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메이터 에릭 오 - 나라는 동력, 시선이라는 땔감

나라는 동력, 시선이라는 땔감
애니메이터 에릭 오


모두의 꿈인, 또 내 꿈의 일부였던 직장에 입사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수도, 또 때로는 부담되는 분기점의 시작일 수도 있을 테다. 애니메이터 에릭 오는 전 세계의 애니메이터들이 선망하는 ‘픽사’에서 작업했다. 픽사를 학교로 생각하던 그는 퇴사 후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전 세계에 외쳤다. 그에게 꿈의 직장은 종착지가 아니었다.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그 자체가 하나의 도달할 수 없는 도착지였던 셈이다. 도달할 수 없는 도착지, 나를 향해 달려가려는 그 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픽사는 화려한 이력이다. 처음 픽사에 입사했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나?

인턴으로 픽사에 먼저 입사했다. 인턴십 경쟁이 워낙 치열해 처음에는 입사 제안을 받지 못했는데, 그로부터 두 달 뒤에 연락이 왔다. 작업하는 동안 잠재력을 봤다고 하면서 함께 작업하자고 하더라. 너무 좋았다. 들뜬 마음으로 입사했던 것 같다.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면 막연히 디즈니, 지브리, 픽사에서 일하는 미래를 그리지 않나. 특히 내가 입사했을 때인 10여 년 전만 해도 콘텐츠를 소비하는 행태나 분위기가 픽사를 ‘넘을 수 없는 브랜드’로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좋았고, 또 치열했다.

픽사 입사 전후를 비교했을 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픽사 같은 규모로 작품을 만드는 회사가 많지 않다. 3D 애니메이션을 시스템화한 최초의 회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파이어니어의 기업에서 한 편의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하며 많은 걸 배웠다. 사람들과 소통하고, 원하는 방향으로 설득시키는 방법, 또 내가 가진 의사를 올바르게 전달하고 수용하는 법과 같은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의 발전이 컸다. 600명 정도의 인원이 군대처럼 한 편의 작품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지했던 것은 무엇인가?

나라는 사람 자체는 변하지 않더라. 나에게 픽사는 애초부터 종착점이 아니었다. 분명 꿈의 일부이기는 했지만, 결국 내 작품을 만드는 게 나의 목표였다. 픽사는 나에게 학교에 가까웠다.

나를 유지하고 내 작품을 만들겠다는 꿈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나?

예술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기준에는 몇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드는 장인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겠지만, 좁은 의미에서는 자기 안에서 끓어오르는 것이 있는 사람이 예술가가 아닐까. 1200여 명 정도 되는 픽사 직원의 대다수는 장인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무언가를 만들고, 만지는 과정 자체가 즐거운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출발점부터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에너지가 있었다. 이 에너지는 결국 예술보다는 삶에서 나온다. 내 안의 결핍이나 긍정, 부정적인 감정의 스펙트럼에서 오는 것 같다.

처음에는 나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동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가며 그를 잊는 경우가 많다.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힘에 대해 더 자세히 듣고 싶다.

나는 땔감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느 선까지 사용하던 땔감과 성숙한 다음에 사용하는 땔감이 다른 것 같다. 30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 안에 있는 여러 감정을 토해내는 게 너무 간절했다. 어릴 때부터 말도 잘 못 하고, 여린 아이로 태어나서 혼자만의 세계관이 너무 컸던 탓이다. 그렇게 소심한 주제에 내 마음에 있는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는 욕망은 컸다. 그런데 나만을 바라보는 그 땔감만으로는 계속 갈 수 없었다. 그때쯤에 사회가 보이고, 세상이 보였다. 내 개인에서 벗어나서 내가 속한 사회와 자연, 환경과 우주, 다른 인간이 보이더라. 이때 조금 더 성숙한 관점의 연료를 찾았던 것 같다. 세상에 안 좋은 사건이 터질 때마다 거기서 나오는 무력함과 감정을 풀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번 미디어 전시에서도 선보일 〈오페라〉의 동력도 마찬가지였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세상에 사건이 일어나더라. 사회가 밝았다면 〈오페라〉를 만들지 않았을 것 같다.

나에 대한 이야기에서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을 바꾼 것으로 들린다. 변화의 이유나 계기가 있었나?

자연스러웠다. 아티스트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도 성숙해 가는 여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술가의 경우가 더 돋보이는 건, 예술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 작품으로 기록되기 때문이 아닐까. 초점의 변화는 그저 조금씩 세상을 배워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다. 나에 대해 더 잘 알고, 나의 욕구나 감정도 충족이 되니 사회로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제주 에릭 오 미디어 체험전 O : AN ERICK OH RETROSPECTIVE ©BANA
〈오페라〉의 경우에는 어땠나?

〈오페라〉야말로 내 시선이 밖으로 열린 출발점에 선 애니메이션이다. 〈오페라〉는 시선이 바깥으로 가는 관찰자가 아닌, 그 안에 객관적 렌즈를 가져다 대려고 했다. 역사와 문명의 사이클, 사회 구조와 메커니즘에 대해 시적으로 묘사하려 한 작품이다. 이 안에 인문학이나 역사, 사회학, 과학이나 철학, 종교까지도 평소에 갖고 있던 시선을 총집합했다. 어찌 됐든 내가 만든 작품이지만 어떤 감정도 넣지 않고 드라이한 시선으로 그려내려 노력했다.

상영 버전과 전시 버전이 조금 다르다고 들었다.

상영 버전에서는 러닝 타임이 필요해서 점차 앵글이 커지는 형식을 택해 약간의 기승전결을 넣었다. 전시 버전에서는 사회 구조를 의미하는 삼각형이 통으로 주어진다. 내 눈이 렌즈가 되어 이곳저곳을 살피라는 의미였다. 작품을 만들 때 작품의 형식을 그 주제에서 그대로 영감을 받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이야기든 그에 알맞은 형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페라〉에 알맞은 형식은 무엇이라 봤나.

〈오페라〉는 처음부터 두 가지 키워드, 역사와 사회를 표현하려 했다. 역사는 시간성이지 않나. 시간성이라는 데는 끝이 없다. 기승전결도 없고, 무한히 밤낮이 끝없이 흘러가는 게 바로 시간이다. 사회라는 것도 순서대로 일이 생기는 게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 그 둘의 주제를 표현하려다 보니 관객의 눈을 렌즈로 삼는 형식을 자연스레 택하게 됐다.
〈오페라〉©BANA
애니메이터로서 기업에 소속돼 일하는 것과 혼자서 작업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자신의 성향에 맞는 세계는 다 있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 공포에 떠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직장, 특히 대기업은 절대적인 안정감이 엄청난 강점이다. 픽사라는 회사 자체의 인지도와 에너지가 너무 좋으니까 소속만으로도 어디에서나 환영받았던 것 같다. 단점은 조직 생활이다. 어찌 됐든 회사원이니 자유도 있게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팀 안에서 수행해야 하는 역할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 장점보다는 단점을 더 크게 느꼈다.

직장에는 팀원이 있다. 팀원으로부터 얻는 동력과 인사이트도 적지 않을 것 같은데, 혼자서 이를 어떻게 보충해 나갔나?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라는 작업 자체가 필연적으로 혼자 하는 일, 또 여럿이 함께해야 하는 작업으로 나뉜다. 시나리오 쓰는 과정에서는 동굴 안에서 혼자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시나리오가 완성되는 순간부터 현장에서 배우들과 어울리고, 때로는 영업사원이 돼야 한다. 혼자서 작업할 때는 이 둘의 균형을 맞추는 데 더 집중했던 것 같다.

가장 자기다운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건 무엇일까.

자신만의 오리지널리티를 찾는 게 중요하다. 최근에는 플랫폼이 발달하면서 자신을 드러낼 기회가 무수히 많아졌다. 쉽게 말해 ‘힙스터’인척 하기가 너무 쉬운 시대가 된 건데, 그렇게 트렌드만 좇다 보면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게 되기 쉽다. 자신의 작품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어느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다. 조용히 자신의 내면에서 끌어나오는 아이디어를 기록하면서 그를 어느 순간 작품으로 풀어낸다. 자신과의 끈질긴 싸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런 노력 없이는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감동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오페라〉©BANA
제주에서 미디어 체험전 상설 전시를 열게 됐다. 이번 전시 개최가 개인적으로 갖는 의미는 어떤가?

아주 큰 의미다. 나는 좋게 말하면 전방위적인 사람이다. 시작은 회화였고, 픽사에서 일하다가 나와서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왔다. VR 작품도 만들고, 넷플릭스 서사 애니도 만든 경험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벽을 안 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벽과 경계 없이 돌아다니는 경험을 표현하는 전시다. 공간만으로 압도하는 전시도 아니다. 굉장히 세밀한 내러티브가 들어가 있어서 계속 발견할 수 있는 요소들이 많다. 관객이 주체적으로 볼 수 있고, 또 벽을 넘나들 수 있는 전시가 될 것 같다.

다음 계획이 궁금하다.

차기작 준비를 하고 있다. 이제는 내러티브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단계다. 전시를 통해 나의 관점을 전방위적으로 풀었다면, 이제는 인물을 따라가는 영화적 서사를 구현해 보려 한다. 물론 그 안에도 사회적 시선이 녹아있을 것이다.

김혜림 에디터

* 2024년 4월 30일에 이메일로 전해 드린 ‘북저널리즘 톡스’입니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메일함에서 바로 받아 보시려면 뉴스레터를 구독해 주세요. 뉴스레터 구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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