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 시나리오
5화

판데믹 이후의 세계 ; 《스테이션 일레븐》

2003년 개봉한 대니 보일 감독의 좀비 영화 〈28일 후(28 Days Later…)〉는 텅 빈 영국 런던 시내 한복판을 넋 나간 듯 터벅터벅 걸어가는 한 남자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시민과 관광객으로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던 국회의사당 앞 거리, 살아 있는 것이라곤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휴지 조각만 날린다. 주인공 ‘짐’이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있던 사이, 인간의 폭력성을 극대화하는 ‘분노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비로 변해버린 것이다. 바이러스가 휩쓸고 간 세계의 스산하다 못해 불길한 모습은 오프닝 장면부터 충격으로 다가온다. 2021년, 우리는 세상의 종말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을 재난 영화가 아닌 뉴스를 통해 보았다. 인적이 끊어진 유럽 대도시의 유명 관광지들, 시체가 떠다니는 갠지스 강의 모습은 너무 낯설어서 도무지 현실 같지 않았다. 코로나19라는 생소한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마스크 쓰기와 사회적 거리 두기가 삶의 새로운 규칙이 된 여름을 설마 두 번이나 맞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적어도 우리가 꿈꾸고 기대했던 미래는 아니었다.

이제껏 우리가 바라던 미래는 판데믹의 공포로 마비된 디스토피아적 세계가 아니라 과학 기술의 발달로 불가능이 현실이 되는 멋진 신세계였을 것이다. 나노 기술, 로봇 공학, 자율 주행 자동차, 사물 인터넷, 유전자 복제 ……. SF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보았을 법한 첨단 과학 기술들은 4차 산업혁명을 통해 펼쳐질 무한한 가능성의 미래를 약속했다. 그러나 전 세계를 습격한 판데믹 앞에서 과학 기술은 기대한 만큼의 위력을 발휘해 주지 못했다. 대형 제약사들이 급히 개발한 백신 접종이 유럽과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을 중심으로 시작되면서 코로나19 종식에 대한 기대를 모았다가도 이제 좀 끝이 보일 만하면 밀려간 파도가 다시 몰아치듯 확진자가 다시 늘어났다. 모두의 소망대로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대규모 감염이 잦아든다 해도, 이미 많은 이들이 예감하고 있듯이 코로나19 이후의 삶의 모습은 이전과 똑같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익숙하게 알아 온 세계는 이미 거대한 변화 속으로 진입했으며, 인류는 앞으로 점점 더 그 변화가 가속화되는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인류세와 전염병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언제, 어디에서 출현했는지는 아직 정확히 규명된 바는 없다. 2020년 3월 중국 우한의 야생 동물을 거래하는 한 시장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고, 중국 실험실에서부터 퍼졌다는 설도 있지만, 그 무엇 하나 확실치는 않다. 비단 중국이 아니라 그 어디에서든 이미 변종 바이러스가 출현할 조건은 충분히 무르익어 있었다. 아프리카처럼 고립된 지역이 아닌, 전 세계를 대상으로 활발히 교역하는 중국에서 터졌기에 바이러스는 더 쉽게, 단시간에 전파될 수 있었을 것이다.

코로나19의 출현은 인류세에 일어난 지구 환경의 변화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인간이 거주와 자원 채취, 식량 재배를 위해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면서 야생 동물의 서식지가 크게 감소했고, 이는 인간과 야생 동물의 거주지 경계를 무너뜨리고 접촉을 늘려 인수 공통 전염병(zoonosis)의 발생이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울창한 열대 삼림이 벌목으로 사라지면 바이러스와 그 숙주인 야생 동물들이 나름대로 평화롭게 공존하며 살아가던 삶의 터전이 파괴되면서 심각한 결과가 초래된다. 숙주를 잃은 바이러스들은 새로운 숙주를 찾아 인간 세계로 침투해 올 수밖에 없다. 예전 같으면 서로의 활동 영역이 잘 겹치지 않는 박쥐와 인간이 만날 일이 드물었겠지만, 버젓이 도시 한복판 시장에서 박쥐 고기를 파는 세상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또 다양한 생물들이 어울려 사는 숲이 파괴되면 생물 다양성이 감소할 수밖에 없는데, 이것도 팬데믹의 발생 확률을 높이는 요인이 된다. 생물종이 풍부할 때는 감염 사태가 억제되는 희석 효과(dilution effect)가 작용한다. 특정 바이러스의 숙주가 될 수 있는 생물과 그렇지 않은 생물들이 다양하게 섞여 있으면 바이러스의 전파 속도가 늦춰진다. 생물 다양성의 고갈은 이러한 완충 지대를 제거해 인수 공통 감염병의 위험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온다. 코로나19 이전에 유행했던 1997년 홍콩 조류 독감, 2009년 미국에서의 돼지 독감, 2012년 메르스, 서아프리카의 에볼라 바이러스 등 인수 공통 전염병이 잇따라 발병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수 공통 전염병의 발병 빈도가 점차 늘어날 뿐만 아니라 그 주기도 짧아지고 있던 터라, 코로나19 사태 이전에 이미 많은 학자들이 대규모 판데믹의 발생을 우려했다.

판데믹은 숲의 파괴 이외에 기후 변화와도 관계가 깊다. 야생 동물들은 숲의 파괴로 생활 터전을 잃어 이동하기도 하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에도 살던 곳을 떠난다. 더위를 피해 전에 살지 않던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지금껏 만난 적 없던 생물들과의 접촉이 증가하고 이로 인해 새로운 바이러스가 출현할 가능성은 더 커진다. 또 더운 지역일수록 바이러스가 더 빨리, 더 많이 증식하기 때문에 지구 온난화는 뎅기열, 말라리아, 콜레라 등 열대성 전염병이 퍼지기에 적합한 환경을 만든다. 국제 연구 공동체 랜싯 카운트다운(Lancet Countdown)이 지난 2021년 10월 20일 발표한 〈건강과 기후 변화에 대한 2021 랜싯 카운트다운 보고서: 건강한 미래를 위한 코드 레드〉에서는 “기후에 민감한 전염병은 전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으며, 모든 전염병의 전염에 대한 환경적 적합성이 증가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지구 온난화로 극지방의 빙하가 녹으면서 페스트균과 같이 오래전 자취를 감췄던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다시 출현할 수 있다는 경고마저 나오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전체적인 지구 환경의 변화는 이처럼 인간이 긴 세월에 걸쳐 생존을 위해 적응해 온 조건들을 파괴적인 수준으로 교란하고 있다.

판데믹 발생에 결정적으로 마지막 방아쇠를 당기는 또 하나의 요소는 전 지구적인 교통의 발전이다. 이렇게 숲이 사라진 자리에서 따듯해진 기온 덕분에 번성한 바이러스는 거의 하루 안에 전 세계 어디든 이동할 수 있게 해주는 촘촘한 교통망을 타고 기하급수적으로 퍼져 나간다. 판데믹의 역사는 사실상 교통수단의 발전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안드레아스 말름은 “초기 근대의 감염병 역사는 상업 자본의 잉크로 집필됐다”고 말한다. 범선을 타고 몇 달이 걸려 대양을 건너는 항해에서는 감염병 환자들이 살아남을 수 없었지만, 산업 혁명 이후 등장한 증기선은 환자와 바이러스를 싣고 며칠 만에 대양을 횡단했다. 20세기 초반 악명을 떨친 스페인 독감은 식민지 사업을 위해 건설된 교통망을 타고 전 세계로 퍼져 ‘증기 기관이 운행한 판데믹’이라는 표현이 나왔을 정도였다. 당시 스페인 독감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까지 퍼져서 막대한 피해를 냈다. 이제 항공기를 탄 감염자는 잠복기가 끝나 증상이 발현하기도 전에 전 세계 끝에서 끝까지 이동할 수 있다.

이처럼 판데믹은 단지 바이러스의 출현이라는 의학적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요인들이 복잡하게 작용한다. 도시화와 인구 과밀로 인한 숲의 파괴, 교통망의 발달, 그리고 기후 변화는 모든 가용 자원을 최대한 빨아들여 더 빠른 속도로 시장에 내다 팔 상품으로 가공, 유통시키려는 자본의 힘에 의해 가속화된다. ‘지구의 허파’로 불리는 아마존 열대 우림의 60퍼센트가 분포한 브라질의 경우, 우파 정치인 자이르 보우소나루(Jair Messias Bolsonaro)가 정권을 잡고 개발 우선 정책을 펼치면서 무차별적으로 숲이 파괴되고 있다. 2014년 기니에서 시작된 에볼라 전염병의 확산 원인은 대규모 단일 경작 방식의 팜유 산업으로 과일 박쥐의 은신처가 파괴됐기 때문이었다. 전염병 학자 에릭 소디코프(Eric Sodicoff)의 연구는 2010년대 초반 마다가스카르의 광견병 확산이 2009년 쿠데타 이후 광산 채굴과 벌목 붐으로 인한 열대 우림 파괴가 그 배경에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숲의 파괴로 주민들의 삶은 불안정해지고 섬의 인프라, 보건 서비스, 위생 상태가 총체적으로 악화하면서 사회적 불안이 가속화됐다. 이렇게 급속히 변해 가는 생태계와 기후 조건에서 사람, 동물, 곤충, 미생물이 다양하게 얽힌 상호 관계가 파괴적인 양상으로 돌입하며 나타난 하나의 증후가 광견병 유행이었다. 인류세의 여러 문제와 마찬가지로, 백신이나 치료제를 통한 바이러스의 퇴치라는 단편적인 접근으로는 세계의 총체적 파국을 감당하기 어렵다.

 

파괴 뒤에 남은 고요한 세상


우리가 알던 세상이 어느 날 갑자기 끝나 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 에밀리 세인트존 멘델의 소설 《스테이션 일레븐》은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를 덮친 가상의 판데믹 ‘조지아 독감’으로 전 세계 인구의 99.9퍼센트가 사망한다는 설정으로, 인간이 사라진 세상을 쓸쓸하지만 아름답게 그려 낸다. 치명률이 너무 높고 전파 속도도 걷잡을 수 없이 빨라서 백신이고 치료제고 대응해 볼 틈도 없이 불과 몇 주 사이에 인류는 절멸 직전까지 간다. 소설은 눈 내리는 평온한 연말의 어느 하루,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극장에서 연극 〈리어왕〉의 막이 오르면서 시작하지만, 같은 시간 머나먼 미지의 나라 조지아에서 출현한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이미 비행기를 타고 캐나다로 들어온 상태였다. 다시 말해 극장 안의 관객 대부분이 죽음까지 길어야 몇 주를 넘기지 못할 운명이었다. 리어왕의 딸로 무대에 섰던 아역 배우 커스틴 레이몬드는 판데믹에서 살아남아 문명이 붕괴하고 20년 후, 어느 유랑 극단의 배우로 살아간다. TV도, 인터넷도, 극장도 없는 세상이지만 여전히 유랑 극단 단원들은 단출한 살림살이와 악기, 연극용 소도구들을 마차에 싣고 종말 이후의 세상을 떠돌며 소수의 생존자들을 위해 셰익스피어 극을 공연한다. 그들의 마차에는 “생존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라는 〈스타워즈〉의 대사가 페인트로 쓰여 있다. 조명도, 무대 장치도 없이 단원들이 폐허를 뒤져서 대충 수선한 의상을 입고 올리는 공연이지만, 사람들은 옹기종기 모여 모처럼의 공연을 즐기며 진지하게 과거 세계의 추억에 잠긴다.

《스테이션 일레븐》은 〈로드〉나 〈매드맥스〉처럼 문명이 붕괴한 이후 세상을 그리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물이지만, 문명 붕괴 후 20년이 지나 극단적인 폭력과 유혈 사태는 웬만큼 진정됐다는 설정 위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그 세계는 살기 위해 아귀다툼을 벌이는 약육강식의 지옥이 아니라, 문명의 혜택 없이 많은 불편과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손수 텃밭을 가꾸어 먹거리를 해결하고 자동차 대신 마차로 이동하는 평화롭고 서정적인 세계다. 국가도, 국경도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소규모 공동체를 이뤄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 도시의 불빛이 사라진 자리를 별빛으로 대신 채운 밤하늘이 그렇듯, 인간이 사라진 세상은 쓸쓸하고 적막하지만 고요하고 아름답다. 패션 잡지, 용도를 알 수 없는 유리 문진, 오래전 작동을 멈춘 시계처럼 쓸모를 잃어버린 과거 문명의 유물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도 구하기 힘든 희소성의 세계에서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매혹한다. 시간이 지나면 나쁜 기억은 잊히고 추억만 남듯이, 과거의 세계는 아직도 그 세상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이들에게 아스라한 향수의 대상이 된다. 유랑 극단이 공연하는 셰익스피어 극은 과거의 세상이 남긴 ‘가장 좋았던 것’의 상징이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에서 보듯이, 현실에서 팬데믹이 발생하고 진행되는 과정은 소설의 그것과 꽤 다르다. 실제로는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일수록 감염된 숙주가 빨리 죽음에 이르기 때문에 전파력은 낮다. 바이러스의 입장에서는 숙주를 최대한 오래 살려 두어 다른 사람들과의 접촉을 늘리는 것이 더 효율적인 생존 전략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전 세계 치명률은 지역, 인구 집단의 연령 구조, 감염 상태 및 기타 요인에 따라 다양하지만 0.1에서 25퍼센트까지다. 문제는 치명률이 높은 것보다 전파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것이다. 단시간에 많은 사람을 감염시키기 때문에 치명률 자체는 낮더라도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사망자 숫자가 폭증하게 된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조지아 독감이 “마치 핵폭탄이 터지듯” 급속히 확산하여 단기간에 인류를 쓸어 버렸다고 말한다. 이러한 전개는 재난을 극적으로 재현하려는 장르 소설의 특성에서 기인한다. 그러다 보니 조지아에서 첫 환자가 발병했다는 것 이외에는 발생 원인도, 대처 방법도, 이 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끝까지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는다. 판데믹의 발생과 확산 원인을 설명하지 않음으로써 지진이나 화산 폭발 같은 자연재해처럼 인간의 힘과는 전혀 무관한 자연 발생적 사건으로 보이게 된다. 현실의 판데믹은 정치적, 사회적 요인들이 복잡하게 얽혀 작용하는 인류세적 사건이지만, 《스테이션 일레븐》에서 판데믹을 재현하는 방식은 인간과 인간이 구축한 현대 문명을 이 불가항력적 재난에 대한 책임에서 면제시킨다. 판데믹은 발생과 전파 과정에서 사회적, 정치적 요소들이 표백된 채 단순히 인류의 멸망과 문명 붕괴를 가져오는 자연적 사건으로만 이용되고 있으므로 사람들은 파국을 초래했다는 죄책감과 부채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그렇기에 《스테이션 일레븐》의 인물들은 과거의 문명을 그리워하고 향수에 잠긴다. 커스틴은 문명 붕괴 직후 극심한 혼란을 겪으면서 생긴 트라우마로 이전 시기의 기억은 모두 잃어버렸지만, 이전 세상에서 보았던 비행기, 냉장고, 컴퓨터 등 문명의 산물들만큼은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었던 전기의 마법 같은 힘을 꿈속에서도 잊지 못 한다. 출장에서 돌아오던 중 판데믹으로 더 이상의 비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세번 시티(Severn city) 공항에 불시착하게 된 경영 컨설턴트 클라크는 아무도 자신들을 구하러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이 확실해지자 승객들과 공항을 새로운 집 삼아 문명 붕괴 이후의 삶을 일구어 나간다. 그는 아이폰, 신용 카드, 시계, 닌텐도 게임기 등 더는 쓸모가 없어진 문명의 유품들을 진열장에 모아 놓고 ‘문명의 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인다. 커스틴과 클라크를 비롯한 생존자들이 그리워하는 과거의 문명이란 과학 기술에 기반한 현대 문명이다. 그러한 과학 기술의 발전과 문명의 진보를 가능케 한 원동력은 화석 연료였고, 마법의 원천은 전기였다. 소설은 커스틴이 세번 시티에서 전깃불이 빛나는 마을을 발견하고 그곳을 찾아 유랑 극단 일행과 떠나는 것으로 끝맺는다. 누구인지 모르지만 전기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문명의 부활에 대한 가장 강력한 상징이다. 《스테이션 일레븐》은 여전히 석유가 남아 있고 석유를 놓고 싸우는 〈매드 맥스〉의 세계를 지나쳐 더 멀리까지 갔지만, 그 세계는 여전히 과거의 그림자 속에 있다.

 

역병에 의해 정의된 자들


《스테이션 일레븐》과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는 반드시 인류를 절멸 직전까지 몰고 가는 대재앙이 등장하지만, 인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으며 종말 자체가 관심사도 아니다. 아포칼립스의 어원인 그리스어 ‘apokalupten’이 ‘to reveal’, ‘to uncover’를 뜻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멸망은 파괴만이 아니라 계시의 순간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재난 자체가 아니라 재난 이후의 삶이다. 인류가 종말에 가까운 재난을 겪더라도 정말로 절멸하지는 않으며, 재난 이후 남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역설이다. 《스테이션 일레븐》은 판데믹의 근본적 원인과 우리가 직면한 위기의 뿌리를 드러내고 성찰하는 데에는 한계를 보였지만, 파국 이후 인류가 어떻게, 무엇을 위해 생존해야 할 것인가를 탐색하고 새로운 대안적 세계를 상상한다.

《스테이션 일레븐》의 생존자들을 괴롭히는 것 중 하나는 왜 이런 대재앙이 인류를 덮쳤는지, 그리고 왜 누구는 죽고 누구는 살아남았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소설 속 유일한 악인이라 할 수 있는 타일러가 바로 이러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다가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인물이다. 그는 ‘예언자’를 자칭하며 광신도 집단을 이끌고 여러 마을을 폭력으로 지배한다. 그는 20년 전 어머니 엘리자베스와 함께 세번 시티에 발이 묶였던 여행객들 중 한 명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성경 교육을 받은 타일러는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기독교 교리에 따라 판데믹과 문명의 붕괴라는 불가해한 사건을 이해하고 수용하려 한다. 그는 ‘죄에는 반드시 벌이 따르며, 결국은 신의 정의가 실현된다’는 인과 법칙을 세계를 해석하는 절대적인 틀로 받아들인다.

공항에는 클라크 일행이 착륙하고 얼마 후 불시착한 비행기 한 대가 더 있었다. 그러나 공항 측에서는 비행기 안에 감염자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비행기 문을 열지 않고 그대로 폐쇄해 두기로 결정한다. 문명이 붕괴하고 20년이 지나도록 그 비행기는 아무도 차마 열어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방치되어 있다. 어느 날 클라크는 어린 타일러가 비행기를 향해 요한 계시록의 한 대목을 큰 소리로 낭독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깜짝 놀란 클라크에게 타일러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어머니의 말을 반복하면서 죽은 사람들은 ‘약한 자들’이고 우리 생존자들은 ‘선한 자들’이기 때문에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클라크는 그 모습에 섬뜩함을 느끼고 그의 어머니를 찾아가 사람들의 죽음은 치명적인 변형 독감에 걸렸기 때문일 뿐이며 타일러의 믿음처럼 신의 판결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다고 설득하려 한다. 그러나 엘리자베스는 아들에게 그릇된 종교적 신념을 심어 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엘리자베스의 믿음은 불가해한 사건들에 인과적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이를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로 바꾸려는 인간 중심적 욕망일 뿐이다. 클라크는 비행기 안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대해 “운 나쁘게 잘못된 때에, 잘못된 장소에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죽음과 나의 삶을 가른 것은 죄의 유무나 신에 대한 믿음 따위가 아니라 우연일 뿐이다. 판데믹, 지구 온난화, 기후 재앙 등 인류세의 사건들은 그 규모 면에서 인간의 인식과 지각의 범위를 초월한다. 인간의 기준으로는 전모를 파악할 수도 없고, 복잡한 상호 영향 관계를 인과적으로 다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범위를 넘어 인간을 압도하는 비인간 세계의 힘이 있으며, 인간의 앎이 미치지 않고 인과 관계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무지의 영역도 존재한다. 우리는 모두 절대적 필연이 아닌 상대적 우연에 노출된 취약한 존재들이며,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공통의 운명에 속한 존재들이라는 연대 의식으로 이어질 수 있다.

클라크는 판데믹 초기, 공항에서 노숙하며 텔레비전 뉴스에 귀를 기울이다 문득 공항의 승객들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처지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클라크는 생면부지의 승객들에게 애정을 느끼고 그들을 ‘동포’라 부른다. 다 같이 재난에 휩쓸려 앞날을 알 수 없는 위태로운 처지라는 유대감이 그들을 한배에 탄 운명 공동체로 만드는 토대가 된다. 재난 앞의 이러한 연대 의식은 유랑 극단이 셰익스피어 극을 공연하는 이유에서도 드러난다. 단원들 중에는 “왜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하지 않고 수백 년 전 연극을 고집하느냐”며 불만을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러나 단장인 디터는 셰익스피어의 삶이 현재 그들의 삶처럼 ‘역병에 찌든 삶’이었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 자신이 역병에 걸렸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역병으로 형제와 자식을 잃었고 몇 년을 주기로 역병 때문에 극장 문을 닫기를 반복해야 했다는 점에서, 디터는 그가 “역병에 의해 정의된 자”였다고 말한다. 《스테이션 일레븐》에서 유랑 극단이 공연하는 〈한여름 밤의 꿈〉은 런던의 극장들이 역병으로 두 시즌을 건너뛴 후 다시 문을 연 1594년, 혹은 셰익스피어의 외아들이 역병으로 죽기 1년 전인 1595년에 쓰였다. 분명 역병은 그의 삶과 존재를 정의하고 제한하며 영향을 준 중요한 요소였을 것이다. 역병이라는 요소를 통해 셰익스피어와 문명 이후 생존자들은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통제할 수도, 완전히 이해할 수도 없는 무언가’에 의해 정의되는 불완전하고 취약한 존재라는 인간의 조건을 공유하게 된다.

“역병에 의해 정의된다”는 디터의 말은, 인간을 합리적 이성으로 자연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지구에 묶인 자’로 보는 브뤼노 라투르의 시선과 비슷하게 인류세의 인간 존재에 대한 통찰을 기반으로 한다. 바이러스의 침입을 완전히 차단하고 이를 정복할 수 있다는 인간의 믿음은 바이러스를 우리와 분리된 외부의 적으로 돌리고 바이러스와의 전쟁을 선포하게 했다. 실제로 판데믹과 관련된 용어와 표현들 속에는 전쟁의 비유가 만연해 있다. 미국 정부의 코로나19 백신 개발 프로그램 ‘속도전’의 최고 운영 책임자인 구스타프 퍼나(Gustave F. Perna) 육군 대장은 2020년 12월 백신 배포를 앞두고 “디데이(D-Day)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실행일을 ‘디데이’라 불렀던 것에 비유하여, 인류가 코로나19와의 전쟁에서 백신 접종으로 역습에 나선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진화의 역사에서 바이러스는 늘 인간과 공생해 왔고, 언제나 우리의 일부였다. 인간의 진화는 자연 선택과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서가 아니라 동물, 식물, 미생물을 비롯한 모든 비인간적 존재들과 공생함으로써 가능했다. 한 예로, 세포 속의 미토콘드리아는 원래 20억 년 전에는 독립된 세포였지만 다른 세포에게 잡아먹히게 된다. 그런데 미토콘드리아는 산소로 호흡해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박테리아였기 때문에, 이것을 잡아먹은 세포가 그 에너지를 이용하면서 둘은 서로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두 개의 세포가 하나의 개체 세포로 진화하는 세포 내 공생 관계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인간은 경계 바깥의 다른 존재들과 소통하고 상호 의존하며 공진화(共進化)해 왔다. 최근 부상하는 학문 분야인 ‘다종 민족지학(multispecies ethnography)’은 인간과 비인간 타자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상호 얽힘 속에서 서로를 지금의 존재로 만들어 왔음을 전제로 하고, 그 위에서 인간이 어떻게 다양한 식물, 동물, 균류, 미생물과의 조우 속에서 형성되고 변형돼 왔는지 탐색한다. 2012년 미국 국립보건국이 수행한 ‘인간 미생물 군집체 프로젝트(Human Microbiome Project)’는 인간 몸 안의 미생물 수가 인간 세포 수보다 많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았다. 미생물이 곧 우리 자신이며, 우리의 존재에 더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특정 미생물 군집은 우리의 기분, 행동, 인격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인간의 몸이 외부로부터 밀봉된 것이 아니라, 인간과 외부 환경을 나누는 경계에 무수히 많은 구멍이 있으며 유동적이고 매 순간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오랫동안 서구 문명은 한 개인의 자아를 외부로부터 독립돼 있고, 스스로 자율성을 행사할 수 있는 하나의 온전한 개체로 봤다. 그렇기에 내가 스스로 사유하고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자유는 한 인간을 온전한 인격체이자 주체로 인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가령 미국과 유럽에서 마스크 착용이나 백신 접종을 거부할 권리를 개인의 자유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러한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주체에 대한 신념에 근거한다. 내 몸은 온전히 나에게 속한 것이고, 마스크를 쓸지 백신을 맞을지는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내가 결정할 문제이지 국가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앞에서 보았듯이 현대 생물학의 연구 성과들은 우리 몸이 외부 환경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돼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상호 작용 및 구성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인간 주체가 외부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독립된 자율적인 개체라고 보는 전통적인 주체 개념에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 주체성은 생태 비평가 스테이시 앨라이모(Stacy Alaimo)의 표현대로 나 아닌 다른 것들과 함께 구성되는 ‘상호 주체성(intersubjectivity)’이며, 내 몸을 가로지르는 세계와 공존하는 ‘횡단 주체성(trans-subjectivity)’이다. 나의 일부는 언제나 외부와 구분할 수 없이 얽혀 있고 외부 요소에 의해 구성된다. 즉, 내 몸을 내 자유 의지로 통제할 수 없으며, 내 의도와는 무관하게 나는 무수히 많은 바이러스와 세균들을 운반하는 숙주로 기능한다. 주체로서 내가 나 자신에 대한 온전한 주권을 갖고 있지 않으며, 나의 모든 행동의 결과를 통제하고 책임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곧 우리가 인간과 비인간들로 이루어진 광대한 네트워크의 일부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 네트워크 속에서 우리를 둘러싼 맥락이 변하면 우리 자신의 존재도 변화한다. 나의 안전과 건강은 필연적으로 다른 이들, 더 나아가 나를 둘러싼 전체 세계의 건강과 연결된다. 병든 세상에서 혼자만 건강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서로를 위협하는 동시에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위험과 안전을 공유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21년부터 불법 체류 외국인들에게도 비자 확인 없이 무료로 코로나19 검사를 시행했다. 왜 불법 체류자들에게 세금을 낭비하느냐는 반대 여론도 있었지만, 싱가포르에서는 기숙사에 공동 거주하던 이민자들 사이에 코로나19 감염이 폭증한 사례가 있었다. 불법 체류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검사를 기피하는 이들이 생기며 방역에 구멍이 뚫린 것이다. 코로나19 무료 검사 및 백신 접종은 가난한 자들에게 마음 내키면 베풀 수 있는 선택적 시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안전을 위한 필수적 조치다. 고립을 선택한다고 감염을 완벽히 차단할 수는 없으며, 어떻게 해도 나 혼자만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내 존재는 세계 속에서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시에 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와 더불어 살아가기


인간은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 아닌 다른 무언가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으며, 또 더 큰 물질적 세계로 열려 있고 온갖 물질과 비인간을 포함한 다른 행위자들에 의해 관통되는 존재다. 이러한 인간의 한계에 대한 인식이 비극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그러한 유한함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필연적으로 죽음에 가까워지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일으킨다. 즉, 인간의 무방비함은 주변 세계와의 상호 공존을 추구하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행동의 기반이 될 수도 있다. 《스테이션 일레븐》은 생존의 동력을 폭력에 의존한 투쟁보다는 공존과 연대에서 찾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공동체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부각된다. 유랑 극단 단원들이 서로 모든 면에서 뜻이 맞는 것은 아니다. 생존을 위해 늘 주변을 경계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동하며 살다 보면 갈등이 끊이지 않는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때로는 서로의 관계가 버겁다. 하지만 함께하지 않으면 이 위기를 넘길 수 없으며, 각자의 생존이 서로에게 달려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공생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세번 시티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공동체가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일 것이다. 공항의 조난자들은 변화한 상황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적응해 나간다. 세계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은 서로에게 자신의 언어를 가르쳐 준다. 어느새 공항은 그들이 ‘집’이라 부르고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된다. 그곳에는 ‘예언자’ 같은 지배자도 없고, 자체적으로 치안을 유지하며 밭을 갈아 자급자족하며 병자를 치료하고 아이들을 교육하는 기본적인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 나약하지만 그렇기에 서로 의존해야 살아갈 수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한 포용적인 시각은 유일한 악한, 타일러에게조차 적용된다. 커스틴은 타일러가 아마도 자신은 너무 버거워서 잊어버린 과거의 참상들을 기억하기 때문에 망가져 버렸으리라 짐작한다. 즉, 그에게 타일러는 타고난 악인이 아니라, 망가진 세계가 만들어 낸 비극적 인물이다.

세번 시티 주민들과 유랑 극단이 보여 주는 인간 존재의 취약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연대 의식이 판데믹 이후의 세계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단초가 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이를 믿기에는 과거의 ‘좋았던 세상’이 진짜로 좋은 세상이었다는 순진무구한 믿음과 그 세상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과 같은 일부 철학자들은 판데믹이 전 지구적 연대와 협력에 우리 모두와 개개인의 생존에 대한 이해관계가 걸려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브레이크 없이 내달리던 자유 시장식 지구화에 제동을 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기대한다. 지젝은 우리가 “늘 위협에 시달리는 훨씬 더 취약한 삶을 사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에게 판데믹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 다른 생명체들 가운데서 살아가는 존재로서 우리 실존을 대하는 태도 전부를 바꾸는 것이다. 인류보다 더욱 오래 지구상에 존재했고 언제나 인간의 일부였던 바이러스는 판데믹이라는 위협으로 변모해 이제 인류세에서 우리 삶의 한 조건이 됐다. 판데믹은 단지 인류세적 현상의 일부로 출현한 것이다. 바이러스에만 개별적으로 대응하는 식으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으며 우리가 변화시킨 환경을 되돌릴 수 없는 한 그 어떤 해결책도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어쩌면 인류세에 대해 과학 사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가 표현한 것처럼 “곤란과 더불어 살아가기(Staying with trouble)”를 배워야 할 필요성을 일깨워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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