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피가 흐르고 있다
완결

그곳에 피가 흐르고 있다

이란의 시위는 히잡에 관한 것이 아니다. 삶과 자유를 근본부터 재정의하는 혁명이다.

마흐사 아미니(Mahsa Amini)가 사망한 뒤, 지난 10월에 이란 서부의 사케즈(Saqez)에 있는 묘지를 향해 행진하는 시위대의 모습이라고 소개된 트위터 게시물 이미지. ©Photograph: UGC/AFP/Getty
지난 12주 동안, 페르시아 고원의 도시와 마을에 혁명의 분위기가 흘렀다. 이 움직임은 지난 9월 16일 이란의 젊은 쿠르드족 여성 마흐사 아미니(Mahsa Amini)가 테헤란의 도덕 경찰에게 체포된 뒤 사망하면서 시작했다. 이 시위는 페미니즘적 성격으로 시작했지만, 다양한 계층과 민족에서 이슬람 공화국을 끝내 버리고 싶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결집시키기도 했다. 이란에서는 지난 15년 동안 수많은 저항 운동이 있었지만 최고 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Ayatollah Ali Khamenei)는 강경 대처와 반대파 내부의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각각의 시위를 편안하게 억압했다. 그러나 이번에 정권의 반대파가 보여 주는 회복력과 단결력은 일시적인 소요에 그치고 말았던 예전의 패턴과는 확실히 다르다. 이란은 대중적 분노의 물결에 맞서 이슬람 공화국 체제를 방어해야 하는 격정적인 시위 단계에 접어들었다.

보안군은 시위대에 보복으로 어린이 60명과 여성 29명을 포함해 최소한 448명을 살해하고, 최대 1만 7000명을 체포했다. 뉴욕에 있는 이란인권센터(ICHRI)에 따르면, 시위에 참가한 사람 중 서른여섯 명이 (사형에 처할 수도 있는) 중범죄로 기소됐고, 그중 몇몇은 보안군 병사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 당국 극도의 자제력을 발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난 11월 9일, 이란의 지상군 사령관은 하메네이가 명령만 내리면 반대파의 “파리들”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나라에 남아 있을 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대학에서든, 거리에서든, 아니면 경찰의 총탄과 곤봉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묻힌 묘지에서든 매일 새로운 시위가 열리고 있다. 그리고 시위대가 한 명 살해될 때마다, 그로부터 시아(Shia)파의 애도 기간이 절정에 달하는 40일이 지나면 무덤가에서 또 다른 시위가 열릴 것이며, 그로 인해 또 다시 사상자가 나올 가능성이 커지고, 잔학성과 반작용의 순환이 더욱 연장될 것이다. 1978년에 (이란의 옛 군주제인) 샤(Shah) 체제를 약화시키고, 1979년 1월에는 결국 국왕이 달아나는 결과를 이끌어낸 것도 바로 죽음 후의 장례식, 장례식과 또 다른 시위, 그리고 시위 이후의 죽음으로 반복되는 순환이었다.

특별한 명칭도 지도자도 없는 이 운동은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적응력도 좋다. 이번 시위는 지금까지 활용되지 않았던 자원, 즉 2등 시민의 지위에 있는 여성들의 잠재적인 불만을 강력한 자산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1979년) 이슬람 혁명 초기 이후 처음으로, 전국의 수많은 여성이 어떠한 형태의 히잡도 착용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 지난 12월 4일, 이란 검찰은 도덕 경찰 제도가 “중단”됐다고 선언했다. 이는 이번 시위 초기부터 보였던 히잡을 착용하지 않은 여성들을 눈감아 준 당국의 정책이 영구화됐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소셜미디어상의 회의론자들은 이 선언이 반대파를 분열시키고 약화시키려는 정부의 술책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시위의 새로운 점이 여성이 동참하게 된 이유인 사회적 급진주의 외에 또 하나 있다면 바로 젊음이다. 나이 든 이란인들은 시위에 참여하는 자녀들을 걱정하면서 집에 머물거나, 또는 아이들이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걸 막기 위해서 마지못해 그들과 동행하기도 한다. 그들은 흔히 아이들의 “두려움이 증발했다”는 말을 하곤 한다.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은 일반적으로 잃을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성이다. 그러나 대부분 10대 후반에서 20대에 해당하는 이란의 청년들에게는 이 특성이 해당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청년들이 이번 시위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물가가 상승하고, 리알(rial)화가 폭락하고, 이란 사회에서 성공의 3대 요소로 여겨지는 결혼, 아파트, 자동차에 대한 전망이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 코로나19 봉쇄로부터 점차 벗어났지만, 이란 제재로 인해 국경 밖의 세계에 접촉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성장과 소비력은 계속 억제됐으며, 정부 당국은 인터넷 접속을 방해했고, 정권의 인사와 그들의 가족에게 경제력이 점점 더 집중되는 것을 목격했다.

현재의 운동은 “여성, 삶, 자유”라는 고무적인 구호와 함께 시작했다. 온라인에는 활기찬 시위 영상이 퍼졌다. 그중 하나는 학교나 관공서에서 흔히 착용하는 머리를 단단히 덮는 형태의 히잡을 벗어 던진 여학생들이 남성 공무원에게 문구류를 집어 던지면서 학교 밖으로 그를 쫓아가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 시위의 비공식 찬가는 이란 북부 출신인 셔빈 하지푸르(Shervin Hajipour)가 달콤한 목소리로 탄식하듯 부르는 “위하여(For)”라는 곡이다. 몽환적이고 슬픔과 갈망으로 가득한 이 노래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폭력이 거의 3개월 동안 이어지면서 구호는 더욱 강경해졌다. 이제는 “내 형제를 죽인 그를 죽일 것이다”라는 말이 더 많이 들릴 것이다. 인스타그램의 피드에는 화염병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는 동영상과 정권의 자원 민병대인 바시즈(Basij)의 병영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올라온다. 이렇게 어두워지는 분위기는 10월 말에 인기 래퍼인 투마즈 살레히(Toomaj Salehi)가 체포되기 직전부터 시작했다. 살레히가 자유로운 신분일 때 마지막으로 공개한 뮤직비디오를 보면, 그가 말쑥한 엘리트 지배층의 누군가를 위해 커피 찌꺼기의 의미를 해석해주는 장면이 나온다.[1] 그는 “당신 잔의 바닥은 (중략)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다”고 랩을 한다. 그리고 이란의 심문관들이 사용하는 기법을 빌려서 상대방에게 (잘못에 대한) 자술서를 쓰라고 하며, 이번에는 “최고 지도자에게 그것을 확실히 전달하라”고 말한다.

살레히는 시위대의 뒤에서 지지를 보낸 수많은 유명인 중 한 명이다. 그중에는 히잡을 벗어 던진 여배우와 당국의 탄압을 비난하는 동영상을 게시한 영화감독이 있고, 자신의 모교이자 이란의 MIT라고 할 수 있는 테헤란의 샤리프공과대학교(Sharif University of Technology in Tehran)에 모인 활기 넘치는 군중 앞에서 모든 체포된 학생을 석방하라고 촉구한 이란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구 해설가도 있다.

살레히가 시위의 전술에 대해 (‘시간과 장소가 명기된 시위 초대에는 응하지 말라, 그건 함정이다’와 같은) 조언하고 나이 든 세대에게는 길거리의 자녀들과 합류하라고 애원하는 등 자신의 소셜미디어 팔로워들에게 저항하라고 촉구하기 시작했을 때, 앞으로 자신에게 닥치게 될 운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살레히가 체포된 후, 당국은 그가 눈을 가린 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친다고 말하는 동영상을 내보냈다. 그러자 그의 삼촌이 즉시 소셜미디어에 등장해서 해당 동영상의 살레히가 가짜라고 주장했다. 이는 진짜 살레히가 여전히 꺾이거나 굽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지난 11월 27일, 이란 사법부의 한 관계자는 살레히가 “지상을 타락시킨 혐의(corruption on earth)”의 (살인죄로 처벌 가능한) 중죄로 기소됐다고 발표했다.

보안군의 총구와 곤봉에 맞서는 이란 청년들의 용기는 전 세계에서 존경받았다. 그러나 세계의 관심은 변덕스럽고 이란 정권은 엄청난 자원을 갖고 있다. 문제는 현재 이슬람 공화국의 반대 세력이 이전의 실패한 혁명들에서 부족했던 충분한 숫자와 지속적인 힘, 전술적 지식을 가질 수 있을지다. 다시 말해서, 이번에는 과연 다를 것인가?
이란의 시위대는 왜 변화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나 ©Guardian

 

1. 혁명의 물결


시위대가 내건 목표는 정권 교체지만,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의 이슬람 공화국은 만만치 않은 적이다. 하메네이의 이란은 시아파의 성직자가 지상에서 신의 뜻을 행한다는 사상 위에 건설된 국가로, 공산주의를 배격하며 자본주의는 되돌릴 수 없이 타락했다고 여긴다. 이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이란 정권은 최근 미국에 맞선 여러 갈래의 투쟁에서 성공했고, 이로 인해 더욱 대담해졌다. 지난 10년 동안 이란의 무기, 인적 자원, 조언은 미국을 포함한 국내외의 적들로부터 이슬람 공화국의 핵심 동맹인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Bashar al-Assad) 대통령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됐다. 또한 이란은 이라크의 반미 민병대에게 위와 비슷한 도움을 제공함으로써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1년 미국의 이라크 전투 임무를 끝내겠다고 결정하는 데 기여했다. 이란은 또한 장거리 미사일을 만들고 블라디미르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폭격하는 데 사용하는 군사용 드론을 공급한다. 한편 UN에 따르면 이란의 우라늄 비축량은 다시 한번 미국과 동맹국을 무시하고 핵폭탄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다.

자신들보다 훨씬 풍족한 미국이라는 라이벌을 몇 번이나 이긴 뒤, 이슬람 공화국의 강경파들은 으스대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지난 10월 31일, 그 자신감은 테헤란 남부의 주거용 고층 건물 단지인 에크바탄(Ekbatan)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명확하게 나타났다. 이란의 보안군은 시위대에게 가혹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시위대를 안으로 몰아넣은 후 첨단 장비로 위협을 가했다. 음향 폭탄은 어마어마한 폭발음을 내며 건물을 뒤흔들었고, 하늘로는 로켓이 발사됐으며, 레이저 불빛이 고층 건물의 벽면에서 춤을 추며 거실 안까지 비췄다. 그중 한 건물의 고층에 살고 있는 여성은 그 장면을 자신의 휴대 전화로 촬영하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전쟁터로 만들었어.”

주민들이 각자의 아파트에서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이란 보안군의 장교 한 명이 밤의 어둠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우리는 국가를 위해 피를 바치고, 국가를 위해 생명을 바치며, 만약 필요하다면, 신께 맹세하건대, 여성과 아내와 아이들의 목을 자를 것이다. 그러나 조국이 해를 입는 일은 없을 것이다.” 주민들이 게시한 동영상에는 피로 얼룩진 한 고층 건물의 로비 바닥이 담겨 있다.

같은 날 밤, 테헤란의 다른 주거 지구에서도 시위가 벌어졌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곤봉을 휘두르면서 공중으로 총을 발사했고, 주민들은 창문을 통해서 그 장면을 촬영했다. 이 무리를 이끄는 장교는 자신의 메가폰으로 이렇게 외쳤다. “불행하게도 당신들은 8500만의 일부에 불과하다.” 의도가 무엇이든 그는 이란에 살고 있는 8500만 명의 사람들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는 만약 시위를 계속한다면 지금까지보다 더욱 가혹하게 다뤄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은 전사가 아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것은 레크리에이션에 불과하다.”

이슬람 공화국의 목표는 이슬람 혁명의 동력을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위기를 활용해 신실한 이들의 신념을 더욱 단단히 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제거해 왔다.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가 서양에 우호적이었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Mohammad Reza Pahlavi) 국왕의 군주제를 무너트리고 성직자들이 통치하는 체제로 바꾼 지 1년 뒤인 1980년에, 이란은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의 이라크로부터 침공당했다. 당시 이라크는 미국과 서유럽 동맹국들로부터 지원을 받고 있었다. 이어진 8년간의 전쟁으로 이란인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이슬람 공화국은 국경선을 그대로 지키며 그들의 맹공격으로부터 살아남았다. 호메이니는 이 전쟁을 이용해 반대파를 제거했고, 1984년에 미국이 이란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한 이후에 그들에게 부과된 제재를 견딜 수 있는 자급자족 경제를 구축했다.

이란과 서방의 관계는 거의 완전히 끝났다. 서방은 이란에서는 석유를 포함해 그 어떤 것도 구입하지 않을 것이다. 이란의 청년들은 외국 여행 비자를 얻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로부터의 고립에 대한 불만은 이란 관료들의 냉담함과 무능력으로 인해 더욱 악화됐다. 2020년 1월 8일에는 이란 혁명수비대가 이란 국민을 가득 태운 항공기를 격추시켰는데, 사흘이 지나서야 자신들의 실수임을 인정했다. 올해 5월에는 정부의 관리 감독하에 건설 중이던 고층 건물이 붕괴해 41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건의 참사 모두 거리 시위로 이어졌지만 빠르게 진압됐다.

19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한 이후, 비교적 겸손한 하메네이가 서서히 이란 전역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획득했다. 그는 현재 83세의 나이로 노쇠했다. 이 정권의 굳건한 지지자 중에서도 특히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이 있는데, 그 수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이는 대체로 전체 인구의 30퍼센트를 넘지 않을 것으로 여겨진다. 지금의 시위대는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고 싶다”는 구호를 내걸고 있다. 하메네이의 하수인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들이 아니라 우리가 이란 사람이라고 말한다.

이번 시위가 시작되기 전에는 국민 모두가 국가 대표 축구팀을 응원할 수 있었다. 국가 대표는 양극화될 수도 있었던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 주는 힘이었다. 그러나 이번 월드컵은 스포츠와 정치가 하나로 합쳐졌다는 것을 보여 줬다. 지난 11월 21일에 잉글랜드와의 조별 리그 첫 경기를 앞두고, 이란 선수들은 국가를 부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다른 종목의 스타들이 자신의 경력과 자유를 위험에 빠트리면서까지 이번 시위를 지지하는 걸 지켜본 시위대에게 있어서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그러나 당국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란 선수들은 조별 리그의 남은 두 경기에서 의무적으로 국가를 불렀다.) 이번 시위를 지지한 선수들로는 히잡을 착용하지 않고 외국의 시합에 출전했던 여성 클라이머, 정부의 탄압에 항의하며 국가대표에서 하차한 탁구선수, 그리고 이란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은퇴한 축구 스타 알리 카리미(Ali Karimi)가 있다. 그는 현재 두바이에 거주하며 반정부 내용의 트윗을 엄청나게 쏟아내고 있다.

이란은 11월 29일(현지 시간 기준)에 열린 이번 월드컵의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탈락이 확정됐다. 그런데 이란에서는 많은 이들이 이를 기뻐하며 반겼으며, 한 취객은 이를 축하하며 자신의 자동차 경적을 울리다가 보안군에게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회 초반에, 이란 대표팀의 간판 스트라이커인 메흐디 타레미(Mehdi Taremi)는 자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국제 언론의 논평 요청을 거절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란 사람들은 자신의 영웅들이 더 정치적이기를 바란다. 이란의 축구 선수들은 가장 낙관적이며 통일된 국가를 상징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혁명의 물결이 이란을 덮을 때, 팬들의 휘파람 소리는 그 누구도 중립을 유지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킬 것이다.
2022년 11월 29일, 카타르 월드컵에서 이란과 미국의 경기 도중 시위를 펼치는 모습. ©Photograph: José Sena Goulão/EPA

 

2. 시위대의 정체


외신은 이번 시위의 페미니즘적 성격을 강조했지만, 이란 전역에서 전개되는 소요 사태의 양상은 그 이미지보다 훨씬 다양하다. 사상자의 대부분은 이란의 남동부인 발루치스탄(Balochistan) 지역과 쿠르드족이 거주하는 북서쪽 지역에서 나왔다. 발루치스탄 지역은 다른 지역보다 여성 시위대의 수가 훨씬 적다. 즉 이곳의 시위는 독실한 수니파 남성들이 자신을 수니파 극단주의에 동조하는 이적 집단으로 여겨 차별하는 시아파 국가를 상대로 벌이는 것이다. 반면에 쿠르드 지역에서는 이번 시위가 완전한 독립까지는 아니라도 문화적 권리와 자치권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왔지만 결실을 얻지 못했던 운동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국가의 탄압이 점점 더 군사적 성격으로 변해 가는 가운데, 부칸(Bukan)이나 자반루드(Javanrud)와 같은 쿠르드족 마을에서는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고 혁명수비대가 수십 명을 사살하면서 이 운동이 점점 더 내란에 가까워지고 있다.

카스피해 바닷가의 바볼(Babol)에서부터 페르시아만의 아살루예(Asaluyeh)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동요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시위대는 사람들의 의견을 가르는 두꺼운 쐐기(wedge)의 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운동의 운명을 결정할 사람은 이번 시위를 지지하지 않는 거대한 이란인 집단이다. 나는 1990년대부터 이란에 대해 보도했는데, 그동안 이슬람 공화국에 애정이 없는 이란인들에게서 만약 지금의 체제가 무너지면 이 나라는 인종 분리주의로 인해 와해되거나 실패한 국가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하는 이야기를 수없이 많이 들었다. 정부 당국은 현재 이런 두려움을 이용하고 있다. 친정부 성향의 매체는 전국적인 이번 시위를 두고 이란을 분열시키려는 분리주의 세력들에 의해 촉발된 “정치적 음모”라고 부르고 있다. 이란 정권은 물론이고 그들을 비판하는 세력들도 동의하는 한 가지가 있다면, 나라 전체를 온전하게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것이다.

이란 정권은 오랫동안 반대 세력들은 분열했고, 신뢰성이 없는 집단이며, 서로 합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묘사했다. 이란 내에서 지지자가 거의 없는 좌파 성향 분파 무자헤딘-에 칼크(Mujahedin-e Khalq, 인민무자헤딘기구) 같은 망명 단체는 미국에 거주 중인 마지막 국왕의 아들 레자 팔라비(Reza Pahlavi)를 중심으로 집결한 나이 많은 군주제 지지자들과 싸우기도 한다. 레자 팔라비의 지지자들은 그가 부친이 공석으로 남겨둔 왕좌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슬람 혁명 이후 쿠르드족과 발루치스탄의 무장 단체들은 이란의 군사 요충 시설에 산발적인 공격을 가해 왔지만, 이 단체들의 분리주의적이며 분파적인 특성으로 인해 페르시아어를 사용하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시아파 이란인들로부터 멀어졌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정치 자유화 및 서방과의 관계 개선을 약속하며 대통령으로 선출된 개혁 성향의 모하마드 하타미(Mohammad Khatami)는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그전까지 혁명적이었던 선동가들에게도 평화로운 변화를 위한 요구 사항을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줬다. 그러나 이란에서는 선출직이 아닌 성직자들이 정부의 위에서 중요한 정책 사안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가진다. 이 성직자들 중 강경파는 하타미의 의제가 실현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두 가지의 중요한 결과가 나타났다. 첫 번째는 인재 유출이다. 이 흐름은 대통령이었던 하타미가 강경파인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Mahmoud Ahmadinejad)로 교체됐던 2005년부터 시작됐다. 이는 자국 내에서 영향력 있는 반대 세력을 형성했을 수도 있는 젊은 전문직 종사자와 학생 집단을 약화시켰다. 동시에 국내에서 국민들의 불만은 길거리 외에 갈 곳을 잃었다.

시위의 빈도가 계속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슬람 공화국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으로 거듭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그 시위들이 각각 서로 다른 명분을 내세웠고, 서로 다른 인구 집단을 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2009년에는 선거 논란으로 인해 거대한 운동이 일어났지만, 평화로웠던 그 시위는 대체로 고상한 중산층의 문제였다. 최고 지도자의 한 차례 경고와 어느 정도 신중하게 조정된 잔인함만으로도 그것을 제압하기에 충분했다. 2019년 11월에는 휘발유 가격이 급등하면서 일자리가 없는 노동 계층의 젊은이들이 거리로 뛰어나왔는데, 그들은 은행을 불태우고 시위 진압 경찰을 향해서 돌을 던졌다. 이란 정권은 소수 집단과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실탄 사용을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당시에도 수백 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그렇게 소요 사태는 끝이 났다.

자신의 자유와 생명을 내놓고도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면 사기가 저하할 수밖에 없다. 상대방에게 제압당하고 무력적으로 열세에 놓이는 상황은 열등감과 무력감을 유발한다. 바로 이 점이 왜 수많은 이란인이 정치를 외면했는지, 그리고 악화되는 경제 환경에서 살아남거나 해외로 이주하는 방법을 찾는 데에 에너지를 바쳐 왔는지를 설명해 준다.
2022년 9월 19일, 테헤란에서 마흐사 아미니를 추모하는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는 이란의 경찰관들. ©Photograph: AFP/Getty Images

 

3.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희망


이란의 반대파가 지금까지 실제로 분열된 상태였으며 쉽게 진압당해 왔다면, 현재의 시위가 이전의 시위와 다른 점은 여기서 나온다. 본능에 의한 것이든 합의에 의한 것이든, 현재 이슬람 공화국의 종식을 압박하는 그룹들은 하나의 통일된 전선을 만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

국경 너머 이라크의 쿠르디스탄 지역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이란계 쿠르드족 게릴라 그룹들은 이란에서 군사 공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유혹에 저항해 왔다. 이 의식은 이란이 그들의 캠프에 미사일 공격을 반복하면서 더욱 날카로워졌다. 만약 공격을 감행했다면 그것은 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됐을 것이다. 발루치스탄 지역의 주요 도시인 자헤단(Zahedan)에서는 시위대가 “쿠르디스탄에서 자헤단까지, 내 생명은 이란을 위해”와 같은 애국주의적인 슬로건을 외치고 있다.

지난 11월 4일, 자헤단에서 영향력이 큰 금요 예배(Friday prayer)[2]의 지도자 모울라비 압둘하미드 이스마일자히(Mowlavi Abdulhamid Ismailzahi)는 이란이 어떤 정치 체제를 가져야 할지 결정하기 위한 국민 투표를 요구했다. (그는 유권자들에게 어떤 대안들이 제시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추종자들 사이에서는 연방제 몇 종류가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든지 체포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이런 대담한 요구를 하면서, 회색 수염을 기른 수니파의 성직자 이스마일자히는 자신이 정장을 입고 미국에 망명 중인 마지막 국왕의 아들인 레자 팔라비[3]와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노동 계층이 많은 지역에서 일어나는 일부 시위에서는 팔라비의 이름이 연호되기도 했다. 군주제의 복원이 얼마나 큰 지지를 얻을지 파악하기는 불가능하다. 팔라비 자신도 최근에 워싱턴DC에서 가진 기자 회견에서 쿠르드족이 이 시위의 초기부터 사용했던 “여성, 삶, 자유”라는 구호를 인용했다.

이번 운동이 이전의 시위들과 다른 또 다른 이유는 2005년부터 시작된 인재 유출로 외국에 거주하는 이란인들이 끊임없이 시위대에게 지지를 보낸다는 점이다. 이란 중부의 야즈드(Yazd)에서 정보 관계자들이 참석한 회의의 녹취기록이 유출돼 BBC 페르시안에 의해 보도된 바 있다. 그 녹취록에서는 관료 한 명이 동료들에게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 이후에 모두 9200만 건의 소셜미디어 게시물이 삭제됐는데, 그중 60퍼센트가 외국에서 유입된 것이었다고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다.

캐나다의 온타리오에 거주하는 하메드 에스마에일리온(Hamed Esmaeilion)이라는 치과 의사도 이란의 저명한 망명자 중 하나다. 2020년에 혁명수비대가 이란에 있는 가족을 방문한 뒤 캐나다로 돌아가던 캐나다계 이란인들이 타고 있던 여객기를 격추했을 때, 에스마에일리온의 아내인 파리사 에그발리안(Parisa Eghbalian)과 딸인 리라(Reera)도 죽었다. 이 사건 이후 에스마에일리온은 유가족 협회를 설립했고, 협회는 이번 소요가 시작된 이후 전 세계에서 정권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그중 최대 규모의 집회가 지난 10월 22일 베를린에서 개최됐다. 당시 8만 명의 국외 이란인들이 참여해 이슬람 공화국 폐지를 요구했다. 10월 11일에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을 접견한 세 명의 이란 활동가 중 하나인 마시 알리네자드(Masih Alinejad) 같은 유명한 망명자는 미국과 유럽 동맹국들이 이란에 대한 제재를 완화하고 그 대신에 이란의 핵 개발을 제한하기 위해 2003년부터 간헐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협상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이란에 계속 살고 있는 사람들과 외국에 거주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결정적인 관점의 차이가 존재한다. 열의 넘치는 망명자들은 핵 협상과 제재 완화가 이슬람 공화국의 생명줄이 될 거라고 여기기 때문에 이것만은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 반면에 이슬람 공화국 내에 사는 이란인들에게는 그것이 최근 몇 년 동안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생활 여건의 개선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현재까지 상인과 교사, 그리고 중요한 세력인 석유 노동자들까지 가담해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여야 한다는 주장은 무시당했다. 그 원인을 정부의 협박이라고만 해석할 수는 없다. 이는 정부가 최근 몇 달 동안 공공 부문 노동자들과 가난한 가정에게 임금과 수당을 대폭 쏟아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위대의 그 모든 영웅적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정권이 갑자기 무너진다는 희박한 가능성이 실현됐을 경우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블랙 리워드(Black Reward)라는 해커 단체가 지난 11월 25일에 공개한 이란 정권 내부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란인 51퍼센트는 히잡이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가 되기를 바라며, 56퍼센트는 이번 시위가 계속되리라고 예측한다. (같은 보고서에서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하메네이 역시 “시위가 조만간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무엇을 위해서인가? 뚜렷한 지도부가 없는 반대 세력은 참수당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처럼 반대 의견이 다양하기 때문에 이슬람 공화국 이후의 이란에 대한 논의가 고통스럽게 구축한 통합을 무너트릴 수도 있다. 오늘날의 혁명가들 사이에서 “다음은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지금은 그런 논의를 할 때가 아니다”라거나 “무엇이든 지금보다 낫다”라는 말로 함구당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면 심지어 정권이 몰락하면 혼란이 뒤따를 것이라는 공포를 퍼트리려는 이슬람 공화국의 전술에 가담했다고 비난받을 가능성도 있다.

이란 당국 역시 두 가지의 경우를 고려하고 있다는 징후를 보여 준다. 하나는 “폭도들”이 분쇄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이번 시위의 중추였던 대학의 학생들과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화는 그 자체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일례로 정부의 한 대변인은 지난 11월 10일 이란 북동부에 있는 마슈하드피르다우시대학교(Ferdowsi University of Mashhad)의 학생들로부터 공개적으로 호된 비난을 받았다.

전국 학생협의회의 지역 대표인 아민 마지디파르(Amin Majidifar)는 당시에 이렇게 말했다. “지속적으로 사회의 뺨을 때리다가 그에 반대하는 손이 올라가니까 그제야 ‘대화합시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에 환호와 박수가 쏟아지자, 그는 “청년들에게서 사회를 향해 자연스럽게 생기는 분노를 (중략) 이 나라의 적, 미국, 이스라엘의 탓으로 돌리는” 정권의 습성을 규탄했다. 그는 정부에게 다음과 같이 촉구했다. “이란 사람들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이 나라 사람 중 일부는 당신들이 상상하는 틀에 맞지 않으며,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고, 완전한 시민권을 갖고 있으며, 2등 시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중략) 이 체제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마지디파르의 요지는 다원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이며 포괄적이다. 그의 발언은 또한 이례적으로 국영 TV 방송에서 생중계됐다. 종교 기구 및 보안 기관의 강경파들이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은 학생들이 불만을 표출할 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과연 캠퍼스가 침략당하고 친구들이 구타당하고 체포되고 집행유예 처분을 받는 걸 지켜보면서 분노하고 있는 학생들을 달래줄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 것인지다.
1978년 10월 9일, 테헤란에서 당시 국왕이었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 반대하며 열린 시위. (역주: 시위대가 들고 있는 피켓은 국왕에 반대하는 종교 지도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의 사진이다.) ©Photograph: AP

 

4. 근본적인 변화


반대파에게 최악의 악몽은 정권이 그들 사이에 쐐기를 질러 넣는 것이다. 이슬람 공화국은 의심과 편집증을 조장하는 것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남부 도시 시라즈(Shiraz)의 어느 여학교에서 휴대 전화로 은밀하게 촬영한 영상의 한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그렇게 조장한) 편집증과 의심은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이 영상에서는 학급의 여학생들과 선생님 사이의 말싸움이 담겨 있다. 학생들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묻어 있는 반면 규정에 의해 짙은 청색 히잡을 착용한 중년 여성 교사의 목소리에는 실망감이 실려 있다. 학생들은 지난 10월 26일에 시라즈에서 존경받는 시아파 인물의 무덤을 공격하여 15명이 살해당한 사건의 배후에 이란의 보안군이 있다고 확신했다. 반면에 교사는 학생들이 오해하고 있다며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이 실패하면서 점점 더 괴로워하고 있다.

“얘야.” 소동의 와중에 교사가 여학생 한 명을 부르며 이렇게 말한다. “가해자들이 누구의 영향을 받고 있을까? 그들은 이슬람국가(IS)와 시온주의자들의 영향을 받고 있단다.” 그러자 학생들이 더욱 분개하며 거칠게 반응한다. 학생 한 명이 “그렇지 않아요!”라고 외친다.

약간의 환기를 위해 자신의 히잡을 이마 위쪽으로 살짝 올리면서 교사는 이렇게 주장한다. “신께서 내게 증언하시듯, 우리의 보안군은 그 일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진실이라고 맹세하마.” 여학생 한 명이 소리친다. “그걸 어떻게 알아요?” 교사가 대답한다. “내가 말한 그대로다. 우리 아이들의 죽음에 대해서, 이슬람국가가 바로 그날 밤에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단다.”

이란인이 스스로 존경하는 시아파 성인의 무덤을 훼손했다는 것은 말이 안 되며, 이슬람국가가 그것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음모론은 이란에서 오랫동안 성공적이었다. 1978년 여름, 이란의 정유 도시인 아바단(Abadan)에서 사람이 가득했던 시네마 렉스(Cinema Rex)의 출입문이 잠기고 건물이 불에 타서 무너져 내리면서 최소한 370명이 사망했다. 현재 우리는 군주의 비밀 경찰이 이 참사를 일으킨 것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당시에는 많은 이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 이 영화관의 화재는 이란 국민들이 그들의 군주로부터 등을 돌리게 된 가장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실제로 이 영화관은 이슬람 열성분자들에 의해 불타올랐으며, 그들 중 한 명이 죄책감에 시달리다 이슬람 혁명 이후에 새롭게 들어선 호메이니 정부에 자백했고, 조용히 처형됐다.)

그리고 현재 이란 정권에 반대하는 외국의 TV 방송사들에 의해 이란인 상당수는 자국 정부가 법과 질서의 붕괴에 대한 두려움을 퍼트리기 위해 이 묘소를 공격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이 공격에 연루된 혐의로 (타지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아프가니스탄 시민권을 가진) 외국인 26명을 체포했다는 성명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이란의 정보부는 (자신들에게 제기되는) 이 혐의를 떨쳐내기 위해 애를 썼다. 이는 그들이 그런 혐의 제기를 우려하고 있다는 확실한 신호이다.

이란의 문화부 장관인 에자톨라 자르가미(Ezzatollah Zarghami)는 최근에 친정부 성향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은 80년대 세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80년대는 이란의 달력 체계[4]에서 1380년대를 말한다. 현재 시위대의 다수인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 태어난 시기다. 자르가미는 과거에 국가의 선전 도구인 국영 방송사의 대표였는데, 이 방송사의 전문 분야는 극심한 탄압에 의해 무너진 반체제 인사들의 고백을 방송하는 것이다. 자르가미는 이렇게 말했다. “최근에 수감된 인물들을 심문하는 책임자와 이야기했데,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저는 평생 사람들을 심문하며 살았는데, 이번 조사가 지금까지 했던 것 중에 가장 힘듭니다. 제가 그들이 말하는 걸 이해할 수 없고, 그들은 제가 말하는 걸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르가미는 계속해서 한 검소한 성직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성직자가 길을 건널 때 누군가 그의 터번[5]을 툭 쳐서 떨어트렸다고 한다. (이번 시위에는 터번을 쳐서 떨어트리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시위대는 다른 무언가 때문에 화가 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얻으려 애쓰는 율법학자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이란의 문제가 그다지 걱정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절차와 방법에 대한 질문이며, 근본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선언했다. 자르가미는 “절차” 문제를 언급하며 마흐사 아미니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히잡 법령의 강압적인 시행을 비판했다. 그러나 해당 법령 자체에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시위 초기에 점잖고 나이 많은 영화감독 바흐만 파마나라(Bahman Farmanara)가 자르가미를 찾아왔다. 그는 주로 서구에서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에, 이슬람 공화국에는 별다른 애정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파마나라 감독이 자르가미를 찾아온 이유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에 대한 허가를 얻기 위해서였다. 자르가미는 이 만남을 사진으로 찍어서 트위터에 올렸고, 파마나라는 온라인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정권의 반대파는 그가 길거리에서 사람들을 죽이고 있는 정부에게 아첨하고 있다며 격분했다. 자르가미와의 만남이 반세기에 걸쳐 구축한 영화감독으로서의 명성을 이처럼 한순간에 무너트릴 수 있다는 것은, 이슬람 공화국이 필요할 때 얼마나 기묘한 본능으로 적들의 약점을 찾아 내는지를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다.

최근 며칠 동안 다수의 저널리스트와 작가, 배우, 영화감독이 체포됐다. 반면 11월 말에는 사법부 수장이 1156명을 석방한다고 발표했다. 그들은 (최근에 체포된 유명인들에 비해서) 다소 영향력이 적다고 여겨진다. 보안군이나 공공 재산을 대상으로 폭력을 행사한 시위대 최소 네 명에게 사형 선고가 내려졌다. 그런 사례는 더 나올 것이다. 국영 TV는 재판과 자백을 방송으로 내보낼 것이고, 경찰은 무기 은신처를 발견했으며 ‘폭도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조직된 지하 조직망을 분쇄했다고 발표할 것이다. 시위대에게 죽은 경찰이나 병사들은, 일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순교자로 장례가 치러질 것이다.

도덕 경찰 제도를 중단한 정부의 조치가 히잡 법령의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 하메네이는 이란의 많은 여성들이 히잡을 쓰지 않고 돌아다닌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그들의 낯부끄러운 행동을 합법화하는 법안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여건이 허락된다면 히잡을 다시 착용하도록 강제할 것이다.

마지막 국왕의 아들인 레자 팔라비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양측이 서로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자르가미의 말이 떠올랐다. 팔라비는 어떠한 정치적 야망에 대해서도 부인했으며, 다만 이란 국민들을 위해 최선의 결과를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치 지난 43년 동안 미국의 옷장에서 거미줄이 쳐진 채로 보관됐던 정장을 입고 있는 것처럼 뻣뻣하고 부자연스러운 페르시아어로 말했다. 그런데 만약 날카로운 길거리의 언어로 이란 정권을 혹독하게 비판하다가 지금은 어딘가의 감방에 수감된 래퍼 투마즈 살레히와 레자 팔라비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이들 두 사람, (국민투표를 요구했던) 자헤단의 성직자, 마슈하드피르다우시대학교의 학생들, 쿠르디스탄의 호전적인 여성들 사이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을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친정부 성향이든 반정부 성향이든 경계해야 한다. 반대 세력들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능력은 이제 겨우 검증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앞으로 이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무언가 근본적인 것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1]
아랍 지역에서는 커피를 마시고 남은 찌꺼기의 모양으로 점을 보는 문화가 있다.
[2]
이슬람 각 도시의 중앙 모스크에서 매주 금요일 정오에 행해지는 집단 예배 의식
[3]
팔라비 왕조는 히잡 착용을 금지하는 등 이란의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했으며, 그래서 국왕의 재위 시절에도 이란의 전통 의상이 아닌 서구식 정장을 착용했다.
[4]
이슬람의 선지자인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메디나로 천도한 622년을 원년으로 삼는다.
[5]
이슬람 남성이 머리에 두르는 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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