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순간
3화

강원국 작가 ; 연설의 시대는 저물었다

말에는 생각이 담기고 시대가 담긴다. 대통령의 말은 곧 국가의 방향이다. 대통령의 연설문은 기록되고 쌓여 역사가 된다. 2006년 4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은 연단에 오른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 천천히 그러나 힘을 주어 말을 이어 나간다. “그냥 우리 땅이 아니라 40년 통한의 역사가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 역사의 땅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조용한 외교’ 노선을 탈피하고 강경 대응을 선언한 것이다. 연설은 생중계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연설은 우리나라 국민만이 아니라 일본에도 닿았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일본 총리는 즉각 반발했다. 일본 언론은 국제사법재판소 제소를 언급했다. 국내외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노 전 대통령은 한일 관계에 대한 단호함을 두 마디에 녹여 냈다. 17년이 흘렀다. 한일 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문은 역사에 자리했다.

2023년, 그 역사를 다시 꺼낸 이유는 무엇인가. 《한겨레》가 새해를 맞아 여론조사기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한 조사에 따르면, 정치적 갈등 해법의 우선순위로 협치와 포용이 꼽혔다. 응답자 40퍼센트가 정치적 이념 갈등 완화를 위해 ‘대통령과 여당, 야당의 상호 존중과 협치 강화’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민주주의는 말의 정치다. 상호 존중은 서로의 말을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왜 우리는 서로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나.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지도자의 말은 무엇인지 짚는다.

 

한일 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문


명연설로 꼽히는 것은 취임사가 대부분이다. 왜 특별담화문인가.

대통령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이고, 그 말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다. 한일 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문은 계기가 없었다. 어찌 보면 안 해도 되는 연설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대통령 본인이 하고 싶었던 연설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통령이 직접 완성한 연설이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왜 한일 관계였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외적으로 이루고자 했던 것은 딱 하나, 동북아시아의 평화였다. 노 전 대통령은 유럽연합 EU 같은 질서를 동북아에 구현하는 것을 꿈꿔 온 사람이다. 한·중·일이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면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 받고 그 안에서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일본의 과거사 청산과 북핵 문제를 동북아 평화의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겼다. 과거사를 청산해야만 한일 관계가 진전하고, 남북 관계가 해결돼야 한중 관계가 진전한다고 생각했다. 남북 관계 해결의 첫 단추는 북핵 문제였다. 노 전 대통령이 임기 내내 과거사 청산과 북핵 문제에 큰 관심을 둔 이유다.

당시 일본의 행보는 문제가 많았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일본의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갖고 있던 생각은 확고하다. 일본이 사실을 인정하고, 지도자가 국민에게 그 진실에 대해 정확하게 알리고, 사과할 것은 사과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할 것. 그렇게 과거를 정리하고 동북아 평화와 번영을 위해서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이를 위해서 임기 초부터 일본 국회에 방문해 연설하기도 했다. 그런데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은 거꾸로 갔다. 신사 참배하고, 독도 영유권 주장하고, 역사 교과서 왜곡하고. 노 전 대통령이 참다 참다 한일 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문을 쓰게 된 것이다. 계기가 없는 연설이지만 그냥 불쑥 나온 것은 아니다.

첫 문장이 강렬하다. 인사 후 다른 설명 없이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로 시작한다.

초안에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도 없었다. 메일로 원고를 받았을 때, 대통령이 왜 이 연설을 썼는지, 어디에 쓰려는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런데 첫 문장이 “독도는 우리 땅입니다”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에게 주문한 것이 있다. 첫 문장에서 사람들을 끌어들일 것. 보통 지루하고 장황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에게 “연설한다”고 하지 않나. 시선을 끌기 위해선 ‘갑자기 뭐지?’ 싶은 요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책을 추천했다. 제임스 C. 흄스 James C. Humes의 《링컨처럼 서서 처칠처럼 말하라》다. 역대 미국 대통령 다섯 명의 연설문을 담당한 작가가 쓴 책인데, 거기에도 의외의 시작을 하라는 내용이 나온다.

의외의 시작이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예를 들며 설명했는데, 노예제 폐지론자인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1852년 독립기념일 연설이었다. 제목은 ‘흑인 노예들에게 7월 4일이 무슨 의미인가’다. 독립기념일에 초청된 흑인 지도자의 첫 마디는 “저를 여기 왜 불렀습니까”였다. 인종 차별은 여전한데 무엇을 기념하는지에 대한 반문이었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약 두 달간 노 전 대통령은 내가 써 간 연설문을 읽지 않았다. 대통령 당선인의 말에 주목도가 가장 높은 때인데, 많은 연설과 발표를 노 전 대통령 혼자 하다시피 했다. 취임 후 나를 불러 그간 내 연설문을 읽지 않은 이유를 말해 줬다. “내 글이 아니어서 안 읽었네. 내 글을 써 주게.” 그리고 자신의 글은 무엇인지 두 시간 동안 얘기했다. 첫 번째가 핵심 메시지를 첫 문장에 담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한일 관계에 대한 특별담화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글을 확실히 이해하게 된 계기다.

 

대통령은 할 말이 있는 사람


대통령은 연설문 작성 과정에 어느 정도 개입하나.

대통령의 의견을 담아서 작성되지만, 대통령이 직접 쓰진 않는다. 취임사의 경우, 준비위원회가 있을 정도다. 준비 과정에 따라 연설문과 말씀 자료를 구분한다. 대통령이 낭독하면 되는 수준으로 준비된 것이 연설문이고, 참고할 만한 메모 같은 것이 말씀 자료다. 대통령 임기 5년 동안 약 500편의 연설문이 필요하고, 대부분 회의나 행사는 말씀 자료로 대체된다. 500편의 연설문 중 대통령이 직접 쓰는 건 보통 임기 중 열 편을 넘지 않는다. 한 편도 안 쓰는 대통령도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챙긴 연설문의 공통점이 있나.

역사의 기록에 남을 연설이라고 판단하면 직접 작성했다. 그 시대, 그 자리의 청중에게만 전달되는 것과 역사에 남는 것은 다르다. 그 중요성을 판단하는 것은 감각이나 안목일 수도 있고 쌓아 온 내공일 수도 있다.

좋은 연설문의 조건은 무엇인가.

기본 조건은 진심이다. 본인에게서 나온,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라는 뜻이다. 충분조건은 결과다. 일종의 반향을 만들어 내는 연설이어야 한다. 한 귀로 흘려들을 만한 내용이라면 안 하는 것만 못 하다.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면 연설문으로서 결격이다. 연설은 일방적으로 혼자 떠드는 웅변이 아니다. 듣는 사람을 설득하겠다는 목적을 가졌다. 마음을 움직여야 하므로 설명이 많고 구체적이다. 설득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면 단어 자체가 추상화된다. 자신만 아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그럼 듣는 사람에게도 가 닿지 못한다.

연설의 위상이 사그라든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일하던 때는 그야말로 연설의 시대였다. 여의도 광장, 보라매 공원에서 대통령이 연설하면 백만 명이 모였다. 상명하복의 시대였기 때문에 일방통행식의 말이라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온라인으로 어디서나 대통령의 말을 쉽게 접한다. 길어지면 가만히 듣고 있을 사람이 없다. 국민들의 발화, 참여도 쉬워졌다. 연설의 시대는 저물었고 질문과 대화의 시대가 왔다. 연설이 아니어도 관계 부처에 대한 지시나 현장에서 만나는 국민에게 하는 약속 하나까지, 대통령 직무 수행의 모든 것이 말로 이뤄진다. 말로 국정을 운영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연설의 힘은 달라졌지만, 여전히 대통령의 말은 중요하다.

변한 미디어 환경은 대통령의 말에 어떤 영향을 끼치나.

대통령의 말이 언론을 거치는 과정에서 좋게 말하면 정제, 나쁘게 말하면 왜곡된다. 대통령이 SNS를 통해 자신의 말을 직접 전달할 수 있게 되면서 국민과의 접점이 늘었다. 국민과의 소통 창구가 다변화된 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여러 면으로 노출되다 보면 예상치 못한 사고나 실수가 있기 마련이다. 말의 농도가 옅어져서 대통령의 영이 안 설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금의 미디어 환경을 반기고 잘 활용했을 것 같다. 굉장한 얼리어답터였기 때문에 즐겁게 소통했을 것 같다.

지금 연설비서관을 했다면 어땠을 것 같은지.

잘 못 했을 것 같다. 단순하게는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편이 아니다. 연설비서관은 2D(Difficult·Dangerous) 직업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다른 부처 비서관의 주된 업무가 지시라면 연설비서관은 직접 쓰는 것이다. 그만큼 시간을 많이 써야 한다. 그리고 대통령과 매일 대면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일이다. 연설비서관이 다루는 것은 대통령의 말이기 때문에 실수는 대통령에 대한 직접적 위해가 된다. 그야말로 살얼음판을 걷는 일이라 집에 못 가고 일했다. 명절이나 대통령 해외 순방 때 쉴 수 있었는데, ‘이것만 끝나면 그만둔다고 말할까?’ 고민한 적도 많다. 그래도 후회는 없다. 하길 잘했다 싶다.

 

추종하지 않고 배척하지 않으면서 성장하라


말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거친 것 같다. 지금 우리 사회의 말은 어떤가.

말의 홍수 시대인데 문제가 있다.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말은 씨앗이다.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런데 말에 휩쓸려 가고 있다. 말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군가를 설득하고 갈등을 해결하고, 또 누군가의 말을 들으며 위로와 용기를 얻기 위함이다. 그것이 말의 효용이다. 하지만 말이 문제를 만들고 갈등을 증폭하고, 위로는커녕 상처를 주는 상황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다름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역사 때문이다. 포용력은 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키워야 하는 능력이다. 그런데 나만 해도 그걸 배울 기회가 없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 같은 편끼리 뭉치는 것, 무리가 아니면 배척하는 것을 꾸준히 학습했다. 나와 다르면 업신여기거나 떠받들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 시대를 살아온 세대가 비워 줘야 한다. 지금 젊은 세대는 짓눌려 있는 상황이다. 말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힘이 없다. 세대교체가 안 되니 말도 변하지 않는다.

세대 간의 말은 무엇이 다른가.

1960년대 태어나 1980년대 대학 다니면서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386세대가 살아온 시대는 읽기와 듣기 중심이었다. 공부를 잘하면 성공할 수 있는 시대였다. 잘 읽고 잘 들으면 됐다. 그렇게 들어간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직이 맡긴 업무를 실수 없이 해결하면 됐다. 손실loss을 줄이려면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에서 봐야 한다. 걸러내기 위한 말이 효율적인 시대였고, 그러다 보니 경쟁적인 말이 주가 됐다. 사람들은 점점 말하지 않고 수동적이게 됐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변했다. 창의성을 요구한다. 자신을 잘 표현하는 사람, 말하고 쓰는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다.

앞으로는 어떤 말의 역사를 써야 하나.

적극적으로 말의 바다에 뛰어들어야 한다. 종이책만이 아니라 칼럼이든 영상이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자기화해야 한다. 내 느낌, 생각, 의견은 무엇인지 사색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받아들이는 데 그치지 말고 메모하고, 메모한 것을 말하고 글로 써야 한다. 말과 글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수단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인식할 때, 자기다움이 완성된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자기다움을 찾은 뒤에는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자기다움이라도 매몰되면 아집이다. 세상과의 접점을 넓히며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추종하지 않고 배척하지 않으면서 성장해야 한다.

2023년 상반기는 어땠나.

정권이 바뀌고 여러 변화가 있었다. 특히 한일 관계, 한미 관계 등 외교에 대한 말이 많았던 것 같다. 날마다 새로운 이야깃거리들이 나오면서 혼란스럽기도 했다. 말이 헛돈 시대가 아닐까. 말의 방향이 바뀌어야 한다. 말의 목적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이 되면 안 된다. 해야 할 말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은 하지 않으면서 때로는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도 해야 한다. 거기에 상대의 말을 경청하면 지금 같은 각박한 ‘말글살이’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은 말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대화가 이뤄진다면, 우리는 잘살 수 있다. 서로 보태 주면서 가장 좋은 말을 찾아가길 바란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말은 무엇인가.

유머다. 말이 각박한 세상이다. 모두가 말로서 칼을 겨눈 것 같다. 유머로 숨통을 트여야 한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을수록 유머가 중요하다. 호주 정상회담 때의 일이 기억난다. 호주 총리가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호주산 철광석을 많이 사 달라고 하니 노 전 대통령이 이렇게 답했다. “좋습니다. 우리는 철광석을 수입해서 자동차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 자동차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 합니다.” 우리나라가 만든 자동차를 많이 사 달라는 뜻이다. 농담 속에서 웃음도 찾고 여유도 찾고 위로를 누렸으면 좋겠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말은 무엇인가.

우선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배제와 타도의 언어에서 벗어나야 한다. 민주주의가 좋은 이유는 공존의 제도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간다는 것은 대화와 타협을 전제로 한다. 우리 정치에서는 실종됐다.

2024년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대화 있는 총선을 기대할 수 있을까.

말은 더 극단화할 것이다. 지금 우리 정치에 중간 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조정과 타협의 말을 하는 사람은 회색분자가 된다. 어느 한쪽으로 가지 않으면, 서 있을 수 없는 구조다. 내부에서 극단적인 발언이 득세하고, 결국 집단 양극화로 이어진다. 끼리끼리 뭉쳐서 양극단을 향해 가고 있다. 양 끝에 남아 있는 것은 날이 서 있는 말뿐이다. 대결과 반목의 말이 선거철에는 더욱 심화할 것이다. 말이 너무 오염돼 있으면 국민으로서는 꼴도 보기 싫어진다. 정치적 무관심이 우려된다.

오염된 말 속에서 좋은 말을 가려내는 기준이 있나.

첫째는 단연 말의 사실 여부다. 둘째는 말의 시행 가능성이다. 사실이 맞는지와는 다른 차원이다. 권력자의 말이 약속인지, 공언空言에 불과한지 냉정하게 봐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뺄셈의 언어인지, 덧셈의 언어인지 헤아려 보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를 깎아내리기보다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말에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 말로 인해서 우리의 사회, 정치, 경제, 역사가 후퇴하는지 전진하는지를 따져 보는 것이 시급하다.
 

앞으로 올 말


강원국 작가가 8년 동안 청와대에서 듣고 쓰던 ‘말’을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던 1998년 태어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하던 2003년, 겨우 다섯 살이었다. 나는 그들의 말을 들어본 적 없다. 정치적 편향성을 가지고 진행한 인터뷰가 아니라는 뜻이다. 단지 궁금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 지금까지 회자되는 이유가 말이다. 노 전 대통령의 말은 기사로만 접했다. 평이 갈렸다. 누구는 알아듣기 쉬워 좋다고 했고, 누구는 경솔해서 싫다고 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이유가 궁금했다.

역사를 통해 미래를 전망하는 책의 기획을 듣자마자, 강원국 작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궁금증을 해결해 줄 사람 같았다. 연락을 드렸다. 1998년생 에디터인데 그 세대의 말이 듣고 싶다고 했다. 강원국 작가는 인터뷰에 응했다. 그렇게 2023년 5월의 마지막 날, 작은 회의실에 1998년생 에디터와 1962년생 작가가 마주 앉았다. 강원국 작가는 우리 역사가 쌓아 온 말을 천천히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권력자의 말을 듣고 쓴 사람이지만, 권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대통령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이고, 그 말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는 사람이다.” 강원국 작가가 처음 내뱉은 말이다. 대국민 연설부터 국정 운영 지시까지 대통령의 직무 수행의 모든 것이 말로 이뤄진다고 설명했다. 비단 대통령만이 아니다. 모든 정치인이 그렇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동의를 기반으로 굴러가는 체제다. 다시 말해, 정치인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말을 통해 시민을 설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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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본질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왜’라는 질문이다. 수사학의 주된 기능은 설득(persuader)이다. 고대인들이 이를 학문으로 구분한 것은 설득을 공부해야 하는 기술로 여겼기 때문이다. 수사학의 이론 체계를 만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방식을 세 가지로 나눈다. 로고스(logos), 에토스(ethos), 파토스(pathos)다. 로고스는 전하고자 하는 핵심을 말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말한 ‘첫 문장’이다. 에토스는 ‘말하는 자의 고유 성품’을 말한다. 말하는 사람의 시선, 단어 선택, 카리스마 등이다. 강원국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를 대통령의 ‘영’이라 표현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파토스다. 그대로 번역하면 정열, 충동인데, 말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의미한다. 강원국 작가는 좋은 연설의 기본 조건을 진심이라고 말한다. 진정성을 담아야 반향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는 말의 잔치다. 하루에 수백 편의 기사가 정치인의 말에서 나온다. 시사 라디오 일일 편성표에 이름을 올리는 정치인만 해도 수십 명이다. 인터뷰 내용 전문은 기사로 옮겨진다. 이 중 반향을 만들어 내는 말은 얼마나 될까. 쏟아지는 말의 결과물이 시민의 피로감이 돼서는 안 될 일이다.

《한겨레》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내놓은 2023년 새해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50퍼센트가 ‘정당 간 대립과 갈등이 과거와 비교해 늘었다’고 답했다. ‘각 정당을 지지하는 유권자 간 대립과 갈등이 늘었다’는 응답도 50퍼센트를 넘었다. 정당 간 대립과 갈등이 심화한 이유로는 ‘편 가르기식 정치 문화’가 1위로 뽑혔다. 응답자 열 명 중 네 명은 정치적 성향이 다른 사람과 식사나 술자리를 함께하는 것을 불편하다 여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치 성향이 본인이나 자녀 결혼에도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의 정치는 갈등을 말하고 있다.

갈라진 말의 시대, 그 원인을 묻자, 강원국 작가는 “나조차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게 배워 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빠르게 성장하는 시대, 손실을 줄이기 위한 뺄셈의 말이 득세했고 사람들은 경쟁적인 말 앞에 소극적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 후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기자 회견을 언급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 기자에게 기회를 주었지만, 아무도 손들지 않았고 질문의 기회는 중국 기자에게 넘어갔다. 이는 기자 회견 흑역사로 두고두고 언급된다.

경쟁적인 말을 희석하기 위한 방법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앞서 언급된 조사에서 ‘정치적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대통령과 여야 간의 상호 존중’이라는 응답이 41퍼센트를 차지했다.

2023년 5월 6일과 13일 양일간, 국회정치개혁특별위원회는 국민들의 말을 듣기 위해 시민 참여단을 구성해 숙의 토론회를 열었다. 지역, 성별, 연령이 다른 시민 500명이 모여 국회의원 선거 제도 개편에 대해 논했다. 이후 발표한 결과에 따르면, ‘비례 대표 의원을 더 늘려야 한다’는 의견이 숙의 전 27퍼센트에서 숙의 후 70퍼센트로 확대했다. 국민들이 정치적 이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서로를 설득하고 설득당하며 뜻을 모았다는 것이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여야가 최종안을 만드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은 언제든 설득하고 설득당할 준비가 돼 있다. 내가 강원국 작가의 말을 듣고 그 세대의 말을 이해하게 된 것처럼 말이다.

2023년 상반기 가장 기억에 남는 대통령의 말은 ‘바이든’과 ‘날리면’이다. 2022년 9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순방 기간 중 벌어진 비속어 논란이다. 이후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의 10월 1주 전국지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70퍼센트가 ‘비속어 논란을 매듭짓기 위해 대통령의 사과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보수층에서도 49퍼센트가 동의한다고 답했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지만, 더 좋은 말을 쌓아 갈 수는 있다. 앞으로 올 말이 중요한 이유다.

2024년 4월 10일,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다. 말의 잔치가 될 것이다. 강원국 작가는 이번 총선을 계기로 말의 극단화와 그로 인한 정치적 무관심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제3지대가 없는 한, 양극단에 위치한 말이 득세할 것이라 분석했다.

그 말을 들으며 강원국 작가와 대화를 나눈 작은 회의실이 제3지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세대 간의 말이 오고 갈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강원국 작가는 경쟁적인 말을 가진 세대가 그렇지 않은 세대에게 길을 비켜 줘야 한다고 했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앞으로 올 말은 그 세대의 말도, 내 세대의 말도 아닌 ‘새로운 말’이어야 한다. 새로운 말의 역사는 ‘우리’의 입에서 시작한다. 이번엔 내가 강원국 작가를 설득할 차례일지도 모르겠다.

정원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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