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식용이 금지된다

2023년 12월 21일, explained

논란의 개 식용 금지 특별법이 상임위 문턱을 넘었다.

국회의사당 돔에 투사된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 메시지 ⓒ 동물해방물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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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식용 금지가 정말 현실이 될 전망이다. 개 식용 금지 특별법이 국회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 회의를 통과한 것이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와 국회 본회의를 거쳐야 하지만, 큰 문턱은 하나 넘었다. 법안의 내용은 식용 목적으로 개를 사육하거나 도살, 유통하는 행위를 일체 금지하는 것이다. 관련 업계 종사자들의 생계 대책을 위해 정부가 전업 및 폐업도 지원한다.

WHY NOW

개 식용은 일부의 이야기다. 그러나 개 식용 금지 특별법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은 우리 모두의 미래다. 왜 개를 먹으면 안 되는가. 질문은 간단하다. 그러나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복잡하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해야 한다.

농경 사회의 개

수렵이나 목축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개는 중요한 자원이다. 때로는 인간을 지켜주는 존재이며 때로는 가축을 감시하는 존재이다. 인간에 득이 된다. 농경사회에서 개의 위치는 좀 다르다. 깊은 밤 침입자의 존재를 알리거나 아이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곤 하지만, 결국 없어도 되는 존재다. 소나 말에 비하면 참으로 소용이 없다. 잉여다.

이유도 모르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찌감치 안정적인 농경사회를 이루었던 한반도에서는 개 식용의 역사가 길다. 조선 시대에는 수라상에도 올랐다고 한다. 상황이 달라진 것은 올림픽 때문이다. 개 식용이 금지됐다. 해외에서 논란이 커지면서 정부가 규제에 나선 것이다. 이게 옳은지 그른지 제대로 논의도 되지 않은 채, 그저 남부끄러워 개 식용을 금지했다. 결국 88 올림픽이 끝나면서 규제는 흐지부지됐다.

문화의 프레임으로 본다면

개 식용이 찬반의 논쟁이 된 것은 이를 ‘문화’의 프레임으로 봤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 닭, 돼지를 먹는다. 종종 양도 먹는다. 그리고 일부긴 해도 누군가는 ‘개’도 먹는다. 이렇게 기술하면 개 식용은 ‘식문화’의 일부다. 내가 먹는 것을 비난하는데 발끈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브리지트 바르도가 한국의 개고기 ‘문화’를 힐난했을 때, 94년 김영삼 대통령에 서한까지 보냈을 때 개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까지 ‘욱’했던 이유다.

다정한 석학의 위로

순 예술(fine art)의 개념 자체를 전복시키는 것이 예술의 본령이 된 21세기다. 문화의 프레임 안에서 우열을 나누는 것은 허튼짓이다. 선악을 나누는 것은 더더욱 힘 빠질 얘기다. 그래서 움베르토 에코가 브리지트 바르도를 ‘파시스트’라며 비난했던 순간은 통쾌했다. “어떤 동물을 잡아먹느냐의 문제는 인류학적인 문제”라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약소국이라 무시당한 한국인의 설움을 위로하는 다정함으로 느껴질 법했다. 그러나 이 논의는 처음부터 함정에 빠져있다.

문화와 애착의 함정

개 식용 논의가 빠져있는 함정은 두 가지다. ‘남부끄러운 일’인지의 여부, ‘개’를 먹어도 되는지의 여부. 이 두 질문이 개 식용의 모든 과정을 가리고, 그 논의를 문화와 애착의 문제로 납작하게 누른다. 변화는 문화에서 생겨나지만, 문화가 언제나 변화의 이유인 것은 아니다. 내연차를 그만 타고 전기차를 선택하는 현상은 문화다. 그러나 이 문화가 발생한 이유는 인류의 과오다. 그 과오를 발견하고 인정한 과학과 정치다. 개 식용 문제도 마찬가지다. 언제까지고 문화와 애착을 이 논의의 핵심 배경으로 오인해서는 법이 제정되더라도 우리 사회의 인식이 여전히 20세기에 머무르게 된다.

식탁 너머의 풍경

동물해방물결의 김도희 변호사는 북저널리즘과의 인터뷰에서 개 식용 종식을 ‘한 종에 대한 산업화를 끝낸다는 의미’라고 정의했다. 먹는 행위는 식탁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음식이 식탁에 오르기 전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이 있다. 그 과정을 지극히 부자연스럽게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이다. 생명이 태어나 생을 보내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산업화했다. 인간의 편의대로 수정 과정을 거쳐 원치 않는 임신 끝에 태어난 개, 납치된 개, 학대당한 개들이 뜬 장에 구겨 넣어진 채 자신의 배설물 위에서 다른 개의 죽음을 차례로 목격한다. 전기 꼬챙이로 아무 데나 찔려 고통스럽게 맞이하는 죽음이다. 이것은 수렵도 아니고 도살도 아니다. 종이 종에 행하는 폭력이다.

이래도 되는가 질문할 때

닭이나 소, 돼지라고 ‘누려야 할 삶’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인류는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 해결해야 할 숙제를 너무 많이 떠안고 있다. 그리고 이미, 그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의 역습을 맞고 있다. 결국 개 식용 금지법은 종착점이 아니라 시작이다. 지금 그만둘 수 있는 잘못부터 그만두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왜 그만두는지 이해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질문은 동물을 인간의 목적대로 판단하는 오만을 언제 그만둘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다. 그리고 종을 산업화해 온 과오를 어디서부터 얼마만큼 되돌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다. 개 식용 금지법은 사실, ‘종 산업화 폐지’를 위한 첫걸음이다.

IT MATTERS

식탁 위의 뜨끈한 음식은 언제나 무해하게 느껴진다. 내 앞의 음식은 오롯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뿐이다. 그러나 깊은 맛이 나는 국물 한 숟갈에는 엄청난 것이 녹아들어 있다. 음식을 만드는 사람의 평가 절하된 노동력, 식재료가 배송되는 동안 발생한 탄소 발자국, 공장식 축산으로 ‘생산’된 동물, 부조리한 유통 구조로 제값을 받지 못한 농작물.

김도희 변호사는 저서 《정상 동물》에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루타르코스의 주장을 인용한다. 스스로 육식인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이 잡아먹으려는 대상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소, 돼지, 닭을 대신 죽여줄 사람이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를 일컫는 개념이 바로 ‘청부 도살’이다. 우리는 음식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그래서 먹는 행위의 무게를 과소평가하게 된다.

육견 협회의 반발에도, 이번 개 식용 금지 특별법의 전망은 긍정적이다. 이제 과제는 반려 인구 1500만 시대나 국민 정서라는 모호한 언어 너머에 있는, 당면한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다. 기후도, 생태도, 종 다양성도 위기에 처한 지금이야말로 인간이 겸허해지기에 참으로 적당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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