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클랜드 전쟁, 선을 긋다

포클랜드 전쟁, 선을 긋다

남태평양 위 작은 섬에서의 전쟁이 지금의 영국과 아르헨티나를 만들었다. 전쟁은 외교로 얼굴을 바꾸어 지금도 진행 중이다.

©Adobe Stock

1. 사우스조지아에 당도한 두 나라, 영국과 아르헨티나


1915년,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의 인듀어런스(Endurance)호가 남극의 얼음에 갇혀서 부딪혔다. 그러자 그는 살아남기 위해 인류사에서도 손꼽히는 위대한 모험에 착수했다. 이듬해 4월, 그를 포함한 다섯 명의 선원들은 엘리펀트 섬(Elephant Island)에 만든 간이 캠프에 나머지 인원을 남겨둔 채 직접 노를 저어야 하는 작은 보트에 올라타고 위험천만한 남극해를 가로질러 남대서양에 들어섰다. 무려 800마일(약 1300킬로미터)을 항해한 끝에 그들은 마침내 사우스조지아(South Georgia) 섬의 남쪽 해안에 상륙했다. 그리고 이 섬의 척박한 산악 지형을 가로질러서 스트롬니스(Stromness)의 고래 어업 기지에 도달하여 도움을 요청했다. 그들은 모두 살아남았고 엘리펀트 섬에 남아 있던 모든 대원도 구조되었다.

이름에는 ‘남쪽’이라는 뜻이 있지만, 사실 사우스조지아는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동쪽으로 거의 1700마일(약 2700킬로미터)이나 떨어진 남대서양에 떠 있는 길이 100마일의 외딴 섬이다. 매우 눅눅하고 추운 건초 더미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격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섀클턴은 자신의 대원들을 데리고 그곳에 도착했다. 그곳의 풍경은 65년이나 지난 1981년 12월, 아르헨티나의 고철 수집상인 콘스탄티노 다비도프(Constantino Davidoff)가 도착했을 때도 거의 그대로였다.
포클랜드 제도 ©Adobe Stock
“펭귄과 바람, 그리고 비가 그치지 않았죠.” 당시 영국 남극조사단(BAS)의 단장이었던 스티븐 마틴(Stephen Martin)은 말했다. 살기에 열악하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함이 없지 않다. 이 섬에는 1965년에 그리트비켄(Grytviken)에 있던 마지막 고래 어업 기지가 폐쇄된 이후로 정주 인구가 없었다. 다만 영국 남극조사단은 지금도 리스 항(Leith Harbour)과 그리트비켄에 여름 기지를 보유하고 있다. 사우스조지아는 항해자이자 탐험가인 제임스 쿡(James Cook)이 1775년에 점령한 이후로 명목상 영국령이었다. ‘SIQQ 1XX’라는 영국식 우편번호 체계도 갖고 있다. 반면에 아르헨티나는 1927년에 처음으로 이 섬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으며, 이후에도 주기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반복했다.

1981년 12월에 다비도프가 이 섬에 상륙하자 영국의 외무・영연방부(FCO)는 눈살을 찌푸렸다. 다비도프는 영국 회사 크리스천살베센(Christian Salvesen)과 계약을 맺고 사우스조지아의 오래된 포경 기지 가운데 하나에서 고철을 수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럴 경우에 그는 그리트비켄의 남극조사단에 그 사실을 고지해야 했는데, 그 의무 조항을 이행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영국 측은 문제를 제기했고, 다비도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국 대사관에 개인적으로 사과하며 이듬해 3월에 다시 이 섬에 돌아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다비도프는 이내 아르헨티나 정부의 끄나풀이 되고 만다.

당시 아르헨티나에서는 대통령이었던 레오폴도 갈티에리(Leopoldo Galtieri) 장군에게 반대하는 분위기가 점점 더 고조되었다. 갈티에리 대통령의 군사 독재 정권은 혼란에 빠져 있었고, 아르헨티나 경제는 비틀거렸다. 인플레이션은 무려 600퍼센트에 달했던 반면, 실질 임금은 20퍼센트 하락했다. 대중들의 인내심이 점차 바닥나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수천 명의 정치적 반대자를 살해하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을 투옥 시키는 억압적인 정권하의 ‘더러운 전쟁(dirty war)’ 과정에서 이미 고통받고 있었다. 노동조합들은 총파업을 외치고 있었다.

갈티에리는 낙담한 대중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독재자들이 흔히 사용하는 확실한 기법에 의지하기로 했다. 이는 오늘날에도 우리가 여전히 목격할 수 있는 방식이며, 2022년에는 유럽의 동쪽 변방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국가주의 정서에 호소한 것이다. 전쟁을 개시할 시간이었다. 그는 이 전쟁에서 패배할 리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갈티에리는 아르헨티나 해안에서 950마일(약 1500킬로미터) 떨어진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침공하는 걸 목표 삼았다. 아르헨티나에서 그곳은 말비나스(Malvinas)로 알려진, 아르헨티나가 오랫동안 소유권을 주장해 온 곳이었다. 그는 영국이 이 전투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이는 중대한 오판이었다. 당시만 해도 두 나라 사이에서 포클랜드 제도의 주권에 대한 논의가 다소 잠잠해지긴 했지만, 이것이 갈티에리의 추정처럼 영국이 그곳에 관심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영국이 그곳의 주권에 대해 논의하지 않은 이유는, 영국은 그 섬들을 양도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갈티에리는 영국이 런던에서 거의 8000마일(약 1만 3000킬로미터)이나 떨어진 이 섬들을 되찾으려 애쓰지 않을 것이라는 데 베팅했다.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들고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영국이 최근에 포클랜드 제도의 군사력을 줄였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었다. 갈티에리는 만약 포클랜드 제도의 수도인 포트스탠리(Port Stanley)에 아르헨티나 국기가 휘날린다면 자신이 아르헨티나에서 10년 혹은 그 이상 집권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포클랜드 전쟁 40주년이 다가옴[1]에 따라, 아르헨티나의 침공과 이후 그 제도를 되찾기 위한 영국 해군 특수 부대의 파병에 대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중에서도 구스그린(Goose Green) 전투와 산카를로스(San Carlos) 전투, 포트스탠리 비행장 폭격, 아르헨티나의 순양함 제너럴벨그라노(General Belgrano)와 영국 해군의 구축함 셰필드(Sheffield)의 침몰 등이 자세히 회자될 것이다.

 

2. 40년 전, 포클랜드 전쟁의 시작


포클랜드 침공의 전주는 그곳에서 동쪽으로 800마일 떨어진 곳에서 이미 연주되고 있었다. 콘스탄티노 다비도프는 자신이 그 한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을 갑작스레 깨닫게 된다. 어느 날 다비도프에게 후안 롬바르도(Juan Lombardo) 제독의 측근인 에드가르도 오테로(Edgardo Otero) 제독과 대통령의 해군 참모인 호르헤 아나야(Jorge Anaya)가 찾아왔다. 롬바르도 제독은 갈티에리로부터 포클랜드 침공 계획을 수립하라는 지시를 받은 상태였다. 오테로 제독은 사우스조지아를 합병하여 영국의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했다. 주력 침공 부대에게서 그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것이었다.

다비도프는 이미 정해진 자신의 운명이 못마땅했다. 그는 영국 측과 비즈니스 계약을 맺은 상태였고, 그걸로 돈을 벌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이 계획대로라면 다비도프는 자신의 생계 수단을 잃을 것이고, 일부 시선에서는 그가 의도치 않게 전쟁을 도발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몇 년 뒤, 그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저는 제 비행기, 선박, 회사 등 모든 걸 잃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병을 얻었습니다. 가족을 부양할 수조차 없습니다.”

그렇지만 당시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듬해 3월, 다비도프는 바히아부엔수체소(Bahia Buen Suceso) 호에 승선하여 다시 사우스조지아로 향했다. 여기에는 또 다른 선원들이 탑승해 있었는데, 그들은 민간 과학자로 위장한 아르헨티나 해병대 비밀 요원들이었다. 그들의 임무에는 ‘알파 작전(Operation Alpha)’이라는 암호명이 붙어 있었다. 그렇게 남대서양에서 전쟁이 시작됐다.

다피도프는 이번엔 일부러 영국 남극조사단에게 자신의 도착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3월 19일에 그가 리스 항에 상륙하는 장면이 남극조사단원 한 명에게 목격되었고, 그는 이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다. 리스 항에 군복을 입은 남성들이 있고, 공중에 소총이 연달아 발사되었으며, 아르헨티나 국기가 펄럭이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상륙한 대원들은 리스의 조사단 기지에 침입하여 영국 표지판을 훼손하고 비상식량을 훔쳐 갔다.

영국 외무부는 그들에게 깃발 제거를 요구하고, 다비도프는 물론이고 바히아부엔수체소의 선장과 선원들에게 그리트비켄의 스티븐 마틴에게 상륙 사실을 신고하라고 알렸다. 브리아토레(Briatore) 선장은 자신들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영국 대사관에서 허가를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영국 외무・영연방부는 이를 부인했다. “아마도 슬쩍 찔러봤던 것 같습니다.” 스티브 마틴의 말이다. 브리아토레 선장은 알프레도 아스티즈(Alfredo Astiz) 소령의 지휘하에 해병대원들을 남겨두고 그곳을 떠났다. 아스티즈 소령은 ‘죽음의 금발 천사(Blond Angel of Death)’라고 불렸는데, 더러운 전쟁 기간에 유럽 시민권자들이 사라진 것 때문에 다수의 나라에서 이미 수배가 되어 있는 인물이었다.

3월 21일, 아르헨티나 병력을 축출하기 위해 포클랜드 제도에서 닉 바커(Nick Barker) 선장이 지휘하는 영국 해군의 인듀어런스호가 출동했다. 여기에는 22세의 키스 밀스(Keith Mills) 중위가 이끄는 22명의 영국 해병대원들과 두 대의 헬리콥터가 승선해 있었다. 포클랜드 제도로부터 영국의 방어 병력을 끌어내려는 아르헨티나 측의 교란 전술이 먹혀드는 것처럼 보였다. 인듀어런스호는 이틀 뒤에 리스 항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그들은 또 한 척의 아르헨티나 군함을 발견했다. 세자르 트롬베타(Cesar Trombetta)가 지휘하는 바히아파라이소(Bahia Paraiso)라는 그 배는 더욱 많은 해병대원들을 상륙시키고 보급품을 내렸으며, 두 대의 헬리콥터가 실려 있었다.

바커 선장은 아르헨티나 해군이 무엇을 시도하려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인듀어런스는 그전까지 남대서양에서 몇 년을 보내며 칠레와 아르헨티나의 여러 항구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했다. 칠레의 해군 장교들은 포클랜드 제도와 관련한 아르헨티나의 계획을 그에게 종종 이야기해왔다. 그리고 실제로 불과 몇 달 전에 아르헨티나 해군의 고위 장교 한 명이 그에게 직접 그런 사실을 시인하기도 했다. 그는 이런 말을 들었다. “말비나스를 둘러싼 전쟁이 있을 겁니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조만간입니다.” 그는 이런 모든 사실을 런던에 보고했지만, 거의 인정받지 못했다. “저는 심지어 트롬베타를 직접 만나서 상황을 진정시켜보겠다는 제안까지 했지만, 당국은 우리에게 자리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다. 그럼에도 영국은 여전히 교전을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인듀어런스는 감시 체제를 유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영국의 외무장관 캐링턴 남작(Lord Carrington)은 아르헨티나의 니카노르 코스타 멘데즈(Nicanor Costa Mendez) 외무장관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섬에 상륙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그곳에 일시적으로 체류할 수 있도록 그리트비켄에서 그들의 여권에 스탬프를 찍어주겠다고 말이다. 그러나 멘데즈 장관은 그 섬들의 소유권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주장이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국 측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의 반응은 분쟁이 불가피함을 시사하는 것처럼 보였다.

영국 해병대는 리스 항 위쪽에 감시 초소를 구축했지만, 여전히 아르헨티나 측을 공격하지는 않고 있었다. 아르헨티나 병력은 영국의 그런 움직임을 간파했는데, 영국 측이 위치한 지점의 상공을 날아가며 ‘오래된 무례한 제스처’를 보여준 후 다시 바히아파라이소로 되돌아갔다. 그런 다음 바히아파라이소는 남대서양으로 향했다. 인듀어런스는 그들을 따라가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사우스조지아로부터 영국 측을 떨어트려 놓으려는 계략이었다. 영민하지만 허를 찔린 바커 선장은 이제 그것이 모두 교란 전술이라고 확신했다. 훗날 그는 그것을 두고 “우리를 골탕 먹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포클랜드 침공이 임박했음을 감지했다. 영국의 해군 본부가 이번에는 그에게 적절한 통지를 하달했다. 그가 데리고 있는 해병대원들을 사우스조지아에 내려놓고 포클랜드제도로 돌아갈 준비를 하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우리는 결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사우스조지아와 포클랜드 사이에 붙들려서 불안한 상황이었습니다.” 바커의 회상이다. “저는 흥분됐습니다. 전쟁이 다가오는 걸 보았습니다.”

영국의 해병대원들은 고무보트를 타고 서둘러서 그리트비켄의 남극조사단 기지로 향했다. 런던에서는 그들에게 아르헨티나의 도발에 대하여 최소한의 저항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대하여 밀스는 분명하진 않지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젠장,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해 주겠습니다.” 한편, 아르헨티나의 또 다른 선박인 게리코(Guerrico)라는 구축함은 더욱 많은 헬리콥터와 거의 100명에 가까운 추가적인 해병대원들을 싣고 사우스조지아에 도착했다. 게리코와 바히아파라이소는 모두 그리트비켄으로 향했는데, 이곳에서는 영국 해병대원들이 참호를 파고 섀클턴하우스(Shackleton House)의 남극조사단 기지에 방어벽을 구축하고 있었다. 한편, 영국 해병대원 세 명은 야생 동물 사진작가인 신디 벅스턴(Cindy Buxton)과 애니 프라이스(Annie Price)를 보호하기 위해 세인트앤드류스베이(St Andrews Bay)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사람이라곤 거의 마주치기도 힘든 이 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들이 국제적인 사건의 한 가운데에 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바닷새들의 사진을 찍으러 갔던 것인데, 나중에는 해군에 배속하게 되었습니다.” 프라이스의 말이다.

 

3.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침공 개시, 그리고 전쟁


그의 입장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지만, 결국엔 스티븐 마틴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인듀어런스가 포클랜드로 돌아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4월 2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제도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그리트비켄의 영국 해병대원들은 라디오에서 그 소식을 들었다. 같은 날, 아스티즈와 트롬베타는 부하들에게 헤오르히아스 작전(Operation Georgias)을 개시할 것이라고 알렸는데, 이는 그리트비켄에 대한 공격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상 악화로 인하여 아스티즈의 공격은 24시간 동안 지연되었다. “경고를 한 뒤에 자위적인 사격”만 하고 “불필요한 인명을 잃을 수도 있는 수준 이상으로 저항하지 말라”는 명령을 여전히 따르고 있던 밀스는 부하들에게 방파제 아래에 철조망과 지뢰, 그리고 45갤런의 드럼통에 휘발유와 페인트를 채워서 급조한 폭탄 등을 설치해서 그리트비켄 해변의 방어선을 강화하라고 지시했다. 남극조사단의 마틴 단장 역시 밀스에게 부대원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에 위치한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 국립 역사 기념비 ©Adobe Stock
4월 3일 오전 10시 30분, 아르헨티나 군대가 도착했다. 일부 보고에 의하면 트롬베타는 그리트비켄을 영국 해군이 아닌 남극조사단 요원들만 지키고 있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는 포클랜드 제도의 총독인 렉스 헌트(Rex Hunt)가 항복했으며 사우스조지아는 이미 아르헨티나에게 양도되었다고 선언하고, 영국인들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밀스는 인듀어런스로부터 이것이 거짓임을 전해 들었다. 포클랜드 정부가 항복한 것은 맞지만 사우스조지아의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한 시간 뒤에 밀스를 비롯한 부대원들이 방파제에서 아르헨티나 측 대표단이 도착할 거라고 예상하며 기다리고 있는데, 아르헨티나의 헬리콥터 한 대가 섀클턴하우스 근처에 착륙했다.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르헨티나의 해병대원들이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들은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 있는 힘껏 달려서 몸을 숨겼다. “솔직히 말해서 다음 날 아침까지 우리가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도 못 했습니다.” 당시 일병이었던 조지 톰슨(George Thomsen)의 말이다. “우리는 X같은 상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숫자는 상당히 압도적이었고, 저는 만약 우리가 그들 중 하나라도 죽이면 그들이 복수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영국 해병대원들은 끈질기게 저항했고, 아르헨티나 측의 추가 병력을 실은 또 다른 헬리콥터가 섀클턴하우스의 반대편에 도착했다. 그들은 서둘러 파낸 참호에 들어갔는데, 놀랍게도 영국의 기관총이 단 한 차례의 사격으로 아르헨티나의 두 번째 헬기에 손상을 가했다. 그것이 첫 번째 교전이었다. 뒤이어서 영국의 총알이 빗발쳤다. 엔진에서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조종사는 헬기를 다시 띄워서 해변의 만을 가로질러 날았지만, 군함에 무사히 착륙하기 전에 추락하여 나뒹굴고 말았다. 두 명이 사망했고 네 명이 중상을 입었다. “덕분에 우리는 예상보다 더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습니다.” 톰슨의 회상이다.

아르헨티나의 첫 번째 파견대원들은 그렇게 병력 보충 없이 영국의 사격에 의해 별관에 갇혀버렸다. 그들의 지휘관은 게리코호에게 엄호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게리코호는 그리트비켄 해변 인근의 후미로 접근하면서 사격을 개시했지만 총구가 막혀버렸고, 배는 비좁은 길목에 꼼짝달싹 못하고 갇히게 되었다. “그 배는 아주 천천히 들어왔습니다.” 해병대원이었던 스티브 처브(Steve Chubb)의 말이다. “거대해 보였고, 배의 총구가 회전해서 우리가 있는 곳을 가리켰을 때 그게 곧바로 저를 겨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완전 무방비 상태였죠.” 영국군은 대전차 로켓을 발사하며 대응했다. 밀스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했다고 말한다. 해병대원 데이비드 콤스(David Combes)가 결정적인 한 방을 날렸다. 그의 대전차 무기에서 발사된 탄환이 물 위를 스치며 날아가더니 수면 위에 떠 있는 게리코호에 명중한 것이다.

그걸로 아르헨티나 선원 한 명이 사망하고 배의 무기도 손상되었다. 배에 물이 들어차고 선체가 30도로 기울자 그 코르벳함은 퇴각했다. 사실상 거의 무장을 하지 않은 영국군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전과였다. 그러나 영국군에게는 불행하게도, 퇴각한 게리코호는 여전히 손상되지 않은 장거리포를 이용해 영국군 근거지를 타격할 수 있었다.

양측은 두 시간 동안 격렬한 포격을 주고받았다. 밀스는 밤이 될 때까지 버티다가 섬을 가로질러서 북쪽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희망했다. 게릴라 전술로 싸우면서 침략군을 바짝 긴장하게 만든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 중 한 명인 나이절 피터스(Nigel Peters) 상병이 아르헨티나의 총탄에 두 번이나 맞았다. 더욱 많은 아르헨티나 해병이 상륙하고 게리코의 포격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면서, 밀스는 부하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이미 아르헨티나가 무력을 사용하도록 강제함으로써 그들이 국제법을 위반하게 만든다는 목표를 달성한 상태였다.

오후 12시 48분, 계속해서 싸우고 싶어 하는 피터 리치(Peter Leach) 하사와 톰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밀스는 흰색 코트를 들어서 흔들며 아르헨티나의 공격대원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나름의 휴전을 제안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교전이 지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는 처음에 무척 화가 났습니다.” 톰슨의 말이다. “저는 절대로 무기를 내려놓지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키스(밀스 중위)가 체면을 잃지 않고도 그걸 상당히 잘 처리해냈고, 그는 매우 용감했습니다.”

22명의 영국 해병대원들이 앞으로 나서는 걸 본 아스티즈는 나머지 대원들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렇게 적은 인원으로 그토록 완강한 방어벽을 구축했다는 사실에 놀란 것처럼 보였다. 아르헨티나 측은 자국 사망자들을 수습했고, 영국군은 남극조사단원들과 함께 구금되었다. 두 명의 야생 동물 사진작가와 아르헨티나에 의해 발견되지 않은 13명의 남극조사단 과학자들은 여전히 본연의 업무를 지속하고 있었다. 그들은 영국이 섬을 탈환했을 때에야 비로소 대피할 수 있었는데, 그제야 프라이스는 해병대가 그녀에게 사용법을 알려주었던 권총을 꺼내놓았다. 그녀는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제가 그걸 사용할 수 있는 배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조지아는 모두 아르헨티나가 점령하게 되었다.

 

4. 제국의 반격과 국제 사회의 반응


이 분쟁의 최종적인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은 갈티에리가 바라던 대로 반응하지 않았다. 영국의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는 포클랜드 제도의 주민들이 아르헨티나의 ‘군홧발’ 아래에 살게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영국 내에서 정치권과 대중으로부터 상당히 합치된 지지를 얻으면서, 침공이 있은 지 불과 사흘 만인 4월 5일에 영국 해군의 특수 부대가 남대서양으로 향했고, 영국군 255명과 아르헨티나 병력 649명이 목숨을 잃은 뒤인 7월 14일, 영국은 포클랜드 제도를 탈환했다. 그보다 50일 전인 4월 25일, 사우스조지아 섬도 패러캣 작전(Operation Paraquet)에 의해 수복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은 155명의 아르헨티나 병사를 생포하고 한 명을 살상했다. 이러한 작전에서 공표된 많은 발언이 대중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수부대 사령관이었던 브라이언 영(Brian Young) 대령이 해군 본부에 보낸 무전 메시지가 아주 유명하다. “여왕 폐하에게 사우스조지아에서 유니언잭 옆에 화이트엔슨(White Ensign)[2]이 나란히 휘날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게 되어 기쁩니다. 신이여, 여왕을 구하소서.” 미국의 《뉴스위크(Newsweek)》 매거진은 이를 두고 “제국이 반격하다”라고, 그리고 덜 관대한 《보스턴글로브》는 “식민주의의 마지막 숨결”이라고 썼다.

이것이 공정한 평가였는지, 또는 더욱 위대한 원칙이 위기에 처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자결권(self-determination)은 1945년에 제정된 유엔 헌장의 1조에 명시되어 있는 권리이며, 영국은 포클랜드 주민들을 대신해 아르헨티나의 침공이 이 원칙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유엔에 의해 대체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특히 영국 정부가 여전히 외교적 논의에 돌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뒤에 더욱 그러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은 그러한 주장을 전면 부인했다. 아르헨티나 정권은 침공 초기에 자국에서 얻은 엄청난 대중적 지지에 한껏 고무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이들은 소수의 남아메리카 국가들뿐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군사 독재 정권이 자주 민주 국가의 취약한 전초 기지를 침공하는 것을 지지할 나라들은 거의 없었다. 유엔은 영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4월 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아르헨티나 군대의 철수와 적대 행위 중단을 요구하는 결의안 502호를 통과시켰다.

소비에트연방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으로서 가지는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나토 회원국인 영국과, 우파 독재 국가인 아르헨티나 모두를 적대 국가로 여겼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럽연합(EU)의 전신인 유럽공동체(EC)의 일원이었던 영국은 EC 회원국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영국 국방부 장관이었던 존 노트(John Nott)는 프랑수아 미테랑(Francois Mitterrand) 대통령에게 프랑스가 “우리의 가장 위대한 동맹”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당시와 같은 분쟁이 오늘날 발생한다면 브렉시트로 인해 이런 주장이 얼마나 많이 달라질지는 상상에 맡길 뿐이다.

유럽공동체와 달리 미국은 침공이 있기 전에는 관련 사안에 대해 표면적으로 중립을 취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은 갈티에리 정권에 대해 제재를 가했고, 그러면서도 그러한 결정이 나토나 남아메리카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해치지 않기를 바랐다. 미국 행정부는 이 분쟁에 대해 다소 당혹스러워했다.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대통령은 왜 미국의 두 우방이 “저 아래쪽의 얼음처럼 차가운 조그만 땅덩어리”를 갖고 다투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의 추가 개입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만약에 미국이 영국을 도와준다면 그것은 아메리카 대륙의 사안에 대해 유럽이 관여하는 것을 반대하는 미국의 먼로독트린(Monroe Doctrine)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건과 그의 국방 장관이었던 캐스퍼 와인버거(Caspar Weinberger)는 나중에 영국으로부터 명예 기사 작위를 수여 받았고, 이는 오히려 그들이 공개적인 선언 이상으로 영국을 도와줬다는 외교계의 믿음에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남미 국가들 가운데 일부는 아르헨티나의 입장을 지지했지만, 군사적으로 지원한 나라는 페루뿐이었다. 물론 그것도 쿠바와 볼리비아에서 지원받은 것이었지만 말이다. 반면 칠레는 전적으로 영국을 지지했는데, 이는 아르헨티나와의 오랜 군사적 갈등은 물론이고 포클랜드에서의 승리가 확정되면 비글해협(Beagle Channel)의 섬들까지 합병하겠다는 아르헨티나의 위협 때문이었다. 마거릿 대처가 영국에 도움을 제공한 칠레를 칭송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때문에 그녀는 칠레의 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와 결탁했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피노체트 역시 정치적 반대자들을 투옥하고 처형하는 것에 있어서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이었다. 피노체트가 그의 나라에서 저지른 인권 위반 혐의로 16년 뒤에 영국에서 스페인 판사가 발부한 영장에 의해 체포되었을 때, 영국 정부는 그를 석방해도 된다고 보았다. 그것이 1982년의 협조에 대한 보상이었는지는 의문이지만, 국제 사회의 일부는 그렇다고 여겼다.

 

5. 사우스조지아 전투가 영국 대원들에게 남긴 유산


이 분쟁의 국제적인 영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잡음을 울리고 있다. 그렇다면 사우스조지아의 전투로 인한 좀 더 소소하면서도 개인적인 유산은 무엇일까?

포로로 붙잡혔던 영국 해병대원들은 생포된 뒤에 사려 깊은 대우를 받았기 때문에 두 집단 사이의 상호 존중이 더욱 커졌다고 보고했다. “저는 실제로 그들이 우리가 겨우 22명뿐인 걸 발견하고는 우리를 두려워했다고 생각합니다.” 톰슨의 말이다. 또 다른 영국 병사였던 앤드류 리(Andrew Lee)는 이렇게 썼다. “그들은 우리에게 악의를 품지 않았다.” 그들의 전우 세 명이 영국 수비군에게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던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맡은 임무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해병대원들이었다.” 부상을 당했던 피터스는 아르헨티나 의료진에게 치료를 받았고, 영국 해병대원들을 비롯한 다른 수감자들은 실제로 포클랜드 전쟁이 종식되기 이전에 우루과이를 통해서 영국으로 송환되었다. 참고로 이는 밀스가 제안한 항복 조건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얄궂은 운명의 장난이었는지는 몰라도, 밀스와 그의 부대원들은 아스티즈를 비롯한 아르헨티나의 전쟁 수감자들을 감시하기 위해 4월 25일 탈환 이후에 사우스조지아로 돌아오게 된다.

리의 동료이자 아르헨티나 헬기를 격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마이클 풀(Michael Poole)은 이후에 화해를 추진했다. 지금부터 10년 전, 그는 전쟁 당시에 그와 맞서 싸웠던 빅토르 이바네즈(Víctor Ibanez)와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그들은 든든한 친구가 되었다. 2013년에 풀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각자가 맡았던 역할을 받아들이는 방법을 알고 있었습니다.”

밀스는 수훈십자훈장(DSC)을 받았고, 영국 해군 인듀어런스호의 헬리콥터 지휘관인 존 엘러벡(John Ellerbeck)도 마찬가지였다. 밀스의 부하였던 리치 하사는 공로훈장(DSM)을 받았다. 바커는 훈작(CBE) 작위를 받았다. 아르헨티나 측에서는 프란시스코 솔라노 파에즈(Francisco Solano Paez) 하사가 국가의 전투용맹(Valor en Combate) 훈장을 수상했다.

그렇다면 이 침공의 의도치 않은 설계자였던 다비도프는 어땠을까? 그는 자신이 영국 정부와 체결한 계약이 결코 이행되지 않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훗날 그는 자신이 사우스조지아로 돌아갈 때는 노동자들만 동행했으며 군인들은 없었다고 주장했지만, 근거는 그렇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계약의 이행을 허용하지 않는 영국 정부를 상대로 벌이는 송사에서 보탬이 되기 위한 수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성공하지 못했고, 아르헨티나 정부도 그에게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그는 본질적으로 민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해병대를 보낸 영국을 비난했다. “저는 아르헨티나 정부의 음모에 휘말린 다비도프에게 동정심을 갖고 있습니다.” 밀스가 BBC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도 속이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나쁘게 보아도 그냥 거짓말 정도였고, 기껏해야 자기기만이었습니다. 정작 나쁜 건 영국 영토에 대한 군사적 점령이었습니다.”

사우스조지아는 1985년에 포클랜드 제도의 관리로부터 벗어나서 현재는 사우스조지아 및 사우스샌드위치 제도(South Sandwich Islands)라는 영국 해외자치령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포클랜드 제도와 마찬가지로 사우스조지아에 대한 아르헨티나의 소유권 주장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의 헌법에도 조항으로 명시되어 있다.
©Adobe Stock

이 분쟁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당시는 물론이고 그 이후의 외교 협상에서도 계속 논의되고 있다. 식민강국이었지만 쇠퇴하던 영국이 제국의 마지막 흔적을 지켜내기로 결심했던 것일까? 아르헨티나는 자국에서 가까운 영토에 대해, 오랫동안 분쟁이 있어 온 영토에 대한 권리가 자신들만의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영국 해군의 특수부대에 의한 포클랜드 제도와 사우스조지아의 성공적인 탈환이 마거릿 대처의 총리직을 구원까지는 아니더라도 더욱 강화시켜 주었으며, 갈티에리의 몰락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아마도 기막힌 우연에 의해 궁극적으로는 아르헨티나의 민주주의가 재확립되었는데, 이는 갈티에리의 원래 의도는 전혀 아니었을 것이다.

22명의 영국 해병대원들이 거의 이겨낼 수 없는 역경을 버텨내기 위해서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으리라는 것은 그저 애국주의적인 주장이 아니다. 만약 아르헨티나 선박에 타고 있던 부대원들을 모두 고려한다면 정주민이 전혀 살지 않는 바위 덩어리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무려 50대 1의 싸움을 벌여야 했을 것이다. 용기는 필요에 의해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외교관들이라면 세계의 땅덩이들에 대한 다양한 주장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논할 수 있다. 그러나 40년 전의 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은 양측 모두 각자의 정부가 하달한 명령을 최선을 다해서 수행했을 뿐이다.

남극조사단을 제외하고 오늘날 이 섬에 오는 유일한 방문객들은 섀클턴과 그의 부관이었던 프랭크 와일드(Frank Wild)의 무덤을 찾는 크루즈 선박일 것이다. 놀라운 우연의 일치이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어니스트 섀클턴은 이후의 탐험을 하다가 사우스조지아의 킹에드워드코브(King Edward Cove)에 정박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섬의 그리트비켄 묘지에 묻혔는데, 이곳은 불과 6년 전에 그를 구해주었던 지점이었다.

펭귄과 비, 그리고 회색 하늘은 불모의 산악 지형에서 여전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의 적대적인 환경으로 인하여 여기에 들어오는 그나마 소수의 방문객은 왜 이 섬에 대한 소유권을 두고 굳이 싸우려 하는지에 대해 자주 의문을 제기한다.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이 분쟁을 무의미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두 명의 대머리 남성이 빗 하나를 두고 벌이는 싸움”이라고 썼다. 그는 아마도 1982년 4월 3일에 사우스조지아에 있었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지 않았을 것이다.
[1]
이 글은 2022년 3월에 발행되었다.
[2]
영국 해군의 군함기
[3]
먼로독트린(Monroe Doctrine)은 미국의 제5대 대통령 제임스 먼로가 의회에 제출한 연두교서에서 밝힌 외교 방침으로, 유럽과 아메리카 다륙 간에 상호 불간섭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외교적 고립 정책을 말한다. 이 경우, 미국은 영국이 남아메리카에서 활동하는 것을 도와주기 때문에 먼로독트린을 위반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