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쇼크
8화

북저널리즘 인사이드; 좋은 게 좋다는 착각

직원 대부분이 외국인인 비스트로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스페인, 베트남, 모로코, 인도네시아,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 출신 국가도 다양했다. 당시엔 비자에 무지했기에 이들이 어떤 체류 자격으로 근무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요식업은 팀워크가 중요하다. 국적과 인종, 언어가 달랐음에도 비스트로에 걸맞은 서비스를 내보여야 했기에 우리는 서로의 손과 발이 되어 줬다. 같은 목표와 수고로움 아래 스테레오 타입이나 체류 자격이 개입할 공간은 없었다.

늘 에스프레소를 부탁하던 수셰프 친구는 모로코 출신이었다. 때가 되어도 저녁 식사를 하지 않길래 왜 그런지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라마단 중이라고 했다. 한번은 탈의실에 들어갔는데 뭔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찾듯 바짝 엎드린 그 친구의 모습을 보고 뭘 찾냐며 말을 걸었다. 대답도, 미동도 없던 그 친구의 맨발과 바닥에 깔린 카펫을 보자 아차 싶었다. 그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기도가 끝난 후 미안했다고 하니 괜찮다고 웃어넘겼다. 그는 그런 친구였다.

이름을 알기도 전에 그를 ‘무슬림’이라고 생각했다면 색안경 없이 볼 수 있었을까. 다문화는 다양한 경로로 사람들과 만난다. 비스트로에서의 경험은 다문화주의로 다가왔다. 한편 우리 사회의 숱한 외국인 혐오를 들여다보면 다문화가 꼭 다문화주의로 안착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원주민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자들로, 우리 동네의 문화를 어지럽히는 자들로, 공중도덕을 해치는 자들로. 다문화는 상황에 따라 동화주의로, 문화적 다원주의로, 혹은 반이민 정서로 다가간다.

다문화주의는 인류애의 자손이고 기본권의 자녀다. 따라서 다문화주의가 표방하는 윤리적 가치는 쉽게 성역화된다. 비슷하게 한국은 보편적으로 자유주의를, 정치적으로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 자본주의를 따르며 국제적 규범 전쟁 속에서도 이를 대체할 것이 없다는 사고가 사회적으로 내재해 있다. 시장 경제의 문제를 짚는 순간 친중이 되고, 민주주의의 문제를 짚는 순간 북풍을 맞는다. 한국은 냉전의 희생양이고 이런 아픔에 민감하다. 순혈주의가 사라져 가는 한국에서 다문화주의 역시 그 고결함으로 많은 질문을 덮는다.

근본적 문제를 외면하면 다문화 정책은 응급 처치에 그친다. 이주자와 다문화 가정은 앞으로 더 늘어날 것이고 이들과 한국 사회와의 마찰은 포용이냐, 배척이냐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다. 인류애의 가치와 인종주의의 싸움도 아니다. 우리는 왜 파독 간호사와 광부를 보냈으며, 이주 노동자와 결혼 이주자는 왜 한국에 오게 되었는가. 저자는 다문화 국가의 문턱에 놓인 한국이 애써 외면하는 것은 비가역적인 글로벌 자본주의의 조류라고 꼬집는 듯하다. 한국의 다문화 정책은 계층의 구조적 고착화를 해결하지 않으면 계속해 미봉책에 그칠 것이라는 날 선 충고다.

정책은 사각지대가 없어야 한다. 보기 싫은 부분도 봐야 한다. 좋은 게 좋다는 것은 달콤한 착각이다. 다문화주의는 더 좋은 토양에서 얻을 수 있는 열매다. 일찍이 이민자의 국가로 구성된 캐나다,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조차 인종과 에스니시티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은 단일 민족 국가여서가 아니라 저성장 시대에 신음하는 자본주의 국가로서, 4차 산업혁명과 고령화의 값을 합리적으로 치러야 하는 선진국으로서 새로운 형태의 다문화 쇼크를 겪고 있다. 모두가 그 비스트로에서 만났다면 축복받을 다문화 세계 속에 깨지 않을 꿈을 꿨을 것이다. 지금은 이루지 못해 아픈 꿈이다.

이현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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