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워싱 주의보
1화

프롤로그 ; 녹색이 돈이 되는 시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 나는 남미, 정확히는 페루에 위치한 아마존을 방문했다. 국제선을 타고 미국을 경유해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 착륙한 후, 다시 국내선을 타고 지방 도시로 이동했으며 네 명만 탈 수 있는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또 한 번 열대 우림 위를 날아 소도시에 도착했다. 이후 열댓 명이 탈 수 있는 소형 배에서 두 명만 탈 수 있는 나룻배로 갈아타고 작은 물길을 따라 노를 저어 가다 보니 드디어 목적지인 원주민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방문한 마을들은 한 번도 외지인, 심지어 같은 아마존 지역 내 다른 마을 사람들조차 방문한 적 없는 원주민 보호 구역이었다. 그들도 나와 동료들이 신기했는지 마을을 방문할 때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든 주민이 우리를 구경하러 나왔으며 플래카드와 축하 공연, 현지 음식 등으로 환대해 줬다.

아마존을 방문한 이유는 원주민들이 국제기구로부터 지원받아 친환경 사업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아마존의 몇몇 지역에선 남미의 슈퍼 푸드라고 불리는 ‘아구아헤(Aguaje)’라는 열매를 가공해 아이스크림, 주스, 화장품 등을 만들고 있었다. 이 제품들은 가공 과정에서 경유 발전기와 같은 설비를 작동해야 하는데, 연료 조달이 어렵고 환경을 파괴한다는 난점들이 있었다. 이에 각 마을 대표들이 원하는 것은 태양광 발전과 에너지 저장 장치를 결합한 친환경 에너지 설비였다. 또 다른 마을의 경우 아마존에서 잡은 물고기를 소도시나 지방 도시에 내다 팔기를 원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냉동 창고가 필요했다. 열매를 가공하는 설비와 마찬가지로 냉동 창고의 전력 조달이 어려웠고, 이들 마을 역시 친환경 에너지 설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들과 국제기구를 연결해 주는 미션을 수행하고자 에너지 전문가, 현지 전문가, 통역사 등으로 구성된 팀에서 나는 녹색 금융 전문가 역할을 맡아 2주간 아마존에 머물렀다.

밤에 달빛을 불빛 삼아 아마존 강에서 목욕을 하고 야외 공터에서 텐트를 펼치고 잠을 자며 나는 아마존 마을의 대표들과 기나긴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왜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지, 왜 친환경 에너지 설비가 필요한지를 그들은 수차례 강조했다. 한번은 다른 마을로 이동하는 길에 나룻배가 고장 나서 아마존강 위에서 6시간을 표류한 적 있는데, 이때 넘실대는 물살을 바라보며 원주민들의 삶과 가치관에 대해 현지 전문가와 토론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페루를 포함한 남미 지역은 대부분 스페인어를 사용하지만 원주민 마을에서는 그들만의 언어를 쓰고 있었다. 이에 한국어-영어-스페인어-원주민어 4개 국어의 통역이 필요했으며, 서로 대화 한 번을 주고받는 데 5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됐음에도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한 친환경 에너지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는 얘기를 들으며 나는 그들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개발에 착수한 이 사업은 후에 유엔 산하 세계 최대 녹색 기금이자 약 10조 원의 자금을 운용하는 녹색기후기금(GCF·Green Climate Fund)의 첫 번째 지원 사업으로 선정됐다.

10년이 지난 지금, 바야흐로 녹색이 대세다. 빌 게이츠가 기후 위기를 주제로 책을 출간하고[1] BTS가 기후 변화 대응에 동참을 호소하는 연설을 한다. 20대 대선 토론에서 친환경 분류 체계(Green Taxonomy)와 RE100(Renewable Energy 100)을 언급하고, 한국을 포함한 주요국들이 그린 뉴딜을 통해 녹색 분야에 수십 조, 수백 조 원의 대대적인 예산 지원을 한다. 애플, 구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국내외 기업들이 친환경 기업으로 거듭나겠다고 앞다투어 선언하며, 전기차 시장을 선도하는 테슬라의 시가 총액은 벤츠, BMW 등 전통적인 내연차 회사들의 시가 총액을 아득히 앞지르고 있다.

누군가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좋은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녹색이 돈이 되는 시대다. 작년부터 국내 주요 화두로 떠오른 ESG 경영의 기원을 쫓아가 보면 결국 기존과 다른 금융의 움직임에 도달한다. 기후 금융, 즉 기후 변화를 막기 위한 자본의 움직임이 녹색 금융의 한 축으로 기업과 사회의 변화를 유인하고 있으며, 녹색 금융을 포괄하는 지속 가능 금융의 움직임이 지금의 ESG 시대를 만들었다.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일해 왔던 사람으로서 이러한 시대의 변화가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회를 틈타 녹색으로 위장하는 속칭 ‘그린워싱’이 만연하지 않을지 내심 우려가 된다. 녹색으로 둔갑했으나 실체를 들여다보면 기후 대응에 무관하거나 혹은 오히려 환경에 유해한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에 ‘진짜 녹색’과 ‘가짜 녹색’을 구분하는 것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기후 변화를 막는 데 필요한 자금이 도리어 기후 변화를 촉발하는 산업에 흘러 들어가 사회적 피해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과 비즈니스를 배제한 채 기후 위기의 심각성만 강조한다면 두리뭉실한, 혹은 업계에서 적용하기 어려운 주장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진정성 없이 녹색 금융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데만 집중하는 비즈니스적 관점은 사회를 충분히 설득하기 어렵다. 기후 위기에 실질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녹색과 금융, 두 분야를 아우르는 이해와 경험을 갖고 올바른 정보를 전달하는 전문가의 역할이다. 그러나 현시점엔 두 분야의 배경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부족하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관련 지식과 경험이 제한적인 사람들이 중재자 역할을 도맡고 있다.

내가 친환경을 비즈니스의 관점으로 처음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2010년도 즈음이다. 당시 글로벌 회계 법인에 입사해 회계 감사 업무를 수행하던 중 녹색 분야에 대한 비전을 실감했고, 이후 기후와 지속 가능성 분야를 전담하는 컨설팅 부서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국내 주요 온실가스 다배출 기업들이 온실가스 감축 전략과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일을 자문했다. 2012년 유엔 산하 녹색기후기금 본사를 한국에 유치하고자 제안서 작성에 참여했고, 이후 남미 아마존을 포함해 온두라스 쓰레기 매립장, 우간다 시골 마을, 미얀마 산림 등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개발 도상국의 녹색 사업 개발에 참여했다. 이후 2015년 우리 정부의 기후 금융 자문 역할로 파리 기후협약에 참석하고, 2018년 국내 최초로 발행된 KDB산업은행 녹색 채권의 인증을 진행하는 등 지난 12년간 국제기구, 우리나라 및 해외 정부, 국내외 투자자 및 금융 기관, 글로벌 대기업에 다수의 자문을 수행해 왔다. 주변으로부터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하여 얻은 안정적인 길을 놔두고 왜 전혀 무관해 보이는 일을 하냐는 말들을 들을 때, 회계사 동기들보다 낮은 보수가 찍힌 월급 통장을 들여다볼 때 ‘이게 맞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기후 위기가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사회적 의제라는 확신과 함께, 기후 대응과 녹색 금융에 있어서만큼은 대체 불가능한 전문가로 성장하겠다는 의지하에 지금까지 경험을 쌓아 왔다.

그래서 이 책은 녹색과 금융, 두 관점을 종합한 시각에서 지금의 녹색 흐름과 그린워싱을 분석할 것을 제안한다. 정부 부처와 공공 기관의 관계자들, 금융업과 산업계의 경영진들, 국제기구 관계자 등 우리 사회의 의사 결정자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선 현실적인 여건과 이해관계자들의 니즈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솔루션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물론 급진적인 환경 보호 주장이나 녹색 무용론과 같은 입장들 또한 우리 사회가 다양성에 기반한 발전을 꾀하는 데 의미가 있다. 다만 이 책은 녹색이라는 가치를 실행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을 토대로 사회를 조금씩이나마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녹색 트렌드와 그린워싱의 리스크를 객관적이고 정량적인 시각으로 분석하겠다.

최근 많은 언론에서 ‘친환경’, ‘녹색’, ‘에코’, ‘ESG’ 등 지속 가능한 미래를 논하는 각종 용어들이 혼용되고 있다. ‘ESG(Environmental, Social, and Governance)’는 업계에서 통용되는 가장 상위 개념인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을 투자자의 언어로 쉽게 표현한 것이다. 이 책에서는 ESG와 지속 가능성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다. 한편 ‘친환경’은 ESG에 포함된 환경·사회·지배 구조 중 환경 분야를 지칭하는 용어로, 이 책에선 편의상 ‘녹색(green)’, ‘에코(eco)’ 등의 대중적인 용어와 같은 의미로 사용했다.

친환경 정책과 사업은 단기간에 정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급속한 경제 성장 과정에서 단기 의사 결정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쉽게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사회의 주요 의사 결정자들도 탄소 중립이나 ESG와 같은 단어에 익숙하며, 올바른 이정표만 잘 제시한다면 서서하지만 확실한 친환경 성과가 드러날 것이다. 기후 위기가 시대적 의제로 떠오르는 지금, 정책 입안자와 행정가들이 올바른 정책 의사 결정을, 투자자와 기업이 올바른 투자 의사 결정을, 시민들이 올바른 선택과 소비를 하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1]
빌 게이츠, 《빌 게이츠,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How to Avoid a Climate Disaster)》, 김영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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