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한 선택
2화

새로운 기후 체제 준비

4. 기후 행동의 주체, 기업과 정부로는 부족하다


유엔기후협약체제에서 온실가스 감축 주체는 당연히 유엔 회원국 정부로 규정되어 있다. 각국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주도적으로 자국 국내 산업에 강제하여야 하지만, 국내 산업을 육성하고 날로 치열해지는 시장 경쟁에서 살아남도록 산업 경쟁력을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서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강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미국이 그토록 선진국의 일방적인 감축 의무 부담을 완강하게 반대한 것도 자국의 국내 산업이 일방적으로 온실가스 감축 부담을 지게 되면 중국과 인도 등 개도국과의 산업 경쟁에서 불리하게 되는 상황을 피하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었다. 각국 정부는 국내 기업이나 산업뿐만 아니라 국내 소비자에게 온실가스 감축의 부담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선도적으로 강제할 수 없는 정치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민주적인 정부가 유권자이기도 한 소비자에게 부담이 되며 인기가 없는 온실가스 감축과 녹색 에너지 사용을 강요하는 정책을 과감하게 선도하리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환경 단체들을 비롯해 기후 위기를 우려하는 시민들은 정부의 미온적인 기후 변화 정책과 기업의 책임 부족을 질타하지만,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정부가 자국 산업과 유권자에게 인기 없는 정책을 시행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기는 어려우며, 가격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자유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이 온실가스 감축 책임 부담에 소극적이라고 비판하더라도 이들에게 과감한 행동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각국 정부는 민주 선거라는 정치적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자유 시장에서 무한 경쟁을 하여야 하는 산업과 기업은 수익성 ‘이익’을 창출해야 하는 분명한 상업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최근 국내에서 기업의 ESG를 강조하는 것이 긍정적인 추세이기는 하지만, 기업의 ESG만으로 기후 위기가 해결될 것으로 기대하기는 어렵다. 1992년 이래 유엔의 기후 체제 논의는 정부와 기업의 책임에 초점을 맞추어 왔으나 기대만큼의 실질적인 변화를 구현하지는 못했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면서 생산된 제품과 서비스를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소비자 개개인의 책임과 역할에 대한 논의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온실가스 감축에 대한 유권자의 정치적 지지와 녹색 소비를 수용하는 소비자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가 없는 상황에서 정부와 기업이 과감한 탈탄소 정책을 시행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로 선출되는 대부분의 민주 정부는 유권자이기도 한 소비자의 기후 변화 대응 책임 부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못한 채 30년의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물론 유럽연합의 경우에는 시민들의 기후 변화 행동에 대한 높은 지지에 힘입어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다. 따라서 지난 30년간 유엔 기후 논의의 두 번째 교훈은 온실가스 감축의 주체를 정부와 기업만이 아니라 소비자에게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유권자이며 소비자인 일반 시민들이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지 표명, 녹색 소비 운동 및 녹색 에너지 추가 비용 지불 의사를 표현해 기후 변화 행동의 1차적 책임 주체로 나서지 않는 한 온실가스 감축의 실질적인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5. 소비자 중심의 기후 행동 필요성


유엔 기후 협상에서 사용하는 온실가스 배출량의 기준은 생산, 즉 국내총생산(GDP)이다. 생산 부문의 배출량을 기준으로 하는 만큼 온실가스 배출량의 감축은 생산량, 즉 GDP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GDP 극대화를 경제 운용의 최우선 목표로 삼는 각국 정부 입장에서 생산 부문의 온실가스 감축을 강요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 실제로 유럽연합을 제외한 어느 나라도 자국의 산업 생산 부문에 실질적으로 온실가스 감축을 강제하지 못했다.

생산 부문에 초점을 맞춘 온실가스 감축 방식은 탄소 유출(Carbon Leakage)이라는 또 다른 문제점을 초래하였다. 현재 유엔에서 사용하는 온실가스 배출량 계산 방식에 따르면, 미국의 소비자가 구매하여 소비하는 중국과 한국 제품의 제조 과정에서 배출된 온실가스는 미국이 아니라 중국, 한국의 배출량으로 계산된다. 유럽연합의 경우 생산 부문 기준의 온실가스 배출량은 나라에 따라 1990년 기준 20~40퍼센트의 감축량을 보여주고 있다.

유럽의 배출량이 대폭 감소하고 중국과 한국의 배출량이 크게 증가했다고 ‘기후 악당’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있으나, 이는 생산 부문에만 초점을 맞춘 온실가스 배출량 계산 방식의 착시 현상일 뿐이다. 만일 유럽 국가들이 수입하여 소비하는 제품의 제조 과정에서 배출된 온실가스 배출량을 포함하여 소비 기준의 배출량을 계산하게 되면, 감축량은 10~30퍼센트 수준으로 줄어들게 된다. 유럽연합의 온실가스 감축은 실제로는 온실가스를 대량 배출하는 철강, 조선 등 중화학공업이 중국, 한국 등으로 이전된 데 따른 탄소유출의 결과이지, 소비 패턴의 변화에 따른 실질적인 온실가스 감축이 아니다. 이러한 탄소 유출에 의한 특정 국가의 감축은 다른 국가로 이전된 만큼, 지구 차원에서는 총배출량은 줄지 않는다.

지구 차원의 배출량이 순감소하려면 소비 부문에서 배출량이 감소해야 한다. 유럽 소비자가 구매하여 사용하는 현대자동차의 생산에 따른 온실가스 배출량을 유럽의 배출량이 아니고 한국의 배출량으로 계산하는 현재의 유엔 기후 변화 온실가스 측정 방식으로는 탄소 유출을 촉발할 뿐 소비 총량의 감소를 통한 지구 차원의 온실가스 배출량의 순감소는 불가능하다. 지구 차원의 온실가스 배출 총량이 감소하려면 각국의 소비 기준 배출 총량이 감소해야 한다. 유엔의 온실가스 배출량 계산 방법을 소비 기준으로 바꿔야 하는 이유이다.

최근 유럽이 이른바 탄소 국경 조정세(Carbon Border Adjustment Mechanism·CBAM)를 도입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이 또한 생산 부문에 초점을 맞춘 조치이다. 중화학공업의 대부분을 중국, 한국 등 해외로 이전한 유럽의 생산 기준 온실가스 감축이 1990년도 대비 30퍼센트에 달한다는 통계에 고무된 유럽이 2030년까지 감축 목표를 55퍼센트까지 높이고, 이를 다른 국가들에도 강요하기 위해 CBAM이라는 조치를 들고나오는데, 우리나라 언론들은 마치 우리 수출 산업에 엄청난 부담이 될 것처럼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생산 부문에 초점을 맞춘 유엔의 탄소 배출량 계산 방법이 조장한 착시 현상이다. 통계적으로 수출 금액 단위당 탄소 배출량이 한국, 중국보다 유럽 선진국들이 낮다고 나오는 것은 유럽 수출 제품은 대부분 고가의 패션, 화장품 등 명품과 벤츠, 페라리 등 고부가가치 제품들인 반면, 중국과 한국의 주력 수출 상품은 조선, 자동차 등 저부가가치의 중화학 제품이기 때문이지, 동일한 상품 제조단위당 배출량에 엄청 차이가 커서 수출 단위 금액당 배출량이 높은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자동차 한 대를 생산할 때 배출되는 온실가스는 한국이나 독일이나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자동차 한 대당 가격의 차이가 클 뿐이다. 자동차,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등 현재 CBAM의 대상으로 거론되는 제품별 에너지 효율을 품목별로 비교하면, 우리 기업의 철강, 자동차, 시멘트, 알루미늄 등의 산업 에너지 효율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다. 따라서 CBAM이 우리 수출 산업에 엄청난 타격을 줄 것이라는 추측도 근거가 없으며, CBAM로 상당한 온실가스 감축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럽의 계산도 기대만큼 큰 효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중국 등 일부 개도국의 특정 불량 산업은 어느 정도 타격을 받을 것인데, 이는 우리에게는 오히려 긍정적인 기회로 작용할 것이다. 탄소를 과다 배출하는 중국의 철강 제품이 유럽 시장에서 배제되면 탄소를 적게 배출하는 우리 철강 제품의 수출은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품목별 탄소 배출량의 계산을 에너지 효율이 아니라 투입된 에너지의 평균 탄소 배출량으로 계산한다면, 유럽보다 석탄발전 비중이 높고 재생 에너지 비중이 낮은 우리나라는 불리할 수 있지만, 이 경우 미국과 중국도 화석 연료 에너지 비중이 우리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높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을 것이나, 유럽 제품과 경쟁하는 일부 분야에서는 불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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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유럽이 과거의 성공에 고무되어 미래를 지나치게 낙관하는 까닭은 그동안 30퍼센트에 달하는 탄소 배출량 감축은 30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친 중화학공업의 개도국 이전이라는 산업 구조조정으로 비교적 손쉽게 달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2030년까지 줄여야 할 추가적인 25퍼센트의 감축은 과거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남은 기간이 7년에 불과하며 과거처럼 산업 구조조정에 따른 탄소 유출 효과를 앞으로는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야말로 소비자의 소비 패턴 변화와 총소비의 감축, 재생 에너지 비중의 획기적 증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지만, 과연 어느 정도 성공할지는 미지수이다. 지난 30년간 소비 부문의 감축은 생산 부문보다 낮으며 대부분 소비 패턴의 변화보다는 소비제품의 에너지 효율 향상, 예를 들면 승용차의 리터당 마일리지 향상 등에 기인하지만, 앞으로의 감축은 소비 패턴, 예를 들면 승용차 이용의 획기적 감축과 대중교통 체제로의 전환 같은 시스템의 변화 없이는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6. 새로운 ‘지속 가능 경제학’ 아이디어


앞에서 살펴본 유엔 기후 체제가 당면한 한계의 근저에는 단기 생산 ‘GDP’의 극대화와 시장의 수요공급에 따라 에너지의 시장 가격을 결정하면서 물, 공기, 환경, 생태 자원, 기후, 탄소를 자유재(Free Goods)로 취급하는 자유 시장(Free Market)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자리 잡고 있다. 탄소를 공짜(Free Goods)로 취급하면서 탈탄소(Carbon Free) Net Zero 2050 목표치를 달성하기는 어렵다. 세계 각국이 Net Zero 2050 목표 달성을 위해 녹색 에너지 전환과 기술 혁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에너지 전환과 기술 혁신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 부연하지만, 에너지 전환과 기술 혁신이 필요 없다는 뜻이 절대 아니며 보다 근본적인 경제 시스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기후 변화 문제는 탄소를 ‘공짜’로 취급하는 자유 시장 체제 때문에 발생한 만큼, 탈탄소 경제구축과 Net Zero 2050이라는 목표치의 달성을 위해서는 에너지의 시장 가격에 탄소의 가격을 반영하는 보다 근본적인 처방이 필요하다. 쉽게 말해서 석탄에 탄소세를 부과하여 태양광 에너지 가격보다 더 비싸게 만들면 녹색 에너지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온실가스 감축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현재의 자유 시장(Free Market) 가격에 탄소 가격을 반영하여 지속 가능 시장(Sustainable Market)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기후 변화 문제해결의 기반이 마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탄소 가격을 반영하는 ‘지속 가능 시장’으로의 전환은 전 세계 주요 국가들이 합의하여 동시에 추진하지 않는 한 실현되기가 어렵다. 시장 경쟁과 산업 경쟁력의 왜곡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느 한 나라만 일방적으로 시행할 수가 없다. 그래서 2015년 파리기후협약이 채택되는 순간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은 관심 있는 국가들 간의 탄소 가격 내부화 동맹(Coalition of like-minded Countries for Carbon Pricing)을 제안하기도 했다. 물론 이 제안은 실현되지 못했다.

2015년 유엔이 지속 가능 개발 목표(SDG)를 채택하고 각국 정부들이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지만 아직도 실질적인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고전하는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기후 변화 대응을 위한 온실가스 감축이든, SDG 달성을 위한 환경 보존과 사회발전이든 그들은 모두 장기적인 목표들인데, 현재 자유 시장 기반의 시장경제체제는 수요와 공급의 단기 균형 또는 단기 성과의 극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매년 GDP의 극대화가 경제 운용의 최우선 지표로 작동되는 한 기후 변화 대응, 사회발전과 경제발전 간의 균형을 통한 SDG의 달성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단기 성과의 극대화를 추구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자유 시장 경제체제를 지탱하는 자유 시장 경제학(Free Market Economics)을 장기 지속 가능성을 최우선 목표로 추구하는 새로운 지속 가능 경제학(New Sustainability Economics)으로 전환하는 구체적 실천 방안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이다. 기후 위기와 빈부격차 등 생태, 사회 위기, 좀 더 넓게 말하자면 지속 가능성의 위기를 초래한 현재의 자유 시장 경제학에 안주하면서 우리가 당면한 다중적 위기를 해결할 수는 없다. 일찍이 아인슈타인이 “We cannot solve our problems with the same thinking we used when we created them.”이라고 한 바 있다. ‘새로운 지속 가능 경제학’으로의 전환에 대한 우리 사회의 담론 시작이 시급한 이유이다.

 

7.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유엔은 앞에서 살펴본 다양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Net Zero 2050이라는 정치적 목표치를 검토하고 상호간의 Peer Pressure를 통해 감축 행동을 촉진해나가는 정치적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발적 서약과 검토 위주의 정치적 협상만으로 기후 위기 해결을 기대할 수는 없다. 보다 근본적이고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기후 위기 해결에 필요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내용을 살펴본다.

자유 시장에서 지속 가능시장으로의 전환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탄소를 자유재, 즉 공짜(Free Goods)로 취급하는 자유 시장(Free Market) 경제를 운용하면서 탈탄소미래(Carbon Free Future)를 논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녹색 에너지 전환’과 ‘기술혁신’을 Net Zero 2050 달성의 기본 방향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탄소에 얼마큼의 시장 가격을 부여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턱없이 부족하다. 에너지와 기술에 초점을 맞추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시장 경제 체제에서 시장가격에 탄소 가격을 반영하는 것만큼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조치는 없다. 물론 이에 대해서도 경제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여러 이론(異論)을 제기하고 있다. “탄소 가격의 반영만이 능사가 아니다.”, “탄소 가격만 반영한다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등과 같이 여러 반론들이 있지만, 탄소 가격을 반영하지 않고 기후 위기에 대처할 만한 충분한 탄소 배출 감축 효과를 거둘 수는 없다. 

태양광, 풍력, 연료 전지, 탄소 포집 저장, 수소자동차 등 이미 다양한 탄소 저감 기술들이 개발되어 있지만 경제성이 발목을 잡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기술들의 경제성을 제고하려면 시장가격에 탄소 가격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다. 에너지와 기술은 주로 생산 부문에 중점을 두지만 탄소 가격의 반영만이 소비패턴의 변화에 상당한 변화를 줄 수 있다. 문제는 속도와 범위의 조절 문제일 것이다. 탄소세와 같은 조치가 강력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나라도 섣불리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은 탄소세 도입이 가져올 경제 충격과 납세자들의 저항 그리고 이에 따른 정치적 부담이 두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검토할 수 있는 실천 가능한 단계적 조치들을 살펴보겠다.

자발적 탄소 가격 지불을 위한 차별화된 탄소 가격 시스템의 도입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민의 48퍼센트는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10년 안에 전기 요금의 두 배 인상에 찬성하였으며, 45퍼센트는 반대하였다고 한다. 여론이 이렇게 반반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정부가 재생전기 확대를 위한 전기요금 인상을 선도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검토할 수 있는 방안은 자발적 탄소 가격 지불을 위한 차별화된 가격 체계의 도입이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기후 위기 대처에 참여하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차별화된 자발적 탄소 가격 체계를 도입하는 것이다.

독일은 기후 위기를 걱정하여 스스로 탄소 배출이 없는 재생전기를 쓰고 싶은 소비자에게는 더 높은 가격에 재생전기를 공급한다. 고속기차 탑승권도 재생전기로 여행하고 싶은 소비자에게는 더 높은 가격으로 그린탑승권을 판매한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탄소 배출을 하고 싶지 않은 소비자는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기차에 탑승하며, 추가로 지불한 금액만큼 재생전기를 구매하여 기차 운행에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제주도 풍력발전 단지의 풍력 발전기를 1년에 160여 일 이상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전력의 적자가 커지는 상황에서 재생 전기 구매량에 한도를 설정하고 있기 때문인데 설치한 태양광 단지들도 한전에서 계통연결을 지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탄소 배출 없는 재생전기를 쓰고 싶은 소비자에게는 더 높은 가격에 재생전기를 공급하고 KTX 승차권도 재생전기승차권을 더 높은 가격에 판매하여 이렇게 지불한 자발적 탄소 가격 지불 금액만큼, 한전에서 재생전기의 구매에 활용한다면 한전이 적자 때문에 재생전기의 구매를 중단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의 자발적 기여(Personally Determinded Contribution·PDC) 선택지의 제공

기후 변화 대응에 대한 찬성과 반대가 반반으로 갈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기후 변화 대응에 참여 의사가 있는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추가 비용을 지불하여 재생에너지를 사용하고 탄소 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이다. 기후 위기를 걱정하는 각 개인이 스스로 결정하여 기후 변화 행동에 대한 기여(PDC)를 할 수 있는 자발적인 기후 행동 참여 사회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탄소발생이 없는 기차여행을 원하는 개인이 추가 비용을 지불하고 녹색기차표를 구매하여 여행할 수 있는 선택지를 제공하는 것이 PDC 활성화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앞에서 파리기후협약이 NDC(Nationally Determined Contribution·국가가 스스로 결정한 기여)에 의존함을 지적했는데, 이미 설명한 대로 경제 성장, 민생, 산업 경쟁력 등 다양한 우선순위를 챙겨야 하는 정부가 다양한 경제 산업 분야의 우선 순위를 제쳐두고 NDC를 국가 운용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 다른 정책 목표들을 희생하면서까지 NDC를 반드시 달성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 만큼, 정부에 의한 NDC에만 의존하기보다는 기후 위기를 걱정하고 자발적으로 기후 행동에 참여하려는 개인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함으로써 PDC 활성화 방안을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비록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일부 개인들이 시작한 PDC가 새로운 사회의 물결이 되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을 가능성을 기대하면서.

주요 사회 인프라 투자 사업의 경제 타당성 검토에 탄소의 잠재가격(Shadow Price of Carbon) 반영

우리나라는 500억 원 이상의 투자사업에 대해서는 예비 타당성 심사를 하여 경제성이 있는 경우에만 투자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법으로 규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경제성 검토가 주로 사업의 수익성, 즉 투자했을 때 경제적인 손실의 발생 여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평가 세부 항목에 사회, 환경 요소도 일부 포함되어 있으나 멸종 위기의 동식물에 대한 환경 영향, 인명 사고 발생 여부 등을 주요 평가 요소로 규정할 뿐 정작 가장 중요한 탄소 배출량, 미세먼지, 공기 오염 등의 증가 또는 감소 여부는 거의 반영되지 않는다. 특히 기후 위기 대처에 가장 중요한 탄소 배출량에 대한 영향이 누락되어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인천공항 접근 교통방식으로 민자 고속도로를 우선하면서 철도의 연결을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수년간 지연시킨 사례이다. 뿐만 아니라 최근 수도권 광역고속지하철망인 GTX A, B, C 노선에 대한 경제성 검토에서도 탄소 배출량은 반영되지 않았다. 만일 인천공항교통망을 고속도로가 아닌 철도 위주로 설계했다면 그동안 감축할 수 있었던 탄소 배출량의 규모는 엄청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탄소 배출권 거래 제도에 의하면 탄소 1톤당 가격이 약 2만 9000원인데, GTX 노선 건설로 인해 줄어들 승용차 운행 감소와 이에 따라 줄어들 탄소 배출 감소량을 톤당 2만 9000원으로 계산하여 이를 수익으로 경제성 계산에 반영한다면, GTX와 같은 녹색 대중교통 투자가 촉진될 것이고, 승용차 운행도 줄어들 것이다. 이렇게 대규모 투자사업의 탄소 배출량에 대해 탄소의 시장 가격을 반영하는 것을 탄소 잠재가격 반영이라고 하며, 유럽에서 적극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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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탄소비용의 계산: 교통 혼잡 비용의 저감

2018년 우리나라의 교통 혼잡비용은 68조 원으로 당시 GDP의 3.6퍼센트에 이른다. 교통체증으로 낭비된 차량 연료비용과 노동력 손실을 계산한 금액이다. 이는 같은 해 국방비 43조 원을 상회하는 엄청난 금액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탄소에 가격을 부여하게 되면 이렇게 보이지 않는 탄소의 비용을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교통 혼잡비용은 불필요한 탄소 배출 비용은 포함하지 않는 수치이다. 만일 톤당 2만 9000원의 탄소 가격을 반영하여 불필요한 탄소 배출 비용을 추가한다면 교통 혼잡비용은 더욱 늘어날 것이다.

우리가 탄소를 자유재, 즉 Free Goods로 취급한 결과 교통 혼잡에 따른 탄소 비용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탄소 비용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엄청난 교통 혼잡 비용을 줄이기 위한 대중교통에 대한 투자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도 탄소에 대한 가격부여가 필요하다. 지하철, 철도 등에 대한 투자가 수익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각되고, 시설 개선과 안전 강화를 위한 투자를 삭감하고, 인원 감축 등 경영 비용 감축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지하철과 철도 운행으로 인해 줄어드는 탄소 배출량을 수익으로 환산한다면 결코 적자가 아니다. 따라서 투자를 더욱 늘려야 한다. 탄소를 자유재가 아닌 경제재로 보게 되면 자원 배분의 우선 순위가 이렇게 바뀔 수 있다.


생태세제개혁(Ecological Tax Reform·ETR)

탄소 가격을 반영하는 보다 적극적인 조치로는 1990년대 초부터 이미 OECD에서 논의되어온 소득세를 줄이면서 탄소세를 늘리는 세제개혁이 있다. 탄소세를 부과하면서 세금 부담을 늘리는 경우 납세자와 기업의 부담이 증가하여 정치적으로 반발할 수밖에 없는 만큼, 소득세를 줄여주면서 줄어든 소득세만큼 탄소세를 도입하는 방안인데, 이 경우 탄소 배출량은 줄면서 경제 성장과 고용 창출은 오히려 증가한다는 이중배당(Double Dividend) 효과가 기대된다는 가설이 있다. 독일은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간 이를 실제로 실험하였으며, 2004년 OECD 회의에서 이중 배당 효과가 있었다고 보고하였다. 온실가스를 줄이면서 경제가 성장하는 것, 이것이 바로 녹색 성장이다. 녹색 성장을 가능케 하는 정책수단으로 ETR에 대한 전향적인 논의와 실행 방안의 검토가 필요하다.


신기후 경제학의 정립

탄소를 더 이상 자유재로 보지 않고 탄소 가격을 시장가격에 반영하는 모든 시도를 총칭하여 신기후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국제사회에서는 이미 2013년 경제와 기후에 관한 국제 위원회(Global Commission on the Economy and Climate)가 한국,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 에티오피아, 인도네시아, 콜롬비아 7개국 간에 결성되어 기후 변화가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The New Climate Economy Report〉를 발간하는 등 새로운 시도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신기후경제학이 정립되고 많은 나라들이 수용하려면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탄소 가격을 반영해야 한다. 이것은 단기적으로 경제에 비용과 부담이 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더 높은 경제 성장과 고용창출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비전을 수립하고 이러한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다양한 정책 수단을 발굴하며 이러한 성과를 증명하는 것이 신기후경제학의 역할이다.

장기적이며 지속적인 투자가 필요한 신기후경제학의 정립에 가장 큰 어려움은 ‘갈수록 심해지는 당장의 성과를 강조하는 극단적인 단기성과주의(Extreme Short-Termism)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이다. 기후대응에 따른 부담은 당장 보이지만, 기후대응의 긍정적인 효과는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기 때문이다.

2018년 〈The New Climate Economy Report〉는 과감한 기후대응 투자는 2030년까지 26조 달러에 상당하는 고용 창출, 경쟁력 강화, 새로운 시장기회, 삶의 질 향상 등의 경제적 혜택을 가져올 것이라고 전망한다. 장기적이고 새로운 혜택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이를 바탕으로 신기후 경제학이 정립될 때 비로소 탄소를 자유재로 취급하는 ‘자유 시장’이 ‘지속 가능 시장’으로 전환될 수 있을 것이며, 생산패턴과 소비패턴이 탄소 중립적으로 바뀌면서 비로소 지구 차원에서 ‘Carbon Free Net Zero Future’가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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