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손맛을 사랑하나

2024년 1월 9일, explained

올해도 산천어 축제는 성공이다. 매년 질문이 쌓여 간다.

2024년 1월 6일 강원도 화천군에서 열린 ‘화천 산천어 축제’에서 참가자가 산천어를 잡고 있다. 사진: Chung Sung-Jun, Getty Images

NOW THIS

지난 주말 ‘2024 화천 산천어 축제’가 성공적으로 개막했다. 이달 29일까지 계속된다. 동원된 산천어는 50만 마리다. 지난 주말에만 20만 명의 인파가 몰렸다. 단순히 지역 축제의 모범 사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겨울 축제다. 얼음낚시뿐 아니라 맨손 잡기, 구이터와 회센터 등이 운영된다.

WHY NOW

지역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산천어 축제는 훌륭한 답안을 제시한다. 1차 산업 위주의 경제 구조 속에서 쇠락을 거듭하던 지역 경제가 단숨에 3차 산업 중심으로 도약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좀 다른 질문을 한다. 21세기, 인류의 축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아직 산천어 축제는 답하지 않았다.
군인의 도시, 화천

강원도 화천군은 인구 약 2만 3000여 명 수준의 농촌이다. 지리적 한계로 경제 발전에 제약이 많다. 북한과의 접경 지역인 탓이다. 2018년까지는 면적의 60퍼센트 이상이 군사 시설 보호 구역이었다. 주민보다 군인이 더 많았다. 이들을 상대로 한 업종이 그나마 지역 경제를 돌리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산천어 축제가 이런 상황을 단번에 돌파해 버렸다. 기획의 힘이었다.

기획의 힘

지역 축제는 지역의 자랑거리를 중심으로 기획되기 마련이다. 지역 특산품을 널리 알리고 매출을 높이는 데에 직접적으로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천군은 달랐다. 축제의 주인공을 외부에서 공수해 온 것이다. 화천군의 이미지와 잘 맞으면서도 청정한 자연을 십분 활용할 수 있는 아이템, 산천어를 찾아낸 것이다. 얼음 위에서 고기를 낚아 올리는 손맛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할 수 없는 이색적인 체험이 되었다. 화천의 매서운 겨울 추위가 최고의 관광 자원이 되었다.

그 많은 산천어는 어디서 왔을까

산천어는 바다와 강을 오가며 서식한다. 동해와 접한 태백산맥 동쪽, 즉 영동 지방에서 잡힌다는 얘기다. 화천은 영서 지방, 내륙이다. 산천어가 없다. 축제에 동원되는 산천어는 전국 18개 양식장에서 키운다. 전국에서 생산된 산천어의 99퍼센트가량이 이 축제에서 사용된다. 화천 산천어 축제가 산업을 하나 통째로 만들어 낸 셈이다. 산천어 축제는 이제 경제 이벤트다.

손맛의 정체

이렇게까지 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왜 얼음 밑에서 산천어를 건져 올리며, 맨손으로 물고기를 들어 올리며 기뻐할까. 축제가 우리의 ‘사냥 본능’을 자극한다는 가정을 할 수 있다. 외견상으로는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낚시’라는 문화적 포장지 속에는 ‘결과가 보장된 수렵’이라는 원시적인 제의가 숨겨져 있다. 수렵의 성과가 곧 생존과 계급으로 이어졌던 원시 시대의 본능까지 꺼내오지 않더라도, 언론 보도에 단골로 등장하는 “짜릿한 손맛”의 정체가 어렴풋이 보인다.

낚시도 아니고, 수렵도 아니고

다만, 축제의 디테일을 뜯어보면 그곳에는 ‘낚시’라는 문화적 행위는 없다. ‘수렵’에 가까운 제의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유사 수렵 행위’다. 현장에서 사용되는 일회용 낚싯대에는 세 갈래로 갈리진 훌치기 바늘이 달려 있다. 사람들은 낚싯대를 드리우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소쿠리로 무언가를 건져 올리는 것처럼 ‘챔질’을 한다. ‘물 반 고기 반’ 수준으로 산천어를 가득 채워 넣은 얼음 밑에서 그 바늘에 무언가가 걸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래서 낚싯줄에 딸려 올라오는 산천어를 잘 살펴보면 미끼를 물고 있는 경우가 드물다. 몸통이나 아가미 등에 아무렇게나 낚싯바늘이 박혀 있다.

두 가지 시선

그래서 산천어 축제를 둘러싸고 언론의 보도는 크게 두 방향으로 갈린다. 먼저, 대한민국 대표 겨울 축제의 짜릿한 현장 분위기에 집중하거나 축제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지역 경제 활성화에 성공한 모범 사례로 보는 경우다. 반면, 산천어 축제를 동물 학대의 대표적 사례로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인간의 오락을 위해 산천어에게 필요 없는 고통을 준다는 것이다. 두 논조 모두 클릭을 부르고 많은 독자가 공감한다. 지금, 2024년 우리 사회의 동물 감수성이 그렇다. 지금까지 당연했던 이벤트를 여전히 사랑할 것인지, 아니면 ‘계속 이래도 되는 것인가’ 질문을 던질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다.

정치와 시민의 속도 차이

정치적인 역학 관계는 이 축제에 질문을 허하지 않는다. 실제로 환경부는 지난 2020년 동물 이용 축제 가이드라인을 제작하고도 공개하지 못했다. 지자체 등의 반발 때문이다. 반면, 시민들은 질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한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동물 이용 축제’에서 응답자의 77퍼센트가 동물 복지 개선을 위해 행사 주최 측과 정부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답했다.

IT MATTERS

우리는 누구의 고통까지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까. 철학자 피터 싱어는 그 답을 ‘공리주의’에서 찾는다. 지구상의 고통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행복은 최대한으로 키워야 한다. 그렇다면 인간처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동물, 감정을 갖는 동물은 차별받아서는 안된다. ‘척추동물’ 이야기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국가의 동물 보호 관련 법은 이 이론에 근거한다. 쾌고감수(快苦感受) 능력을 가진 동물은 ‘동물 보호’의 대상이 된다. 일부 국가는 피터 싱어를 넘어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영국은 지난 2022년, 문어와 게도 ‘지각 있는 존재’로 인정했다. 노르웨이도 연어를 도살할 땐 먼저 기절시킨 후 행위를 한다. 그렇다면 산천어 축제에 대한 우리나라 법원의 판단은 어떨까. 우리나라에서 식용 목적의 동물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 그 답이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나은 세상이라면, 그것은 ‘그래도 되는지’ 질문했기 때문일지 모른다. ‘흑인에게’, ‘아이에게’, ‘여성에게’, ‘장애인에게’ 그래도 되는지 인류는 질문해 왔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 쌓인 질문이 많다. 산천어에게도 그 차례가 올 수 있을까. 지역 주민들에게 몇천 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준 축제다. 경제 효과도 몇천억 원대다. 그래도 우리는 과연 ‘산천어에게’ 그래도 되는지 질문할 용기를 낼 수 있나.

아니, 그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질문은 우리가 축제를 위해 동물을 ‘생산’해도 되는지에 관한 질문일 수도 있다. 지난 2022년 코로나19 여파로 축제가 열리지 못하자 30만 마리에 달하는 산천어가 ‘처리’되었다. 통조림이 되거나 수출길에 오른 것이다. 허투루 찍어 낸 음반도 환경 오염의 원인으로 지목되어 입길에 오르는데, 허투루 양식해 낸 30만 마리의 생명에는 다른 잣대가 적용된다. 우리는 과연 언제까지 이 축제를 기꺼운 마음으로 즐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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