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나의 커피여
완결

친애하는 나의 커피여

검은색 액체 한 잔이 현대를 창조했다. 현대의 가장 보편적인 중독, 카페인을 생각한다.

©Photograph: Jonathan Knowles/Getty Images
아침에는 톨 사이즈의 모닝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고, 그 사이에 틈틈이 녹차를 마시며, 점심을 먹고 나서는 가끔씩 카푸치노를 마신 지 몇 년이 흘렀을까. 그러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카페인을 끊었다. 특별히 그 필요성을 느껴 끊었다기보다는 집필하고 있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인터뷰했던 다수의 전문가는 카페인을 끊어 보지 않는 한, 보이지 않게 서서히 스며드는 카페인이 자신의 삶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후 다시 카페인을 섭취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기분전환 약물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연구자이며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5)〉에서 ‘카페인 금단현상(caffeine withdrawal)’ 진단 항목을 책임지고 집필한 롤랜드 그리피스(Roland Griffiths)는 이렇게 말했다. 그 자신도 카페인을 끊은 다음 스스로를 대상으로 일련의 실험들을 진행하기 전까지는 카페인과 자신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카페인을 섭취하는 이유는 그저 의식의 ‘기저선 상태(baseline state)[1]’에 도달하기 위해서다. 전 세계 인구의 90퍼센트 정도가 주기적으로 카페인을 주입하고 있다. 카페인은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향정신성 약물이며, 일상에서도 흔히 탄산음료의 형태로 아이들에게 제공하는 물질이기도 하다. 카페인을 약물로 생각한다거나, 매일 섭취하더라도 그것을 중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러한 인식이 너무나도 만연해 있기 때문에, 카페인을 섭취하면 의식의 기저선 상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의식의 ‘변성 상태(altered state)’가 된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이는 우리 모두가 경험하기 때문에 그 영향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1. 이것은 중독이다


과학자들의 상세한 설명을 통해서 예상했던 카페인 금단 증상은 두통, 피로감, 무기력, 집중력 저하, 의욕 감퇴, 신경 과민, 극심한 괴로움, 자신감 상실, 불쾌한 감정 등이다. 그러나 사소한 것처럼 보이는 ‘집중력 저하’라는 증상은 작품을 써야 하는 작가에게는 실존적인 위협이나 다름없다. 집중할 수 없는데 어떻게 글을 쓸 수 있겠는가?

나는 글쓰기 일정을 최대한 뒤로 미뤘지만, 결국 암흑기가 찾아왔다. 인터뷰했던 연구자들에 의하면, 금단증상이 실제로 시작되는 건 밤 시간대라고 한다. 사람이 자는 동안 카페인의 일주기 영향(diurnal effect)[2] 그래프에서 “가장 낮은 지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하루 중 처음 마시는 한 잔의 차나 커피가 가장 위력적이며 즐거움을 주는 이유에는 카페인 특유의 도취적이며 자극적인 특성도 있겠지만, 바로 그 한 잔이 밤사이에 시작된 금단증상을 억눌러 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카페인의 교묘한 부분이다. 카페인이 인체에 작용하는 약리학적 기전은 우리의 생체리듬과 너무나도 완벽하게 맞물려 있기 때문에, 우리는 정확한 시점에 모닝커피 한 잔을 공급해야만 전날 마신 커피가 유발하는 정신적 고통을 막아낼 수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카페인은 바로 그 카페인이 만들어 낸 문제에 대한 최적의 해결책을 자처하고 있다.

나는 커피숍에서 일상적으로 마시던 ½디카페인(half caff) 커피 대신에 민트 차 한 잔을 주문했다. 아침에 카페인을 마시면 의식의 내부에 잔뜩 끼어있던 멘탈 포그(mental fog, 마음의 안개)[3]가 말끔하게 걷히곤 했지만, 이날 아침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 마음에 내려앉은 그 안개는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끔찍한 기분이 드는 건 아니었다. 심각한 두통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 자신과 현실 사이에 마치 차단막이 내려진 것처럼 하루 종일 약간 몽롱한 상태가 지속됐다. 그것은 일종의 필터가 되어 특정한 파장의 빛과 소리를 흡수했다.

나는 어떤 일을 할 수는 있었지만, 주의가 산만했다. 당시의 노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마치 뭉툭한 연필이 된 느낌이다. 주변의 상황들이 나를 방해하는데, 그것을 무시하기가 어렵다. 1분 이상 집중할 수 없다.”

이후 며칠 동안 조금씩 기분이 좋아지며 차단막이 올라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온전한 나 자신이 아니었고, 세상도 아직은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러한 새로운 일상(new normal) 속에서 나는 세상이 약간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나 자신도 약간 무감각하게 느껴졌다. 최악의 시간대는 아침이었다. 나는 자는 동안 의식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는 일상적인 활동에서 카페인이 얼마나 필수적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렇게 다시 제정신을 차리는 시간이 예전보다 훨씬 더 길어졌지만, 완전히 온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2. 유럽이 커피를 만난 순간


인류가 카페인과 처음 조우한 건 놀랍게도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렇지만 이 분자가 세상을 다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피와 차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근본적인 수준에서부터 변화를 일으켰다. 사람의 기분에 변화를 유도했다. 알코올에 의해 흐려진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어 주고, 자연의 섭리에 의해 움직이는 신체와 태양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면서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활동을, 그리고 단언컨대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15세기 무렵에는 커피가 아프리카 동부에서 재배되고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거래됐다. 초기에는 이 새로운 음료가 집중력 보조제로 여겨졌고, 예멘에서는 수피(Sufi)교 사람들이 종교의식을 진행하면서 졸음을 떨쳐내기 위해 사용했다. 차(茶) 역시 불교의 승려들이 오랜 시간 명상을 하면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데 약간의 도움을 얻기 위해 마시기 시작했다. 불과 한 세기 만에 아랍 전역의 여러 도시에서 커피하우스(coffeehouse)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1570년에는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 한 곳에만 600여 개의 커피하우스가 있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북쪽과 서쪽으로 널리 퍼져있었다.

이 시기의 이슬람 세계는 과학이나 기술, 교육 등의 많은 측면에서 유럽보다 더욱 발전돼 있었다. 이러한 정신적 풍요로움이 커피의 유행과 (그리고 알코올의 금지와) 관련이 있는지 그 여부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독일의 역사학자인 볼프강 쉬벨부시(Wolfgang Schivelbusch)는 이 음료가 “알코올 섭취를 금하고 근대 수학을 탄생시킨 문화권을 위해 맞춤형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1629년에는 아랍과 터키의 스타일을 모방한 유럽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이탈리아의 베니스에서 모습을 보였고, 1650년에는 유대계 이주민이 옥스퍼드에서 영국 최초의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커피하우스 문화는 머지않아 런던에까지 이르러서 급증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 후 런던에는 수천 개의 커피하우스가 존재했는데, 그러한 유행이 정점에 달했을 때에는 런던 시민 200명당 하나의 커피하우스가 있을 정도였다.

영국의 커피하우스를 새로운 유형의 공공장소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는 그 실체를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커피를 마시기 위해 1페니를 지불하긴 했지만, 신문이나 책, 잡지, 대화 등의 형태로 전달되는 정보는 무료였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커피하우스를 ‘페니 대학교(penny university)’라고 부르는 경우도 흔했다. 프랑스의 막시밀리앙 미송(Maximilien Misson)이라는 작가는 런던의 커피하우스들을 방문한 이후에 이렇게 썼다. “그곳에 가면 온갖 종류의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난방도 잘 되고, 원하는 만큼 오랫동안 앉아 있어도 된다. 이곳에서는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지인들을 만나서 업무를 처리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단돈 1페니에 가능하다. 혹시라도 더 많은 비용이 들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런던의 커피하우스들은 손님들의 직업이나 지적인 관심사에 따라서 서로 구분됐는데, 이러한 특성이 결국엔 제도적인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서 해상 운송에 관심이 있는 상인들과 남성들은 로이즈 커피하우스(Lloyd’s Coffee House)로 모여들었다. 이곳에서는 어떤 선박이 도착하고 출발하는지 파악할 수 있었고, 자신의 화물에 대한 보험 증서를 구입할 수 있었다. 로이즈 커피하우스는 결국 런던 로이즈(Lloyd’s of London)라는 보험 중개 회사로 발전했다. 지식인들과 당시 ‘자연철학자(natural philosopher)’로 불렸던 과학자들은 그리션(Grecian)에 모여들었는데, 이들은 왕립학회(Royal Society)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에드먼드 핼리(Edmond Halley)가 이곳에서 물리학과 수학에 대하여 토론을 벌였으며, 언젠가는 이곳에서 돌고래를 해부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런던의 커피하우스에서 오가는 대화가 정치적으로 발전하는 경우도 빈번했는데, 특히 1660년 왕정복고 후에는 커피하우스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자유로운 발언들이 정부의 분노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커피하우스에서 모의가 싹트는 것을 우려했던 찰스 2세는 이런 곳들이 반란을 선동하는 위험한 장소이기 때문에 탄압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675년에 국왕은 그런 곳에서 흘러나오는 “거짓되고 악의적이며 선정적인 이야기들”이 “왕국의 고요와 평화에 대한 장애물”이라는 근거로 커피하우스 폐쇄 조치를 단행했다. 사람의 의식적인 성질을 변화시키는 다른 수많은 물질들과 마찬가지로, 카페인은 제도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됐다. 그래서 왕권은 카페인 탄압을 단행했는데, 이는 먼 훗날에 전개될 마약과의 전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왕이 커피를 상대로 벌인 전쟁은 겨우 11일 만에 끝났다. 찰스 2세는 카페인의 조류를 되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음을 깨달았다. 당시의 커피하우스는 영국의 문화이자 일상의 일부였고, 런던의 수많은 저명한 인사가 카페인에 중독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왕의 명령을 무시하고는 태평하게 커피를 마시러 갔다. 자신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는 사실이 들통나는 걸 두려워했던 국왕은 조용히 물러났다. 그리고 “군주의 배려와 왕실의 연민을 발휘하여” 애초의 명령을 철회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17세기의 프랑스와 영국의 커피하우스들에서 들끓어 올랐던 이러한 종류의 정치적, 문화적, 지적 소요가 술집에서도 전개됐을 거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알코올의 도움을 받았던 중세인들의 신비주의적인 사고는 합리주의와 그에 뒤이은 계몽주의 사고라는 새로운 정신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하여 프랑스의 역사학자인 쥘 미슐레(Jules Michelet)는 이렇게 썼다. “정신을 맑게 해주며 두뇌의 강력한 자양분이 되는 커피는 여타의 증류주와는 다르게 순수성과 명료함을 높여 준다. 커피는 망상의 먹구름과 그것이 가진 음울한 무게감을 걷어낸다. 커피는 진실의 불빛으로 현실의 실체를 비춰준다.”

“현실의 실체”를 명료하게 바라보는 것. 이것이 바로 합리주의자들이 추구하는 목표였다. 현미경, 망원경, 펜과 함께 커피는 그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것이 되었다.
17세기 런던의 어느 커피하우스. ©Photograph: Lordprice Collection/Alamy

 

3. 카페인의 힘, 산업혁명


몇 주 뒤, 금단증상이었던 정신적 장애가 진정되었다. 나는 다시 또렷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며, 머릿속에서는 어떤 생각을 2분 이상 유지할 수 있었고, 주변부적인 생각들은 관심 영역 밖으로 몰아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정신적으로 아주 약간 현실에 뒤처진 것처럼 느껴졌는데, 특히 일행이 커피나 차를 마시고 있을 때 더욱 그랬다. 커피와 차는 당연히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다.

내가 그리워했던 것들이 있다. 나는 카페인과 그것을 마시는 의식이 하루를 정리해 주던 방식이 그리웠다. 특히 아침이면 더욱 그랬다. 커피나 차에 함유된 카페인은 정신의 조류를 움직이면서 나의 일상을 에너지의 정점으로 끌어올렸다가 바닥의 계곡으로 내려가게 만들기도 한다. 허브차는 가끔 정신 활성(psychoactive) 작용을 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카페인처럼 급물살을 타게 하지는 않는다. (카페인에 의해) 아침에 몰려오는 밀물은 확실히 축복이지만, 오후에 밀려나는 썰물에도 뭔가 나른한 편안함이 있다. 그리고 차 한 잔을 마시면 그러한 흐름을 부드럽게 되돌릴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커피와 차를 끊은 이후 시작된 정신적 방황의 감각이 어쩌면 그저 나의 기분 탓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관련된 과학 분야를 찾아서 혹시라도 그러한 인지기능 향상이 카페인의 영향일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했다. 나는 카페인이 기억력, 집중력, 각성도, 경계성, 주의력, 학습능력 등 다양한 인지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는 다년간에 걸친 수많은 연구 결과들을 찾아냈다. 1930년대에 수행된 어느 실험에서는 카페인을 복용한 체스 선수들이 그렇지 않은 선수들에 비하여 현저하게 뛰어난 실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다른 연구에 의하면, 카페인 사용자들이 비록 더욱 많은 실수를 저지르긴 했지만 다양한 사고 업무들을 더욱 빠르게 완료해 냈다. 어떤 논문에서는 그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카페인을 섭취한 사람들이 “더 빨랐지만 더 똑똑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2014년에 진행된 어느 실험에 의하면, 새로운 정보를 학습한 직후에 카페인을 받은 대상자들이 플라시보(placebo, 가짜 약)를 받은 사람들에 비하여 그 내용을 더욱 잘 기억했다. 심리 운동 능력을 평가한 다수의 실험에서도 카페인이 사람들에게 우위를 준다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자면 모의 운전 실험에서 카페인은 사람들의 수행 능력을 향상시켰다. 특히 대상자가 피곤할 때 그 효과는 더욱 컸다. 또한 카페인은 속도, 근력, 지구력 등의 항목에서도 신체 능력을 향상시켜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사실 이런 유형의 연구를 제대로 수행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연구 결과는 적당히 가감해서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사실상 모든 사람이 카페인에 중독된 사회에서 적당한 대조군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페인이 정신 능력과 신체 능력을 어느 정도 향상시켜 준다는 데 있어서는 대체로 합의가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카페인이 창의력을 강화시켜 주는가의 여부는 전혀 다른 문제이며, 그렇다는 주장을 의심할 만한 이유도 여럿 존재한다. 카페인이 우리의 주의력과 집중력을 향상시켜서 직관적인 사고와 추상적인 사고를 강화시켜 주는 것은 확실하지만, 창의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매우 다르다. 창의력이라는 건 어쩌면 특정한 유형의 집중력이 결핍되거나, 선형의 사고방식에 얽매인 상태에서 우리의 정신을 자유롭게 풀어줄 때 더욱 활성화되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인지심리학자들은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되는 의식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하나는 ‘스포트라이트 의식(spotlight consciousness)’이다. 이는 집중력을 발휘해야 하는 단일한 대상을 비추면서 합리적 사고에 매우 도움이 되는 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랜턴 의식(lantern consciousness)’으로, 집중은 조금 덜 되지만 더 넓게 주의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랜턴 의식을 드러내는 경향이 강하다. 환각 물질을 복용한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주의력이 좀 더 확산된 이러한 형태의 의식은 딴생각이나 자유 연상, 참신한 사고 연결에 적합하다. 이는 모두 창의력을 키우는 특징이다. 반면에 인류의 발전에서 카페인이 크게 기여해 온 부분은 스포트라이트 의식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집중적이고, 직관적이고, 추상적이고, 능률적인 인지 처리 능력은 자유로운 놀이보다는 정신적인 활동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하여 다른 여타의 물질들보다도 카페인이 합리성과 계몽주의의 시대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부흥에 있어서도 완벽한 약물이 될 수 있었다.

카페인은 사람을 각성시켜 깨어 있는 상태로 유지시켜 주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피로해지는 걸 막아 신체의 생물학적인 리듬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는 인공 조명의 출현과 더불어 밤이라는 변방 영역을 사람들이 일할 수 있는 시간대로 만들었다.

사무직과 지식인들에게 커피가 있었다면, 영국의 노동계층에게 그런 역할을 해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차였다. 실제로 산업혁명에 불을 지폈던 것은 동인도에서 들여온 차에 서인도에서 들여온 설탕으로 단맛을 첨가한 것이었다. 흔히 영국에는 차 문화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초기에 훨씬 더 저렴하고 지배적이었던 음료는 커피였다.

그러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중국과 교역하기 시작한 직후부터 저렴한 차가 영국으로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차는 1700년대에만 하더라도 부유층만이 구입할 수 있었지만, 1800년대가 되자 귀부인에서부터 공장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모든 사람들이 즐기게 되었다.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키려면 거대한 규모와 잔인함을 갖춘 제국주의적 기업이 필요했다. 특히 영국이 중국에서 차를 수입하는 것보다는 식민지였던 인도를 차 생산국으로 바꾸는 게 수익성 측면에서 더 낫다고 판단한 이후에는 더욱 그러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중국으로부터 차 생산의 비밀을 훔쳐내야만 했다. 이러한 임무를 해낸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식물학자이자 식물탐험가였던 로버트 포춘(Robert Fortune)이었다. 이를 위해서 그는 중국인으로 변장하고 야생에서 차가 자라던 아삼(Assam) 지역의 소작농들에게서 땅을 강탈한 후, 그 농부들을 강제로 노예화하여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찻잎을 따도록 했다. 서양으로 차가 전래된 과정은 착취라는 단어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차 생산 과정에서 농부들을 착취했고, 영국에서는 노동자들로부터 잉여 가치를 뽑아내기 위하여 차가 소비됐기 때문이다.

차는 영국의 노동 계층이 장시간의 교대 근무, 참혹한 작업 환경, 거의 일상적이었던 굶주림을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카페인은 굶주림으로 인한 고통을 잠재우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 안에 든 설탕은 주요한 칼로리 공급원이 되었다. 그러나 순전히 영양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당시의 노동자들은 차라리 맥주를 계속 마시는 게 더욱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차 안의 카페인은 기계적인 규칙에 더욱 적합한 새로운 유형의 노동자를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차를 빼놓고는 산업혁명을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인도의 아삼(Assam) 지역에서 찻잎을 따는 사람들. ©Photograph: AFP/Getty

 

4. 카페인 위험 경보


그렇다면 커피는, 좀 더 일반적으로 카페인은 정확히 어떻게 해서 우리를 더욱 활기 넘치고 능률적이며 더욱 빠르게 만들어주는 것일까? 칼로리도 없는 작은 분자에 불과한 카페인은 대체 어떻게 해서 인간의 신체에 에너지를 공급해줄 수 있는 것일까? 카페인이 과연 속담 속의 공짜 점심[4]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각성 효과, 집중력, 활력 등 카페인이 제공하는 정신적 에너지와 신체적 에너지에 대가를 지불해야 할까?

세상에 공짜 점심이란 없다. 사실은 카페인이 우리에게 에너지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카페인은 아데노신(adenosine)이라는 분자의 작용을 차단한다. 아데노신은 하루가 가는 동안 두뇌에 조금씩 축적되면서 우리의 신체가 휴식을 취하도록 준비한다. 카페인 분자는 이 과정에 간섭하여 아데노신이 제 할 일을 못 하도록 방해하고, 우리를 깨어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러나 아데노신의 수치가 꾸준히 증가하고 카페인이 신진대사에 의해 분해되고 나면, 인체의 수용체(receptor)에 아데노신이 흘러들면서 다시 피로감이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카페인이 제공하는 에너지는 사실상 빌려온 것이며, 결국엔 우리가 되갚아야 할 빚인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오랫동안 커피와 차를 마셔오는 동안, 보건 당국은 카페인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해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카페인은 자신에게 제기되어 온 심각한 혐의들을 대부분 벗었다. 현재까지 과학적으로 합의된 내용을 보면 안심하고도 남을 만한 수준이다. 실제로 관련 연구를 살펴보면, 커피와 차는 우리의 건강에 해로운 것과는 거리가 멀고, 과도하게 섭취하지 않는 한 나름의 중요한 혜택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기적인 커피 섭취는 유방암, 전립선암, 결장암, 자궁암 등의 여러 암은 물론이고 심혈관계 질병, 제2형 당뇨, 파킨슨병, 치매의 발병률 감소와 관련이 있으며, 우울증과 자살률을 줄여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량 섭취 시에는 신경 과민과 불안감을 유발하고, 하루에 여덟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에게는 자살률을 높일 수 있다.

커피와 차에 대한 의학 문헌들을 살피다 보니, 카페인을 절제하는 것이 오히려 정신적 기능만이 아니라 신체적 건강에도 위태로운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맷 워커(Matt Walker)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는 생각이 바뀌었다.

영국 출신으로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UC 버클리)의 신경 과학 교수이자 《우리는 왜 잠을 자야 할까(Why We Sleep)》라는 책의 저자인 워커에게는 필생의 사명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 않는 공중 보건의 위기에 대해 전 세계에 경각심을 울리는 것인데, 그 위기란 우리가 잠을 너무 적게 자고 있으며 그렇게 자는 수면의 질조차도 형편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체와 정신을 상대로 저지르는 이러한 범죄의 유력한 범인은 바로 카페인이다. 카페인 그 자체만으로는 우리에게 해롭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는 잠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를 수도 있다. 워커 교수에 의하면 수면 부족이 알츠하이머병, 동맥경화증, 뇌졸중, 심부전, 우울증, 불안감, 자살, 비만을 일으키는 주요한 요인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가 있다고 한다. 그의 결론은 단호하다. “잠이 줄어들수록 수명도 줄어듭니다.”

워커는 아침이건 낮이건 밤이건 엄청난 양의 홍차를 마시는 영국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는 가끔 마시는 디카페인 음료에 조금씩 포함돼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카페인을 섭취하지 않는다. 실제로 내가 이번 글을 쓰기 위해 인터뷰했던 수면 연구자나 생체 리듬 전문가들 중에서 카페인을 섭취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워커의 설명은 이렇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카페인의 ‘사반감기(quarter life)[5]’는 일반적으로 약 12시간인데, 이는 만약 정오에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 자정에 잠자리에 들 때도 뇌 속에는 낮에 마셨던 카페인의 25퍼센트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정도면 숙면을 완전히 망가뜨리기에 충분한 양이다.

워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상당히 잠을 잘 자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그는 나의 수면 습관에 대해 물었다. 나는 일반적으로 내가 일곱 시간 동안 연속해서 잠을 자고, 쉽게 잠이 들며, 대부분의 밤마다 꿈을 꾼다고 말했다.

그가 이렇게 물었다. “하룻밤에 몇 번이나 잠에서 깨나요?” 나는 하룻밤에 서너 번 잠에서 깨는데(대개는 소변을 보기 위해서다), 그럴 때도 거의 언제나 곧바로 다시 잠들곤 한다.

그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잠이 중단된다는 건 전혀 좋은 게 아닙니다. 수면 시간만큼이나 수면의 질도 중요합니다.” 그렇게 중간에 잠을 깨면 렘(REM) 수면보다 더 깊이 잠드는 상태인 ‘숙면(deep sleep)’이나 ‘서파수면(slow wave sleep)’에 빠져드는 시간이 줄어든다. 참고로 나는 늘 렘수면을 질 좋은 잠자리의 척도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건강에 있어서는 렘수면만큼이나 숙면도 중요해 보이는데, 숙면 시간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감소하는 경향이 있다.

수면 위기를 초래하는 유일한 원인이 카페인은 아니다. 각종 스크린, (카페인이 숙면을 방해하는 것처럼 렘수면을 어렵게 만드는) 알코올, 의약품, 업무 스케줄, 소음과 빛 공해, 불안감 등이 수면의 지속성과 품질 모두를 떨어뜨리는 데에 나름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카페인에는 독특하게 음흉한 측면이 존재한다. 카페인은 수면 부족을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지만,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의존하는 주요한 도구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섭취하는 카페인의 대부분은 바로 그 카페인이 유발한 질 나쁜 수면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카페인이 일으키는 문제점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도록 카페인이 도와주고 있다는 의미이다.
“커피를 드세요! 잠은 죽어서 자면 됩니다!” ©Photograph: Stockimo/Alamy

 

5. 결국, 커피


나의 카페인 중단 실험을 마무리할 시간이 다가왔다. 나는 세 달 동안 카페인 청정 상태로 지내온 나의 신체가 에스프레소 몇 잔에 노출되면 어떤 일을 겪을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커피를 어디에서 마실 것인지에 대해서 오랫동안 심사숙고했다. 나는 동네의 커피숍에서 ‘스페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이곳에서는 에스프레소 더블 샷에 일반적인 카푸치노보다 스팀 우유를 적게 넣은 음료를 스페셜 커피라고 불렀다. 흔히들 플랫 화이트(flat white)라고 부르는 커피이다.

내가 주문한 스페셜 커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이전에 마시던 디카페인 커피가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새삼 깨달을 정도였다. 여기에는 내가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다양한 차원과 깊이의 풍미가 있었다. 시야에 들어온 모든 것들이 기분 좋은 이탤릭체로 쓰인 것처럼, 영화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는 슬리브로 감싼 종이컵을 들고 있는 이곳의 모든 사람이 스스로가 얼마나 강력한 약물을 마시고 있는지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의식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카페인에 길들여졌고, 이제는 그것을 완전히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기저선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인데, 거기에 더해서 반갑게도 기분까지 약간 고무된다. 나는 이처럼 더욱 강력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양질의 수면을 제공해 줬던 것은 물론이고, 카페인 중단이라는 투자를 했던 나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배당금이었다.

그러나 불과 며칠 만에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카페인 내성이 생겨서 또 다시 중독되고 말았다. 나는 이런 의문이 들었다. 이 약물의 힘을 보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혹시 내가 카페인과의 새로운 관계를 고안해낼 수 있지는 않을까? 그것을 일종의 환각성 약물처럼 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서 아주 가끔씩, 더욱 엄격한 기준과 의도를 정해놓고 복용하는 것이다. 커피는 토요일에 딱 한 잔만 마시기로 하는 것처럼 말이다.

집에 돌아온 나는 여느 때와는 다른 열정을 갖고 내 몸에서 솟구쳐 오르는 집중력의 에너지를 활용해 처리해야 하는 일들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 에너지를 좋은 용도에 투입한 것이다. 나는 컴퓨터와 옷장과 정원과 창고를 강박적으로 청소하고 정돈했다. 나는 정원에서 갈퀴질을 했고, 잡초를 뽑았으며, 모든 것을 정리했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일단 무언가에 집중하면, 나는 오직 그곳에만 열성적으로 전념하여 집중했다.

정오 무렵이 되자, 그런 강박증이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는 분위기 전환을 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나는 텃밭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던 채소들을 뽑아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대신 심을 채소를 사러 원예 센터에 들르기로 했다. 운전을 해서 가는 동안 내가 하필 그 원예 센터로 향하고 있는 진짜 이유를 깨달았다. 그곳의 입구에 정말 맛있는 에스프레소를 판매하는 커피 차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2021년 7월 8일에 출간된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의 《아편, 카페인, 메스칼린을 통해서 살펴보는 우리의 마음(This Is Your Mind on Plants: Opium-Caffeine-Mescaline)》을 발췌한 내용이다.
[1]
평상시에 유지되는 기본적인 마음의 상태
[2]
지구의 1회 자전 주기에 맞추어 변화하는 양상
[3]
마음에 안개가 낀 것처럼 의식이 흐릿해지는 현상으로 의식의 혼탁(clouding of consciousness)이나 브레인 포그(brain fog)라고도 부른다.
[4]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There is no such thing as a free lunch). 바로 다음 문단의 첫 문장에서 인용하고 있다.
[5]
반감기(half life)의 절반, 처음의 양에서 ¼로 줄어드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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