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시나리오
4화

화석 연료 시대의 종말 ;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

“바닥에서 초록색 불빛이 올라오는 수영장의 염소 처리된 물속으로 다이빙하는 일. 야간 조명등 아래에서 하는 야구 경기. 여름밤 나방이 몰려들던 현관 등. 엄청난 전력을 소비하며 도시 아래를 달리던 지하철. 도시. 영화 …… 비행. 하늘에서 여객기 창문을 통해 반짝이는 불빛이 수놓인 도시들을 내려다보는 일. 10킬로미터 상공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그 시각 불을 밝히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상상하는 일. 비행기 …… 국가. 국경에는 아무도 없었다.”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Emily St. John Mandel)이 2016년에 낸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스테이션 일레븐》은 치명적인 판데믹으로 전 인류의 99퍼센트가 사망하고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계를 그린다. 위에선 짧게 인용했지만 실제 소설에서는 한 페이지가 넘도록 그 세계에서 사라진 것들을 길게 묘사하는데, 그것들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전기와 관련돼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현대의 삶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갈 수 있게 하는 동력원이었던 전기가 사라지는 순간, 우리의 일상도 함께 정지하고 국가와 국경마저 존재 의미를 잃어버린다. 아직까지는 전기의 대부분이 화석 연료에서 생산된다. 태양광, 수력, 풍력 등 재생 에너지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비탄소 전력의 비중은 2000년 35.2퍼센트에서 2020년 36.7퍼센트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석탄과 석유로 대표되는 화석 연료는 편리하고 풍요로운 우리 삶을 떠받치는 근원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기까지의 그 짧은 시간 동안에만 몇 개의 전자 제품을 사용하는지 생각해 보라. 스마트폰, 텔레비전, 전등, 냉장고, 토스트기, 커피 머신……. 이뿐만 아니라 전기와 상관없어 보이는 일상의 것들에도 화석 연료의 영향이 닿아 있다. 우리가 입는 합성 섬유로 된 옷에는 화석 연료 추출물이 포함돼 있고, 당연히 그것들을 제조하고 운송하는 과정에 석유가 쓰인다. 냉장고 안에 든 싱싱한 채소와 과일 또한 석탄이나 석유를 때는 온실 안에서 재배했으며, 어떤 것들은 바다 건너 먼 나라로부터 배나 비행기에 실려 온 것이다. 농업의 비약적 성장이라는 기적을 일으킨 화학 비료도 화석 연료를 이용했다. 이렇듯 우리는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석 연료에 의존하는, 화석 연료 문명에서 살고 있다. 여러 분야에서 점점 확장하고 있는 가상 공간은 우리가 마치 물질적 제약이나 인프라 없이 디지털 세계의 진공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나 광섬유 케이블이나 데이터 서버, 컴퓨터에 에너지가 공급되지 않으면 이런 환상 역시 지속될 수 없다. 어느 날 갑자기 전기가 영원히 끊긴다면, 혹은 그 전기를 만들던 석탄과 석유가 바닥을 드러낸다면……. 그것은 문명의 종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영원한 파티는 없다


앞장에서 말했듯이, 인류세의 시작을 언제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파울 크뤼천을 비롯한 다수의 학자들은 1800년대 산업혁명을 인류가 지구 환경을 변화시키기 시작한 중대한 기점으로 본다. 크뤼천은 지구 시스템에 인간이 각인한 흔적은 화석 연료에 기반한 에너지 시스템의 도래 및 확산과 가장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화석 연료 사용에 따른 대기 중 이산화 탄소의 축적량으로 인류세의 진전을 추적하고 수량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그는 인류세의 단계를 총 세 단계로 구분한다. 산업화 시기에 해당하는 1800년부터 1945년까지가 1단계, 소비자본주의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대가속(Great Acceleration) 시기인 1945년부터 2015년까지가 2단계, 2015년 이후가 3단계다. 이 중 마지막 3단계는 기후 변화가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인간 활동이 정말로 지구 시스템의 구조와 기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인식과 함께 시작됐다.[1]

화석 연료는 산업혁명과 떼어 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이전에도 석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땅속 깊이 묻혀 있는 석탄을 대량으로 파낼 기술력이 없었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발명한 증기 기관은 이 귀중한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고, 이로써 산업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본격적으로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계기가 됐다. 제이슨 무어는 18세기 영국에서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이 발명한 증기 엔진을 사용함으로써 저렴한 비용으로 철 제조용 코크스[2]를 석탄에서 채굴하고, 깊어질수록 점점 물이 차는 탄광에서 물을 빼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코크스로 제련한 철은 1750년 영국 철 생산량의 7퍼센트에 불과했으나 1784년에는 무려 90퍼센트로 늘어났고, 철 1톤을 생산하는 총비용은 60퍼센트까지 감소했다. 화석 연료가 제공한 풍부한 에너지 덕분에 노동력과 자본 비용을 절약하고 원자재 가격이 내려가는 기적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3]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화석 연료는 1억 5000만~3억 5000만 년 전 생성됐다. 프랑스의 소설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화석 연료를 “다른 생명체로부터 인류가 물려받은 자본”이라고 말했다. 엄청난 규모의 시간과 공간이 압축된 에너지 형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석유 1리터를 만들려면 고대 해양 생물 25톤이 필요하다. 이렇게 집적된 화석 연료가 내는 에너지의 규모는 엄청나다. 거대한 피라미드를 짓는 데 20년간 1만 명의 사람들이 동원됐다면, 미국에서 사용하는 석유 기준 에너지의 하루 평균량으로는 100개의 피라미드를 지을 수 있다.[4]

화석 연료의 가공할 힘 덕분에 산업 혁명 이후 자본주의와 기술 문명은 비약적 발전을 맞았다. 《탄소 민주주의》를 쓴 정치학자 티머시 미첼(Timothy Mitchell)은 갑작스러운 기술의 발전과 식민지 확보를 통해 인류는 급격한 성장을 경험했으나, 19세기의 성장률 증가는 이전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말한다. 기술의 약진, 지구 표면의 더 많은 지역에 대한 통제가 지하의 탄소 저장고 발굴과 결합해 엄청난 시너지 효과를 낸 덕이다. 이전에는 급속한 성장을 이룬다 해도 한두 세대 정도 지속하고 말았지만, 인류가 전 세계의 화석 연료 저장고에 접근할 수 있게 되고 이를 급속히 고갈시키는 능력이 생긴 이후 21세기 초까지 200년 넘도록 기하급수적 성장을 이어갔다.[5] 인구 통계학자 토머스 맬서스(Thomas Malthus)는 1798년 《인구론》에서 어떤 수단을 동원하더라도 식량 공급이 인구 증가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며, 결국 대기근과 강제적인 인구 감축을 피할 수 없으리라는 암울한 예측을 내놓았다. 다행히도 맬서스의 비관론은 실현되지 않았고, 기술 발전으로 인류가 어떤 한계도 극복할 수 있다는 무한한 진보의 이상을 신봉하는 낙관주의자들에게 맬서스라는 이름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파티는 끝났다: 석유, 전쟁, 산업 사회의 운명(The Party's Over: Oil, War and the Fate of Industrial Societies)》을 쓴 리처드 하인버그(Richard Heinberg)는 맬서스의 예측이 틀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과학 문명의 발전으로 한계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화석 연료에 힘입은 폭발적인 성장으로 맬서스가 예고한 파국을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그의 불길한 예언은 빗나갔다기보다는, 실현될 시점이 화석 연료 덕분에 미루어진 셈이다.

파티가 끝나면 어김없이 청구서가 날아온다. 화석 연료를 태우느라 대기 중에 수천만 년간 축적된 탄소가 단기간에 배출되면서 인류는 지구 온난화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얻게 됐다. 석유 산업이 시작된 1860년대부터 2010년까지 150년 동안 소비된 석유 중 절반이 넘는 양이 1980년 이후 30년간 연소됐다. 인류는 5억 년간 축적된 화석 연료를 겨우 몇 세대에 걸쳐 태워 버리면서 대기에 엄청난 양의 이산화 탄소를 배출해 왔다. 미국 대통령과학자문위원회는 1965년 인류가 이러한 에너지원을 다 써버리면서 “자신도 모르게 거대한 지구 물리학적 실험을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2021년 21차 IPCC 총회 평가 보고서는 1850년부터 진행된 인위적인 이산화 탄소 누적 배출량과 그에 따른 지구 온난화 사이에 관련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현재 매년 대기 중에 배출되는 온실가스의 양은 510억 톤에 달한다. IPCC는 2100년까지 지구 평균 온도 상승 폭을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으로 2030년까지 이산화 탄소 배출량을 2010년 대비 최소 45퍼센트 이상 감축해야 하고, 2050년경에는 탄소 중립(Net-zero)[6]을 달성해야 한다는 경로를 제시했다. 이를 위해서는 에너지, 토지, 도시 및 기반 시설(수송과 건물 포함)과 산업 시스템에서의 규모 측면에서 전례가 없는 빠르고 광범위한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7] 게다가 땅속에 매장된 화석 연료의 양은 한정적이어서 언제까지나 파티가 계속될 수는 없다. 티머시 미첼은 지구 온난화 이외에도 석유로부터 또 다른 위기가 초래될 것이라고 말한다. 석유 공급이 석유가 고갈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류세가 전체 지구 역사에서는 극히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듯이, 그의 말대로 인류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보면 화석 연료 시대는 막간에 불과할지 모른다.

 

석유 때문이지, 바보야


2015년 개봉한 영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는 얼핏 고철 덩어리 같지만 온갖 기묘한 모습으로 개조된 수십 대의 차량이 황량한 사막의 먼지구름 속을 달리며 화려한 액션을 펼치는 블록버스터 영화다. 우리나라에서도 약 4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인기를 끌었다. 핵전쟁으로 문명이 붕괴해 법도 질서도 없는 디스토피아, 폭력과 피가 난무하는 세계에서 희소해진 자원을 틀어쥐고 폭정을 휘두르는 독재자, 그런 세계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변화를 만들어 내려는 저항 세력 등 영화를 이끄는 기본 구조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지만 거칠게 사막을 질주하는 차량들과 그 위로 솟은 장대 끝에 매달린 배우들의 몸 사리지 않는 액션이 관객의 몰입도를 높였다.

이 단순해 보이는 영화의 세계관 핵심에 석유가 있다. 서두에서 주인공 ‘맥스’의 내레이션이 영화 속 세계를 간략하게 설명한다. “왜 사람들을 괴롭히지?”라는 맥스의 질문에 누군가 간단명료하게 대답한다. “석유 때문이지, 바보야(It’s oil, stupid!)”. 1992년 미국 대선에서 빌 클린턴 후보가 꽤 재미를 보았던 선거 구호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를 패러디한 것 같은 이 대사는 맥스가 “불이 타오르고 피가 난무한다”고 묘사한 이 지옥 같은 세계를 한 마디로 명쾌하게 요약한다. 정체 모를 남자의 말대로 그 세계는 석유 전쟁 중이며, 사람들은 석유를 놓고 서로를 죽이고 있다.

영화 속 바위 도시 시타델을 지배하는 잔인한 독재자 ‘임모탄’의 힘은 그가 독점한 석유와 물로부터 나온다. 가장 중요한 자원인 석유와 물이 고갈되고 온통 사막으로 변한 황폐한 세상에서는 이것들을 손에 넣은 자가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 시타델의 영웅이며 존경받는 사령관인 또 다른 주인공 ‘퓨리오사’의 책무는 거대한 석유 탱크를 매단 전투 트럭을 운전해 무기 농장과 가스 타운까지 사막을 횡단하는 것이다. 즉, 충분한 석유와 운전 실력이 생존 여부를 결정짓는 요소다. 어느 집단이나 공동체에도 소속되지 않고 외로운 늑대처럼 홀로 세상을 떠도는 맥스의 독립적인 삶 또한 이 두 가지를 갖췄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임모탄이 선심 쓰듯 물탱크의 밸브를 열자 물 한 방울이라도 더 얻겠다고 뛰어들어 아귀다툼하는 시타델 주민들의 모습은 핵전쟁 이후의 세계에서 그들이 가혹한 폭력만이 아니라 물자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영화 초반, 퓨리오사는 석유를 가지러 열띤 배웅을 받으며 시타델을 떠나지만, 사실 그녀가 향하는 목적지는 가스 타운이 아닌 그녀의 고향 ‘녹색의 땅’이었다. 전투 트럭에는 임모탄의 다섯 아내가 시타델을 탈출하기 위해 몰래 타고 있다. 퓨리오사가 시타델로 납치되어 끌려오기 전 어린 시절을 보낸 녹색의 땅은 시타델과는 대척점에 있는 세계다. 영화 속에서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지만 ‘많은 어머니들’이 이끄는 곳이라는 점에서 여성을 오로지 자손을 얻기 위한 도구로 취급하는 임모탄의 가부장적 세계와 다른, 모성적 가치를 중시하는 자연 친화적 세계였으리라 짐작된다. 〈매드맥스〉는 일반적인 액션 영화와 달리 여성 인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 그리고 여성적 가치와 생태적 가치를 연결 짓는다는 점에서도 생태 여성주의적 세계관의 요소를 드러낸다.

이 세계관은 땅을 살아있는 ‘어머니 자연’으로 존중하고 숭배한다는 점에서, 땅을 마구잡이로 파헤쳐 인간에게 필요한 것들을 짜낼 수 있는 ‘죽은 자원’으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대척점에 있다. 페미니즘 이론가 캐럴린 머천트(Carolyn Merchant)는 17세기 이전까지 자연을 어머니 대지로 보는 유기론적 관점이 우세했으나, 과학 혁명 이후 근대 과학의 발전과 함께 자연을 기계적 이미지로 구성하는 문화적 전이가 일어났다고 설명한다. 어머니를 살육하고 몸을 절단하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유기체이자 양육하는 어머니로서 지구의 이미지는 지구에 대한 과도한 개발과 착취를 제한하는 문화적 규제로 작용했다. 그러나 17세기에 자연 과학은 자연을 기계적 이미지로 인식함으로써 착취와 개발을 정당화하기 시작했다.[8] 석유든 석탄이든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라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자연이 토해 내도록 만들어야 했다. 마치 암소 젖을 짜내듯 여자들로부터 모유를 짜내는 장면과 다섯 아내를 ‘내 소유물’이라고 주장하는 임모탄의 소유욕은, 끝을 모르는 인간 중심적 욕망이 세상을 파괴했음에도 시타델이 여전히 그러한 착취와 소유의 원칙을 기반으로 세워졌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퓨리오사가 시타델에서 떠나온 날짜를 하루하루 세면서, 꿈에 그리던 ‘녹색의 땅’은 자원 고갈을 견디지 못하고 이미 지상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간신히 임모탄의 추적에서 벗어나 녹색의 땅을 지키는 비블리오족을 만났지만, 녹색의 땅은 물이 마르면서 까마귀 떼만 들끓는 폐허로 변했고 살아남아 그곳을 지키는 여자들은 채 열 명도 되지 않았다. 퓨리오사 일행은 자유는 얻었을지 몰라도 생존은 불확실한 위기에 처한다. 퓨리오사는 바이크를 타고 소금 사막을 건너 새로운 땅을 찾겠다는 계획을 세우지만, 결국 맥스의 설득에 따라 자신이 목숨을 걸고 탈출한 곳, 물과 석유가 있는 시타델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녀가 꿈꾸는 유토피아는 회상 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현실의 세계에서 생존하려면 불확실한 유토피아를 쫓을 것이 아니라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가 그곳을 변혁해야 한다. 그것이 퓨리오사의 선택이었다.

〈매드맥스〉에서 디스토피아의 시작은 핵전쟁이다. 핵으로 인해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 되었다.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의 소설 《로드(The Road)》의 설정도 이와 유사하다. 핵전쟁이 일어나 방사능 낙진이 하늘을 가리면서 인간을 제외한 지상의 모든 동식물이 멸종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아버지와 아들은 석유 없는 세상에서 어렵게 구한 약간의 식료품과 생필품을 카트에 싣고 오직 두 발로만 이동해야 한다. 《로드》에서 재앙의 원인은 기후 변화가 아님에도, 이 작품은 기후 변화 소설로 분류된다. 핵전쟁이 기상 이상을 초래하며, 이것이 이미 심각한 타격을 입은 인류를 더욱 치명적으로 멸망을 향해 몰아가기 때문이다. 〈매드맥스〉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핵전쟁으로 복구할 수 없을 만큼 무너진 세계의 모습은 인류세에 인류의 생존에 있어 점점 위협적으로 변해 가는 세계의 극단적인 미래상이다. 석유만이 아니라 물 자원의 과도한 사용으로 이미 많은 나라가 심각한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고, 열대 우림의 무분별한 벌목으로 인해 무섭도록 빠르게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매드맥스〉나 《로드》와 같이 인류 문명이 붕괴된 이후의 세계를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가 최근 유행하는 현상은, 점점 현실로 다가오는 파국을 감지하는 우리의 무의식 속 불안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후 변화를 가속화하는 화석 연료는 이러한 불길한 디스토피아가 현실화 될 가능성을 높이는 결정적 요소이다. 문제는 우리의 현대적 삶과 문명이 이 화석 연료에 너무도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화석 연료가 제공한 막대한 에너지는 인간의 삶을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다. 화석 연료가 가져온 변화는 기하급수적 경제 성장이나 기술 문명의 발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 측면에도 전방위적인 영향을 끼치면서 인류의 삶 전체를 새로운 국면으로 진입시켰다. 사회학자 임레 세만(Imre Szeman)과 도미닉 보이어(Dominic Boyer)는 근대성을 형성한 강한 힘 중의 하나가 에너지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근대성의 경험에서 상품과 서비스의 증대와, 경제 성장은 모두 에너지 사용이 급격히 늘어난 결과이며, 근대와 연결되는 역량과 자유, 여가 시간, 이동성 모두 화석 연료 덕분이라는 것이다.[9] 미국의 사상가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20세기 초반 노예제의 죄악으로부터 미국을 자유롭게 만들어 준 석탄의 힘을 찬양했다. 석탄의 힘이 노예 노동을 대체해 주었으므로 미국은 경제 성장을 포기하지 않고도 노예제를 폐지할 수 있었다. 레닌은 석유왕과 석유 주주들에 맞선 전쟁을 선포했지만, 그 이유는 그들이 충분한 양의 석유와 석탄 생산을 거부함으로써 노동 계급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화석 연료는 농업 국가 러시아를 근대적인 공산주의 공업 국가로 나아갈 수 있게 해줄 동력이었다. 그렇기에 차크라바티는 “근대 자유의 집은 끝없이 팽창하는 화석 연료 사용을 기반으로 세워졌다”고 말했다.[10]

화석 연료는 증기 기관을 발전시켜 처음으로 농업 노동을 도시 공장으로 전환하는 조건을 마련했고, 이래서 대규모 제조업과 근대적 도시가 발전할 수 있었다. 티머시 미첼은 1859년 석유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강력한 자본주의적 재생산과 팽창이 이뤄졌다고 말한다. 석유로부터 우리가 아는 지금의 자본주의가 흘러나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최초의 거대 다국적 기업(스탠다드 오일, 듀퐁), 사적 운송 수단의 사회적 시스템(자동차, 항공기, 고속도로, 교외, 도시 내 게토화), 상대적으로 저렴한 소비성 상품에 접근하게 해준 환경과 노동 비용까지 모두 포함된다. 이처럼 석유와 자본은 불가분하게 얽혀 있어서 석유 화학 경제의 종말은 엄청난 재앙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므로 “화석 연료 없는 삶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자본주의 체제 바깥에서의 삶이 가능한가”라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과도한 탄소 배출로 인한 지구 온난화가 이제는 ‘온난화’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하고 ‘지구 가열(global heating)’로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판인데도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확실한 조치가 실행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석유 없는 삶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석유 자본주의의 딜레마


퓨리오사는 녹색의 땅이 사라졌음을 알게 된 뒤, 또 다른 유토피아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자신이 벗어났던 곳으로 되돌아가기로 선택한다.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알지만 그렇다고 화석 연료를 포기할 수도 없는 우리의 딜레마가 떠오른다. 소금 사막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향하는 것은, 핵전쟁으로 지구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져 버린 현실을 부정하는 일종의 자살 행위가 될지 모른다. 퓨리오사는 구원이 기다리는 녹색의 땅은 지상 어디에도 없다는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여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는 떠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 독재자의 손에서 삶을 유지할 자원을 되찾아 오고 억눌린 사람들을 해방함으로써, 현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위에서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찾으려 한다. 퓨리오사와 일행들이 목숨을 건 싸움 끝에 임모탄의 차에 그의 시체를 싣고 돌아와 시타델의 꼭대기로 올라갈 때, 소수의 특권층에게만 허락되던 리프트에 너나 할 것 없이 주민들이 올라탄다. 임모탄의 통제하에 있던 물탱크의 밸브를 열어 주민들에게 물을 뿌려 주는 장면은 이제 시타델이 더는 억압과 공포로 지배되는 세계가 아닐 것이라는 희망찬 미래를 암시한다.

그러나 퓨리오사는 바로 시타델의 석유와 물 때문에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매드맥스〉에서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살육이 펼쳐지지만 어쨌든 그 세계에는 석유가 있고, 석유 덕분에 그나마 생존이 유지된다. 석유를 어디서 구해오는지, 핵전쟁 이전에 남은 여분을 아직 쓰고 있는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석유가 언젠가 완전히 고갈된 후에는 어떻게 될지, 그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말이 없다. 석유가 완전히 사라진 《로드》의 세계는 〈매드맥스〉보다도 어둡고 참혹하다. 식량을 재배할 방법이 없으니 지하실이나 창고에 보관된 통조림 등 보존 식품을 뒤지는 수밖에 없고, 이마저도 거의 다 떨어져 서 급기야 아이와 여자들부터 잡아먹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된다. 핵전쟁 이후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상상해 본다면 〈매드맥스〉보다는 《로드》의 세계에 가까울 것 같다. 퓨리오사가 임모탄보다 훨씬 나은 지도자가 되리라는 점은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그녀라도 어딘가에서 석유가 펑펑 솟아나는 유정을 뚫거나 수원지를 찾아내지 않는 한, 인심 좋게 물탱크 밸브를 아무 때고 열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매드맥스〉의 세계는 훨씬 축소됐을 뿐, 여전히 석유라는 윤활유로 돌아가는 기존의 화석 연료 경제 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시타델을 떠나 와서 맞는 첫 번째 밤, 퓨리오사 일행은 사막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사라진 과거의 문명에 대한 추억에 잠긴다. 그때 쏘아 올린 인공위성들이 아직도 궤도를 돌면서 수신자 없는 전파를 발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느끼는 감정은 잃어버린 현대 기술 문명에 대한 향수다. 그러한 기술 문명을 가능케 한 물질적 기반이 석유로 대표되는 화석 연료라는 점에서, 그들의 향수는 문학 비평가 스테파니 레메나거(Stephanie LeManger)의 용어를 빌어 ‘페트로멜랑콜리아(petromelancholia)’라고 할 수 있다. ‘멜랑콜리아’는 ‘우울증’을 뜻하지만 여기에서의 우울증은 석유로 인한 것이다. 레메나거는 페트로멜랑콜리아를 “전통적인 석유 자원에 대해 느끼는 슬픔과 그것으로 지속되는 기쁨”으로 정의한다. 페트로멜랑콜리아는 석유 자원의 이용에 대해 느끼는 죄의식을 더해 줄 수는 있어도 반드시 이에 반대하는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떻게 해도 석유에 기반한 문화를 극복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서, 결국 이 장애물에 맞서 행동할 능력의 마비로 귀결되는 경우가 더 많다.[11]

영화 내내 사막을 누비는 화려한 자동차들은 과거를 상징하지도, 미래를 나타내지도 않고 영원한 현재의 계속이라는 자본주의의 약속을 상기할 뿐이다. 그 약속은 결코 실현될 수 없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인류세의 재난으로 가득한 현실과도 어긋난다는 점에서, 욕망으로 인간의 눈을 가리는 물신이며 진정한 계시에 눈뜨지 못하게 막는 장애물로 기능한다. 임모탄과 그를 추종하는 워보이들은 물론, 맥스와 퓨리오사조차도 종말의 의미가 석유와 전기로 지탱되는 세계가 끝났다는 것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상실을 거부하므로 적절한 애도를 할 수 없으며, 이는 화석 경제 체제 바깥의 미래를 상상하기보다는 다시 본래의 체제로 복귀하는 결말로 끝난다. 영화는 장르물의 관습적 한계 안에 갇혀 삶의 조건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상황에서도 석유와 전기 없는 대안적 삶을 상상하는 데 한계를 드러낸다.

 

기후 정의와 기후 부채


리처드 하인버그는 《미래에서 온 편지》에서 기후 변화와 에너지 자원 고갈은 많은 문제들 중에서도 최우선 순위에 해당하며, 제각기 달라 보이는 문제들이 실은 화석 연료는 하나의 원인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밤이면 온 집안에 불을 환히 밝히고, 바깥 날씨가 덥건 춥건 늘 최적의 실내 온도를 유지하며, 식탁 가득 전 세계에서 배와 비행기로 운송된 음식들을 차려 놓는 생활을 포기할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든 지금의 생산량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전기 생산량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니 전기를 포기하지 않고도 탄소 배출은 줄일 수 있다는 여러 대안이나, 자원 고갈은 그리 심각하게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일각의 주장들이 달콤하게 들릴 수밖에 없다.

석유가 곧 바닥을 드러낼 거라는 경고는 1972년 《성장의 한계》가 출간되고, 마치 이 불길한 예언이 현실임을 보여 주기라도 하듯 1973년 1차 오일 쇼크가 터지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오일 쇼크의 충격이 가시고 다시 저유가가 지속되면서 이 경고는 곧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혔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피크 오일론이 제기되면서 되살아났다. 피크 오일(peak oil)은 세계의 석유 채취가 정점에 달하는 시기를 가리키며, 그 이후로는 전 세계 석유 사용 가능량이 감소하리라 예상한다. 국제에너지기구 (IEA)는 2006년 이미 재래식 석유는 생산량의 정점을 지났다고 했으나, 에너지 절약과 채굴 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고갈 시점을 조금씩 뒤로 미루며 화석 연료 체제는 생명을 연장하고 있다. 특히 미국에서 최근 대규모로 개발되는 셰일 가스의 영향이 컸다. 셰일 가스 덕분에 미국은 석유 고갈은커녕 산유국 지위로 올라서서 중동에 덜 의존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셰일 가스는 화석 연료 경제를 조금 더 연장해 줄 수 있을 뿐, 근본적인 대안이 되지는 못한다. 셰일 가스는 모래와 물, 화학용품의 혼합물을 고압으로 분사해 퇴적암을 파쇄하는 공법으로 추출한다. 쉽게 말해 기존 석유는 우물에서 물을 퍼올리듯 석유를 퍼내는 식이지만, 셰일 가스는 바위에서 물을 짜내듯이 암석이 머금은 석유를 짜내야 한다. 당연히 채굴 비용이 훨씬 더 든다. 고유가 상황이 아닌 이상 셰일 가스는 경쟁력이 없다. 또 셰일 가스를 추출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사용되고, 화학용품 때문에 환경 오염이 유발되며, 지반 침하가 우려된다는 점 때문에 무조건 환영할 수만도 없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탄소 감축 문제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양쪽이 마치 낭떠러지 끝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모양새다. 우리에게 허용된 탄소 예산은 빠르게 줄어들고 지구의 온도는 그만큼 빨리 상승한다. 하기 싫은 숙제를 미루고 미루다가 더는 미룰 수 없게 된 아이처럼 각국 정부들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할 상황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탄소 절감 대책을 요구하는 줄의 반대쪽 끝에는 강력한 화석 연료 기업들, 그리고 지금까지 그에 의존해 굴러갔던 화석 연료 자본주의 경제 체제, 그리고 화석 연료가 제공하는 이 모든 풍요와 안락을 포기하기 싫은 우리들의 욕망이 있다. 이 줄다리기가 팽팽하게 이어지는 한 실효성 있는 조치가 과감하게 취해질 가능성은 적다. 유엔환경계획(UNEP)이 발표한 〈2021년도 생산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주요 탄소 배출국 15개국이 향후 20년간 생산할 화석 연료는 지구 온난화 상승 폭을 1.5도로 제한하는 데 필요한 양의 110퍼센트에 달한다. 이를 의식하듯 2021년 10월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당사국 총회(COP26)의 핵심 의제는 화석 연료 감축이었지만, 실제 분위기는 영 미온적이었다. 세계 2위 석탄 수출국인 호주와 세계 최대 원유 수출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2050년, 혹은 2060년까지 국내 이산화 탄소 순배출량을 제로로 만들겠다며 탄소 중립 선언에 동참하면서도 석탄 채굴과 수출은 이어가겠다거나, 원유와 가스 생산량 자체는 줄이지 않고 오히려 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처럼 대부분의 나라들이 서로 눈치만 볼 뿐, 손안 가득 사탕을 움켜쥐고 좁은 항아리 입구에서 손을 빼지 못하는 원숭이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심지어 미국은 판데믹을 핑계로 슬그머니 석탄 채굴량을 늘리기까지 했다.

화석 연료 감축 문제는 인류세의 문제 대부분이 그렇듯 사회, 정치, 경제 전반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역사적으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이 막대한 양의 화석 연료를 독점하다시피 했고, 지금도 제3 세계에 비해 엄청난 양을 사용하면서 그만큼 많은 탄소를 배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화석 연료 문제는 ‘쓰는 사람 따로, 돈 내는 사람 따로’가 되기 쉽다. 현재 이산화 탄소 배출량 1위 국가는 중국이며 미국, 인도가 그 뒤를 따르고 있다.[12] 이렇게 보면 중국이 최악의 기후 악당인 것 같지만 1850년 이래 누적 배출량으로 따져보면 미국이 중국의 두 배에 가깝다.[13] 그리고 중국이나 인도 같은 제3 세계 국가들의 경우, 선진국들이 탄소 배출량이 많고 환경 오염이 심한 제조업들을 이 나라들로 이전함으로써 배출량이 늘어난 점도 고려해야 한다. 1인당 배출량으로 따져도 어느 나라가 이 문제에 가장 책임이 큰지는 달라진다. 미국 컨설팅 업체 로디움 그룹(Rhodium Group)에 따르면, 2019년을 기준으로 중국(인구 13억 9800만 명)의 1인당 평균 온실가스 배출량은 연간 10.1톤으로, 연간 17.6톤에 달한 미국(인구 3억 2800만 명)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이러한 차이는 ‘미국적 생활 방식’에서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제 환경 협력 단체인 ‘기후 투명성(Climate Transparency)’은 미국인들은 소득이 높아 더 많이 소비하고, 연료 소모가 큰 차를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인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더 자주 비행기를 탄다고 2021년 보고서에서 밝혔다.

〈매드맥스〉에서 등장인물들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멋진 자동차들은 막대한 양의 화석 연료를 소비하고 탄소를 배출하는 미국 사회의 특성을 잘 보여 준다. 미국은 엄청난 면적의 국토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럽 등 다른 국가에 비해 철도망이 매우 빈약하다. 미국에서 여행하거나 생활하려면 자동차 운전은 필수다. 미국 문화에서 자동차는 다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이동할 수 있는 자유와 독립의 상징인 동시에, 〈위대한 개츠비〉에서 제이 개츠비가 타고 다니는 화려한 노란색 자동차처럼 자신의 부를 자랑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에너지 독립’을 중시하는 미국적 사고는 1970년대 석유 위기 이후, 저렴한 석유가 미국적 생활 방식에 필수 불가결한 요소이며, 석유 공급에 대한 위협은 미국 시민의 자유와 자립에 대한 위협이기도 하다는 공적 담론에 깊이 각인돼 있다.[14] 영화에서는 핵전쟁으로 지구가 멸망해도 멋진 자동차를 포기할 수 없는 미국인들의 광적인 집착이 엿보인다. 이처럼 에너지를 낭비하는 삶은 미국이 전 세계의 석유를 빨아들이듯 저렴한 가격으로 수입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이 안정적인 석유 공급을 보장받기 위해 오랫동안 여러 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중동 정치에 개입해 왔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2006년 1월 연두 교서에서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은 “미국은 석유에 중독되어 있다”라는 말까지 했다.

화석 연료의 혜택을 보지 못한 개발 도상국과 저개발국들이 화석 연료로 인한 기후 변화의 대가를 똑같이, 아니 어쩌면 더 혹독하게 치러야 하는 불공정한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에 따라, 최근 ‘기후 정의’에 대한 논의가 대두하고 있다. 기후 정의 논의는 15세기 ‘지리상의 발견(Geographical Discoveries)’이 시작되면서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토착 문명을 멸망시킨 뒤 금과 은을 비롯한 자원을 착취하고, 토착민들을 노예로 끌고 왔던 시기부터 이미 구세계와 신세계 간의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데 주목한다. 제이슨 무어처럼 자본세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산업 혁명보다는 이 시점을 인류에 의한 전면적인 지구 환경의 변화가 시작된 시기로 보고 있다. 이러한 인식에서 나온 개념이 1992년 칠레 정치생태학연구소가 제안한 ‘생태 부채(Ecological debt)’이다. 오늘날 선진국들의 발전은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의 생태 자원을 착취, 약탈한 덕이며 선진국들은 제3 세계가 진 금융 부채를 갚도록 요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제3 세계에 빚을 갚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기후 문제도 이와 비슷하게 선진국들이 200년간 산업화를 위해 배출한 온실가스를 전 세계에 진 ‘기후 부채(Climate debt)’로 보고, 이에 책임질 것을 요구한다. 현실적으로 선진국들이 이러한 책임을 인정하고 수백 년간 쌓인 빚을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갚겠다고 나설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문제 제기는 적어도 환경 문제의 본질이 정치적, 역사적, 사회적 국면들과 깊이 얽혀 있으며, 그러한 사정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래서 환경운동가 나오미 클라인(Naomi Klein)은 기후 변화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세계 질서를 해체하고, ‘끝나지 않은 해방 사업’을 완수하려는 노력에 전 세계 사회 정의 세력을 결합할 기회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15] 기후 변화 문제를 초래한 체제의 근본적 변혁 없이는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기후 변화 말고 체제 변화(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라는 기후 정의 운동의 구호를 떠올리게 한다.

화석 연료 없는 삶은 고사하고 지금보다 전기를 적게 쓰는 삶을 나 자신부터 실천할 수 있을까? 사실 쉽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직면한 문제들을 한 방에 깔끔하게 해결해 줄 마법의 지팡이는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신재생 에너지, 원자력 발전, 친환경 기술도 에너지 문제를 완전히 해결해 주지는 못한다. 석탄을 사용하는 화력 발전이나 원자력 발전을 대체할 태양열과 풍력 발전 등 신재생 에너지 사업이 독일과 영국 등 유럽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되며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고 있다. 2020년 유럽연합에서 신재생 에너지로 전력을 얻는 비율이 38퍼센트에 이르며 화석 연료의 비율(37퍼센트)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유럽 국가들은 2050년까지 탄소 중립을 달성한다는 목표 아래 신재생 에너지가 전력 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늘려 가고 있다. 그러나 신재생 에너지의 경우, 전력 공급의 불안정성이라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전기는 잠깐만 정전이 돼도 막대한 피해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정적인 공급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햇빛이나 바람 같은 자연의 힘은 변수가 너무 많다. 2019년 미국 텍사스 주에서는 강력한 한파가 이 지역 풍력 발전 설비를 망가뜨려 풍력 터빈과 핵심 부품들이 꽁꽁 얼어버리는 바람에 약 400만 가구가 전력을 공급받지 못했다. 또한 유럽 풍력 발전은 북해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에 의존하는데, 2020년 바람이 너무 적게 불어 전기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었다. 태양광 역시 실외에 설치해 태양을 마주 보게 해야 하는 시설이다 보니, 눈·비·강풍·산사태 등 자연 현상과 인간·동물의 공격에 노출되고 고장에 취약한 문제가 따른다.

그렇다 보니 신재생 에너지에 적극적이던 국가들도 슬금슬금 다시 화력 발전으로 회귀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20년 풍력 발전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은 유럽 국가들은 전체 전력 생산에서 석탄과 천연가스의 비중을 늘렸다. 빌 게이츠는 신재생 에너지의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좀 더 안전하고 신뢰할 만한 대안으로 소규모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제안했다. 그가 보기에 소규모 원자력 발전소는 탄소 배출을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지금 우리가 누리는 기술 문명의 혜택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다. 과학 기술로 돌파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빌 게이츠의 제안은 그가 개발 중인 ‘차세대 핵반응로’가 언제 실용화될지 확실치 않다는 점만 제외하면 의미가 있는 기술적 대안이며, 《빌 게이츠,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에서[16] 탄소 감축을 위한 정부 정책의 중요성을 비중 있게 다뤘다는 측면에서, 그의 제안은 기술이나 시장에만 의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 해결책들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는 목마른 사람이 바닷물을 들이키듯, 욕망이 욕망을 부르고 소비가 더 많은 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의 구조에 있다. 지구로부터 최후의 한 방울까지 악착같이 짜내려 하는 욕망의 체제에 대한 반성적 성찰 없이는 유한한 자원은 그 시기가 언제가 되건 점점 고갈되어 갈 것이고, 우리가 현재에 눈멀어 미래 세대를 포함해 더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에게 넘기는 부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다. 〈매드맥스〉의 결말에서 퓨리오사가 시타델을 접수했는데도 이 승리에 누구보다 큰 공을 세운 맥스는 그곳에 정착하지 않고 다시 어디론가 떠난다. 물론 맥스는 미국 문화에서 하나의 원형(archetype)이 된 황야의 방랑자이고, 그가 떠나는 것은 영화의 속편을 위한 암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시타델은 새로운 미래라기보다는 여전히 구원을 기다려야 하는, 과거에 속한 세계이다. 맥스에게 아직도 황야를 방랑할 차와 석유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기보다 저주다.

최근 탄소 중립에 대한 세계 각국 정상들의 회담이 구체적인 행동이 아니라 말뿐인 선언으로 끝나는 것은 급격하고 전면적인 변화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저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그럴까? 타협 가능한 선까지 점진적으로 수용하는 온건한 변화만이 가능할까? 의외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과격하고 전면적인 변화가 가능하지 않다면, 그건 우리가 불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가 ‘정상’이라고 굳게 믿어왔던 기본 원칙들이 완전히 바뀌는 ‘뉴 노멀(New Normal)의 시대’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방식으로 어느 날 갑자기 닥칠 수도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공항이 텅 비고 학교와 직장에 가지 못하고 집에 갇혀서 인터넷으로 소통하는 세상을 누가 예상했을까? 우리는 하루아침에 도시 전체가 봉쇄되고 기업에 밀려 점차 역할이 축소되어 가던 작은 정부들이 막대한 예산을 풀면서 사태의 전면에 나서는 전례 없는 상황을 목도했다. 자영업자들이 문을 닫고 기업들이 경제 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받아도 각국 정부들은 극단적인 봉쇄 조치를 단행했다. 환경 사상가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은 “기후 변화도 판데믹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심각한 인류의 위기인데, 왜 기후 변화는 이런 과격한 조치를 취할 근거가 되지 못한단 말인가”라고 질문한다.[17] 라투르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앞으로 다가올 지구 온난화와 경제 위기에 대한 일종의 예행연습이었다고 말했다.[18] 의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질병과 노화를 정복해 나가고 있다고 믿었던 인류를 괴롭히는 판데믹은 단순히 하나의 강력한 바이러스 출현으로 빚어진 사태가 아니다.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그리고 그 연결 고리 안에는 당연히 화석 연료도 포함된다.
[1]
Will Steffen, Paul J. Crutzen, and John R. McNeill, 〈The Anthropocene: Are Humans Now Overwhelming the Great Forces of Nature〉, 《AMBIO: A Journal of the Human Environment 》, 36(8), 2007.12.1, pp.616-618.
[2]
석탄을 용기에 넣고 밀폐해서 1000도씨 내외로 가열하면, 수분이나 휘발분이 가스가 되어 방출되고 남은 것이 코크스로, 탄소와 회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3]
라즈 파텔, 제이슨 무어(백우진, 이경숙 譯), 《저렴한 것들의 세계사》, 북돋움, 2020, 226-227쪽.
[4]
리처드 하인버그(송광섭, 송기원 譯), 《미래에서 온 편지(Peak Everything: Waking Up to the Century of Declines)》, 부키, 2010, 67쪽.
[5]
티모시 미첼(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譯), 《탄소 민주주의》, 생각비행, 2017, 32쪽.
[6]
인간 활동에 의한 온실가스 배출을 최대한 줄이고, 남은 온실가스는 흡수, 제거해서 실질적인 배출량이 0(Zero)이 되는 개념이다. 즉, 배출되는 탄소와 흡수되는 탄소량을 같게 해 탄소 순배출이 0이 되게 하는 것으로, 이에 탄소 중립을 ‘넷-제로’라 부른다
[7]
이를 위해 공기 중 이산화 탄소를 포집해 땅속에 매장하는 기술 등이 연구되고 있으나 아직 실용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를 비롯한 지구 공학적 시도에 관해서는 5장에서 상세히 다루겠다.
[8]
Carolyn Merchant, 《The Death of Nature》, HarperSanFrancisco, 1990.
[9]
Energy Humanities, Imre Szeman and Ominic Boyer, Johns Hopkins Univ. Pr, 2017, pp.2.
[10]
Dipesh Chakrabarty, 〈The Climate of History: Four Theses〉, 《Critical Inquiriy》 Vol.35, 2013.9.29, pp.208
[11]
LeMenager, Stephanie, 《Living Oil: Petroleum Culture in the American Century》, Oxford Univ Pr, 2014, pp.102-103
[12]
2019년 한 해에만 중국이 배출한 이산화탄소 등가물(모든 온실가스를 이산화탄소로 환산한 것)은 141억 미터톤에 달한다. 이는 전 세계 배출량의 4분의 1이 넘는 양이다. 반면, 미국은 지구 전체 배출량의 11퍼센트에 해당하는 57억 미터톤을 배출한 것으로 집계됐다. 인도와 유럽 연합(EU)이 각각 지구 전체 배출량의 6.6퍼센트, 6.4퍼센트로 뒤를 이었다.
[13]
영국의 기후 에너지 정책 기관인 카본브리프(Carbon Brief)에 따르면 1850년 이래 중국과 미국이 방출한 이산화탄소량은 각각 2840억 톤, 5090억 톤이다. 미국이 배출한 이산화 탄소량이 중국의 두 배 가까이에 이르는 셈이다.
[14]
미국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차지하기 위해 각종 분쟁에 개입해 왔으며, 특히 트럼프 대통령은 셰일가스 채굴로 미국 내 에너지 생산을 확대하여 외국산 석유 의존을 줄이는 ‘에너지 독립’을 선언했다.
[15]
나오미 클라인(이순희 譯),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자본주의 대 기후(This Changes Everything: Capitalism vs. the Climate)》, 열린책들, 2016.
[16]
<빌 게이츠, 기후재앙을 피하는 법> 빌 게이츠 저, 김민주, 이욱 역. 김영사. 2021.
[17]
Andreas Malm, 《Corona, Climate, Chronic Emergency》, Verso Books, 2020.
[18]
Bruno Latour, 〈Is This a Dress Rehearsal?〉, 《Critical Inquiry》 47(52), 2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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