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
완결

어느 새부터 힙합은 안 멋져

특유한 역사를 가진 힙합은 정치적 올바름을 요구받기도, 쿨하고 무모할 것을 요구받기도 한다. 우리에게 힙합은 ‘힙찔이’, 갱스터 음악을 넘어 그 무엇이 될 수 있을까? 혹은, 되어야 할까?

퍼블릭 에너미 라디오(Public Enemy Radio)가 2020년 3월 LA에서 열린 민주당 버니 샌더스(Bernie Sanders) 후보의 지지 유세에서 공연을 펼치고 있다. 퍼블릭 에너미 라디오는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가 멤버 중 한 명인 플레이버 플레이브(Flavor Flav) 없이 활동하는 일종의 사이드 프로젝트다. ©Photograph: Rolling Stone/Rex/Shutterstock
미국의 힙합 듀오 블랙쉽(Black Sheep)이 1991년에 발표한 데뷔 앨범 〈양의 탈을 쓴 늑대(A Wolf in Sheep’s Clothing)〉를 듣다 보면, 중간에 시위대가 끼어들어서 음악을 방해하는 구간이 나온다.[1] 누군가 이렇게 말한다. “이봐, 흑인들의 지위 향상에 대한 음반을 만들어야 하는 거 아냐?” 다른 누군가는 왜 ‘돌고래를 먹는 행위’에 관해 침묵하느냐고 묻는다. 또 다른 사람은 “호존(hozone)[2]에 구멍이 뚫렸다”고 말하며 환경 문제를 더러운 농담의 소재로 만들어 버리는데, 그게 의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이러한 지적들에 대해서 블랙쉽의 멤버들은 그저 웃음을 터뜨리기만 할 뿐이다. 힙합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욱 많은 노랫말과 더욱 멋진 가사를 탐닉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어쨌든 블랙쉽은 뛰어난 앨범을 만들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힙합은 1970년대에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처음 생겨났는데, 그 이후로 사람들은 줄곧 힙합에 대해서 논쟁을 벌여 왔다. 머지않아 힙합은 미국에서 가장 논쟁적인 장르가 되었다. 특이한 점은, 시간이 지나면서 힙합이 사라지거나 그 인기가 줄어들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힙합은 성공을 거두었고, 주류의 위치에 올랐으며, 마침내 지배적인 장르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 음악은 온순하게 길들여지지 않았다. 힙합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주로 미국 전역의 가난한 흑인 거주 지역들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론 흑인들만이 아니라 전 세계의 가난한 지역들에서도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이러한 연관성 때문에 힙합이라는 음악은 여러 요구를 받곤 한다. 많은 음악 팬들은 힙합이라는 장르가 정치적 의식을 가져야 한다거나 명백한 혁명성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래서 래퍼들이 주로 전달하는 메시지가 그러한 생각과 불일치하거나 이해할 수 없을 때면 실망감을 표출했다.

최고의 힙합이란 도저히 거부할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팬들은 물론이고 때로는 래퍼들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힙합 내부 관계자들은 물론이고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이 장르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됐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 언제나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그리고 래퍼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말하면서 스스로를 곤경에 빠트리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힙합이란 장르가 리스펙트(respect)에 대한 강박에도 불구하고 크게 성공하며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귀감(respectability)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떨쳐냈기 때문이다. 장난스럽고 오만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블랙쉽의 멤버들도 변화하는 힙합의 체계 내에서 자신들이 어떤 위치인지 의식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상한 현상이 아니었다. 때로는 랩을 한다는 행위가 스스로를 의식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가수들은 정형화된 것이든 그럴싸하게 꾸며낸 것이든 간에 선율 아래 자신의 메시지를 감출 수 있다. 그러나 래퍼들은 가수들보다 스스로를 더욱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들의 표현 방식이 일상적인 말투에 훨씬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래퍼들은 수많은 시간을 들여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들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비슷한 이유로 래퍼들은 자신을 비판하는 사람들과도 더욱 적극적으로 설전을 벌인다. 사회적인 지위를 걱정해야 하는 가수들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진 바로 그 사회적인 지위가 그들에게 발언할 수 있는 권리와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1992년, 블랙쉽의 멤버이자 프로듀서인 미스타 롱(Mista Lawnge)은 힙합계의 유서 깊은 잡지 《소스(Source)》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지나치게 많은 힙합 그룹이 ‘메시지’ 지향적인 음악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려 혈안이 되어 있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어떤 음악 장르가 교훈을 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랩 음악도 굳이 사람들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없어요.” 힙합도 당연히 엔터테인먼트다. 그렇지만 컨트리 음악이나 알앤비(R&B), 심지어 로큰롤 같은 여타의 엔터테인먼트보다 뭔가 더 대단한 걸 제공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 경우가 많다.
블랙쉽, 1994년 뉴욕 브루클린. ©Photograph: Al Pereira/Getty Images
 

1. 길티 플레저


앞서 소개한 블랙십의 앨범에 끼어들어서 “호존(hozone)”에 대해 불평했던 가짜 시위대는 힙합계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특정한 그룹을 연상시킨다. 바로 1980년대 말에 결성된 퍼블릭 에너미(Public Enemy)이다. 퍼블릭 에너미는 전투적이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힙합의 형태를 가다듬었다. 이들의 음반은 랩이라는 것을 진지한 사회 활동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밥 딜런(Bob Dylan)이 가수들은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을 널리 퍼트리는 데 일조했던 것처럼, 퍼블릭 에너미도 래퍼들은 혁명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퍼블릭 에너미의 척 디(Chuck D)는 음악 팬들이 힙합이라는 장르를 미국에서 가장 험난한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현실과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겪어온 중대한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받아들이기를 원했다. 척 디는 1988년에 가진 잡지 《스핀(Spi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랩은 미국 흑인들의 TV 방송국입니다. 젊은 흑인들이 체감하는 진짜 현실을 전달해주는 유일한 매체는 바로 랩 음반입니다.”

힙합을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설명이 효과적일 수도 있다. 랩 음반은 쓸데없다거나 심지어 해롭기까지 하다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반박하는 하나의 논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음악을 분석하는 입장에선 이러한 주장이 그리 타당하지만은 않다. 이런 의식을 갖는다고 해서 힙합의 사운드가 더욱 흥미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힙합이 언제나 진실을 말해왔던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랩이라는 것이 무언가에 대한 고발이라기보다는 그저 헛소리에 불과한 경우도 많았다. 오히려 힙합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핵심적인 이유는 그들이 수십 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유별난 즐거움을 고집해 왔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팬들은 물론이고 척 디를 비롯한 뮤지션들이 힙합을 재편하고자 했던 이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들은 힙합이 세상에 더욱 명확하고 선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장르로 바뀌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런 바람과 달리 힙합이 자랑스럽게 개혁되지는 않았지만, 팬층은 계속해서 유입됐다. 힙합은 어쩌면 미국이 세계에 선보인 가장 큰 문화적 기여이자 미국 현대 예술의 정수일지 모른다. 그러나 힙합은 탄생한 이래 나쁘다는 걸 알아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일종의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로 여겨져 왔다.

퍼블릭 에너미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너무나도 성공적이었기에 힙합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사운드는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중적인 인식을 바꿔 놓을 정도였다. 이들은 롱아일랜드에서 결성되었으며, 척 디의 위압적인 목소리와 전투적인 분위기가 특징이었다. 그룹이 데뷔했을 당시 그의 나이는 26살로 비교적 많은 편이었으며, 시끌벅적한 힙합계에서 이러한 진지함은 그를 독특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룹의 대표곡인 〈권력에 맞서 싸워라(Fight the Power)〉는 스파이크 리(Spike Lee) 감독의 영화 〈똑바로 살아라(Do the Right Thing)〉에 삽입되었는데, 이 노래의 뮤직비디오 역시 스파이크 리 감독이 찍은 것이다. 해당 뮤직비디오를 보면 이들은 1989년 4월에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정치적인 행진을 주도하면서 저항하라는 보편적인 슬로건을 반복해서 외치고 있다. “우리는 권력자들에게 맞서 싸워야 한다.”

많은 음악 팬들에게 있어서 퍼블릭 에너미는 이상적인 모습의 힙합 그룹이었다. 분노가 들끓었고 정치적으로 활동적이었으며 길거리를 행진하면서 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사실 퍼블릭 에너미는 특이한 사례였다. 노골적으로 정치적인 발언들은 계속 있어 왔지만, 힙합이라는 장르가 발전하는 데 있어서 이러한 특성이 기여한 역할은 상대적으로 미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말부터 힙합 팬뿐만 아니라 외부자들까지더 힙합 장르가 정치적인 본질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퍼블릭 에너미가 남긴 유산이자, 어느 정도의 희망적인 생각들이 모여서 나타난 결과이기도 하다. 예술은 일종의 환상을 만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랩은 상당히 그럴듯한 연설처럼 들릴 수 있다. 특히 척 디처럼 깊은 공감을 불러내는 목소리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힙합이 이후에도 계속해서 거두었던 성공의 상당 부분은 래퍼들의 특별한 능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노랫말에 대해 특별히 생각하지 않더라도 곡 전체가 그냥 ‘들리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가사의 내용이 얼마나 전투적인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1989년 뉴욕에서 스파이크 리(Spike Lee) 감독(가운데)이 퍼블릭 에너미의 플레이버 플래브(Flavor Flav, 왼쪽) 및 척 디(오른쪽)와 함께 〈권력에 맞서 싸워라(Fight the Power)〉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있다. ©Photograph: Michael Ochs Archives
 

2. 신뢰할 수 없는 우군


90년대 초, 미국 연방지방법원의 어느 판사는 마이애미 출신의 투 라이브 크루(2 Live Crew)가 1989년에 발표한 〈그들이 원하는 만큼 추잡한(As Nasty As They Wanna Be)〉이라는 앨범이 “더러운 생각들”을 자극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판단하면서 “사회적으로 고려할 만한 가치가 전혀 없다”고 판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을 판매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레코드 가게 주인이 1990년 6월에 체포되었고, 곧이어 이 그룹의 멤버 3명도 해당 앨범에 수록된 곡들을 연주한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들 모두가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덕분에 투 라이브 크루는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힙합 그룹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아무튼 이 사건은 절대로 결론이 나지 않는 인종 및 성별에 대한 논쟁에 다시 한번 불을 지폈다.

당시 펑크 록에 심취해 있던 나는 투 라이브 크루의 사건에 대해 자세히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펑크 록은 기존의 관습에 저항하며 전혀 다른 종류의 전율을 안겨줬다. 그 이후로 시간이 경과하며 나의 관심사는 펑크에서 힙합으로, 댄스 음악과 알앤비로, 그리고 주류 팝으로, 컨트리 음악 등으로 확대되었다. 펑크 록은 내게 어떤 곳에서든 그러한 저항 의식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때로는 일부러라도 찾아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투 라이브 크루와 같은 음악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편이다. 그러나 투 라이브 크루의 음악은 정부 기관들이나 기업 임원들이나 지역 활동가들에게나 모두 정도를 벗어난 것으로 간주된다. 하지만 나는 분란을 일으키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음악에 더욱 끌리는 편이다.

음악을 듣는다는 건 사회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사회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음악들은 적어도 처음에는 반사회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만약 수많은 사려 깊은 사람들이 투 라이브 크루의 음악이 상당히 유해한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 판단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이 그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오래된 길모퉁이 음악의 전통을 따르고 있었다. 앨범의 가사는 의도적으로 추잡하게 만들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다. 투 라이브 크루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주변 세계의 추잡함을 고발하려 했다고 주장하지만, 나는 멤버들이 이렇게 상스러운 언어를 사용한 목적이 사회를 풍자하기 위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즐겁고 재미있는 음악을 만들려던 것뿐이다. 그러니 투 라이브 크루의 음악이 재미없다거나, 그들의 노랫말을 들으면 화가 난다거나 무섭다는 반응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힙합은 기본적으로 흑인들의 음악이기 때문에, 특히 수많은 흑인들은 힙합을 그냥 싫어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의무감을 갖고 있다. 그들은 힙합을 제대로 들어 봐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걸 거부해서는 안 된다고 느낀다. 그렇지 않으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화 그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1994년에 트리샤 로즈(Tricia Rose)는 힙합에 대한 최초의 학술 연구 서적 가운데 하나인  《블랙 노이즈, 현대 미국의 랩 음악 및 흑인 문화(Black Noise: Rap Music and Black Culture in Contemporary America)》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힙합을 오직 찬양하기만 하는 기념 서적이 아니다. 로즈는 이 책의 서두에서 스스로를 “친-흑인, 혼혈, 전(前) 노동 계층, 뉴욕 거주 페미니스트, 좌파 문화비평가”라고 밝힌다. 그는 자기와 같은 정치적 성향, 문화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힙합이 신뢰할 수 없는 우군이라는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가 찬사를 보내는 음악들은 부기 다운 프로덕션스(Boogie Down Productions)가 폭력적인 경찰력을 소리 높여 고발하는 〈누가 우리를 당신들로부터 지켜 주나(Who Protects Us from You?)〉처럼 흑인들의 정치적 저항 의식을 표출하는 곡들이다. 그러면서 로즈는 흑인 음악 내에 “성차별이 만연하다”고 성토하며, 여성 래퍼들에게도 면죄부가 없음을 지적한다. 이를테면 여성 래퍼들이 남성들을 두고 “동성애자일 가능성이 있다고 암시하며” 깎아내릴 때, 그들 역시 “이성애적인 남성성이라는 절대적 기준”에 동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리샤 로즈는 2008년에 《힙합 전쟁, 우리가 힙합에 대해서 말할 때 이야기하는 것과 그것이 중요한 이유(The Hip Hop Wars: What We Talk About When We Talk About Hip Hop – and Why It Matters)》라는 또 한 권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힙합이 “심각하게 병들었다”고 표현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미국의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성차별주의자들의 공통분모라고 할 수 있는 저속한 욕망에 영합하느라”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즈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자신이 논의하는 것이 주로 상업적인 힙합이라고 조심스레 말한다. 상업적인 힙합이 이 장르를 지배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힙합의 전부는 아니다. 그는 독자들이 비록 인기는 덜하지만 현실과는 더욱 가까운 또 다른 분야에 주의를 기울이라고 당부하며, 그것을 “사회적 의식을 가진” 또는 “진보적인” 힙합이라고 부른다. 로즈는 미디어와 음악 산업을 장악한 “강력한 기업들의 이해 관계”가 미치지 않는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에서 이 분야의 최고이자 아마도 마지막 희망일 수도 있었던 일군의 래퍼들이 나타났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른바 “깡패-포주-창녀(gangsta-pimp-ho)의 삼위일체”를 뒤로 하고, 정치적 의식을 가진 깊이 있는 음악을 만들었다. 

그러나 로즈는 “사회적 의식을 가진” 힙합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 주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음악들이 많은 래퍼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힙합계를 나누어 놓았기 때문이다. 로즈는 “어떤 래퍼가 ‘사회적 의식을 가졌다’는 이야기를 듣는 건 상업적으로는 거의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고 말한다. 그런 표식이 붙으면 사람들은 그 노래의 가사에 선명한 메시지가 들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아마도 유머 감각이라고는 전혀 없을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의식성이라는 관점에서 진지하게 바라보면, 갱스터(gangsta) 랩은 그저 즐거움만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회적 의식’이라는 건 오래된 표현이다. 이것은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또는 적어도 바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칭하기 위해서 지난 수십 년 동안 사용되어 온 표현이다. 80년대의 힙합에서 ‘사회적 의식’이라는 건 소위 말하는 ‘메시지’를 가진 음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는 바로 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앤 더 퓨리어스 파이브(Grandmaster Flash and the Furious Five)의 〈더 메시지(The Message)〉라는 앨범이다. 이러한 용어는 퍼블릭 에너미에게도 잘 어울렸다. 그들은 새로우면서도 정치적으로 더욱 전투적인 힙합의 시대를 열어젖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파이크 리 감독이 브루클린에서 사람들이 행진하는 장면을 담은 〈권력에 맞서 싸워라〉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하고 나서 한 달이 지났을 때, 퍼블릭 에너미에서 랩을 하지 않는 멤버인 프로페서 그리프(Professor Griff)가 워싱턴타임스(Washington Times)와의 인터뷰에서 유대인들은 “지구 전역에서 벌어지는 사악한 일들의 대부분”에 책임이 있으며, 자신은 그들이 보내는 “호모 암살자들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다고 말했다. 이러한 발언은 유대인 관련 단체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로부터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그해 여름 〈권력에 맞서 싸워라〉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자 커다란 혼란이 일었다.

퍼블릭 에너미는 해체했으나 재결성의 기미를 보였고, 결국 쫓겨났던 프로페서 그리프가 다시 영입되었다. 척 디가 사과를 했지만, 프로페서 그리프는 사과하지 않았다. 이러한 논란과 그에 대한 척 디의 모호한 대응으로 인해 이들이 두려움을 모르는 명민한 혁명가들이라는 인식이 약화됐다. 어쩌면 그보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힙합 팬들이 좀 더 새로운 그룹들과 더욱 새로운 이야기들에 끌리게 됐다는 점일 것이다. 이후에도 퍼블릭 에너미는 많은 앨범을 발표했고 때로는 더 크게 히트를 치기도 했지만, 브루클린의 거리를 행진하면서 보편적인 혁명의 메시지를 외치던 그 시절의 봄날만큼 다시 주목을 받거나 영향력을 발휘하는 일은 없었다.
투 라이브 크루, 1990년. ©Photograph: Anna Krajec/Getty
 

3. 갱!


이것이 바로 정치적인 힙합이 가진 한 가지 문제점이다. 래퍼들이 언제나 반드시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갱스터 랩의 대표 아티스트인 아이스 큐브(Ice Cube)는 1992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벌어진 시위와 폭동에서 일종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그의 격렬한 라임(rhyme)은 마치 저녁 뉴스의 보도 같았다. 그런데 그가 1991년에 발표한 앨범 〈사망진단서(Death Certificate)〉에는 동양인 가게 주인들에 대한 위협을 비롯하여 정치적인 구호라고 옹호하기가 거의 불가능한 내용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스 큐브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가장 그럴듯한 주장은 그의 작품이 본질적으로 미학적인 것이지 정치적인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즉, 그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래퍼로서 자신이 왜 그렇게 느꼈는지,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느꼈다면 왜 그랬는지 사람들을 보다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음악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힙합의 행동주의를 보여주는 당대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자기파괴(Self Destruction)〉라는 싱글(single)은 그보다 논란이 훨씬 적었다. 이 노래는 1989년 케이알에스-원(KRS-One)의 주도하에 퍼블릭 에너미와 엠씨 라이트(MC Lyte) 등을 비롯한 최고의 래퍼들이 참여하여 결성한 ‘폭력 중단 운동(Stop the Violence Movement)’이라는 그룹의 이름으로 발표됐다. 이들이 이 단체를 결성한 목적은 흑인 인권 단체인 내셔널어반리그(National Urban League)의 설립 자금을 조성하고, ‘흑인이 흑인에게 저지르는 범죄’의 원인과 피해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끌어모으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자선 행동이자 저항 운동이었으며 격려 연설이었다. KRS-One은 어느 긴 영상에 출연하여 이 프로젝트가 단지 폭력에 맞서 싸우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힙합 그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기를 바란다는 자신의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저는 부기 다운 프로덕션스, 폭력 중단 운동, 퍼블릭 에너미와 같은 움직임들이 랩 음악을 말 그대로 구해 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랩이 자기중심적이며 성차별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면, 지금은 아예 죽어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힙합을 구해 내기 위한 힙합의 행동주의’라는 발상이 다분히 순환 논리인 것처럼 들리지만, 어쨌든 힙합의 구원이라는 생각은 점점 더 강박 관념 같은 것이 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로 접어들면서 소위 말하는 갱스터 랩이 전성기를 누리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그전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캘리포니아 출신의 쿨리오(Coolio)라는 래퍼가 갱스터 랩의 사운드와 스타일을 사용하여 1994년부터 〈환상적인 여정(Fantastic Voyage)〉이나 〈갱스터의 천국(Gangsta’s Paradise)〉과 같은 당대 최고의 히트곡들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유명세를 얻었다. 이러한 현실은 힙합이라는 장르에서 성공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갱스터 랩과 팝이 뒤섞이기 시작했는데, 이는 둘 가운데 어느 쪽도 아닌 수많은 래퍼들에게 문제가 됐다. 그들은 설 자리를 잃었고 힙합이 새롭게 장악하기 시작한 라디오 방송국들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한때 “데이지[3] 에이지(Daisy Age)”에 대한 재치 있는 라임으로 유명했던 드 라 소울(De La Soul)은 1996년에 흑백 커버로 장식된 〈위기고조(Stakes Is High)〉라는 다소 심각한 분위기의 앨범을 발표했다. 이 앨범의 타이틀 트랙에서 데이브(Dave)라는 이름의 래퍼는 대부분의 현대 힙합이 지루하며 해롭다고 주장했다. “엉터리 트랙을 듣는 알앤비 겁쟁이들이 지겨워 / 코카인과 크랙(crack)[4]이 / 흑인들을 병들게 만들어 / 부푼 머리를 한 래퍼들이 지겨워 / 그들의 랩도 역겨워 / 권총의 총알이 / 병든 세상 전체를 무너트리고 있어.”

그러면서 사회적 의식을 가졌거나 ‘의식 있는’ 힙합이라는 개념은 주류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규정되는 사례가 점점 더 많아졌다. 1970년대의 아웃로 컨트리(outlaw country)[5] 운동과 마찬가지로, 1990년대의 의식 있는 힙합 운동은 보수적인 동시에 진보적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루브(groove)가 있었고, 반(反)문화적 정신이 있었으며, 거기에 더해서 자신들의 힙합은 예전의 방식과는 다르다는 굳건한 확신이 있었다. 시카고 출신의 래퍼인 커먼(Common)이 1994년에 발표한 트랙 〈나는 그녀를 사랑했었다(I Used to Love H.E.R.)〉는 이러한 새로운 감성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었다. 커먼은 이 노래에서 방황하다 할리우드로 떠나 버린 여성에 빗대 힙합을 묘사하고 있다. “그녀는 자기가 얼마나 격렬하며 진짜인지 강조하지만 / 그녀가 정말로 가장 진짜였던 때는 쇼비즈니스로 떠나기 전이었다”며, “그녀를 되찾아 오겠다”고 맹세한다. 또 주류 힙합의 폭력적이며 성적인 이미지를 비판하다 보니, 이러한 개혁주의자들이 남성성의 과시나 성별 고정관념에 반대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혁명적인 성향이 뚜렷한 데드 프레즈(Dead Prez)는 1999년에 음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힙합(Hip Hop)〉이라는 심플한 제목의 트랙을 발표해서 히트시켰다. 데이 라 소울과 마찬가지로 데드 프레즈도, 대중적이지만 위협적이지는 않으며 어쩐지 조금은 ‘여성스러워진’ 알앤비 음악이 힙합의 가장 불순한 측면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하루종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거짓 깡패들의 알앤비 랩 이야기가 지겹다.” 갱스터 랩과 마찬가지로 이들 개혁가들도 진정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공언했지만, 실제로 가사를 쓸 때는 그러한 원칙이 상당히 모호해지곤 했다.

필라델피아에서 결성된 더 루츠(The Roots)라는 그룹의 블랙 쏘트(Black Thought)는 가차 없이 평가했다. “진정한 힙합의 원칙은 버림받았다 / 이제는 그저 계약을 하고 돈을 버는 것만 남았다.”[6] 그에게 동의하는 이들은 힙합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를 원했으며, 힙합 그 자체도 역시 진지해지기를 원했다. 어떤 이들은 자신이 만든 라임에 빼곡하게 들어찬 노랫말과 지적인 감수성에 대해서 스스로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블랙 쏘트는 스스로를 래퍼보다는 엠씨(MC)라고 불리는 걸 선호하는 이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 표현이 자신의 예술을 진지하게 대하는 탐구자이자 실천가처럼 보이게 만들어 주면서 파렴치한 사기꾼의 느낌은 덜어주었기 때문이다. 1996년에 《바이브(Vibe)》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에 래퍼란 사업적 측면에서라면 몰라도 이 문화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없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더 루츠가 다소 특이했던 이유는 그들이 퀘스트러브(Questlove)라는 드럼의 거장이 이끄는 라이브 밴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힙합이 광범위한 흑인 음악 전통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들은 2장의 앨범에서 재즈 가수인 카산드라 윌슨(Cassandra Wilson)과 협업하여 만든 곡을 실었다.) ‘진정한 힙합’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들과 기존의 힙합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 힙합에 대한 이런 상반된 감정은 ‘의식 있는’ 래퍼들과 그 반대에 있는 갱스터 랩 진영의 아티스트들이 모두 공유하고 있는 것이었다.

뉴욕에서는 푸지스(Fugees)라는 그룹 출신의 로린 힐(Lauryn Hill)이 “온갖 잘못된 사안들에 대해서”[7] 랩을 하는 가식 덩어리들로부터 힙합을 지켜내기 위해 애쓰고 있었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그녀는 자신이 단순한 랩 이상의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를 입증하기라도 하듯, 푸지스는 로버타 플랙(Roberta Flack)이 1973년에 발표한 버전의 〈그의 노래가 나를 부드럽게 죽이고 있어요(Killing Me Softly with His Song)〉를 리메이크해서 대히트를 시켰다. 여기에서 로린 힐은 강렬한 힙합 비트 위에서 아름답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가끔씩 푸지스의 멤버들이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중얼거리는 부분은 있지만 정확히 랩이라고 부를만한 요소는 등장하지 않는다.

로린 힐은 1998년에 〈로린 힐의 잘못된 교육(The Miseducation of Lauryn Hill)〉이라는 앨범을 발표하며 솔로로 데뷔했는데, 이는 의식 있는 힙합 운동이 최고의 절정에 달하는 순간이었다. 여기에서 반쯤 쉰 목소리로 랩과 노래를 했던 로린 힐은 거친 라임과 발라드 사이의 경계를 지워 버리며 70년대의 소울과 감미로움이 고스란히 담긴 힙합 앨범을 만들어 냈다.
1999년 그래미 시상식에서의 로린 힐(Lauryn Hill). ©Photograph: Kevork Djansezian/AP
 

4. 진정한 힙합은 무엇일까


나도 물론 이런 종류의 많은 음반들을 좋아했고 심지어 사랑하기도 했지만, 나 자신이 ‘의식 있는’ 혹은 ‘진보적인’ 힙합의 편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컨트리나 알앤비를 개혁하고자 했던 다른 유사한 운동들과 마찬가지로, 힙합을 개혁하고자 하는 운동은 이 장르가 어딘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힙합에 무언가 특별히 잘못된 것이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고상한 마음가짐을 주입해서 고쳐낼 수 있을 만한 문제점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나는 문학 작품을 인용하거나 복잡한 단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굳이 찬사를 보내야 한다거나 생각지 않았고, 살인이나 섹스에 대한 노랫말보다 정치나 인종 차별에 대한 노랫말이 덜 진부하며 더욱 기억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일부 힙합 뮤지션과 팬들은 재즈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재즈는 한때 저급한 장르였지만 20세기 후반을 거치며 미국의 고전 음악으로서 명성이 높아졌다. 이제는 미국의 고품격 예술 유산을 수호하는 수많은 비영리 단체들의 보살핌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나는 재즈의 그러한 지위를 질투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나는 힙합이 그 특유의 천박함과 고상하지 못하다는 대중적인 인식으로 인하여 제도권에 편입되지 않고 지켜질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이 ‘리스펙트’를 얻어내려고 움직이는 징후를 발견할 때마다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서 린-마누엘 미란다(Lin-Manuel Miranda)가 미국의 역사를 힙합으로 풀어낸 〈해밀턴(Hamilton)〉이라는 뮤지컬 작품으로 브로드웨이를 완전히 사로잡았을 때나, 커먼이 백악관의 초청을 받아서 공연을 했을 때나, 켄드릭 라마(Kendrick Lamar)가 그래미상뿐만이 아니라 클래식 음악이나 재즈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 음악 부문의 수상자가 되었을 때가 그랬다.

공교롭게도 현대 힙합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가운데 한 명은 가장 당황스러운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바로 카니예 웨스트(Kanye West)다. 이미 힙합 분야에서 가장 저명한 프로듀서 가운데 한 명이었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특이하지만 매력적인 래퍼로서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이지(Jay-Z)를 비롯한 많은 아티스트의 프로듀서였던 그는 고전 소울 노래의 한 부분을 가져와서 그것을 빠른 속도로 바꾼 다음, 익숙하지만 원곡과는 살짝 다른 트랙을 만들어 내는 걸로 유명했다. 래퍼로서의 그는 의식 있는 힙합에 동조적이긴 했지만, 그 자신이 가진 모순과 위선 역시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었다. 2004년에 발표한 첫 번째 앨범에서 카니예 웨스트는 로린 힐의 노래[8] 가운데 한 부분을 가져와서 사회적인 의식이 아닌 ‘자의식’에 대한 노래[9]를 만들었다. 그는 처음으로 받은 많은 급여를 보석에 탕진하고, 과시적인 소비를 비판하면서도 거기에 몰두한다고 자백하는 내용으로 랩을 했다. 어쩌면 자랑이었을지도 모른다. “난 돈이 생기기도 전에 써버리는 게 문제야 / 우리 모두는 자의식을 갖고 있어, 내가 그걸 처음으로 인정할 뿐이야.”

카니예 웨스트의 음악에 영향을 준 자기 자신의 모순과 위선 같은 것들은 그가 음악을 하면 할수록 더욱 커지기만 할 뿐이었다. 미래를 연상시키는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음악을 만들고 예상치 못했던 컬래버레이션을 성사시키면서 그는 ‘자의식’을 가진 괴짜에서, 힙합계에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성장했다. 패션 분야에서도 또 하나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시작하며 그는 쇼핑에 대한 개인적인 집착을 화려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브랜드로 만들어 냈다. 킴 카다시안(Kim Kardashian)과 결혼하고서는 (지금은 이혼했지만) 단지 존경받는 뮤지션일 뿐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초미의 관심을 받는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는 부시를 비판했고 오바마에게선 비판을 받았으며, 트럼프를 칭송하고 2020년 대통령 선거에는 직접 후보로 출마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 철학을 조금씩 가다듬으면서 자신에 대한 평판을 구축하고 산산이 부수었다가 다시 만들어냈다. 그리고 2019년에는 〈예수는 왕(Jesus Is King)〉이라는 제목의 조금 산만하긴 하지만 강력한 가스펠(gospel) 앨범을 발표하면서, 그는 미국의 음악 역사상 가장 위엄 있는 전통 가운데 하나인 가스펠에 대한 충성을 선언했다.

‘의식 있는’ 힙합이라는 관념에 있어서 낙담스러운 부분은, ‘의식 있는’이라는 표현이 문화 및 이념의 영향력 내에서도 지극히 협소한 범위만을 가리키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사실이다. 특히 흑인들의 고통과 힘을 기록한, 의심할 여지 없이 위대한 70년대의 소울 음악에 한정되어 있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가끔씩 내가 좋아하는 래퍼들이 ‘무의식적인’ 힙합을 만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책임감 있기보다는 무모한, 논리적이기보다는 꿈꾸는 듯한, 분명하기보다는 은근한 음악이라고 말이다.

‘의식 있는’ 힙합이라는 것이 성립한다면, 사실 서구의 불안정하고 예측할 수 없으며 자극적인 대부분의 음악들이 모두 그러한 정의에 들어맞을 것이다. 카니예 웨스트는 가끔씩 서로 공존할 수 없는 힙합의 모든 성향을 자기 자신 안에서 화해시키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서 그는 파티의 주인에서부터 대중 선동가, 안티히어로(antihero)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역할을 오가며 자신을 비평하는 많은 사람과 맞서 싸우고 있다.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굳게 믿고 있지만, 여전히 비판에 매우 취약해질 수 있다. 그는 정신 질환과 싸우면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상황에서도 관심을 구한다.

카니예 웨스트는 끊임없이 계속해서 미국에 사는 흑인 남성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이 나라에 급진적인 변화가, 어쩌면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자신의 확신과 연결시킨다. 설령 그러한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는 최근에 이렇게 노래했다. “내 마음은 우리를 성층권 너머로 끌고 갈 수 있어 / 우리를 여기에 데려다 놓은 그 마음은 여전해.”[10] 이보다 더 사회적으로 ‘의식 있는’ 것이 있을까?
2018년에 카니예 웨스트가 백악관에서 도널드 트럼프를 만나고 있다. ©Photograph: Rex/Shutterstock
이 글은 켈레파 사네(Kelefa Sanneh)가 2021년 10월 7일에 출간한 《메이저 레이블, 일곱 가지 장르로 살펴보는 대중음악의 역사(Major labels: A history of popular music in seven genres)〉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1]
6번 트랙 〈Are You Mad?
[2]
매춘부(ho) 같은 여성들을 쉽게 만날 수 있는 지역(zone)을 의미하는 비속어.
[3]
데이지(DAISY)는 ‘da inner sound, y'all(내면의 사운드)’의 줄임말이다.
[4]
연기 형태로 흡입하는 코카인 계열의 마약.
[5]
내슈빌(Nashville) 지역으로 대표되는 기존의 컨트리 음악을 벗어나고자 했던 움직임.
[6]
The Roots, 〈What They Do〉,
[7]
로린 힐, 〈Doo-Wop (That Thing)〉,
[8]
로린 힐, 〈Mystery of Iniquity
[9]
카니예 웨스트, 〈All Falls Down ft. Syleena Johnson
[10]
카니예 웨스트, 〈Wouldn't Le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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