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 다음의 실리콘앨리

9월 29일 - 데일리 북저널리즘

탈(脫) 실리콘밸리를 외치는 테크 기업이 늘고 있다. 실리콘밸리의 대안으로 떠오른 뉴욕은 미국 IT 업계의 새 허브가 될 수 있을까.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모두가 실리콘밸리에 살고 싶은 건 아니다. 우리는 전국에 더 역동적인 사업 거점을 건설하게 되길 바란다.” 알파벳·구글의 최고재무책임자(CFO) 루스 포랏이 2018년 기술 콘퍼런스에서 했던 말입니다. 그가 밝힌 비전은 3년이 지난 현재 뉴욕에서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습니다. 포랏은 지난 9월 21일 구글이 기존에 임대해 사용하고 있던 세인트존스 터미널 건물을 21억 달러(2조 4800억 원)에 매입한다고 자사 블로그에 공지했습니다. 2023년 개장을 목표로 진행 중인 확장 공사가 마무리되면, 이 빌딩은 캘리포니아 이외 지역에서 가장 큰 구글 사무실로 거듭납니다.

글로벌 부동산 데이터 제공 업체 리얼캐피털애널리틱스에 따르면, 한화로 2조 원이 훌쩍 넘는 이번 매입가는 코로나19 판데믹 이후 미국에서 성사된 단일 빌딩 거래 가운데 가장 높은 금액입니다. 건물 면적도 130만 제곱피트(3만 6500평)로 대형인데요, 이로써 구글은 ‘허드슨 스퀘어’ 구축에 마침표를 찍게 됐습니다. 허드슨 스퀘어는 구글이 뉴욕 맨해튼 허드슨강 일대에 조성하는 대규모 근무 단지로, 그 크기가 170만 제곱피트(4만 7775평)에 달합니다. 이는 축구장 20개를 더한 것보다 넓은 것으로 이 일대는 명실상부 구글의 제2 본사로 기능하게 될 예정입니다.

올해 들어 뉴욕시는 늘어가는 빈 사무실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올 1분기 맨해튼 지역의 사무실 공실률이 16.3퍼센트로, 1994년 이후 가장 높은 수치로 나타났습니다. 구글 역시 8월 말 델타 변이 바이러스 확산을 감안해 직원들의 사무실 복귀를 내년 1월 10일까지 미루겠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이제 재택근무가 일상으로 자리 잡은 많은 기업의 경영진이 여전히 오프라인으로의 복귀를 고심하는 가운데, 구글은 왜 뉴욕에 사무 공간을 확장하는 걸까요. 또 새로운 사업 거점에는 어떤 기대를 걸고 있을까요.
 

실리콘밸리 엑소더스


구글은 페이스북, 애플 등과 마찬가지로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지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두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는 글로벌 IT 기업들의 성지이자 기술 혁신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인근에 스탠퍼드대와 UC 버클리 등 명문 학군이 있어 전 세계 인재가 모이는 곳으로도 유명하죠. 그야말로 IT 산업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최근 실리콘밸리를 떠나는 직장인과 기업이 크게 늘면서 탈 실리콘밸리가 하나의 트렌드로 읽히고 있습니다. 재택근무하는 개인은 살인적인 수준의 집값과 물가로 악명 높은 샌프란시스코 생활을 감내할 필요가 없어졌고, 판데믹으로 경영 환경이 복잡해진 기업 입장에서는 세금 등 각종 규제가 강한 캘리포니아를 고집할 이유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12월 휴렛 팩커드 엔터프라이즈(이하 HPE)의 본사 이전 계획 발표는 탈 실리콘밸리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됐습니다. 1938년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팩커드가 허름한 차고에서 창업한 이래로 HPE는 공동 창업, 차고 창업(garage startup) 등 지금의 실리콘밸리 문화를 만든 원조로 인식돼 왔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시기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도 반기업적인 캘리포니아주 정책을 비판하며 텍사스주로 이사했습니다. 1995년 처음 실리콘밸리에 터를 잡아 25년간 사업을 이어 오며 오늘날 혁신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그의 상징성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작년 한 해 캘리포니아주를 떠나 이사간 주민만 20만 명이 넘어 미국에서 가장 큰 이탈을 보였습니다.

실리콘밸리 엑소더스[1] 행렬에 반사 이익을 누리며 새롭게 부상한 지역은 텍사스주 오스틴 지역입니다. HPE 외에도 세계 최대 기업용 소프트웨어 업체 오라클 등 굴지의 기업이 잇따라 오스틴으로 본사를 옮겼고, 애플도 새로운 캠퍼스 설립지로 이 지역을 택하면서 실리콘힐스(Silicon Hills)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였습니다. 텍사스는 땅값이 싸고 캘리포니아와 달리 개인의 주 소득세가 없어 직원 선호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20개 넘는 대학이 위치한 영향으로 대졸자 비중이 높고, 낮은 법인세 등 세제 혜택이 제공돼 기업 운영 측면에서도 유리한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실리콘힐스에 감도는 위기감

지난 5월 오스틴에 위치한 텍사스 주의회 의사당에서 낙태 금지 법안 반대 시위가 열렸다. ©Sergio Flores/Getty Images
실리콘밸리를 떠나 실리콘힐스에 정착한지 얼마 안 된 기업들 사이에서 최근 텍사스 주 정부 정책에 대한 우려감이 표출되고 있습니다. 공화당 소속 그레그 애벗 주지사의 주도로 임신 6주 후 낙태를 사실상 전면 금지하는 법안과 24시간 투표 및 드라이브스루 방식의 투표를 제한하는 법안, 또 백신 의무를 금지하는 법안 등 보수 성향의 정책을 밀어붙이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진보적 성향이 강한 것으로 알려진 테크 기업 근로자들의 반감을 살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경제 비평가인 리처드 앨름은 “텍사스로 이주하려는 기술 인력이 줄면 기업의 노동력 공급에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뛰어난 인재를 발굴하고 적절하게 관리해 이익 창출에 힘써야 하는 기업 입장에서는 직원 이탈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리콘힐스를 택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복지 측면에서의 생활 여건 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상치 못한 정책 리스크가 발생하자 기업의 경영진은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자구책을 내놓고 있습니다. 오스틴이 본사 소재지인 소프트웨어 기업 퀘스천프로는 여성 직원이 텍사스가 아닌 타지역에서 임신 중절 수술할 경우 비용 지원을 하기로 약속했습니다. 본사는 여전히 실리콘밸리이지만 텍사스 댈러스 지역에도 사무실을 두고 있는 세일즈포스는 재직 기간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할 경우 비용 일부를 지원한다는 방침입니다.

몇몇 기업 CEO는 직접적으로 텍사스주 정책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습니다. 25년 전 인도에서 이민 와 현재 데이트 앱 틴더로 직원 2000명을 이끄는 매치그룹의 샤르 두베이 CEO는 “인도를 비롯한 대부분 나라보다 여성에게 퇴행적인 법을 시행하는 지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라고 말했습니다. 컴퓨터 제조업체 델의 마이클 델 CEO도 각종 투표 관련 제한에 대해 “미국 민주주의의 토대인 자유롭고 공정한 투표권은 그동안 여성과 유색 인종이 어렵게 얻어낸 권리로, 텍사스는 시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실리콘앨리로 향하는 기술 인재들

2020년 기준 뉴욕 거점 스타트업의 산업별 분포
이런 상황에서 최근 빅테크 기업이 집중적으로 거점을 확대하는 뉴욕 인근은 테크 업계 주목을 다시금 받고 있습니다. 특히 올 초까지 높은 공실률로 우려를 사던 맨해튼 일대가 IT 업계의 새로운 허브로 점쳐집니다. 2009년과 비교해 맨해튼 일대 사무실 규모는 30배 넘게 커졌습니다. 페이스북(330만 제곱피트), 구글(이번 계약 포함 310만 제곱피트), 아마존( 180만 제곱피트), 마이크로소프트(76만 제곱피트), 애플(33만 제곱피트) 순이죠. 뉴욕은 또 시 정부의 테크 생태계 육성 정책에 힘입어 다양한 기술 기반 기업이 진출해있습니다. 도심 한가운데라는 지리적 특성을 지녀 기업과 소비자의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고, 기업의 경쟁력을 검증할 수 있는 테스트베드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 뉴욕에는 스타트업 포함 약 9000개의 테크 기업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는 기업 가치가 10억 달러 이상인 유니콘 기업 57곳이 포합됩니다. 스타트업을 육성하는 각종 엑셀러레이터 및 인큐베이터 센터도 100여 곳 넘게 존재해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죠. 뉴욕을 실리콘앨리(Silicon Alley)라고 부르는 이유입니다. 최근 뉴욕은 실리콘밸리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초기 단계 투자(866건)를 유치한 지역이기도 한데요, 특히 소프트웨어(270건), 인터넷(114건), 모바일(113건), SaaS(112건), 전자상거래(106건) 분야 테크 기업들이 지난해 기준 162억 달러, 19조 2000억 원의 투자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실리콘밸리 못지않은 기술 인력풀이 자연스레 뉴욕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습니다. 구글이 현재 1만 2000명 수준인 뉴욕 사무실 직원 수를 허드슨 스퀘어 완공 후 1만 2000명 이상으로 더 확대할 수 있다는 근거입니다. 특히 미국 광고 산업의 중심지인 뉴욕은 구글의 디지털 광고 사업 확대를 위한 최적지인 동시에, 향후 핵심 비즈니스로 꼽히는 클라우드 분야를 위한 개발자 확충 차원에서도 많은 이점을 지닙니다. 수천 개의 스타트업은 물론 컬럼비아대, 뉴욕대, 코넬대 공과대학원 그리고 차로 2~4시간 이내에 하버드대,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예일대 등 아이비리그 명문도 몰려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IT 허브의 조건

구글의 허드슨 스퀘어가 뉴욕에 의미하는 것 ©CBS New York
구글 CFO 포랏은 최근의 빌딩 매입 건에 대해 “뉴욕의 에너지와 창의성, 세계 최고 수준의 재능이 구글이 이곳에 뿌리내리게 한 원동력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구글은 2000년 무렵 실리콘밸리에 기반을 둔 IT 기업 중 최초로 뉴욕에 진출하기도 했는데요, IT 기업에 핵심 자산이 사람인 만큼 글로벌 문화, 패션, 미디어의 중심인 뉴욕의 도시 경쟁력은 인재 유치와 유지에 어쩌면 눈에 보이진 않는  핵심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지리적 환경 그 자체가 일종의 직원 복지가 될 수 있는 셈이죠. 지난 2019년 영국계 회계 법인 KPMG LLP가 IT 전문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에서는 응답자의 60퍼센트가 2023년 내로 뉴욕이 새로운 기술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답했습니다. 기술 집약도 평가에서는 당시에 이미 뉴욕 점수가 실리콘밸리보다 더 높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 서부 실리콘밸리에서 시작해 남부 내륙 실리콘힐스를 거쳐 동부 실리콘앨리까지 이어진 최근 테크 업계의 이동 경로 결말은 당장 예단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이야 각종 기업 규제와 정책 리스크에서 자유로운 뉴욕이 최적의 대안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구글 등 빅테크를 비롯한 스타트업이 코로나19로 비었던 사무실을 가득 채운 이후 상황은 낙관적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특히 실리콘밸리에서 그랬듯, 높아진 부동산 가격이 또 다른 젠트리피케이션[2]과 직원들의 생활고를 야기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주택 임대료가 다시 폭등하고 교통 혼잡이 더 심각해질 수도 있죠. 벌써부터 코로나19로 떨어졌던 맨해튼 주택 임대료가 50에서 최대 70퍼센트까지 반등했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독과점 방지, 개인정보 보호 등 테크 기업을 향한 규제가 갈수록 심해지는 가운데, 사업하기 좋은 환경으로 기업이 움직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입니다. 코로나19 판데믹 이후 급물살 타고 있는 탈 실리콘밸리 흐름과 최근 텍사스 지역 내 기업들의 반발이 이를 보여 줍니다. 테크 기업은 사업의 명운을 가르는 최우선 기준이 오직 기술력이었던 과거와 달리, 기술력의 근간인 유수 인재 확보라는 과제까지 해결해야만 합니다. 시장이 주목하는 테크 거점이 이동했듯, 기업의 경쟁력 또한 기술 중심에서 인재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인력 전쟁이 본격화되면 기업의 자유로운 경영 환경을 보장하고 동시에 직원이 살기 좋은 직주 근접형 도시야말로 다음 세대의 IT 허브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에서는 뉴욕에 사무실 넓히는 구글과 테크 기업들의 속내를 살펴봤습니다. 읽으시면서 들었던 생각을 댓글로 남겨 주세요. 서로 다른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면서 사고의 폭을 확장해 가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댓글이 북저널리즘의 콘텐츠를 완성합니다.

오늘 데일리 북저널리즘은 《사무실의 정치학》, 《오피스의 재구성》, 〈재택근무는 뉴노멀일까〉와 함께 읽으시면 좋습니다.
[1]
엑소더스(Exodus)는 탈출이라는 뜻의 단어로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동시에 특정 장소를 떠나는 상황을 의미한다. 증시에서는 투자금이 한번에 빠져나가는 자금 유출을 뜻한다.
[2]
둥지 내몰림이라고도 불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심 인근 낙후했던 지역으로 외부인과 돈이 유입되면서 임대료가 올라 원주민이 밀려나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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