의를 두고 “이 나라와 이 세계에 대한 실존적인 위험”이라고 설명하는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된다.

물론 이러한 변화의 상당 부분은 도널드 트럼프와 관련이 있는데, 코츠는 그를 두고 “백인주의는 개념적이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진 권력의 핵심”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이는 단지 트럼프 때문만은 아니다. 백인주의는 대서양의 양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을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었다. 브렉시트는 물론이고, 노르웨이와 뉴질랜드, 미국에서 일어난 대규모 총기 난사, 조지 플로이드(George Floyd)와 브리오나 테일러(Breonna Taylor) 사망 사건, 그리고 지난 1월 6일 미국의 국회의사당에서 있었던 반란 사태 등이 대표적이다. 이처럼 실제로 발생한 사건들과 함께 타네하시 코츠, 넬 어빈 페인터(Nell Irvin Painter), 조던 필(Jordan Peele), 에릭 포너(Eric Foner), 에바 두버네이(Ava DuVernay), 애덤 서워(Adam Serwer), 바버라 필즈(Barbara J. Fields)와 캐런 필즈(Karen E. Fields) 자매, 케빈 영(Kevin Young), 데이비드 올루소가(David Olusoga), 니콜 해나-존스(Nikole Hannah-Jones), 콜슨 화이트헤드(Colson Whitehead), 클로디아 랭킨(Claudia Rankine)을 필두로 한 많은 이들이 학계, 언론계, 예술계, 문학계 등에서 엄청나게 활약하면서, 50년 만에 인종으로서의 백인에 대한 가장 진지한 재성찰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추정이 가끔씩 이루어지곤 하지만, 이번에는 실제로 그 영향이 측정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퓨(Pew Research Center)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 백인들의 거의 3분의 1은 최근의 인종적인 이슈에 대한 관심이 미국인들이 인종에 대해 가지는 태도에서 “상당한 변화”를 의미한다고 답했고(45퍼센트는 “약간의 변화”라고 답했다), 거의 절반은 이러한 변화가 인종적인 불평등을 개선하는 정책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국에서 유가브(YouGov)가 지난해 12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영국인들의 3분의 1 이상이 인종 차별에 대해서 예전보다 더 많은 토론을 벌였다고 대답했다.

동시에, 백인주의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관심은 상당한 혼란과 실망감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 특히 자기 자신을 인종 차별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백인들 사이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퓨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미국 백인들의 절반은 인종적인 이슈에 대한 논의가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절반 정도의 백인들은 인종 차별이 존재하는 영역에서 그러한 차별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보다는 인종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에서 그러한 차별이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라고 말했다.

이러한 최근의 논쟁을 통해서 무엇보다도 드러나는 것은 아마도 백인주의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전히 거의 아무런 합의가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백인”이라는 것은 유의미한 지표로 간주되고 있는데, 그것은 나이나 젠더와 마찬가지로 뉴스 기사에서 언급해야 하고, 정치 여론조사에서 집계되어야 하며, 정부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어야 할 만큼 중요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정체성이 우리에게 말해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상당한 논쟁거리이다. 백인주의는 많은 면에서 성 아우구스티누스(Saint Augustine)가 목격했던 ‘시간’이라는 개념과 유사하다. 즉,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설명하라는 요청을 받지 않는 한 그것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그것에 대해 질문을 받으면 도저히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백인주의라는 종교 


100여 년 전, 사회학자이자 사회비평가였던 듀 보이스(W. E. B. Du Bois)는 〈백인의 영혼(The Souls of White Folk)〉이라는 에세이에서, 우리가 백인이라고 부르는 인종적 정체성에 대해서 가장 날카로우며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의 하나로 평가받는 표현을 제시한 바 있다. “전 세계의 사람들 사이에서 개인으로서의 백인주의를 발견한다는 것은 매우 근대적인 일이다. 그것은 실로 19세기와 20세기적인 현상이다.”

비록 당시에는 급진적이었지만, 듀 보이스가 “신이 창조한 모든 색조들 가운데 오직 흰색만이 갈색이나 황갈색보다 본질적이며 명백하게 우월하다고 믿는” 교리에 기반을 둔 “백인주의라는 새로운 종교”라고 불렀던 이러한 규정은, 이후에 역사학자들을 비롯한 다른 학자들이 인종적인 정체성을 이해하는 방식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는 부분적으로 백인과 같은 인종적인 분류가 생물학적인 사실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믿음에 더욱 가깝다는 그의 주장과도 관련이 있다. 듀 보이스의 시대에는 인종이 생물학적인 인류 내에서 자연적인 종의 분화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흔했는데, 그는 이러한 관념을 거부했다. 또한 백인과 관련된 신체적, 정신적, 행동적 특성이 현대 사회에서 가장 귀중한 것이 되었으며 거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주장하는 결론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한 주장은 예를 들어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의 견해에서도 나타나는데, 그는 1781년에 초판이 출간된 자신의 저서 <버지니아 주에 관한 주석(Notes on the State of Virginia)>에서 인종 간에 “자연이 만든 실제적인 차이”를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그 기세가 조금 약화되긴 했지만 2세기가 지난 1994년에 찰스 머레이(Charles Murray)와 리처드 헌슈타인(Richard J. Herrnstein)이 출간한 〈종형 곡선(Bell Curve)〉에서 다시 나타나게 된다. 머레이와 헌슈타인은 IQ 테스트 기록에서 흑인과 백인 집단이 보이는 차이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유전자와 환경적인 요소가 어떤 형태로 섞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서, 적어도 그런 차이의 일부는 자연적 차이로 인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종형 곡선〉이 출간될 무렵, 인종적인 분류가 생물학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듀 보이스의 주장은 이미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과학적인 근거는 더욱 강력해질 뿐이었다. 2017년에 진행된 어느 연구에서는 전 세계 약 6000명의 DNA를 검사했는데, 그 결과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일부 유전적인 차이는 동아프리카인, 남유럽인, 극지인 등 다양한 조상의 혈통으로 추적해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지만, 이러한 혈통들은 그 어떤 것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종이라는 개념에 해당하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학자이자 사회비평가 듀 보이스 ⓒPhotograph: Keystone/Getty Images
만약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백인이라는 개념이 순전히 사회학적인 현상이라는 사실에 충분히 쉽게 동의한다면(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인종이라는 것은 사회적인 개념이다”라는 생각도 하나의 클리셰가 되었다), 백인주의라는 것이 인류의 역사에서 비교적 새로운 현상이라고 말했던 듀 보이스의 주장은 사실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의 유전학에서 제시하는 사례는 물론이고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입증한 바에 의하면, 비록 듀 보이스의 주장은 몇 백 년의 오차가 있기는 하지만, 백인종이라는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사람들이 나타난 것은 겨우 근대 시기에 들어서부터라는 그의 생각은 정확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이 현대적인 개념이라는 점을 과장해서 해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백인주의의 진화 과정은 엉망이었고 불분명한 경우가 많았다. 역사학자인 넬 어빈 페인터(Nell Irvin Painter)는 이렇게 주의를 주고 있다. “백인이라는 정체성은 완전한 불변의 형태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 전에도 이미 범 유럽인(pan-European)의 정체성이라는 자각이 커지는 것을 포함해서, 흰색을 순결함과 고상함의 상징으로 보는 오랜 문화적 전통, 그리고 흔하게 볼 수 있는 자민족 중심주의와 같은 의미심장한 선례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금은 과감하게 그 시기를 좁혀 보자면, “개인으로서의 백인주의의 발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발전 단계는 17세기 후반, 아직 초창기였던 대영 제국의 주변에서 발생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오스카 핸들린(Oscar Handlin)과 머리 핸들린(Mary Handlin) 부부나 에드먼드 모건(Edmund Morgan), 에드워드 러그머(Edward Rugemer)와 같은 역사학자들은, 비록 제노포비아(xenophobia)가 인간 집단 사이에서 상당히 흔한 것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백인종이라는 정체성을 발명하게 된 동기는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필요성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라는 듀 보이스의 의심이 대체적으로 옳다는 점을 확인해주고 있다. 역사학자이자 후에 트리니다드토바고의 초대 총리가 되는 에릭 윌리엄스(Eric Williams)의 말을 빌리자면, “노예 제도는 인종 차별의 산물이 아니라, 인종 차별이 노예 제도의 결과물이다.”

 

백인주의는 하층 백인을 위한 특혜   


만약 17세기 초기의 잉글랜드 사람에게 자신의 피부 색깔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 사람도 물론 피부색이 하얗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부가 하얗다는 것이 코가 둥글다거나 머리가 대머리라는 것보다 더한 집단적인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적절한 근거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만약 그 사람에게 당시 빠르게 확장하고 있던 세계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설명하라고 요청한다면, 그는 당연히 가장 먼저 자신을 잉글랜드인이라고 설명했을 것이다. 만약 그러한 분류가 너무 좁다면, 그러니까 그가 터키인이나 아프라카계 사람들에게는 없지만 프랑스나 독일 사람들과는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무언가를 덧붙여야 한다면, 그는 거의 분명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정체성은 영국의 노예 무역 발전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었고, 결국 인종적인 백인주의의 발달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17세기 초, 서인도제도와 미대륙 식민지의 농장 소유주들은 유럽에서 이주해 온 계약 하인(indentured servant)들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이런 하인들은 일종의 소유물로 여겨졌고 그들에 대한 처우도 혹독한 경우가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영국의 가장 부유한 식민지였던 바베이도스의 노동 조건은 악명 높았다. 그러나 그들은 최소한 한 가지 측면에서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들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이다. 법률에 의하면, 기독교인에 대해서는 범죄자나 전쟁포로가 아닌 이상 평생을 구금해둘 수 없었다.

아프리카인들은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없었다. 그들은 신앙심이 없는 자들로 여겨졌고, 그래서 기독교 국가들의 “영원한 적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노예로 붙잡아 두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었다. 1640년경이 되자, 계약 하인에 대한 거친 대우가 알려지면서 설탕이나 담배 농장에서 일하기 위해 자진해서 건너오는 유럽인들의 공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식민지 주민들은 점점 더 노예 제도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고, 구대륙과 신대륙 사이에는 문자 그대로 대서양을 가르는 허점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노예 노동력을 공급함으로써 환상적인 수익성을 가진 사업을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었다.

신대륙의 농장주들은 계약 하인으로 건너온 유럽인들에 대한 잔인한 처우, 그리고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그보다 더욱 잔악한 처우가 자칫하면 복수심이나 그보다 더한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한 노동력의 숫자가 자신들보다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든 봉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상시적인 두려움 속에서 살았다. 그들이 특히 두려워했던 것은 1676년에 발생한 베이컨의 반란(Bacon’s Rebellion) 같은 사건이었는데, 당시에는 계약 하인의 신분이던 유럽인들이 버지니아의 식민 정부에 맞서서 자유로운 신분 및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과 함께 싸우는 일이 일어났다.

이런 사건을 막기 위해, 농장주들은 처음에는 “기독교인” 하인들에게 노예화된 “니그로(Negro)”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합법적인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했다. 그것은 비록 미미한 차이이기는 했지만 유럽 출신 계약 하인들에게 주어지는 일련의 혜택들을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에게 주어지는 것보다 더 높게 책정함으로써 그들의 충성심을 돈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17세기 말을 향해 가면서, 이러한 정책이 상당히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노예 및 하인 행위를 규제하는 법률의 상당수가, 예를 들자면 1681년에 자메이카에서 제정되어 이후에 남부 캘리포니아에서도 똑같이 사용된 하인법(Servant Act) 등에서 특권 계층을 “기독교인”이 아니라 “백인”이라고 규정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설명은 그 누구보다도 에드워드 러그머(Edward Rugemer)와 역사학자인 캐서린 거브너(Katharine Gerbner)가 내놓은 것으로, 백인주의를 합법적인 범주로 확립함으로써 종교적인 딜레마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퀘이커교의 창시자인 조지 폭스(George Fox)를 포함한 1670년대의 기독교 선교사들은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에게도 기독교의 믿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이 농장주들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명확했다. 만약 아프리카계 노동력이 기독교인이 된다면, 더 이상 기독교 왕국의 “영원한 적들”이 아니게 되고, 따라서 그들을 노예화할 수 있었던 합법적인 근거가 사라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에게 특별한 특권을 부여했던 식민지 법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아마도 이러한 법안을 만든 사람들은 아프리카인들이 언젠가는 그들과 같은 신앙을 갖게 될 수도 있을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농장주들은 그전까지는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의 개종을 근원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자 시도했었다. 예를 들자면 1680년에 바베이도스 의회는 만약에 그러한 개종을 허용한다면, “개종한 니그로들이 점점 더 비뚤어지고 다른 이들에 비해서 다루기 힘들어진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섬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노력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런던의 대주교가 이를 반대했다), 그들은 대신에 기독교의 세례가 자유를 추구하기 위한 근거로서 활용될 수 없음을 보장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후에 기독교인들에 대한 특권이 문제시되면서, 식민주의자들에게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해졌다. 이제는 더 이상 종교적인 정체성만으로는 그들 자신과 유럽에서 온 하인들을 노예화된 아프리카인들과 구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그들에게는 에드먼드 모건(Edmund Morgan)이 “인종적 멸시의 차단막(a screen of racial contempt)”이라고 부르는 것이 필요해지게 된다. 이후로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백인으로 생각하기 시작할 필요가 있었다.

 

백인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탁 


1694년 말, 노예선을 이끌던 어떤 선장 한 명은 자신의 노예 무역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새롭게 고안된 인종적 논리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고 있었다. (토머스 필립스(Thomas Phillips)는 자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어떤 피부색이 다른 피부색과는 다른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거나, 백인이 흑인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오직 우리가 백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인주의라는 것은 그 자체로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백인” 및 아프리카계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게 해주는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빠르게 입증했다. 이를 두고 역사학자인 시어도어 앨런(Theodore Allen)은 이렇게 표현했다. “농장 부르주아들은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노예화를 생산 체제의 근간으로 전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도적으로 모든 백인 빈민층에게까지 특권적인 지위를 확장했다.”

백인이라는 아이디어가 경제적으로 유용하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전 세계로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듀 보이스가 그것을 두고 종교라고 부른 것은 틀리지 않았고, 그것은 마치 종교처럼 가장 은밀한 부분에서부터 가장 공공연한 영역에 이르기까지 모든 심리적, 사회적, 정치적 단위에서 통용되었다. 그것은 또한 종교처럼, 현지의 조건에 맞게 적응했다. 영국령 버지니아에서 백인이라는 것은 미국 남북전쟁 이전 시기의 뉴욕이나, 영국이 통치하던 시절의 인도나, 흑인에 대한 차별 정책이 존재하던 시절의 조지아나, 연방 설립 이후의 오스트레일리아나, 제3제국 시절의 독일에 있던 백인과 동일한 의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들을 모두 하나로 묶는 특이한 아이디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백인이라고 불리는 일부 집단의 사람들이 다른 이들보다 당연히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총리를 지냈으며 당대에 가장 헌신적인 인종 이데올로기의 신봉자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Benjamin Disraeli)는 이렇게 표현했다. “인종은 차이를 의미하고, 차이는 우월성을 의미하며, 우월성은 우세함으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서, 백인이라는 아이디어는 백인 우월주의와 동일한 것이었다. 1950-60년대에 시민 평등권 운동이 일어나기 전의 3세기 동안, 이러한 생각은 가장 세련된 수준의 문화권에서 당연시되었는데, 이는 달리 말하자면 그들이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가장 소리 높여 주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의미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들을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해야 하며 절대로 단순히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칸트는 1802년에 출간된 〈자연지리학 강의(Lectures on Physical Geography)〉에서 “인류는 백인이라는 인종에게서 가장 완벽한 상태가 된다”거나, 〈인류학 강의(Lectures on Anthropology)〉를 위한 메모에서는 “아메리카 원주민이나 니그로들은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다, 따라서 오직 노예로서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간디조차도 젊은 시절에는 백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거짓 주장을 받아들였는데, “영국인과 인도인은 인도-아리아인(Indo-Aryan)이라는 동일한 혈통으로부터 태어났다”고 말하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들이 지배적인 인종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신들 스스로의 죄의식을 의식한 듯, 백인주의라는 종교의 전도사들은 그것이 단순한 편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언제나 필사적이었다. 성경이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노아(Noah)의 아들인 함(Ham)에 관한 이야기를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신성한 항변으로 변질시켰다. 18세기와 19세기에 해부학과 인류학이 명성을 얻었을 때, 그들은 두개골의 가로세로 비율과 횡단면적에서 보이는 인종적인 차이를 마치 과학적인 근거인 것처럼 인용했다. 20세기 들어서 심리학이 발전하자, 이번에는 IQ의 차이에 대해서 같은 식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1967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Photograph: Rolls Press/Popperfoto/Getty
이런 모든 노력들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백인주의라는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완벽한 비전을 결코 완성하지 못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그로부터 이득을 얻는 위치에 있지만 인종적 우월함이라는 교리를 거부하는 이들을 포함해서 언제나 반대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기억되는 사람들로는 엘리자베스 프리먼(Elizabeth Freeman),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시팅 불(Sitting Bull), 프란츠 보아스(Franz Boas), 하비바 레이크(Haviva Reik), 마틴 루터 킹 주니어(Martin Luther King Jr.),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가 있고, 그 외에도 지금은 잊혔지만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활용해서 저항했던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또한 부분적으로는 그들의 일관성 없는 원칙도 한몫했다. 즉, 선조들 가운데 단 한 명이라도 흑인이 있으면 백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미국의 한 방울 원칙(one-drop rule), “백인종(caucasian)”[1] 이 무엇인가에 대한 끝없는 논쟁, 히틀러가 일본인들에게 “명예 아리아인”이라는 지위를 주었다는 사실 등 백인의 범위를 규정하는 말도 안 되는 원칙은 인류사회의 엄청난 복잡성에 비하면 그 논리가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백인주의라는 종교가 결코 불변의 과학적 진리로 받아들여질 수는 없었지만, 사회의 현실을 형성하는데 있어서는 여전히 거대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이러한 성공의 일부는 그것이 가진 유연함과 관련이 있었다. 그것이 노예 제도를 더욱 활성화하는 데 기여한 덕분에 미국에서는 백인이라는 의미가 흑인의 반대 개념으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이러한 두 가지의 극단 사이에는 전략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1751년에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은 잉글랜드와 색슨(Saxon)계의 후손만이 “이 지구상에서 백인들의 주요한 몸체를 이룬다”고 선언했고, 거의 80년 후에는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중국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아일랜드계 사람들도 백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문화적으로 누가 백인인가에 대한 정의는 남유럽의 가톨릭교도, 아일랜드계, 그리고 심지어 수세기 동안이나 철저한 외부인으로 여겨졌던 유대인들에게까지 확장되었다.

백인주의라는 종교는 또한 그들이 억압했던 사람들이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들이 진정한 희생자라고 추종자들을 설득하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1692년에 영국령 바베이도스의 식민지 입법의원들은 이렇게 불평했다. “이 섬에 있는 온갖 니그로와 노예들이 가장 끔찍하고, 피비린내 나고, 지독하고, 혐오스러운 반란과 대학살과 암살과 파괴를 오랫동안 준비하고, 획책하고, 음모를 꾸미고, 계획해왔다.” 이러한 내용은 1903년 우드로우 윌슨(Woodrow Wilson)이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을 창설한 남부인들을 두고 “단지 자기보호 본능에 의해서 이끌린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나, 도널드 트럼프가 2015년에 대통령 선거 운동을 시작하면서 멕시코 이민자들이 미국으로 “마약을 가져오고 있으며, 범죄를 들여오고 있고, 그들은 강간범들이다”고 경고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백인주의라는 종교가 설득이나 공포심의 조장을 통해서 개종자를 얻을 수 없었던 곳에서는, 법률, 제도, 관습, 교회를 동원하여 그 특권을 행사하면서 그러한 권력을 확보하기 위한 더욱 조악한 조치들을 전개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무력에 의존했다. 20세기 중반까지, 백인이라고 불리는 인종의 사람들이 다른 모든 이들보다 우월하다는 추정은 단지 대서양 양안의 노예무역에만 중심적인 정당성을 부여해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에 대한 거의 완전한 말살, 콩고에서 벨기에가 저지른 잔혹 행위, 대영제국의 인도, 동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에 대한 피로 물든 식민지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 및 서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에서 저지른 똑같이 피로 물든 식민지화, 나치 독일의 집단 학살 집행, 그리고 남아프리카에서의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까지 정당성을 부여해주었다. 그리고 이들은 그저 가장 극단적인 사례들일 뿐이다. 이런 사례 이외에도 백인이라는 이들이 저지른 살해, 강간, 노예화는 그 건수만 따져도 최소한 아홉 자리(10억 건)에 달하는데, 거의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늘 결핍에 시달리고, 제약을 받았고, 적대시당하고, 모욕을 받으며 살았다.

 

위협받는 백인 우월주의 


백인 우월주의에 대해서 노골적으로 지지하는 주장은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야 영미권의 대중적인 담론에서 광범위하게 반감을 사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주로 시민권 운동 및 반식민지 활동가들의 공로 덕분이기는 하지만, 세계 대전도 그 자체로 한 몫을 했다. 나치 정권이 저지른 참상이 당시의 미국이나 영국에서 일어난 그 어떤 사건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긴 했지만, 2차 세계 대전은 미국과 영국 모두에서 여전히 팽배해 있던 인종 차별주의를 무시할 수 없게 만드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했다. (1946년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이처럼 잔인하고 그릇된 정책으로 세계를 지배하려고 시도했던 적들이 패배하는 것을 최근에 목격했기 때문에, 올해는 선입견과 편견, 인종 증오라는 해악에 맞서는 캠페인을 펼치기에 확실히 좋은 시기”라고 주장하며 그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분명히 밝혔다.)

백인들이 결속해야 한다는 정치적 호소는 느리기는 했지만, 확실히 줄어들었다. 예를 들어서, 1955년 윈스턴 처칠은 “영국을 하얀색으로 유지하자”라는 표현을 총선 승리를 위한 테마로 구상할 수 있었고, 1964년 말에만 하더라도 보수당의 후보인 피터 그리피스(Peter Griffiths)가 노골적으로 인종 차별적인 슬로건을 지지하면서 깜짝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1968년에는 이녹 파월(Enoch Powell)이 “피의 강물(Rivers of Blood)”이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어느 유권자가 “15년이나 20년이 지나면 흑인이 백인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며 한탄했다는 내용에 동의하는 발언을 했다가 타임스(Times) 신문으로부터 “악랄한 연설”이라는 표현을 받으며 거센 비판을 받았고, 결국 그는 보수당의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2]에서 축출되었다. 노예의 세기를 거쳐서 인종 차별의 세기가 이어졌던 미국에서도 인종 차별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 발언에 대해서는 대중적인 질책이 점점 더 심해졌다. 60년대를 지나 70년대로 접어들면서, 미국 의회는 공공 생활의 많은 영역에서 노골적인 인종 차별을 불법화하는 일련의 법령들을 통과시켰다.

정부에 의해 강요된 노골적인 백인 우월주의를 거부하는 분위기가 점점 더 커지는 것은 공공 정책의 측면에서는 매우 중요한 결과였다. 그렇다고 해서 정치적인 영향력으로서의 백인주의가 그 호소력을 잃었다는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파월의 연설이 있은 지 몇 주 후에 실시된 갤럽(Gallup)의 여론조사에 의하면, 영국인들의 74퍼센트는 갈색 피부의 이민자들을 본국으로 추방해야 한다는 파월의 주장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그것은 또한 백인주의가 오랜 지배의 역사로부터 진정으로 분리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더욱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두었다.

많은 백인들은 그들의 백인주의가 남긴 추악한 역사를 힘겹게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시민권 운동 진영이 인종 차별 반대와 관련하여 그들이 해야 할 모든 일을 완수했다고 판단하는 것이 좀 더 쉽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결과는 기이한 데탕트(détente)였다. 반면에 백인주의는 대중들의 관심 주제에서 멀어졌고, 인종의 피부색 무시(colour-blindness)라는 새로운 논리에게 그 자리를 내주었다. 반면에, 백인들이 가진 경제 및 문화적인 엄청난 차이 덕분에 그들은 굳이 정치 권력이 아니더라도 지난 3세기에 걸쳐서 축적해 온 제도적 권력과 구조적 영향력을 계속해서 행사할 수 있었다.
1972년 이녹 파월 지지자들의 집회 ⓒPhotograph: Evening Standard/Getty
마찬가지로, 1991년의 루이지애나 주지사 선거에서 큐 클럭스 클랜(KKK)의 그랜드 위저드(grand wizard) 출신의 데이비드 듀크(David Duke)가 내세웠던 것과 같은 백인들의 우위에 대한 노골적인 주장은 엘리트 계층으로부터 상당한 저항을 받았지만, 인종 차별주의자로 간주되는 것(과 금기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인종 혐오의 가장 명백한 사례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진보진영과 보수진영 사이에서는 인종 차별이 일반적으로 혐오 행위의 일종으로 이해되었는데, 이는 어떤 백인이라도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공공연한 적대감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스스로를 인종 차별과 관련해서는 무죄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영어에서 “인종 차별(racism)”이라는 단어보다 80년 앞서 만들어졌으며, 한때는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주는 인종적 특권들의 연관 체계를 설명했던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y)”라는 표현조차도 뭔가 희귀하고 극단적인 의미로 재정의되었다. 예를 들어서 1923년, 뉴욕타임스는 ‘위협받는 백인 우월주의(White Supremacy Menaced)’라는 헤드라인으로 기사를 게재했는데, 이는 “오늘날 우리 세계 앞에 놓인 가장 중대하면서도 심각한 문제는 어두운 피부색의 인종들 속으로 침몰하는 백인종을 구하는 문제“라는 하버드대학교의 어느 교수의 경고를 액면 그대로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1967년 미국의 연방 대법원은 백인이 그렇지 않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무효라고 판결했는데, 그 법률이 “백인 우월주의의 교리에 대한 명백한 지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판결의 이유였다. 그리고 2년 후에는 비평가인 알버트 머레이(Albert Murray)가 그 표현을 경찰 사회에 존재하는 흑인에 대한 적대적인 편견에서부터 흑인의 삶을 묘사하는 미디어의 심각한 편견과 대니얼 패트릭 모이니한(Daniel Patrick Moynihan)의 〈흑인 가족(The Negro Family)〉과 같은 영향력 있는 학술 연구에 이르기까지 온간 종류의 사안을 설명하는 용도로 사용했다. 

그러나 80년대와 90년대에 이르자, 적어도 백인들이 장악한 미디어에서는 “백인 우월주의”라는 표현이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시대에 역행하는 인종 차별의 사례에서만 사용되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필자를 포함해서 당시 성장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 표현은 부, 교육, 주거, 감금, 정치권력에 대한 접근성 등에 대한 불균형을 유지시켜주는 법률과 규제의 정교한 그물망보다는, 십자가를 불태우는 장면과 인종 차별적인 훌리건들을 연상시켰다.

아마도 그 중에서 가장 불순한 것은 “역인종 차별(reverse racism)”이라는 혐의를 제기하는 것이었는데, 이는 차별철폐 조처를 비롯한 “인종적 의식을 가진” 정책들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대담하게 만들어서, 그러한 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이 인종 평등의 진정한 전령이라고 주장했다. 1986년,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은 한 발 더 나아가서,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언급하면서까지 소수자 고용 할당제에 대한 자신의 반대 의견을 옹호했다. 당시 레이건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피부색이 무시되는 사회를 원합니다. 킹 박사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는 피부의 색깔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인격이 가진 내용물로 판단해야 합니다.

 

백인주의 학문의 발달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새로운 체제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는데, 학자들은 이 새로운 체제를 두고 “구조적 인종 차별(structural racism)”, “상징적 인종 차별(symbolic racism)”, “인종 차별주의자 없는 인종 차별(racism without racists)”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했다. 시민권 운동의 시대에 뒤이은 수십 년 동안, 유색인종 지식인 및 활동가들은 백인주의를 사회적 지배력의 발현으로 이해하는 듀 보이스의 지적인 전통을 계속해서 발전시켰다. 80년대와 90년대에 들어서, 데릭 벨(Derrick Bell), 킴벌리 크렌쇼(Kimberlé Crenshaw), 셰릴 해리스(Cheryl Harris), 리처드 델가도(Richard Delgado) 등을 비롯한 일군의 법학자들은 다수의 연구 결과들을 쏟아냈는데, 이는 이후에 ‘비판적 인종 이론(critical race theory)’으로 불리게 된다. 벨의 표현에 의하면 이 이론은 “인종 차별에 대해서, 특히 제도화되고 법률에 의한 차별에 대항하는 투쟁에 이념적으로 헌신하기 위한 것”이다.

비판적 인종 이론을 비롯해서 그로부터 파생한 수많은 방식들과 함께, ‘백인주의 학문(whiteness studies)’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흐름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하위분야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백인 우월주의의 추구가 영미권 역사를 형성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중심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했던 수많은 방식들을 보여주었다. 부를 추구하고 여성을 억압했던 것이 대표적이다. 많은 학자들이 제기하는 백인주의에 대한 혐의는 가히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었다.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로디거(David Roediger)는 이렇게 말한다. “백인주의 안에 그저 억압적이었고 잘못된 측면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백인주의는 온통 억압적이고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1992년 가을, 백인주의 학문 분야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인 노엘 이그나티에브(Noel Ignatiev)가 공동 창간한 새로운 잡지가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일대의 서점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인종 반역자(Race Traitor)〉라는 제목의 이 잡지가 표지에서 보여 주는 모토이자 지도 강령은 ‘백인에 대한 반역은 인류에 대한 충성(Treason to Whiteness is Loyalty to Humanity)’이었다. 잡지의 창간호는 “필요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by any means necessary), 백인종을 폐지하라”라는, 역시나 자극적인 제목으로 편집인의 서문을 싣고 있었다. 말콤 X를 통해서 더욱 크게 울려 퍼진 사르트르의 외침[3]이 실린 이 잡지는 폭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었고, 인종 대학살을 요구하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이그나티에브와 공동 편집인인 존 가비(John Garvey)가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그들은 “백인종은 역사적으로 체계화된 사회 구성체(social formation)”이며 이러한 집단의 구성원들은 “이 사회에서 흰색 피부를 특권으로 취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내용을 기본적인 전제로 가지고 있었다.
1940년 5월, 노스캐롤라이나주 더램의 대기실 ⓒPhotograph: PhotoQuest/Getty
이그나티에브와 가비의 입장에서는, 백인 우월주의가 너무나도 오랫동안 확인되어 왔기 때문에 그것을 구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쓰고 있다. “백인종이 존재하는 한, 인종 차별에 저항하는 모든 운동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관점에서 필요한 것은 (그들처럼)[4] “백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백인이라는 신원 증명과 그로 인해 수반되는 인종적인 특권들을 강하게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백인주의가 허술하고 불안정한 것이기 때문에, 학교의 운영위원회나 인종 차별적인 경찰의 행위를 동영상으로 남기는 등 불과 몇 차례의 단호한 공격만으로도 전체적인 체계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록 백인주의 학문이 이 사안에 대한 이해를 돕는 명쾌한 연구들을 많이 만들어내긴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들이 반대하고자 했던 바로 그 특권의 또 다른 사례로서 조롱받기 시작했다. “전체적인 취지가 다문화 패러다임 안에서 그들이 그 전까지는 결코 누려본 적인 없었던 일종의 지위를 부여한다.” 1997년에 매거릿 탈보트(Margaret Talbot)가 뉴욕타임스에 쓴 글이다. “그리고 백인주의에 대해서 스스로가 생각함으로써 잠재적으로 새로운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그러한 자아발견의 여정에는 불가피하게 그들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이그나티에브조차도 후에 “그 점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2000년대 중반까지 “피부색 무시”라는 이데올로기 체계는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백인주의가 더욱 명백하게 작동하는 실상, 예를 들자면 기업의 이사회나 미디어 및 기술 산업계에 종사하는 백인들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에 대한 엄중한 비판을 방어해 낼 수 있었다. 인종적인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던 미국에서는, 유일한 해결책은 오직 시간뿐이라는 의견이 제기되는 경우도 많았다. 즉, 백인들의 수적인 비율이 점차 줄어들면, 그들의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권력 역시 약해진다는 것이었다(그 전에는 백인들이 인구학적으로 파멸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었지만, 그들이 이전에는 주변인으로 간주했던 집단을 통합함으로써 그런 위기에서 탈출했다는 점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주장이다).

한편, 대학에서 벨이나 크렌쇼, 또는 이그나티에브의 글을 읽었을 가능성이 높은 자유주의적인 성향의 백인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인종적인 정체성과 관련된 주제가 나오면 어색하게 도피하는 듯한 경향을 보였다. 시민권 운동 시기로부터 수십 년이나 지난 시대에 성장한 백인들은 마치 부유하지만 평판이 좋지 않은 사촌이라도 둔 것처럼 보였다. 즉, 그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자신의 생일 선물로 가져온 사치스러운 물건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난감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대체적으로 아무런 발언도 하지 않는 것이 손쉬운 선택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백인주의에 대한 논의의 부재가 너무도 만연해지면서, 그러한 논의의 부재가 이제는 인종 문제의 진전에 있어서 상당한 걸림돌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내가 대학원에 다니던 2000년대 초에는 백인주의 학문의 반짝 호황이 끝을 향해 가고 있었는데, 당시 나는, 심지어 내 입으로 스스로 말하는 것을 포함해서, 진짜 문제는 백인들이 그들의 인종적 정체성에 대해서 충분히 말하지 않는 것이라는 주장을 자주 들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이런 이야기도 했는데, 만약 사람들에게 그들의 백인주의를 인정하게 할 수 있다면, 백인주의가 그들에게 도움을 주었던 불공정한 방법들을 인식하게 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말이다.

 

오바마라는 딜레마 


이러한 관념이 가진 문제는 머지않아서 명백해지는데, 버락 오바마가 대통령이 됨으로써 그 우월주의가 가장 극심했던 과거로부터 백인주의가 스스로 탈피했다는 가정에 대한 가장 확실한 시험대가 마련된 것이다. 오바마의 승리가 초기에는 미국이 인종 차별을 벗어나서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한 증거라며 일부에서 환영을 받았지만, 불과 몇 달 만에 표면적으로는 작은 정부를 선호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운동세력인 ‘티 파티(Tea party)’에 의해서 오히려 진실은 정반대에 더 가까운 것은 아닐까라는 의구심이 들게 되었다.

2009년 9월, 지미 카터(Jimmy Carter)는 (오바마 행정부의 예산안에 대한) 티 파티의 반대는 단지 정부의 지출에 대한 원칙론적인 대응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파문을 일으켰다. 카터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 대해서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반감의 압도적인 비율은 그가 흑인이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카터의 추정은 나중에 연구에 의해서 뒷받침되었다. 예를 들어서, 정치학자인 애슐리 자디나(Ashley Jardina)는 “인종적인 적개심이 심한 백인들일수록 자신들이 티 파티를 지지하며 그들을 더욱 긍정적으로 평가한다고 말하는 비율이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2009년 버락 오바마가 제안한 보건의료 개혁안에 반대하며 워싱턴에서 열린 티 파티의 시위 ⓒPhotograph: Michael Reynolds/EPA
오바마 행정부에 대한 백인들의 반발은 그의 두 차례 임기 내내 지속되면서, 루퍼트 머독(Rupert Murdoch)의 미디어 제국이 성장하는 것과 함께, 공화당이 오바마의 모든 시도를 막아서겠다고 약속하면서 상하원 모두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과정에서도 일조하게 된다. 두 가지 프로젝트 모두 오바마의 연임을 막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전혀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바마가 2008년 선거 당시 백인 유권자들 사이에서 거둔 득표율은 상대에 비해서 12퍼센트 뒤졌지만, 4년 뒤에는 그 열세가 20퍼센트로 벌어졌다. 이는 미국 역사상 대통령에 당선된 이들 중에서 백인들의 지지율로는 최악의 성적이었다.

동시에 일부에서는 오바마의 당선이 인구통계학적인 주장을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다. 즉, 미국 내 인종 구성이 변화됨으로써 적어도 대통령직과 관련해서는 백인 유권자들의 선호도가 어느 정도 무력화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오바마의 승리 이후, 어느 공화당원은 “중년의 백인들을 아무리 긁어모아봐야 승리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2014년 여름에 전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던 ‘흑인들의 생명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시위의 첫 번째 물결은 백인들 사이에서, 특히 온라인을 중심으로 노골적인 성찰이 빗발치게 만들었다. 비평가인 화 슈(Hua Hsu)는 2015년에 반쯤 놀리는 듯한 말투로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마치 백인들이 세대적인 규모로 스스로를 자각하는 순간을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트위터에서는 보다 심층적인 수준에서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조류의 기미가 나타나고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2010년대의 중반에 백인주의가 가장 두드러져 보이는 방식들은 최근에 대학 졸업생들이 인스타그램에서 ‘로즈 동상 철거(Rhodes Must Fall)’를 지지하는 입장을 밝히라고 촉구하는 움직임과는 전혀 달랐다. 그것보다 더욱 의미심장한 것은 백인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에 대한 비전이었다. 즉, 백인주의의 장점을 인정하고 그것의 상실을 걱정하는 것, 이민을 실존적인 위협으로 보는 것,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통제권을 되찾자”[5]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ke America Great Again)”[6]고 원하는 것이었다.

2016년에는 이러한 백인주의의 버전을 원동력 삼아서 두 차례의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하나는 브렉시트였고, 다른 하나는 트럼프였다. 특히 후자는 단지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에 더욱 활력을 불어넣는 거리낌 없는 복수심과 독설이라는 특유의 어조로 인해서 백인주의가 과연 그들의 우월 콤플렉스(superiority complex)를 버린 것인지에 대한 여전한 의문을 불러일으켰다.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백인이 좋아하는 것들(Stuff White People Like)’이 제시하는 백인주의의 실체 없는 고정관념을 형편없이 근시안적인 것으로 보이게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타네하시 코츠(Ta-Nehisi Coates)는 이런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즉시 이해했다. “트럼프는 확실히 새로운 현상이다. 자신이 가진 정치적인 자산이라고는 오직 흑인이 대통령이었다는 사실에 기대고 있는 최초의 대통령이다.” 2017년 가을에 코츠가 쓴 글이다. “그것이 가진 공격성과 독선적인 권력의 측면에서, 그의 이데올로기는 백인 우월주의이다.”

 

백인주의라는 헤게모니 


1860년, 자신을 “이디오프(Ethiop, 에티오피아인)”라고 칭하는 한 남자가 〈앵글로-아프리칸 매거진(The Anglo-African Magazine)〉에 에세이를 한 편 게재했는데, 이 매거진은 미국 최초의 흑인 문학 잡지라고 불린다. 이러한 가명 뒤에 숨은 저자의 본명은 윌리엄 J. 윌슨(William J. Wilson)이었는데, 그는 전직 제화공 출신으로 훗날에는 브루클린 최초의 흑인 아이들을 위한 공립학교의 교장을 역임하게 된다. 윌슨이 쓴 에세이의 제목은 ‘우리는 백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였다.

이 글의 일부분에서는 미국의 흑인들에 대해서 비슷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는 백인 작가와 정치인들을 조롱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글은 단순한 패러디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겨냥하는 대상 집단의 거만한 가부장주의를 모방하는 어조를 통해서, “원주민”들에 대한 약탈 및 살해, 아프리카인들에 대한 강탈 및 노예화, 미국의 헌법과 정부와 백인 교회들에게 체화된 위선 등 미국에서의 백인 통치를 포괄적으로 비판하고 있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의 근저에는 백인 남성 및 여성들을 “쉴 새 없는 탐욕을 가진” 약탈자로 만드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광범위하고 거의 완벽한 부정행위 체계”가 있다고 보았다. 이 글의 말미에서 윌슨은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볼 때,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드는 생각은 우리가 이러한 백인들을 대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다.”

윌슨이 살던 시대에 비해서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한 세기 반이나 흐름 지금도 그의 질문이 가지는 적절성은 여전히 그대로이다. 정치학자인 에릭 카우프만(Eric Kaufmann)과 같은 사람들은 백인주의가 언제나 그렇게 행세해 왔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도 인종이라는 것이 유전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우프만은 인종이라는 것이 일부 자연적인 기준에 의해서 충분히 변론할 수 있을 만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인종에 대한 의식이 “색채에 대한 무의식 프로세스의 혼합을 통해서 발생했으며, 서서히 문화적인 관습으로 진화했다”고 주장한다. 카우프만은 2019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인 〈백색편이(Whiteshift)〉에서 백인들에 의한 억압의 역사는 “실제이지만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말하며, 그 스스로 “대칭적 다문화주의(symmetrical multiculturalism)”라고 부르는 것을 옹호하는데, 이는 “백인이라는 정체성이나 백인의 민족적 전통을 가졌다고 해서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비해서 더욱 인종 차별적인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다. 대체 이런 백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 카우프만은 백인들이 스스로 백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끔 장려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더욱 폭력적인 상황으로 변질될 수 있다고 한다. “백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합법적인 표현을 금지하게 되면 극우 세력이 그러한 권리를 갖게 됨으로써 오히려 그에 대한 더욱 난폭한 생각을 낳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평상시의 내 생각인데, 백인주의는 다른 인종이나 민족적 정체성과는 다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다른 인종이나 민족적 정체성과는 다른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3세기 반에 걸쳐서, 백인주의는 전 지구적 규모에서 하나의 무기로 활용되어 왔다. 반면에 흑인주의(Blackness)는 오히려 방패막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듀 보이스가 말했던 것처럼, 백인주의를 새롭고 다르게 만드는 것은 “모든 것에 대한 제국적인 면모, 하늘도 거스르는 대담성”이다.) 백인주의가 그것이 어떤 모습이건 간에 스스로 만족할 만한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근거도 많지 않아 보인다. 백인주의라는 종교는 그것이 위험하지 않은 공존에 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스스로 비-우월주의적인 노선으로 개혁하는데 5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다만 그 결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도널드 트럼프였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조차 윌슨이 제기하는 질문에 대한 완전한 대답이 되지는 못한다. 논쟁의 여지가 없는 백인 우월주의의 기나긴 역사에 대한 합리적이며 도덕적인 유일한 대응이 〈인종 반역자(Race Traitor)〉의 지면에서 대변하고 있는 인종 차별 폐지론자들의 입장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이론적으로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는 있겠지만, 예를 들자면 집단 정체성으로서의 백인주의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프로이센인”이나 “에트루리아인”처럼 과거의 유물로 취급할 수는 있겠지만, 백인주의가 (〈인종 반역자〉 매거진의) 이그나티에브나 가비가 상상했던 것처럼 그렇게 연약한 것이 아니라는 점도 마찬가지로 분명해 보인다. 제임스 볼드윈(James Baldwin)은 말년에 백인주의를 두고 그것이 자연적인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도덕적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백인주의는 하나의 도덕적 선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많은 도덕적 선택들이 결합한 복잡한 네트워크이며 우리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중 대다수는 여러 시간과 장소에서 우리 스스로의 선택과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백인주의는 기후 변화나 경제적 불평등과 비슷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구조 안에 너무도 철두철미하게 중첩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도덕적인 선택이라는 생각을 낡은 것으로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과 마찬가지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보다 더욱 어려운 것이 있다면, 대안을 갖고 살아가려 노력하는 것일 것이다. 백인주의는 불가피하며 바꿀 수 없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단지 주장에 의해서 인종 차별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의 말은 확실히 타당하다(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나는 더 이상 백인이 아니라고 결심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넬 어빈 페인터가 주장하듯, 35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에도 백인주의는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생각에 불과하다”는 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혼자가 아니라면, 그리고 그것의 이름으로 행해진 피해를 복구하기 위한 수많은 노력이 없지 않다면, 우리의 사고방식이 바뀔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1]
영어에서는 백인을 공식적으로 “caucasian”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글자 그대로 따져보면 “코카서스 사람”을 의미하며, 코카서스는 유럽의 동쪽과 아시사의 서북쪽 지역을 말한다.
[2]
(주로 영국에서) 야당이 집권을 대비해서 꾸리는 예비 내각
[3]
‘필요한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by any means necessary)’는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더러운 손(Les mains sales)>에서 쓰인 표현으로, 나중에 말콤 X가 연설에서 사용하면서 인권운동 진영에서 유명해지게 되었다.
[4]
노엘 이그나티에브와 존 가비 역시 백인이다.
[5]
Take Back Control, 브렉시트(Brexit)를 주장하던 진영의 슬로건
[6]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선거 당시 슬로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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