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수난사

2023년 10월 23일, explained

은행의 계절이 돌아왔다. 악취 민원이 폭주한다. 나무가 뽑혀 나간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NOW THIS

은행의 계절이 돌아왔다. 도로에 주황색 열매가 쌓이고 밟히고 터진다. 껍질 속 점액이 고약한 냄새를 풍긴다. 매년 10월이면 저 열매 좀 어떻게 해달라고 구청에 수십 건 이상 민원이 들어온다. 서울 동작구는 집게 달린 굴삭기로 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리고 포대에 담았다. 전국 기초단체가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은행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

WHY NOW

우리는 왜 냄새나는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심었을까. 전국 기초단체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나무를 흔들고 뽑고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주사를 놓으면 그만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사람과 나무가 함께 살 수 없을까. 매년 10월이면 많은 시민이 악취로 불편을 호소한다. 그만큼 은행나무도 수난을 겪는다. 은행나무의 속사정을 들어 본다.

가로수의 왕

서울의 가로수는 총 29만 6000그루다. 은행나무가 가장 많다. 10만 4000그루다. 전체 가로수의 3분의 1이다. 플라타너스 5만 4000그루, 느티나무 3만 9000그루, 왕벚나무 3만 4000그루로 뒤를 따른다. 1990년대까진 가로수로 플라타너스가 가장 많았는데, 잎이 너무 크고 너무 빨리 자라서 건물 간판을 가렸다. 플라타너스 수요가 주춤해졌고 그 자리를 은행나무가 차지했다.

도시 나무

은행나무는 도시에 심기 좋은 나무다. 대기 오염에 강하다. 자동차 배기가스에도 잘 버틴다. 이산화탄소, 아황산가스, 중금속 같은 유해 물질을 잘 빨아들여 공기 정화 효과가 뛰어나다. 잎의 먼지 흡착력도 좋다. 또 나무껍질이 두꺼워 화재에 강하다. 불이 나도 잘 옮겨붙지 않는다. 나무 자체에 살균 성분이 있어 병충해에 강하다. 은행나무 근처엔 벌레가 잘 없다.

열매

가을이면 주황색으로 익는 열매는 사실 열매가 아니다. 종자, 즉 씨앗이다. 종자를 육질 외피가 싸고 있는 형태다. 종자가 파괴되면 번식할 수 없다. 은행나무는 동물이 종자를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해 종자에서 악취가 나도록 진화했다. 독성도 들어 있다. 실제로 새든 다람쥐든 은행 열매를 먹지 않는다. 익히지 않고 날로 먹으면 사람에게도 좋지 않다. 익혀도 많이 먹으면 안 된다.

자웅이주

은행나무도 성별이 있다. 열매는 암나무에서만 열린다. 달리 말하면 수나무만 심으면 냄새 걱정은 없다. 그런데 이게 눈으로는 구별이 안 된다. 20년은 자라서 꽃을 피울 때가 돼야 꽃을 보고 암수를 구별할 수 있다. 성별을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가로수로 심었는데, 자라고 보니 암나무가 섞여 있어 악취 민원을 일으킨다. 서울의 은행나무 가로수 중 25퍼센트가 암나무다.

DNA 분석

눈이 못하는 일을 DNA 분석이 할 수 있다. 외국 기술이 아니다. 우리 연구진이 해냈다. 2011년 국립산림과학원은 은행나무 잎의 DNA를 분석해 암수를 감별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제 꽃이 피는 20년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손톱만 한 잎 하나만 있으면 1년생 묘묙에서도 쉽고 빠르게 암수를 구별할 수 있다. 문제는 기술 개발 전에 식재된 전국 수십만 그루의 은행나무다.

암수 교체

그래서 구청은 10월이면 인력을 고용해 열매를 수거하거나, 도로와 인도를 물청소하거나, 진동기로 나무를 흔들어 조기에 열매를 수거하거나, 열매 수거 그물을 나무 몸통에 매달아 열매가 바닥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 예산이 좀 넉넉하다면 악취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암수를 교체한다. 암나무를 뽑고 그 자리에 수나무를 심는 방법이다. 한 그루당 200만 원 정도 든다. 뽑힌 암나무는 폐기되는 경우가 많다.

화학적 조치

화학적인 방법도 동원된다. 열매를 적게 맺도록 유도하는 약제를 나무에 주사하거나, 암나무의 암술머리에 불임제를 살포한다. 그런데 커다란 가로수에는 불임제를 뿌리기 어렵고, 적정 살포 시기가 짧아 인력과 예산이 적지 않게 든다. 약을 친다고 열매가 아예 안 열리는 것도 아니다. 서울시는 암나무에 수나무 가지를 접목해 열매가 열리지 않게 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도시에서 나무로 산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IT MATTERS

전국 기초단체는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악취 민원에 대응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점진적으로 암수를 교체하고 있다. 은행나무는 풍매화다. 수나무의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암나무로 날아와 수분이 이뤄진다. 암나무를 모두 수나무로 교체하면 꽃가루 양이 많아져 알레르기 피해가 커질 수 있다. 가을철 악취 대신 봄철 알레르기를 겪어야 할지 모른다. 비용도 문제다. 암수 교체 한 그루당 200만 원이 든다. 서울에서만 500억 원이 소요된다. 막대한 예산을 들여 가을 냄새가 나지 않는 가을이 되면 정말 좋을까. ‘식물 윤리’까지 갈 것도 없다. 수나무만 있는 도시라면 너무 엄혹해서 머물고 싶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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