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 IMF
완결

신용불량 IMF

힘의 방향이 바뀌면 돈의 방향도 바뀐다. 신자유주의가 끝났다. IMF의 시대도 끝났다.

ⓒIllustration: Guardian Design/EPA; Getty; Reuters; AFP; PA
지난여름에는 비정상적인 폭우와 장마가 있었으며 기온은 인간 생존 한계 온도까지 다다랐다. 히말라야 빙하 수천 개[1]가 녹아내리고 있는 곳인 파키스탄은 국가 역사상 최악의 홍수를 겪었다. 신드(Sindh)와 발루치스탄(Balochistan) 지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몇몇은 파키스탄의 최대 3분의 1이 물에 잠겼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이 홍수로 1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전체 인구보다도 더 많은 3200만 명[2]이 살 곳을 잃었다. 파키스탄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 지대의 일부가 거대한 호수가 되면서 가축들이 익사하고 농작물과 기반시설이 파괴됐다. 이 재해로 인한 피해액은 현재 수백억 달러에 이른다.

지난 8월 파키스탄 정부는 이 참사의 규모를 정확히 추산하는 것과 동시에, 또 다른 재앙을 방지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마침내 외채를 상환하기 위한 국제통화기금(IMF)과의 협약 체결에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합의가 없다면 파키스탄은 디폴트(default, 채무불이행)를 선언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경기 위축을 촉발하고, 이 나라의 장기 성장을 약화시키고, 향후에는 저렴한 금리로 대출하는 것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협약 조건은 고통스러웠다. 파키스탄 정부가 IMF로부터 11억 7000만 달러의 구제 금융을 제공받기 위해서는 에너지 보조금을 삭감하는 등 무리해서라도 긴축 정책을 수행하겠다는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다. 최근 남아시아의 또 다른 국가는 IMF의 도움을 너무 오랫동안 미뤄두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줬다. IMF가 요구하는 개혁의 이행을 몇 달 동안 거부하던 스리랑카 정부가 불과 몇 주 전 디폴트를 선언한 직후 대중 봉기로 전복된 것이다.

파키스탄은 이례적일 정도로 파괴적인 홍수와 경제적 붕괴의 위협이라는 두 가지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사건들은 어떤 측면에서는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또한 기후 위기의 최전선에 있는 많은 나라가 마주한 도전 과제의 전형이기도 하다. 감당할 수 없는 채무 부담에 고통받고 구제의 대가로 제시된 긴축 요구에 대처할 준비를 하는 동시에, 어떻게 스스로 극단적인 자연재해에 대처하고 다가오는 참사들에 대비할 수 있겠는가?

파키스탄과 스리랑카는 현재 심각한 부채 문제에 직면한 수많은 나라 중 일부에 불과하다. 코로나19는 2008년 금융위기와 함께 시작된 저금리 시기에 거액을 빌린 중저소득 국가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많은 나라에서 공공보건과 복지 관련 비용이 치솟으면서 경제가 막히고 관광산업이 붕괴했다. 세금으로 거두는 수입이 급락한 것이다. 팬데믹은 또한 글로벌 공급망에도 지장을 줘 소비재의 부족과 물가 상승을 불러왔다. 이러한 인플레이션 압력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더욱 악화됐다. 한편, 미국의 인플레이션을 줄이기 위한 연방준비제도(FB, 연준)의 금리 인상 결정은 달러화의 가치를 20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밀어 올렸다. 이로 인해 달러화로 돈을 빌린 나라들의 통화 가치가 떨어지며 부채 규모가 더욱 커졌고, 수입 비용은 더 높아졌다. 미국의 금리 인상은 또한 투자자들로 하여금 위험한 신흥 시장에서 자본을 빼내도록 했다. 역대급 환율로 인해 이제는 안전한 달러 투자가 더욱 높은 수익을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 경제는 수십 년 만에 최악의 부채 위기 가능성에 직면했고, 심각한 경기 침체와 정치적 불안정, 그리고 수년에 이르는 마이너스 성장의 위협에 처해 있다. 동시에 더욱 강력한 허리케인과 되풀이되는 가뭄 등 극한의 기후 재해가 증가하면서 그러잖아도 수익의 대부분을 외채 상환에 바치고 있는 여러 나라의 삶을 더욱 힘들게 만들고 있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도 IMF는 지난 몇 년간보다 더 많은 나라에게 구제 금융을 제공하고 있다. 지난 몇 달 동안만 하더라도 방글라데시, 이집트, 가나, 튀니지 등 IMF에 도움을 요청하는 나라가 증가했고, 그들이 제공한 긴급 구제 금융의 액수는 기록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IMF가 일하는 방식을 쉽게 말하자면, 그들은 회원국들로부터 재원을 모아서 재정적 어려움이 발생한 나라에게 단기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워싱턴DC에 본부가 있는 이 기관에는 전 세계의 재무부와 중앙은행을 대표하는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각국의 재정적 기여도에 따라 의결권에 가중치가 부여된다. 따라서 IMF의 최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이 주요한 결정에 대해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고, 지배구조의 개혁안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IMF는 거의 모든 주권 국가들이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는 국제 기구로서 세계 경제에서 독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은 심각한 경제적 곤궁에 처한 나라라면 누구든 도와줄 수 있는 자금력과 위임권, 그리고 그만한 영향력을 가진 유일한 기관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IMF는 도움을 제공하는 대가로 해당 정부에 가장 어려운 일을 하도록 요구한다. 대표적으로는 공공 지출을 줄이고, 세금을 인상하며, 연료와 식품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하는 등 GDP 대비 부채 비율을 낮추기 위한 개혁을 시행하는 것이다. 당연히 정치인들은 이러한 조치의 단행을 주저하는 경우가 많다. 단지 유권자들이 더 힘들어지고 정치인들의 인기가 떨어지기 때문만이 아니다. 국가적 자부심도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외국 정부들이 장악한 기관의 요구 사항을 따르는 것은 굴욕적인 처사이며, 국가 기능의 장애와 통치 실패를 인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드물게 IMF가 부유한 유럽 국가의 정책을 비판할 때도 있다. 그럴 때 IMF는 해당 국가의 내정 갈등에 휘말리기도 한다. 지난 9월, IMF는 리즈 트러스(Liz Truss) 당시 영국 총리의 감세 정책을 비판했다. 이는 트러스의 반대파에게 공격의 실탄을 제공했고 파운드화 가치 폭락에도 기여했다. 쿼지 콰텡(Kwasi Kwarteng) 재무부 장관은 이로 인해 경질됐다. 이 결정은 그가 워싱턴DC에서 개최되는 IMF의 연례 회의에 참석한 도중에 내려졌다. 당시 회의에서 IMF의 지도부는 콰텡 장관이 추진하는 정책에 대한 반대 의견을 숨기지 않았다. 트러스 총리의 추락을 기록할 향후의 역사에서, IMF는 작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서술될 것이다.

그럼에도 IMF는 더 이상 옛날의 킹메이커가 아니다. 90년대의 IMF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미국의 엄청난 영향력과 함께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IMF에 대한 저항이 커졌다. 극심한 재정 압박에 시달리는 나라를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이 IMF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의 위상 하락, 다른 대출 기관의 출현, 위압적인 감독관이라는 평판으로 인해 애매한 위치가 된 것이다. 즉, IMF는 여럿에게 필요한 조직이지만 사랑받지는 못하며, 엄청나게 강력한 조직이지만 계약 조건을 강제하지는 못한다. 만약 경제 혼란이 세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는 예측이 정확하다면, 마지막 수단으로써 세계적 대출 기관의 필요성은 어떠한 형태로든 더 높아지기만 할 것이다. 과연 IMF가 그러한 과업을 맡을 수 있을지는 자신의 파란만장한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었는지에 달려 있다.
영국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쿼지 콰텡(Kwasi Kwarteng)이 지난달 워싱턴에서 BBC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Photograph: Simon Walker/HM Treasury

 

1.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제기구


IMF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측면 중 하나는 설립 당시에 원래 성취하려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초기의 목적으로부터 얼마나 빠르게 이탈했는지다. IMF의 창설은 1944년 7월 브레튼 우즈 컨퍼런스(Bretton Woods Conference)에서 결정됐다. 당시 이 회의에서는 세계 경제의 규칙을 새로 쓰기 위해서 40개국 이상의 대표단이 만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와 그 상대로 미국의 해리 덱스터 화이트(Harry Dexter White)가 주도한 이 회의의 목적은 통화 안정과 자유로운 교역으로 복귀하기 위한 국제적인 금융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다. 각국의 통화 가치는 달러화에 대한 고정이지만 조정 가능한 환율로 설정됐고, 달러화는 금 1온스당 35달러의 고정환율로 전환될 수 있었다.

이러한 체제에서 IMF의 역할은 단기적 국제 수지 문제를 겪는 회원국들을 돕는 것이었다. 협력 기관인 세계은행(World Bank)은 (각국의) 재건 및 개발을 위해 장기 대출을 제공했다. 결정적으로 이같은 원래의 비전에 의하면 IMF는 회원국이 불경기일 때 예산 삭감이나 금리 인상과 같은 고통스러운 정책을 단행하도록 협박하지 않고 무사히 재정 불안을 헤쳐 나가도록 도와줘야 했다. 이는 각국의 통화 가치를 특정한 양의 금에 고정시킴으로써 19세기 말부터 각 나라들에게 예측 가능하며 안정적인 환율을 제공했던 이전의 금본위제도(金本位制度)와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었다. 금본위제도에는 안정성이 있었지만, 위기 상황에서 국가 차원의 대대적인 경제 정책을 시행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3] 반면에 IMF의 창설에 관여한 관료들은 케인스가 말했던 “할머니의 권력(grandmotherly powers)”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할머니의 권력이란 회원국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약하면서 손가락질을 하고 심하게 훈계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IMF 집행이사회의 유럽 대표들은 전쟁 중 미국과 분명히 합의했음에도 2차 세계 대전 직후에 IMF가 예전의 금융 제국주의 시절과 연관된 나쁜 관행을 다시 채택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빌려주는 자금에 대해 대출 약관을 첨부하려는 것이었다. 유감스럽게도 IMF는 재정 및 통화 정책의 결정과 관련해서 회원국 내부의 민감한 사안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미국 측 대표단은 회원국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달러를 가져가는 걸 경계했다. 그리고 미국은 IMF의 활동에 대해 월등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었다. IMF에서 미국의 특권은 강력했다. 그러나 IMF가 이러한 간섭주의적 권력을 처음 행사한 곳은 유럽이 아니었다. 그곳은 소위 말하는 제3세계로, 칠레, 파라과이, 볼리비아 같은 50년대의 남아메리카 국가들이 그 시작이었다.

하지만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미국 달러화의 금태환(金兌換) 제도를 없애며 70년대 초에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된 후, IMF가 할 일은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재정적으로 불안정한 국가들에게 구제 금융을 제공하면서 금세 새로운 존재감을 얻었다. 이런 대출금에는 재정 및 금융 긴축에 더해서 민영화, 탈규제, 관세 철폐 등 주요한 구조 개혁 요구안이 따라왔다. IMF가 이토록 막강해진 이유는 시티은행(Citibank) 같은 시중 은행이나 외국 정부 등의 다른 채권자들이 IMF와의 사전 협의를 그 나라의 신용도를 나타내는 신호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90년대 초에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자, IMF는 직전까지 소비에트의 공화국들이었던 나라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걸 관장했다. 이는 IMF 역사상 가장 야심찬 작업이었다. 정치학자인 랜들 스톤(Randall Stone)의 표현을 빌리자면, IMF는 그 과정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제기구”가 됐다.

그러나 90년대에 IMF의 영향력이 절정에 달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반발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반발이 시작된 곳은 아시아였다.

 

2. 금융 제국주의의 시대


서구는 아시아의 금융 위기를 잘 기억하지 못한다. 9.11 테러 공격이나 ‘테러와의 전쟁’이 그 사태를 덮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낳은 사건이었으며, 그 영향력은 이후 25년에 걸쳐서 세계 경제를 재편했다. 그 시작은 1997년 여름이었다. 태국 바트(baht)화의 붕괴가 금융 공황을 촉발했고, 이는 아시아 전체로 빠르게 확산됐다. 투자자들이 휘청거리는 통화들을 하나둘 폐기하면서 이 공황은 계속해서 번졌다.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그리고 러시아와 브라질처럼 멀리 있는 나라들에까지 대혼란이 일어났다.

IMF는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 최악의 타격을 입은 나라들에게 구제 금융을 제공하면서 이 사태에 신속히 개입했다. 이런 구제 금융의 대출 조건에는 재정 축소 및 통화 긴축 정책과 같은 IMF의 오랜 요구 사항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이 나라 중 어떤 나라도 심각한 재정 적자를 겪고 있지 않았고, 해당 국가의 경제를 위기로 치닫게 할 만한 인플레이션도 없었다. IMF는 또한 그 나라들의 경제를 자유화하기 위해 많은 개혁안을 설계하고 강요했다. 그들은 특히 ‘패거리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라고 조롱받는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형태의 관행과 제도를 해체하고자 했다. IMF는 한국에서 현대 같은 거대한 재벌을 목표물로 삼았다. 한국의 재벌은 정부 및 자국의 은행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장기 집권 독재자인 수하르토(Suharto) 집안의 부를 늘리는 막대한 후견 제도의 근절을 요구했다. 예를 들자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수익성이 높은 정향(clove) 생산을 국가가 독점한 채 수하르토의 아들이 관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향은 인도네시아에서 인기 있는 크레텍(kretek)이라는 담배의 핵심 원료였다.

IMF는 외환 위기와 관계 없는 분야에 개입함으로써 커다란 야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들은 그때까지 잘 운영되는 것으로 보였던 국가들을 변화시키고자 했다. 특히 경제 운영에 있어서 국가가 주도해 특정한 산업과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특징인 ‘아시아 모델’을 뒤집어엎기로 단호히 결심한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아시아 모델의 접근 방식은 여러 나라에서 인상적인 결과를 낳았다. 특히 세계 2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하는 일본이 대표적이었다. 그러나 서구의 관료와 투자자들은 대체로 이 방식을 시대착오적이라고 여겼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아시아의 국가주의적 접근법은 영미권의 자유방임주의를 대체할 수 없었으며, 아시아 금융 위기는 그에 대한 사망 선고였다.

이렇듯 IMF는 아시아 국가의 경제 운영 방식을 개혁하고자 했기 때문에 아시아 국가에서의 인기가 낮았다. 사람들은 외국 자본이 국내 기업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제를 완화시킨 데에 특히 격노했다. 미국과 유럽의 기업들이 태국과 한국의 금융기관을 헐값에 사들이자, 많은 이들이 IMF를 신식민지주의라고 비난했다. 이러한 최악의 위기에서 벗어나 있던 중국은 국영 인민일보(人民日報)에서 미국이 “동아시아를 굴복시키려 한다”며 힐난했다. 심지어 2003년에 IMF의 수석 경제학자가 되는 라구람 라잔(Raghuram Rajan)조차도 IMF가 위기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 금융 제국주의라는 비판에 변명하기 힘들다고 시인했다.

한편 쌀이나 밀가루 같은 식료품이나 연료에 대한 보조금 삭감 등의 긴축 조치는 극심한 생계비 문제와 실업 위기를 겪고 있던 나라들에서 정치적 불안을 더욱 고조시켰다. 이러한 위기는 특히 인도네시아에서 극에 달했다. 1998년에 루피아(rupiah)화의 가치가 계속해서 떨어지고 폭도의 공격으로 중국계 소수 민족 사망자 수십 명이 발생하면서 인도네시아는 정치적 불만과 폭력의 격랑에 휩싸였다. 수도인 자카르타에서는 군부가 트리삭티대학교(Trisakti University)의 학생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네 명이 사망했고, 이는 전국으로 확산된 시위의 불길을 더욱 부채질했다. 흑자 예산을 만들라는 IMF의 요구 사항을 충족하기 위해 수하르토가 연료 가격을 인상하자, 정권에 대한 반대가 더욱 심해졌다. 그는 결국 1998년 5월에 집무실에서 쫓겨났다.

당시 IMF를 옹호하던 이들은 수하르토가 몰락을 자초했다며, 위기는 부패 때문이었고 그를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신속하게 개혁을 이행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수하르토 정권이 의지하던 후견 체제 전체를 즉시 근절하라는 것이 불가능한 요구였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어떤 외교관은 “사람들에게 자살하라고 요청하는 건 미친 짓”이라고 논평했다.

1998년 1월에 IMF와의 협약서에 서명하고 있는 수하르토와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당시 IMF의 총재였던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의 사진을 보면, 이 장면은 주권 국가의 치욕적인 항복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굳이 음모론을 꺼내 들지 않더라도 미국 재무부를 비롯한 서방의 투자자들이 수하르토의 축출을 원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비록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있는 전략적 파트너의 안정을 위협하는 조치에 대해서 미국의 국무부와 펜타곤이 반대했더라도 말이다. IMF가 수하르토의 제거를 획책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 재무부의 관료들이 인도네시아의 정권 교체를 이 나라 경제의 유일한 구원책으로 여겼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캉드쉬 총재도 훗날 스스로 이렇게 시인했다. “우리는 수하르토가 권좌를 떠날 수밖에 없는 여건을 만들었다.”

미국의 일부 관측자들이 보기에 인도네시아는 역사의 철칙을 입증해 보였다. 즉, 시민들의 물질적 번영은 필연적으로 독재 통치를 거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들은 수하르토에게 벌어진 일이 결국엔 중국 공산당에게도 일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에서는 그 시기를 2015년으로 예측하고, 중국에서도 인도네시아에 버금가는 민중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시아의 외환 위기 및 그로 인한 정치적 효과들이 다른 나라의 정부들에게 보내는 명백한 경고 신호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없다. 여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분명했다. 각 나라는 금융의 세계화로 인한 위기에 스스로 버틸 힘을 만들어야 하고, 그 위기가 닥쳤을 때 혼자서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1998년 수도인 자카르타에서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IMF의 미셸 캉드쉬(Michel Camdessus) 총재 앞에서 협약서에 서명하고 있다. ⓒPhotograph: Agus Lolong/AFP/Getty Images

 

3. 신용불량 IMF


아시아의 외환 위기는 하나의 경고였다. 다른 나라들은 향후에 금융 위기가 발생한다 해도 국내 사안에 개입할 수 있는 기관을 불러들이는 일은 피하고 싶어 했다. 한 가지 방안은 거대한 외환 보유고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외환 보유고는 위기의 순간이 되면 자국의 통화 가치를 지켜 내고 외채를 상환하며 필수품을 수입할 때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중국이 시작했지만, 한국, 브라질, 멕시코 등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도 뒤를 따랐다. 2000년부터 2009년까지 중국의 준비자산(reserve assets)[4] 총액은 약 1조 8000억 달러로 늘어났다. 현재는 3조 달러를 가뿐히 넘는데, 이는 아프리카 대륙 전체의 GDP 총액보다도 더 많은 수치이다.

일부 국가들에게는 이러한 외화의 축적이 수출 주도 발전 전략의 핵심이었다. 이것이 자국의 통화 가치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며 수출 경쟁력을 더욱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 대부분이 외화를 모으는 목적은 금융 불안에 대비한 일종의 보험이었다. 이 방식은 어떤 경우에는 놀라울 정도로 잘 먹히기도 했다. 축적해 놓은 외환 보유고는 신흥 시장의 국가들이 2008년에 시작된 최악의 세계 금융 위기를 모면하는 데 도움을 줬다. IMF는 2010년대에 그리스를 구제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지만, (외환 보유고가 튼실한) 다른 곳에서의 역할은 비교적 미미했다. 그리고 90년대에 그토록 논란이 됐던 한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다시는 IMF를 불러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외화 비축으로 인한 한 가지 충격적인 결과는 이제 거액의 자본이 부유한 나라에서 가난한 나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는 세계 외환 보유고의 상당 부분이 미국 달러로 보관되고 있고, 각국은 이런 달러를 안전한 피난처인 미국의 국채에 다시 투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전 세계에서 미국의 국채에 대한 수요가 끝없이 형성되며, 지속적으로 세계 경제에서 미국 달러의 중심 지위를 공고히 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중국이 거대한 미국 국채 더미를 깔고 앉아 있다는 사실은 오랫동안 베이징이 워싱턴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조성해 왔다. 이를 대량으로 매각한다면 달러화의 가치가 폭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중국 경제에도 참사기 때문에, 그 위협이 현실화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이런 방식으로 외화를 비축할 여력을 가진 건 아니다. 또한 그럴 능력이 있는 나라들도 이에 따른 고통이 없는 것은 아니다. 공공 투자에 사용할 수 있는 재원을 이쪽으로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각국 정부가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에 대해 의아해하면서, 공공 투자를 줄임으로써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금융 위기에 대비한 저축액보다 많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산의 비축은 단지 경제학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1997~1998년의 외환 위기 당시에 인도네시아와 태국, 한국이 헐값에 팔아버린 자주권을 지켜내기 위한 정치적이며 전략적인 정책이다. 이 시각에서 봤을 때, 완전한 주권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대가라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역사학자인 애덤 투즈(Adam Tooze)는 90년대 이후 신흥 시장 국가들이 추구한 이 전략을 ‘양무운동(洋務運動)’ 프로그램이라고 불렀다. 이는 원래 19세기 말에 중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들이 강력한 서양 제국들의 침략에 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정부 체제와 군부, 경제를 개혁하려던 노력을 일컫는 용어이다.

러시아를 예로 들어보자. 러시아는 1990년대에 IMF와 길고 고통스러운 관계를 경험했다. 1998년에는 자국 국채에 대해 채무 불이행을 선언했고,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신임 대통령이었던 블라디미르 푸틴 체제 하에서 유가 상승에 편승해 외화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2008년이 되자 러시아는 막대한 전쟁 자금을 깔고 앉을 수 있었다. 덕분에 그들은 재정적인 파급 효과에 대한 별다른 우려 없이 조지아 침략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소비에트연방의 붕괴로 인한 독립 이후에) 새로운 전략적 독립을 쟁취한 것으로 보였다.

푸틴이 올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로 결정한 데에도 비슷한 계산이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푸틴의 적들이 선보인 가장 폭넓은 대응 행보들 가운데 하나로, 미국과 G7 파트너들은 러시아의 중앙은행이 보유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방 국가들이 통제하고 있는 러시아의 외국 자산을 목표로 겨눴다. 지난 2월, 러시아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조치의 일환으로 3억 달러 이상의 러시아 자산이 동결됐다. 몇 달 뒤에도 동일한 방법을 사용했다. 카불이 함락된 뒤 탈레반을 막기 위해 아프가니스탄 중앙은행의 달러화 자산을 동결한 것이다.

러시아의 경우, 이 전략으로 전쟁을 끝내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일부는 이 조치로 인한 역풍을 우려한다. 경제적 안정을 보장할 수단으로 미국 달러화를 보유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시아의 외환 위기로 인해 많은 나라가 IMF로부터 등을 돌렸다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비슷한 방식으로 보유할 수 있는 외화 목록에서 달러를 배제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영향은 엄청날 것이다. 달러가 권좌에서 쫓겨나면서 세계의 주요한 안전 자산이라는 지위를 상실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달러화가 가졌던 영향력이 다른 통화들로 분산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러시아에 대한 미국과 유럽의 야심찬 금융 제재가 아시아의 외환 위기에 대한 IMF의 대응과 비슷한 효과를 가졌던 것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즉, 개별 국가들이 세계 경제의 인프라를 통제할 수 없는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각 나라의 자주권을 보장할 수 있는지 재고하게 만들 수도 있다.
올해 초 중국 동부의 장쑤성에 있는 어느 은행 출납원의 모습. ⓒPhotograph: Future Publishing/Getty Images

 

4. IMF의 미래


지난 10년 동안, IMF는 자신들의 평판을 개선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IMF의 관료들은 긴축 정책이 역효과를 낳을 수 있으며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이 이 기관의 중심적 관심사 중 하나가 됐다고 공개적으로 시인하게 됐다. 국가 경제의 안팎으로 외국 자본이 흘러 다니는 것을 제한하기 위한 자본 통제(capital control)처럼 한때는 터부시됐던 정책들의 선별적 사용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으며, 국내 구조의 대대적인 개혁은 과거의 일이 된 것처럼 보였다. IMF가 공식 발행하는 《금융 및 발전(Finance and Development)》이 2016년에 〈과잉 판매된 신자유주의?(Neoliberalism: Oversold?)〉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를 실었을 때, 많은 언론매체는 이것이 IMF에서 상당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라고 보도했다. 신자유주의를 오랫동안 비판해 왔던 하버드대학교의 경제학자인 대니 로드릭(Dani Rodrik)이 이 기사의 발행 소식을 듣고 보인 반응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IMF의 변화는 과장됐다. 알렉산더 켄티켈레니스(Alexander Kentikelenis), 토머스 스텁스(Thomas Stubbs), 로렌스 킹(Lawrence King)이 같은 해 발표한 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수사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IMF는 대출국들에게 공무원을 해고하고, 연금을 삭감하고, 최저 임금을 낮추는 등의 개혁을 이전만큼은 아니더라도 계속해서 요구했다. 보스턴대학교의 글로벌발전정책센터(Global Development Policy Center)가 2020년에 수행한 연구에서도 비슷한 사실을 발견했다. 이 연구는 현재의 IMF가 긴축 정책이 성장을 억제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조의 대가로 해당 국가들에게 계속해서 긴축 정책을 요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보스턴대학교의 연구는 또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 연구는 어쩌면 IMF에서 진짜 변화가 진행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보여줬다. 단지 이데올로기적 전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비즈니스 경쟁력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었다. 연구진은 중국과 이미 대출 협약을 맺은 나라들이 IMF로부터 더욱 관대한 대우를 받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중국이 대출에 대한 대가로 긴축 정책이나 해당 국가의 개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따라 IMF도 이처럼 조건 없이 자금을 이용하고 있는 클라이언트에게 좀 더 완화된 대출 약관을 권유하게 되는 것이다. 세계은행의 업무를 조사한 다른 연구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발견됐다.

중국은 현재 세계 최대의 양자간 대출(bilateral loan)[5] 기관이다. 이 사실은 서방에게 상당한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때로 이처럼 별도의 조건이 없는 대출은 부패한 독재자들에게서 호의를 사기 위한 베이징 나름의 방식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중국은 또한 ‘부채의 덫’이라는 외교를 편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막대한 비용이 드는 ‘하얀 코끼리[6]’ 인프라 프로젝트에 투자하기 위해 여러 나라에 돈을 빌려주는 것을 뜻한다. 이들 국가가 부채를 상환하지 못하면, 중국의 관료들은 그 나라의 귀중한 자산을 포기하라고 강요한다. 예를 들자면, 2017년의 스리랑카처럼 그 나라의 주요 항구를 99년 동안 중국에게 빌려줘야 할 수도 있다.

중국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스리랑카의 재정적, 정치적 혼란이 베이징의 약탈적 대출로 인한 논리적 귀결이라고 설명한다. 2000년대 중반부터 올해 여름까지 자신들이 지배해 온 스리랑카를 팔아넘긴 라자팍사(Rajapaksa) 형제가 중국의 자금 지원을 받는 화려한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베이징이 스리랑카의 인프라 건설 붐에 큰 역할을 했더라도, 올해 초 스리랑카의 경제 붕괴 당시 더 큰 빚을 지고 있던 곳은 중국이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투자자들이었다. 스리랑카를 그저 중국이 벌인 부채 외교의 희생자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시각이다.

현재는 중국이 맞이한 첫 번째 글로벌 부채 위기를 헤쳐 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많은 이들이 대출 기관으로서 중국이 갖는 역할의 본질에 대한 단서를 찾는 중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중국은 더욱 많은 긴급 구제 금융을 제공하기 시작했는데, 그러면서 스스로 IMF에 맞서는 직접적인 대안으로 더욱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그러나 IMF에 비판적인 사람들도 방대한 회원국 규모와 전 세계적인 영향력, 공공적인 목표를 가진 IMF가 세계 경제에서 중국과 같은 일개 국가와는 의미심장하게 다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여긴다. 다른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중국이 대출을 해주는 이유는 주로 그들의 전략적 목표와 국익을 위한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바베이도스의 미아 모틀리(Mia Mottley) 총리처럼 국제 금융 시스템의 변화를 촉구하는 많은 개혁가들이 여전히 IMF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많은 실책도 있었고 미국의 외교적 목표와 긴밀하게 엮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IMF는 여전히 글로벌 금융 안전망에 가까운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실제로 IMF 재편을 압박해야 하는 곳은 변함없이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미국이다. 현재의 글로벌 위기가 정치적 변화를 강제하고 있다는 징후가 있다. IMF와 세계은행의 연례 회의가 열리기 직전이었던 지난 10월, 미국의 전직 재무부 장관인 로렌스 서머스(Lawrence Summers)는 각국의 중앙은행이 금리를 인상하면서 극심한 압박을 받고 있는 다른 나라들에게 IMF가 별다른 조건 없이 재정적인 지원을 제공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개발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서머스는 IMF가 제공하는 전통적 형태의 대출과 연관된 정치적 오명이 정작 그들의 도움을 가장 필요로 하는 나라들이 IMF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고 말한다.

서머스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아시아 외환 위기 당시에 서머스는 미국 재무부의 차관이었다. 그는 워싱턴이 IMF를 통해 그 위기에 대응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심지어 자카르타에서 직접 수하르토를 만나 IMF가 내미는 조건에 동의하라고 설득하기도 했다. 그러나 서머스는 한때 IMF의 권력 행사를 도왔던 인물임에도, 현재는 세계 경제에 IMF의 개입주의적 유산을 뛰어넘는 재정적 원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올해의 연례 회의에서 세계 경제를 구할 수 있는 야심찬 조치들을 고려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이번 회의가 그저 ‘잃어버린 기회’로 기억될 거라고 주장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금리 인상) 결정이 세계 경제에 새로운 불안의 위협을 일으키면서, 올해의 회의가 어쩌면 완전히 다른 무언가로 기억될 수도 있다. 그것은 어쩌면 2020년대에 미국의 권력이 갖는 역설적인 속성을 보여 주는 장면일지도 모른다. 미국이 세계를 부숴 버릴 수 있을 만큼 막강하지만, 그것을 다시 돌려놓을 수 있을 만큼은 아니라고 말이다.
[1]
세계은행(World Bnak)의 자료에 의하면, 히말라야에는 모두 5만 5000개의 빙하가 존재한다.
[2]
2022년 11월 말 기준으로 오스트레일리아의 총 인구는 약 2608만 명이다. 자료 출처: 오스트레일리아 통계국
[3]
각국이 발행할 수 있는 통화의 양이 금 보유량에 따라 결정되는 일종의 족쇄(fetter)이기 때문이다.
[4]
어떤 나라의 통화 당국이 외화 결제를 위하여 준비해두고 있는 자산
[5]
돈을 빌려주는 쪽과 빌리는 쪽이 모두 단일한 상대인 대출로, 이와 대비되는 개념은 복수의 금융기관이 한 곳에 돈을 빌려주는 신디케이트 론(syndicated loan)이다.
[6]
비용이 많이 들지만 처리하기 곤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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