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 도시의 부활 전략
완결

코로나 시대, 도시의 부활 전략

팬데믹으로 인해 국경은 닫히고 분열은 깊어졌다. 그러나 인류의 삶에 있어 번영을 위한 유일한 해결책은 연대뿐이다.

© Illustration: Klawe Rzeczy

1. 코로나19, 닫혀버린 국경


팬데믹 기간 동안 세계 각국은 정부의 입국 제한에 따라 주변국과의 경계, 자국 내에서의 경계를 적극적으로 강화했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초기 봉쇄 기간 동안 전 세계 195개 국가 중 168개국이 국경을 부분적으로 혹은 전면적으로 폐쇄했다. 이는 특히 난민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UNHCR의 대표인 필리포 그랜디는 “이동은 탈출중인 사람에게는 생명이 걸린 일”이라며 “그들은 살기 위해 달린다”고 말했다.

바이러스에게는 국경이 없다. 바이러스는 극단적인 글로벌리스트이다. 19세기 유럽식의 민족국가가 우리 모두 추구해야 하는 정치 체제라는 생각에 코로나19가 종말을 고한 것이다. 민족국가는 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며 지금 당장의 비상사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다. 부유한 국가들은 이민을 중단시켰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동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의 소득원이 막혔다. 해외 근로자들의 가족 송금액은 강대국이 빈곤국에 제공하는 해외 원조금의 4배에 달하는 규모이다. 이 송금액이 전 세계적으로 2년 연속 감소했다. 가난한 나라들이 더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이민 시스템도 기본적으로 중단 상태이다. 불법체류자는 물론 이미 입국 비자를 발급받은 사람들, 전쟁이나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로부터 탈출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동결 상태인 것이다. 2020년, 이민 비자는 전년 대비 45퍼센트 감소했다. 정부 당국은 이민자가 질병에 시달리는 집단이라는 공포에 불을 붙였다. 폭스 뉴스의 진행자 제닌 피로는 “코로나에 감염된 사람들이 지금 국경에서 풀려나고 있다”며 “그들은 온갖 종류의 질병을 갖고 있다. 그들이 미국으로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19는 전 세계 정부에게 거부나 지연의 핑계거리가 되었다. 여행 금지조치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었고, 이민자를 악마로 몰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팬데믹 상황은 새로운 명분을 제공했다. 쿠웨이트 출신의 한 여배우는 원주민을 위한 병원 공간을 확보하기위해 쿠웨이트 인구의 70퍼센트에 달하는 이주민들을 사막으로 추방하자고 주장했다. 자신의 주장이 SNS 상에서 비난을 불러일으키자 이 배우는 “내가 한 말의 의도가 잘못 전달되었다… 나는 그들을 사막으로 추방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막에 무언가를 빠르게, 단시일 내에 지어야 할 지도 모른다”고 답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아프리카의 다른 국가 출신의 이민자들을 공격했다. 콜롬비아는 베네수엘라와의 국경을 폐쇄하고 절망에 빠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의 생명줄을 끊었다.

국경 폐쇄와 함께 세계 경제 질서의 불평등이 백신 불평등에도 영향을 끼쳤다. 전 세계적인 연구와 생산이 이루어졌지만, 유통은 공평하지 못했다. 작년 12월 15일 기준으로 미국인의 61퍼센트가 백신 접종을 완료했지만, 인도인의 62퍼센트와 나이지리아인의 98퍼센트는 접종을 받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까지 세계가 갈라져 있는 경우도 처음 보지만, 이렇게까지 하나가 된 경우도 처음 본다. 국제 의료 지원이 이렇게까지 이기적으로 작동한 일은 없었다. 그랜디 UNHCR 대표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모두가 안전해질 때까지 우리는 안전하지 않다.”
텍사스 엘 파소의 미국과 멕시코간 국경. 2020년 3월 비필수 이동이 봉쇄되었다. ©Paul Ratje/AFP/Getty
 

2. 전염병 재난 속의 이민자들


코로나19는 정부를 다시 중앙집권적으로 만들었다. 미국 경제는 정부 정책에 의해 살아날 수 있었다. 정부가 시민들에게 지급한 지원금이 경제를 살린 것이다. 백신 개발을 위해 제약 회사들을 동원하고 자금을 지원한 것도 정부였다. 민간 기업만으로는 바이러스와 싸울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하다. 이것은 거버넌스(governance)에 대한 최고의 시험이라 할 수 있다.

시민권이야 말로 가장 중대한 복권이다. 대만이나 뉴질랜드처럼 공공 보건 시스템이 탄탄하고 정부가 제대로 기능을 하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금수저라 할 수 있다. 지도자들이 전염병 확산과 심각성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인도에서 태어났다면, 당신은 망한 것이다. 거버넌스는 이제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세계는 ‘기후 난민’이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범주의 난민, 즉 정말 끔찍하게 나쁜,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나쁜 거버넌스를 피해 탈출하는 난민을 상상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글로벌 경제 위기로 인해 우리는 오히려 더 많은 이민을 필요로 한다. 좋은 거버넌스는 이민에 대한 개방성과 반사적인 포퓰리즘에 대한 저항력을 갖고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국경을 개방한다면 전 세계 GDP는 두 배가 될 것이다. 이코노미스트지에 따르면, 연간 78조 달러 수준의 부를 더 쌓을 수 있다. 서방세계는 도시를 되살리기 위해 젊고 에너지 넘치는 이주 노동자를 필요로 한다. 최근 조사에 따르면 미국의 인구는 감소하고 있다. 지난 10년간 미국은 건국이래 최저 성장률을 기록했다. 80세 이상의 미국인이 2세 미만보다 더 많다. 코로나로 인한 봉쇄가 베이비붐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도 있었지만 2021년 2월의 출생아 수는 전년 같은 기간 대비 10퍼센트 감소했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미국인들이 아기를 더 많이 낳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것은 전 지구적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전 세계 인구의 약 4퍼센트를 차지하는 미국인들이 지구 전체 에너지의 약 20퍼센트를 소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다른 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위한 여지를 마련해야 한다.

2030년이 되면 미국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은퇴 연령에 다다른다. 미국은 노인의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은퇴자들이 셔틀보드를 즐길 수 있도록 세금을 내는 ‘젊고’ ‘근면한’ 노동자가 없다면 미국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이민자들의 평균 연령은 31세로 미국 중위 연령보다 7살 어리고, 이민자는 원주민보다 더 높은 비율로 노동에 참여하고 있다. 고령자들이 순전한 이기심을 버리고 더 많은 이민을 요구하는데 앞장서야 하는 이유다.

봉쇄 기간동안 경기를 부양시킨 것은 미국을 개척했던 메이플라워호의 후손들이 아니었다. 이민자는 미국 인구의 14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의사의 29퍼센트를 차지한다. 백신을 연구하는 의학 및 생명 과학자의 40퍼센트는 이민자이다. 절반 이상의 공학 및 컴퓨터 과학 분야의 박사 학위는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은 학생들이 취득했다. 화이자 백신을 발명한 두 과학자는 독일로 이주한 터키인 부부이다. 팬데믹 기간 동안의 업적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 영국의 국민보건서비스(NHS) 직원의 15퍼센트가 이민자이다.

의사뿐만이 아니다. 가족의 간호가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요강을 비우고 목욕을 시켜줄 간호사와 다른 보건의료 인력 또한 똑같이 우리의 생존에 필수적이다. 미국 농무부(USDA)에 따르면 미국의 250만 명의 농장 노동자들 중 약 절반이 불법 이민자들이지만, 농장주와 노동 계약자들은 그 수치가 75퍼센트에 육박한다고 추산하고 있다. 미숙련 이민자들은 우리가 원격으로는 할 수 없는 분야의 일들을 계속해서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이득은 그들에게는 손실이 될 수 있다.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후 아프가니스탄은 지식인, 교사, 기술 관료를 비롯해 기타 시민 사회 구성원을 엄청나게 잃었다. 재앙적인 가뭄과 계속되는 내전에 직면한 상황에서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동의 자유가 사람들을 가난한 국가에서 부유한 국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숙련된 이민자의 예를 들어보자. 영국으로 온 파키스탄 출신의 이민자가 의학을 공부한 후 매년 고국을 방문해 시골의 진료소에서 도움을 주거나 다른 많은 의사들처럼 아예 돌아가서 병원을 운영할 수도 있다.

정부가 차별금지법에 명시된 이민과 이동의 필요성을 수용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보다 개방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 국경을 열면 마음도 열린다. 즉, 지식의 흐름, 다양한 방식의 사고, 존중, 존재함에 대해 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미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들에 더 많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기가 쉬워질 것이다.
 
팬데믹 기간 중 런던 남부 지역에서 자신의 텃밭을 가꾸고 있는 정원사 ©Andy Hall/The Guardian
 

3. 도시에서 자연을 누릴 권리


나는 국경을 싫어하는 만큼 도시를 사랑한다. 그러나 지난 한 해 동안 도시 생활자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집에 머물러 있으라는 명령과 주택 부족으로 인해 수십 년 동안 이미 존재해 왔던 문제들이 더욱 악화했다. 나는 팬데믹 상황을 겪으며 우리의 도시들을 개선하기 위한 세 가지 아이디어를 얻었다. 다양성을 높이고 이주를 활성화 하는 것, 모두가 자연의 일부라도 접할 수 있게 하는 것, 공공의 공간을 조성해 공동체를 확장하고 그 안에서 참여하며 교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도시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활력 넘치는 도시는 이동 가능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동은 새로운 돈과 재능, 에너지로 불우한 이웃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유년 시절의 집에서 영원히 살 권리는 없다 할지라도 도시 안에서 아이들을 위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는 권리는 있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도시라면 이를 모든 시민에게 보장해야 한다.

“뉴욕이 팬데믹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나는 두 단어로 대답한다. “제이키샨 하이츠(Jaikishan Heights).” 즉, 퀸즈 근방인 잭슨 하이츠(Jackson Heights)를 남아시아인 방식으로 발음한 것이다. 우리 가족이 1977년 뉴욕에 처음 왔을 때, 이 도시는 위험했고 몰락했었다. 10대 시절, 나는 두 번이나 강도를 당했다. 우리 차는 상습적으로 도난당했다. 잭슨 하이츠는 화려하지도 않았고 따뜻하게 환영해 주지도 않았다.

우리가 그곳에 살 때 이웃의 남아시아인 대부분은 인도 출신이었으며 인종 할당제를 폐지하고 가족 재결합을 장려한 1965년 이민법의 수혜자였다. 이들은 엔지니어, 의사 등과 같은 전문직 종사자들이었다. 지금은 방글라데시인, 네팔인, 티베트인, 부탄인과 같이 훨씬 더 다양한 출신의 남아시아인들이 섞여 있다. 이들은 상점 주인, 택시 운전사, 의류 공장의 노동자이다. 내가 70년대 이 곳에서 자랐을 때 알던 인도인들 중 극히 소수만 아직 이 동네에 남았다. 이 거리들은 현재 각지에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부를 창출하고 도시를 재생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다양성은 꼭 필요하다.

전염병 재난 기간 동안 자연은 유일하게 허락된 탈출구였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겐 공원, 등산은 물론이고 여름 별장 등이 그러했다. 내가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방문했던 정원 겸 시민 농장을 바로 이 곳에 되살리고 확장해 나아가야 한다. 1864년 시작 된 슈레베르가르텐 운동은 도시 생활자들, 심지어 빈민에게도 자연을 누릴 수 있도록 한다. (동명의 모리츠 슈레베르는 자녀 양육에 관한 그의 이론으로 독일의 아동들을 힘들게 했다.) 1000유로를 선불로 지불하고 150유로의 연간 임대료를 지불하면 토지의 일부인 부지 중 하나를 임대할 수 있지만 소유할 수는 없다. 각 부지에는 오두막이 있어 잠시 잠을 청할 수는 있지만 이것이 별장은 아니다. 오두막에서 낮잠을 잘 수는 있어도 밤을 보내기엔 적합하지 않다. 군락마다 이웃과 함께 맥주를 마실 수 있는 클럽하우스, 즉 노동자를 위한 컨트리클럽이 있다. 당연히 이 곳에서 작물을 재배할 수도 있다. 현재 독일 전역에 140만 개의 슈레베르가르텐이 있다.

전 세계 도시에 살고 있는 모든 노동자 계급 가정들이 슈레베르가르텐을 갖게 된다면 멋지지 않을까? 패스트푸드점 직원이나 택시운전사가 도시 근처 작은 집이 딸린 부지에 갈 수 있다면, 그 곳에서 가족과 함께 고추와 토마토를 기르고 봄바람을 즐기며 사이렌 소리가 아니라 새들의 지저귐과 함께 일어날 수 있다면 말이다. 자연과 접할 수 있는 권리는 부자들 만의 것이 아니다. 인간의 권리여야 한다.

팬데믹 기간동안 영국에서는 시민 농장에 대한 수요가 치솟았고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300퍼센트나 증가했다. 이들은 대부분 지방 의회가 윤영하는 영국의 33만 개의 시민 농장 중 하나를 원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영미권 국가 농산물의 5분의 1을 재배해 낸 “전쟁 정원(victory gardens)”처럼 자신의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고 싶어 했다. 런던 시민 다섯 명 중 한 명만 정원을 이용할 수 있으며, 나머지 네 명은 이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시위를 벌이기 위해 집 밖으로 나왔다. 도시 전체가 연설의 장이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외침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당파를 초월한 대화는 거의 없었다. 실제로 짜여지지 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공의 공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을까? 어디서 경찰은 흑인 인권 운동가들과 대화를 나누는가? 이런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우리는 새로운 공공의 공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어디서 서로 만날 수 있는가? 바자회, 도서관, 공원이 그러한 장소인가? 전 세계 도시에서 외부 공간은 점점 사유화되고 있다. 예를 들어 값비싼 아파트의 사설 공원은 명목상으로는 모두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위협적인 경비원을 고용해서 가난한 사람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뉴욕에서 가장 성공적인 새 공원은 하이 라인 공원이 아니다. 이 곳은 관광객들이 허드슨 야드의 터무니 없이 비싼 콘도미니엄에서 미트패킹 구역의 터무니 없이 비싼 레스토랑들로 이동할 때 주로 이용된다. 뉴욕의 가장 성공적인 새 공원은 잭슨 하이츠의 다이버시티 플라자이다. 이 곳은 지하철 입구 앞 도로에 차량 진입을 금지하는 간단한 조치로 탄생한 공유지이다. 방글라데시 선거에서 어떤 논쟁이 있는지 알고 싶거나 중국과 티베트 간의 분쟁에 대해 듣고 싶다면, 도시가 제공하는 불편한 금속 의자나 벤치 중 하나를 잡아 광장 앞 작은 가게 앞에서 차를 한잔 사서 앉을 수 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고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도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십대 시절, 잭슨 하이츠에서 성장한 내가 친구들과 어울리고 여자애들과 시시덕거리며 세계의 뉴스를 읽고 30개 언어로 된 책들을 대출했던 (이민자들은 책을 살 여유를 가진 경우가 거의 없었다) 곳은 81번가에 있는 퀸즈 공립 도서관 분관이었다. 사회학자 에릭 클리넨버그는 “도서관은 사람들을 위한 궁전”이라고 했다.

팬데믹 이후 집에 공간이 없거나 인터넷 접속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도서관은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장소 역할을 해 왔다.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도서관이 필요하다. 인도 총리 나렌드아 모디의 30억 달러의 초현대적이며 현란한 프로젝트인 뉴델리 센트럴 비스타 재개발 계획과 같이 엄청나게 어리석은 정책은 우리에게 필요 없다. 이 프로젝트의 건축가인 비말 파텔은 CNN과의 인터뷰에서 “이곳은 낡은 슬럼 같은 곳이며 그 안에 작은 마을이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라고 밝혔다. 그가 왜 현존하는 유산과 마구간과 막사 등을 수년에 걸쳐 개조한 사무실 등의 건물을 철거하려고 했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슬럼’이란 말은 도시 계획가에게는 전문용어로서 가장 오래되고 무게감 있는 무기이다. 로버트 모세스는 사우스 브롱크스에 그 단어를 사용했으며 부동산 로비단체는 뭄바이의 요새에 그 단어를 사용했고 경찰은 브라질 리우의 공동체에 대항하여 그 단어를 사용한다.

파텔과 같은 전문가들은 도시 건축은 기념비적이고 경외심을 불러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들어서자마자 어리둥절해 하고 신과 통치자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건축은 평범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들의 무력함을 깨닫게 하는 또 다른 방법이 된다. 그러나 모든 도시는 마을을 품고 있다.
 
뉴욕 브루클린의 지역 파티 ©Simon Leigh/Alamy
 

4. 다양성을 위해 함께 살기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그것이 갈등을 일으키고, 심지어 당신이 적대자가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십자군 전쟁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무슬림에게 대항하게 했지만, 중동 지역과 유럽 사이에 지식이 대규모로 교류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서구 사회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을, 숫자 0과 이슬람 건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작가로서 나의 가장 본질적인 관심사는 바로 개인적이고 정치적인 역사의 발굽 아래에서 투쟁하고 있는 인간 개개인이다. 힌두교 신화에서 시바는 불꽆에 둘러싸인 채 한 발로 춤을 추며, 그 아래에는 거대한 역사의 발굽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난쟁이가 있다. 역사는 그의 통제하에 있기도 하고 그의 통제 밖에 있기도 하며, 작가로서 우리가 목격하고 기록하는 것은 바로 이 투쟁이다.

마치 좌측 운전석과 우측 운전석처럼 인류는 터무니없이, 자의적으로 분열되었다. 우리는 위대한 문학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한 집단이나 계층이 아니라 개별적인 인간을 보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우리는 사람들을 흑인, 백인, 이민자, 성전환자, 페미니스트, 경찰, 민주당원, 공화당원 등의 큰 범주로 분류한다. 그 결과 각 범주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범주의 무게를 머리에 이고 돌아다녀야만 한다. 각 집단 안에서 우리는 대체가능한 존재로 인식된다. 개별 인간은 복잡하다. 바이러스보다 훨씬 복잡하다. 다양성 혹은 이질성이 우리를 구할 것이다. 예측 불가능성 혹은 유별남도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도덕적 복잡성이 낳은 존재들이다.

나는 인도의 성지 베나레스에서 발발한 힌두교와 무슬림간의 잔혹한 폭동을 조사하여 보고한 적이 있다. 그 도시의 주요 산업은 정교하게 짜여진 실크 사리(인도 여성의 복장)이다. 무슬림은 그것을 짜고 힌두교도는 그것을 판매하면서 수 세기 동안 공존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초, 그 협력은 깨졌고 도시는 폭발했다. 수십 명의 무슬림들이 BJP(Bharatiya Janata Party, 인도인민당)와 관련있는 힌두교도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래서 나는 폭동을 선동했던 BJP의 힌두교 지도자와 만나고자 했고, 그는 어느 날 아침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했다. 집에 들어간 뒤 나는 베란다에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두 명의 무슬림 노인들을 지나쳤다. 안에 들어가 힌두교 지도자에게 말을 걸었더니 인도에서 이전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말로 무슬림에 대한 증오를 뿜어냈다. 무슬림은 아웃사이더이며, 분리 당시 파키스탄으로 갔어야 했다는 등의 이야기였다.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인터뷰를 마무리하면서 나는 그에게 두 명의 무슬림 노인이 베란다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아, 그들은 자기들끼리의 재산 분쟁을 해결하려고 내게 왔습니다”고 말했다. “왜 당신한테 왔죠? 당신은 그들을 싫어하지 않나요?”라고 나는 물었다.

 “맞아요, 하지만 나는 그들 모두를 똑같이 싫어하죠.” 그가 대답했다. 만약 무슬림이 분쟁을 판결하기 위해 자신의 공동체에 속한 누군가에게 간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어느 한쪽과 관련이 있거나 편향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 힌두교도 지도자가 그들 모두를 똑같이 싫어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재산 분쟁에 대해 공정한 판결을 할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다. 인도가 외신 기자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다양한 면을 구분해 낼 수 있고, 따라서 위선과 악은 동일하지 않다. 인도 철학에는 중도가 배제되는 법칙이 없다. 어떤 것은 진실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가 참 또는 거짓이라는 명제를 위해 존재의 두 가지 가능한 상태만을 인정하고 중도의 여지가 없는 반면, 자이나교 논리는 이를 적어도 7가지 가능성으로 확장한다. 정교하게 서술된 이 진리의 개념에 주어진 이름은 syadvada, 즉 “불확실성(maybeness)의 학문”이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우리 모두 약간의 불확실성이 필요할 수 있다. 이분법을 제거하자. 중도를 포함하자. 가장자리와 위아래도 포함하자. 마니교도가 죽을 때까지 싸우는 동안 우주가 영원하지는 않다. 바이러스는 우리의 적이지만, 지난 2월 백신 접종을 받은 이후 내 몸에도 바이러스가 살고 있다. 바이러스는 나의 일부이고, 내 안으로 침투해 죽음에 이르게 하려는 수많은 바이러스에 대항하여 나를 지켜낸다.

바이러스를 물리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의 슈퍼 유기체로 뭉쳐야 한다. 이번 팬데믹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닥쳐올 것이 매우 확실한 모든 전염병들에 대항하기 위해서이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묶고, 무엇이 우리를 갈라놓는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정말로 함께 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대다수는 떨어져 있기를 원하는가? 코로나 바이러스는 9/11 테러보다, 2008년 금융 위기보다 인류에게 더 한 시험대였다. 그러나 국가와 도시에는 더 큰 시험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기후 변화이다. 코로나는 마지막 리허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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