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순간
1화

전례 없는 위기를 넘어서는 법

성장의 의의가 과거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것에 있다면, 대한민국의 성장, 나아가 세계의 성장은 멀어진 꿈처럼 보인다. 고도성장을 반복하던 아시아 시장은 정체기에 접어들었고, 예기치 않게 찾아온 팬데믹은 성장보다 앞서 위치한 생존의 문제를 가시화했다. 팬데믹과 저성장, 기후 위기와 갈등, 그 앞을 장식하는 ‘전례 없는’이라는 상투어는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시대적 감각이 된 것처럼 보인다.

북저널리즘은 여기에서 출발했다. 우리가 마주한 위기, 그리고 정체와 쇠락이 정말 전례 없는 것일까? 세계가 마주한 위기의 근원은 우리가 지나온 사건에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과거의 사건을 하나의 레퍼런스로 삼아 더 나은 미래를 조각할 수도 있지 않을까? 모두가 말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결정적 순간》 은 반복될 역사를 현재를 진단하는 기준점이자 미래를 전망하는 힌트로 삼으려 했다. 매일 아침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정치인의 말과 신념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기후 위기와 효율성의 시대에서 환경 보호를 설득하는 일은 가능한 걸까? 혐오와 차별이라는, 구체화하기조차 어려운 문제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지구 바깥의 삶과 모험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북저널리즘이 정치, 사회, 우주, 환경, 법, 다섯 개 분야의 전문가를 만나 미래를 바꾼 결정적 순간을 물었다. 이 시대가 마주한 다섯 가지의 문제는 힘과 기술, 문화로 요약할 수 있었다.

모든 힘의 작동에는 규칙이 있다. 힘은 돌을 옮겨 도시를 지을 수도 있지만, 돌을 던져 도시를 파괴할 수도 있다. 지렛대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는가에 따라 결과가 바뀐다. 김동춘 사회학자는 이념이라는 한국의 문제로, 강원국 작가는 권력자의 말이 가질 힘과 가져야 하는 의무로, 지금 한국을 옭아맨 힘의 지렛대를 읽어 낸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낸 사회학자 김동춘은 여순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념 논쟁으로 모습을 바꾼 채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은 역설적으로 지금의 갈등을 가시화한다. 김동춘을 만난 이현구 에디터는 사회적 합의가 부재한 작금의 상황이 제대로 청산되지 못한 과거와 연결돼 있음을 짚는다.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지냈던 작가 강원국은 연설의 시대를 고민했다. 그에게 있어 권력자의 연설은 “일종의 반향”을 만들어 내야 하며,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다. 권력자의 말과 그를 향한 의견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지금, 우리는 어떤 형태와 목적을 가진 말을 지향해야 할까. 강원국을 만난 정원진 에디터는 그와 “대화를 나눈 작은 회의실”을 회상하며 세대 간의 말이 오갈 제3지대를 그려 본다.

힘이 작용점과 받침점을 통해 세계를 움직이는 직접적인 동력이라면, 기술은 시대의 욕망을 드러내며, 내일이 사용할 지렛대를 바꾸는 간접적인 동력에 가깝다. 소통과 연결을 향한 욕망이 극에 달했을 때 소셜 미디어가 출현했고, 인류가 생산한 무한의 데이터를 가공하고 싶다는 욕망이 인공지능을 탄생시켰다. 그런 점에서 북저널리즘이 주목하는 기술은 실험실 안에 갇힌 멸균의 존재가 아니다. 세계와 충돌하고, 더럽혀지는 욕망 묻은 존재다. 지금 인류의 욕망은 우주를 향한다. 한국 최초의 우주 스타트업인 나라스페이스의 대표 박재필은 “하나의 소유권이자 경제권”이 된 우주와 달을 탐구한다. 그에게 있어 우주 개발은 “인류와 기술이 진보하는 솔루션”의 일부다. 이미 다가온 뉴스페이스 시대에는 모두가 우주 개발의 당사자다. 이다혜 에디터는 우주라는 공간이 더 이상 상상의 영역이 아님을 짚는다. “우주가 논픽션이 될 때, 인류의 상상도 현실이 된다.”

자신이 인지하고 있음을 인지하는 인류는 지금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올바른 방향을 향하는지, 출현한 기술이 어떤 욕망을 대변하는지를 점검한다. 이 점검의 과정이 남긴 족적을 우리는 문화라 부른다. 법사회학과 인권법을 전공한 법학자 홍성수는 이 시대 차별의 다양한 양상과 그 속에서 법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차별금지법은 “한국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의 시금석”이다. 그는 차별금지법이 제정된 대한민국은 “더 성숙한 민주주의 국가, 성숙한 인권 국가”가 되리라 전망한다. 백승민 에디터는 차별금지법이 개개인의 개별성을 드러내는 공적 영역의 힘을 재건할 것이라고 말한다. 《한겨레》 에서 13년째 기사를 써온 기자 최우리도 제도와 구조, 개인의 관계를 사유한다. 경부 고속도로 개통은 일시의 사건이었지만, 고속도로가 만든 “효율화를 지향하는 사고방식”은 영속적이다. 최우리와 대화한 김혜림 에디터는 질식의 속도로 내달리는 콘크리트 도로가 아닌, 울퉁불퉁한 흙길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1960년대의 지친 세대가 머물고 쉬었던 흙길처럼, 우리에게는 모두를 위로해줄 콘크리트 바깥의 길이 필요하다. 최우리는 말한다. 속도를 약간만 낮추면 길 바깥의 꽃과 나무가 보인다고. 기후 위기의 해결은 잠시 머무는 시선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마주한 위기는 전례 없지 않다. 그 전례가 미래 혁신의 물꼬를 트기도 한다. 이 책은 케케묵은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 《결정적 순간》은 미래를 바꿀 혁신가에게 순간이라는 레퍼런스를 제시한다. 전례 없는 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필요한 건 잠시의 트렌드, 한순간의 유행이 아니다. 우리가 점검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성 그 자체다.

김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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