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사우스의 대항적 공존
완결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대항적 공존

더 이상 글로벌 사우스 대전략은 한국과 직접 연관이 없는 머나먼 이슈가 아니다.

1. 글로벌 사우스의 역사적 진화와 ‘대항적 공존’


21세기에 들어와 인구에 회자되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는 단순히 지리적으로 글로벌 노스(Global North)와 대척되는 적도 이남의 저개발 국가 지역을 통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글로벌 사우스는 역사적으로 지난한 부침의 경로를 경험한 이른바 ‘제3세계’의 집합적 정체성의 진화물이다(김태균 2023). 19세기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던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의 구 식민지 지역이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료된 이후 신생 독립국으로 근대 국가 건설에 합류하게 되지만,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동맹 체제에 편입되거나 영향권 아래 예속되어 제3세계의 탈식민주의 과정이 퇴색되는 제국의 아류(empire lite) 문제가 지속되었다(Ignatieff 2003). 따라서 제1세계인 미국 중심의 서구 자유 민주주의 블록과 제2세계인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블록을 모두 거부하는 비동맹주의(non-aligned movement)로 연대하여 독자적인 노선을 구축한 제3세계는 1955년 인도네시아 반둥(Bandung)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Asia-African Conference)’를 계기로 국제 사회에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그 이후 유엔 무대를 중심으로 1964년 국제연합무역개발회의(UNCTAD), 1967년 G77 회의, 1970년대 신국제경제질서(NIEO)를 성공리에 출범시키면서 제3세계의 연대체를 확장해 나가게 되지만, 1970년대에 발생한 두 차례 오일 쇼크와 1980년대부터 시작된 제1세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주도권과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제2세계의 소멸에 따라 제3세계의 대안적인 탈식민주의 노력은 점차 희석되고 신자유주의 국제경제질서에 예편되어 연대라는 정체성보다는 느슨한 방식의 반둥 정신과 신자유주의적 생존 방식 가운데 제1세계 제국의 아류에 편승하는 경향이 강해지게 된다. 결국 제3세계론은 역사적 소명을 다하게 되고 그 진화의 장기 지속은 ‘글로벌 사우스’가 이어가게 된다.

냉전 이후 미국과 서유럽, 일본 등의 전통적인 글로벌 노스 공여국들이 제공하는 대외 원조 의존도는 더욱 커져 가는 동시에 중국과 인도 등 글로벌 사우스 신흥 원조 국가들의 경제 성장에 혜택을 받는 ‘남남 협력(South-South Cooperation)’ 방식 사이에서, 글로벌 사우스는 구 식민지 종주국에 대한 ‘대항’과 원조 수혜를 지속하기 위한 ‘공존’이라는 양극단에서의 줄타기를 현실주의적 생존 전략으로 강구하게 된다. 중국의 부상과 연이어 인도, 브라질, 러시아,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결성한 ‘브릭스(BRICS)’라는 연대체는 미국 중심의 자유 국제 질서(liberal international order)에 대항하고 글로벌 남반구 역내의 협력을 위한 상호 공존을 강조하면서 최근 2023년 8월 브릭스 정상 회의를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하여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등 6개국을 추가 회원국으로 확장하였다. 중국의 공격적인 수정주의 국제 질서 도전은 미국 중심의 대항 전선과 전략 경쟁을 벌이게 되고 글로벌 사우스 역내의 중국 패권을 확장하기 위하여 일대일로(Belt and Road Initiative) 정책을 전략적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중국과 인도가 상호 협력과 동시에 패권적 경합과 분쟁의 가능성을 키우는 형국이라는 점에서 글로벌 사우스 역내 질서에서도 항상 협력과 연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항과 공존이 교차되고 있다는 현상을 쉽게 목도할 수 있다.

이렇듯, 글로벌 사우스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서 시작된 비동맹주의의 국제 연대라는 대안적 도전에서 냉전 이후 제3세계론의 쇠퇴와 사우스 국가의 현실주의적 이해관계에 따라 남남 협력 정치화와 기능주의적 접근이 남발하는 역사적 진화 과정의 총체적인 산물이다(김태균 2023; Comaroff and Comaroff 2016). 개념적으로는, 글로벌 사우스 범주에 적도 위 북반구에 위치한 중국, 인도 등이 포함되고 남반구에 위치한 호주, 뉴질랜드 등은 제외되기 때문에 글로벌 사우스 자체가 지리적으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지정학적으로 유동적인 것이다.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에 따라 전 지구적으로 적체된 구조적 불평등이 재조명되고 과거 식민지 경영의 제국이었던 서유럽과 미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 도전하고 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글로벌 사우스가 글로벌 노스와의 적대적 관계만을 상정하거나 대결 구도만 고집하지 않는다. 반둥 정신이 철저하게 반영된 글로벌 사우스의 이상적인 대항과 도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미·중의 전략 경쟁, 중국의 일대일로와 미국/G7 중심의 글로벌 인프라·투자 파트너십(PGII)의 경합,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 글로벌 거버넌스의 복합 위기 상황에서 사우스 국가들은 자신이 처한 국제 관계의 변수를 조율하면서 국익 계산의 최대치를 모색할 것이다. 다시 말해, 글로벌 사우스 국가들 간의 국제 연대라는 느슨한 형태의 반둥 체제 유산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급변하는 국제 정치 질서 아래 자국의 생존과 번영을 위하여 동원된 현실주의적 전략은 사우스 내 연대가 아니라 오히려 권역 내 대항과 경합을 조장할 수 있다. 브릭스 공동 회원국인 중국과 인도의 경우, 인도가 미국 중심의 쿼드(Quad)에 가입하여 중국을 견제하는 역할에 동참하고 아직까지 중국의 일대일로를 지지하지 않는 현상은 글로벌 사우스 내 상생의 공존보다는 대항적 요소가 우세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즉, 글로벌 사우스의 대항과 도전은 궁극적으로 글로벌 노스를 소멸시키거나 제로섬 게임을 기획하였다기보다, 사우스의 생존을 위해 노스와의 ‘공존’을 선택하였고 역설적이게도 이를 위한 ‘대항’이라는 전략은 사우스 권역 내 사회적으로 구성된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2. 사우스의 부상과 구조적 불평등에 대한 도전


2000년대 이후 글로벌 사우스의 부상은 다각도에서 목도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통계가 2026년 중국과 인도의 글로벌 구매력평가(PPP) 지수의 합이 미국과 EU의 합과 거의 동일하다고 평가할 정도로 사우스를 대표하는 중국과 인도가 기존 자유 시장주의 세계 경제 주인장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근래 미·중의 전략 경쟁과 러·우 전쟁 등으로 인한 국제 질서 재편의 움직임에서 글로벌 사우스에 속하는 나라들의 중요성 또한 부각되고 있다. 사우스 국가들이 미국과 중국 가운데 어떤 진영을 지지하는가가 앞으로 국제 정치 질서의 판도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다. 중국이 일대일로를 통해 글로벌 사우스 인프라 개발에 개입하는 것을 미국이 G7과 같이 견제하면서 최근 한미일 협력을 통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도 국제 개발 협력을 통해 보다 양질의, 투명한 인프라 사업 투자와 인도적 지원을 약속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글로벌 사우스는 전통적으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기구와 브릭스 등의 소다자주의를 통해 글로벌 거버넌스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글로벌 노스 중심의 자유 시장주의 국제 질서에 배태된 구조적 불평등에 도전해 왔다. 구조적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사우스 국가들의 노력은 21세기에 들어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수렴되고 있다. 첫째,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으로 대표되는 브레턴우즈 체제에서 지속적으로 배제되어 왔던 브릭스 국가들의 IMF 의결권 쿼터 확대 문제 등에 이의를 제기하고 실제로 브레턴우즈 체제와 경쟁할 수 있는 신개발은행(New Development Bank)을 2014년 장외에 출범시킴으로써 글로벌 노스에 의해 구조적으로 불공정하게 대우 받았던 문제를 유사 국제기구를 통해 해결하려는 방식이다. 둘째, 서구가 고착시킨 구조적 불평등을 글로벌 사우스 특정 국가의 개입으로 현상 변경을 시도하는 전략이다. 일대일로를 통한 중국 시진핑 정부의 공격적인 인프라 투자 전략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으나, 일대일로 사업 중 스리랑카의 함반토타 항만 프로젝트, 지부티의 해군기지 프로젝트 등에서 발생한 사우스 협력 국가들의 심각한 부채 문제가 중국의 현상 변경 개입 전략의 리트머스 테스트가 되고 있다. 따라서, 과거 반둥 체제의 제3세계와 달리 냉전 이후 글로벌 사우스의 핵심 신흥 원조국들은 자국의 경제 성장으로 물리적인 힘과 재원을 확보하게 되었고, 구조적 불평등 해결과 대안적인 국제 질서 구축을 위해 자국의 물리적인 권력을 사용할 수 있는 ‘공간적 해결(spacial fix)’ 능력이 갖춰지게 되었다(Harvey 2001). 그러나 브릭스로 대표되는 남남 협력의 핵심 주체들은 글로벌 사우스를 하나의 통합된 집단 주체로 인정하기보다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연대와 경합이 언제나 가능한 전략적 선택의 대상으로 인식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3. 글로벌 사우스의 글로벌 거버넌스 개입


국제 사회의 위기는 단발적인 이슈가 아니라 복합적인 연계성의 문제로 단일 국가가 해결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보건 위기가 식량 위기와 기후 위기로 확장되었고, 러·우 전쟁으로 인하여 인도적 위기를 비롯한 난민과 강제 이주의 문제가 유럽을 압도하게 되었다. 미·중 전략 경쟁과 코로나19 팬데믹은 글로벌 공급망의 붕괴 내지 편승을 야기해 국제 경제 질서의 거버넌스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 글로벌 노스가 의존하는 자국 중심주의의 경제 보호 정책은 세계화를 강조하던 기존의 신자유주의적 경제 거버넌스와 심각한 괴리를 보이며 키신저가 언급했듯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자유 시장 질서는 가고 국가 중심의 성곽 시대가 도래한다는 암울한 전망이 대세이다. 이러한 글로벌 위기가 도래하면 기존 글로벌 거버넌스의 개입 방식은 주로 미국과 G7 중심의 단극 체제가 자유 민주주의 국제 질서 강화와 복원을 유엔과 세계은행 등과 함께 다자주의적 접근으로 처리하였더라면, 팬데믹과 미·중 전략 경쟁 이후의 글로벌 거버넌스는 글로벌 사우스와 글로벌 노스가 집단적으로 경합하거나 사우스의 주요 국가들이 다극화되어 가는 세계 질서에서 미국 중심의 자유 국제 질서를 재편하거나 변화시키려는 도전을 시도한다는 차이가 있다.

특히, 이미 중국은 2023년 3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을 단교 7년 만에 화해를 중재하면서 국제 질서를 유지하거나 재편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대안 세력으로서 가능성을 과시했으며, 5월에는 러·우 전쟁을 중재하기 위해 시진핑 국가 주석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함으로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한 중재자로서 첫발을 뗐다. 한편, 2023년 5월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랍연맹 정상 회의에 젤렌스키 대통령을 초대한 바 있으며, 8월에는 미국·중국·인도·브라질 등 40여 개국 관료들을 초청하여 우크라이나 평화 회담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개최하였다. 중동의 대표적인 미국 동맹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최근 독자적인 외교 노선을 걸으면서 러·우 전쟁의 중재자를 자처하며 글로벌 거버넌스 작동에 있어 미국과 글로벌 노스의 부재를 전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평가이다. 러·우 전쟁의 중재를 위한 글로벌 거버넌스 운전대에 미국과 서유럽은 보이지 않고 글로벌 사우스의 새로운 중재자들이 중재의 기술을 경쟁적으로 선보이는 형국이다.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이 독자적으로 글로벌 거버넌스에 개입하는 최근의 경향 이전에, 이미 글로벌 사우스는 전통적으로 대안적인 국제 정치 경제 질서를 주창하기 위한 전략 수단으로 반둥 회의부터 줄곧 국제 연대의 정체성을 고수해 왔다. 미국과의 동맹, 그리고 4강 외교가 외교 정책의 주축이었던 한국은 제3세계의 비동맹 연대에 쉽게 주목하지 않았고 사우스의 부상에 대한 중요성도 최근에 들어와 조금씩 인지하기 시작했을 뿐 다양한 글로벌 사우스의 국제 연대 기제와 거버넌스 개입이 축적한 시간의 궤적 앞에 한국은 대단히 몰역사적이었다. 1955년 반둥 회의 이후 지금까지 이어지는 ‘비동맹주의 정상 회의(NAM Summit)’는 2019년 10월 제18차 정상 회의를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개최하였으며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제19차 회의를 2024년 1월 우간다 캄팔라에서 개최할 예정이다. 긴 역사를 보유한 비동맹주의 정상 회의와 함께, 2000년 4월 제1차 사우스 정상 회의(South Summit)가 쿠바의 아바나에서 개최되었고, 그 이후 2005년 6월 제2차 사우스 정상 회의가 카타르 도하에서, 그리고 2023년 12월 제3차 사우스 정상 회의가 우간다 수도인 캄팔라에서 개최된다. 글로벌 사우스는 역내 정상 회의를 통해 사우스의 정체성을 반둥 회의에서 찾고 있으며 미·중의 갈등 관계와 러·우 전쟁의 종식을 위해 사우스의 집합 행동과 대안을 글로벌 수준의 거버넌스 개혁과 맞물려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단지, 한국이 이를 적극적으로 공유하거나 외교 정책에 수용하지 않을 뿐이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국제 질서가 회복되지 않으면 힘의 공백 상태를 중국, 러시아, 또는 글로벌 사우스의 패권국들이 일정 영역을 잠식하거나 새로운 거버넌스와 국제 질서를 기획할 공산이 커지고 있다.

 

4. 글로벌 사우스 역내의 경쟁과 갈등 구조


글로벌 사우스가 국제 사회에 개입하는 강도가 강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사우스의 개입이 언제나 통합된 방식의 연대 전략과 정체성을 확고하게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김태균·이일청 2018). 이는 사우스 권역 내의 집합행위가 과거 반둥 체제와 유사하게 내부적으로 조율되거나 단일한 방식의 연대성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냉전 종식 이후 제3세계론이 쇠퇴하고 글로벌 사우스 역내에서의 패권 경합이 중국과 인도를 중심으로 가속화되면서 반둥 정신은 더더욱 현실주의적 남남협력으로 개도국의 국익을 추구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변모하고 있다. 앞서도 강조했듯이, 중국과 인도 사이의 경쟁과 갈등 구조에서 우리는 사우스의 맹주국가 중 하나인 인도가 중국과 상호 협력과 경합을 동시에 진행하는 대항적 공존의 프레임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

인도의 모디 총리는 전통적인 비동맹 노선이 아닌 다양한 진영과 협력을 동시에 진행하는 이른바 ‘마이웨이 외교’를 강조하면서 “바이든도 시진핑도 모두 우리 편”이라 할 정도로 국익과 실용주의를 앞세운 다자 동맹 외교를 펼치고 있다. 인도는 미국·일본·호주와 함께 쿼드 회원국으로 미국의 반중 연대에 동참하고 있으며, 중국의 일대일로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기를 회피하고, 2022년 5월에는 미국이 주도한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참여를 선언했으며, 이스라엘·미국·아랍에미리트 간 협의체인 I2U2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이 러·우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 푸틴 정부의 인권 유린에 대한 비판 성명에 인도의 동참을 요구했지만 모디 총리는 끝까지 명시적으로 동의하지 않았으며, 중국 중심의 상하이협력기구(SCO)에서 러시아와 중국 정상과 손을 잡았고, 202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개최된 브릭스 정상 회의에서 중국과 신경전을 벌이지만 큰 구도에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은 이러한 인도의 독자 외교를 견제하기 위해 일대일로의 인프라 사업 중 하나이며 파키스탄과 인도 갈등의 뇌관인 카슈미르 지역을 건드리는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China-Pakistan Economic Corridor)’ 프로젝트를 지원하였다. 결론적으로, 인도는 미·중 패권 경쟁 속 실용 외교로 국익을 극대화하고, 정치·경제 등 다양한 글로벌 거버넌스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동시에, 다양한 국제 위기 속에서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와도 관계를 지속하며, 역사적으로 앙숙인 중국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다중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글로벌 사우스 역내의 경쟁 구도를 미국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해석을 인도의 쿼드 참여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중국과 인도 간의 대항적 공존을 위기 관리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국가의 범주가 미국 등 글로벌 노스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우스 역내의 또 다른 저개발 국가들도 중국과 인도의 갈등 관계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솔로몬제도는 글로벌 사우스의 남남 협력 수혜국으로 중·인의 갈등 관계를 전략적으로 활용하는 사례인데, 솔로몬제도의 도서 간 교량을 잇는 대규모 인프라 투자를 중국으로부터 받은 후 중국 원조의 상환을 인도가 투자하는 인프라 자금으로 충당하는 기획을 통해 중국과 인도의 경쟁 관계를 스마트하게 관리하여 중국 부채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

 

5. 한국의 글로벌 사우스 대전략을 준비하며


현재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글로벌 사우스의 저발전 문제 그리고 제국의 아류에 아직 종속되어 있다는 비판적 성찰의 목소리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글로벌 사우스와 글로벌 노스 간의 경쟁 관계, 그리고 사우스 역내에서의 패권 경쟁 문제는 우리와 직접 상관없는 이슈 영역이기 때문에 한국은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 강화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인가? 더욱 정치화되고 국익 우선주의로 회귀되는 글로벌 사우스의 남남 협력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은 어떤 전략을 준비해야 하는가? 복합 위기 대응과 글로벌 거버넌스 개혁을 위하여 한국은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어떠한 기여를 할 수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사우스 파트너 국가와 어떠한 협력 관계를 수립해야 하는가? 더 이상 글로벌 사우스 대전략은 한국과 직접 연관이 없는 머나먼 이슈가 아니다. 한국은 국제 사회에서 선진국 대열 진입을 인정받았고, 2010년 OECD 개발원조위원회에 가입하면서 공적개발원조(ODA)를 글로벌 사우스에 제공하는 공여국 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미·중 전략 경쟁 이후 한국은 미국·일본·G7 중심의 전통적인 지유 국제 질서의 글로벌 노스에 편승하여 대북 리스크를 원활하게 관리하고 인도·태평양 전략에 집중하여 글로벌 사우스와의 다층적인 외교 협력보다는 기존 동맹국들과의 협력 관계를 강화하는 제한된 글로벌 사우스 외교 전략에 만족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한국은 상생과 갈등의 기로에 처한 글로벌 사우스의 주요 협력국들과 긴밀한 파트너십을 구축하고, 파트너십을 경영하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기초적인 지역 전문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한국은 글로벌 사우스에 대한 거시적 이해력과 미시적 분석력의 경험이 부족하여 사우스 국가들이 처한 상생과 갈등의 기로가 어느 시공간의 맥락에서 구현되는지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은, 인도가 다자 동맹 전략을 선택한 이유, 즉 갈등 관계인 미국·러시아·중국과 동시에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겠다는 인도의 실용주의가 과연 상생의 선택인지, 아니면 이러한 무리한 실용주의가 초래할 갈등의 기로는 무엇인지 등등에 대한 시나리오를 정리할 수 있는 지역 전문성이 필요한 것이다.

둘째, 미국 중심의 기존 외교 정책에 글로벌 사우스를 추가하여 한국의 새로운 외교 대전략에 북반구와 남반구를 균형 있게 연결할 수 있는 코페르니쿠스적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며, 이는 ‘반둥 2.0’ 또는 ‘비동맹주의 2.0’ 으로 표현될 수 있는 글로벌 사우스 권역의 새로운 변화와 맞물려 삼각 협력의 전략화로 모색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반둥 회의의 유산을 부활시키기 위해서 반둥 회의 50주년 기념 정상 회의를 2005년에 개최한 후 정상 회의를 정례화하였고 2025년에는 70주년 정상 회의를 기획하고 있다. 한국은 2005년 이해찬 국무총리가 반둥 회의 기념식에 참석한 적이 있으며 그 이후 국무총리를 넘어서는 한국 정부 대표가 반둥 정상 회의에 참석한 적은 없다. 한편, 반둥 2.0을 목표로 하는 반둥 회의 60주년 기념 정상 회의에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일본의 아베 총리 등 글로벌 사우스의 환심을 얻기 위해 주요 국가 정상들이 적극적으로 참석한 바 있다. 이는 글로벌 사우스의 중요성과 외교적 가치에 대한 우선순위가 한국에서는 뒤로 밀려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글로벌 사우스와 노스가 공히 매력적인 파트너로 인식하는 한국은 ODA 등을 통해 사우스 역내 다양한 플랫폼과 협력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적극 활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이 글로벌 사우스 대전략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역사 사회학적 상상력을 통해 사우스의 역사적 질곡과 경험을 충분히 이해하고 대항적 공존의 주요 패턴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 형성되어 왔는가에 대한 정치한 분석이 선행되어야 한다. 복합 위기와 다극 체제로 전환되는 글로벌 거버넌스 구조하에서 전통적인 글로벌 노스의 자유 시장주의를 표방하는 미국과 G7, 그리고 일본만이 한국의 선택지가 될 수는 없다. 또한 한국 스스로 글로벌 사우스의 빈곤국에서 글로벌 노스의 선진국으로 발전한 사례이기 때문에 사우스와 노스의 경합 이슈, 그리고 사우스 내 다양한 발전 문제의 중재자로서 또는 파트너로서 기여할 수 있다. 글로벌 사우스와 노스 국가들은 예외 없이 대항과 공존의 모순된 선택을 동시에 할 수밖에 없고 대항적 공존 가운데 상호 공존의 공간이 커질 수 있도록 한국은 글로벌 중추 국가의 가치 외교와 기여 외교의 로드맵을 준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항적 공존이 형성되는 글로벌 또는 지역별 이슈 영역을 적극적으로 찾아내고 한국의 국익, 그리고 기여 외교 역량 등을 총체적으로 조율하는 대전략이 필요하다.
참고 문헌
김태균, 《대항적 공존: 글로벌 책무성의 아시아적 재생산》, 서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8.
김태균, 《반둥 이후: 글로벌 사우스의 국제정치사회학》, 과천: 진인진, 2023.
김태균·이일청, 〈반둥 이후: 제3세계론의 쇠퇴와 남남협력의 정치세력화〉, 《국제정치논총》 58(3): 49-99., 2018.
Comaroff, Jean and John L. Comaroff, Theory From the South: Or, How Euro-America Is, 2016.
Evolving Toward Africa, Abingdon: Routledge.
Harvey, David, “Globalization and the ‘Spatial Fix’,” Geographische Revue 2: 23-30., 2001.
Ignatieff, Michael, Empire Lite: Nation-Building in Bosnia, Kosovo and Afghanistan, London:Vintage., 2003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