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셀이 남긴 유산
완결

러셀이 남긴 유산

당연해 보이는 사실도 논리적으로 따져 보면 그렇지 않다. 철학과 수학은 러셀의 눈을 통해 어떻게 바뀌었을까.

 

1. 세 가지 열정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은 명실공히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성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수학과 철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석학이자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이라는 끔찍한 참상을 초래한 당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수많은 저술과 사회 활동을 통해 이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수학 전체가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논리주의 기획을 발전시키던 중, 그가 발견한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은 아직도 수학 기초론의 가장 중요한 역설로 남아 있다. 러셀이 스승 화이트헤드(Whitehead)와 공저한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는 유형 이론(theory of types)을 통해 러셀의 역설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면서 수학을 모순 없이 논리학으로 환원할 수 있는 형식 체계를 최초로 제시한 논리주의의 기념비적 저서다. 러셀은 또한 논리학을 도구로 사용해 수학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 일반과 존재자의 본성을 분석하는 작업을 발전시켰다. 이는 20세기의 가장 유력한 철학 사조인 분석철학을 탄생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러셀은 동료 철학자 G.E. 무어(Moore)와 독일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고틀로프 프레게(Gottlob Frege), 그리고 가장 유명한 제자인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과 더불어 분석철학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다.

러셀은 그의 자서전 서두에서 자신의 인생을 회상하며 이렇게 밝힌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 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추구,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1] 사랑에 대한 갈망은 러셀의 사적인 삶을 지배한 열정으로, 그는 일생 동안 네 번이나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자유연애를 옹호하면서 많은 이들과 연인 관계를 맺었다. 지식의 추구와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은 러셀의 공적인 삶을 지배한 열정으로, 특히 확실한 지식을 찾으려는 열망은 수학과 철학에서 그가 가장 중요하고 독창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2. 러셀을 살린 수학


버트런드 러셀은 1872년 5월 18일 영국 웨일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명문 귀족 가문이었다. 러셀의 할아버지 존 러셀(John Russell)은 두 차례나 영국 총리를 지냈고 19세기의 대표적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은 그의 대부였다. 러셀의 부모는 그가 어릴 때 일찍 사망했고 할아버지 존 러셀 또한 그가 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나, 그는 할머니에게 양육되면서 학교 대신 가정 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환경 때문에 러셀은 매우 외롭고 고독했으며, 여러 차례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러셀이 이러한 충동을 극복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수학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탐구욕 때문이었다. 계기가 된 사건은 그가 열한 살 때 형 프랭크 러셀로부터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운 경험이었는데, 놀랍게도 러셀은 이때부터 이미 유클리드가 자명한 진리로 간주한 다섯 개의 공준(公準)을 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을 품었다고 한다. 1890년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하여 수학과 철학을 전공했고,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1차 세계철학대회에서 이탈리아의 논리학자 주세페 페아노(Giuseppe Peano)를 만나면서 수학이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논리주의 기획에 확신을 갖고 이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키기 시작했다.[2]

논리주의의 기본 아이디어는 17세기 후반에 철학자 라이프니츠(Leibniz)가 제시했다. 하지만 수학이 논리학으로 환원될 수 없는 고유의 내용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특히 기하학의 개념과 법칙은 도형의 작도와 같은 직관의 도움을 받아야 이해할 수 있는 듯했으므로 라이프니츠의 생각은 거의 무시됐다. 러셀이 논리주의 기획을 새롭게 추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수학과 논리학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수학에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의 발전과 이른바 ‘해석학의 산술화’를 통해 기하학과 미적분학의 정리들을 직관의 도움 없이 순수하게 개념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논리학 분야에서는 프레게가 1879년 출간한 《개념기호법(Begriffsschrift)》에서 오늘날의 명제 논리와 술어 논리에 해당하는 새로운 논리 체계를 처음 제시함으로써 논리학의 혁명이 시작됐다. 프레게의 논리학은 전통적인 아리스토텔레스 삼단논법 논리학이 다룰 수 없는 수많은 추론을 형식화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비로소 진지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프레게는 러셀에 앞서 이미 1884년과 1893년에 《산수의 기초(Die Grundlagen der Arithmetik)》와 《산수의 근본법칙(Grundgesetze der Arithmetik)》 Ⅰ권을 출간하면서 논리주의 기획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프레게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세계의 속성들이 어떤 수적(numerical) 속성을 공통적으로 갖고 있고 자연수 0, 1, 2 등은 이러한 수적 속성으로부터 추상화된 대상이라는 착상이었다. 가령 속성들 〈지구의 위성이다〉, 〈《햄릿》을 썼다〉, 〈백범 김구를 암살했다〉는 각각 달, 셰익스피어, 안두희라는 유일한 개체만이 갖고 있는 속성이므로 〈한 개의 개체가 속해 있다〉라는 수적 속성을 공통으로 갖고 있다. 프레게에 따르면 각 수 n은 바로 수적 속성 〈n개의 개체가 속해 있다〉로부터 추상화된 대상으로, ‘n개의 개체가 속해 있는 속성들의 외연들의 집합’으로 정의될 수 있다. 속성의 외연은 곧 그 속성을 갖고 있는 개체들의 집합이므로, 결국 프레게는 각 자연수 n을 ‘n개의 원소를 가진 집합들의 집합’으로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순환적인 정의인 것처럼 보이지만, 프레게는 ‘n개의’라는 개념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n개의 원소를 가진 집합들의 집합’을 정의할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순환성의 문제를 해결했다.

러셀 또한 자신의 논리주의 기획을 발전시키면서 프레게식의 수 정의를 채택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는 ‘집합들의 집합’에 대해 얘기하면서 집합이 다시 어떤 집합의 원소일 수 있음을 아무런 제약 없이 허용하고, 이에 따라 각 집합이 자기 자신의 원소이거나 아닐 수 있는 가능성 또한 허용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러셀은 유명한 ‘러셀의 역설’을 발견했다. 각 집합이 자기 자신의 원소이거나 아닐 수 있다면, 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집합들의 집합, 즉 집합 R = {x|x∉x}가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R은 자기 자신의 원소인가 아닌가? 다시 말해 R∈R인가 아니면 R∉R인가? 만약 R∈R이면, R은 R의 원소가 되기 위한 조건 x∉x를 만족시켜야 하므로 R∉R이다. 만약 R∉R이면, R은 R의 원소가 되기 위한 조건 x∉x를 만족시켜버리므로 R∈R이다. 결국 R∈R일 경우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 R∉R이라는 귀결이 따라 나오므로 모순이 발생한다.

러셀이 위의 역설을 발견한 1901년 5월 당시 그는 논리주의의 철학적 정당화 및 개략적 증명을 제시한 책 《수학의 원리(Principles of Mathematics)》 초고를 완성한 후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보다 엄밀하고 형식적인 증명을 담은 《수학 원리》를 집필하고 있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작업을 끝낼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러셀의 역설이라는 암초를 만남으로써 1910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수학 원리》 첫째 권을 출간할 수 있었다. 역설을 해결하기 위해 러셀이 채택한 유형 이론은, 집합을 비롯한 모든 존재자들이 서로 다른 단계의 논리적 유형을 갖고 있어서 각 단계의 존재자들은 오직 자기보다 한 단계 낮은 존재자들만을 자신의 원소로 가질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이를 받아들이면 어떠한 집합에 대해서도 애초부터 그것이 자기 자신을 원소로 갖거나 갖지 않을 가능성 자체가 허용되지 않으므로 러셀의 역설은 발생하지 않는다. 러셀이 《수학 원리》에서 발전시킨 복잡한 형태의 ‘분지(分枝, ramified)’ 유형 이론은 러셀의 역설 이외에도 거짓말쟁이 역설 등 논리학에서 널리 논의되는 모든 역설을 해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세계에 무한히 많은 개체가 존재함을 함축하는 이른바 ‘무한 공리’ 등 논리 법칙이라고 보기 어려운 원리들을 가정해야만 수를 정의할 수 있다는 문제점 또한 갖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점은 자연스럽게 논리 법칙과 논리학의 본성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졌고, 러셀은 이 질문을 결국 미해결의 상태로 남겨 놓았다.[3]
 

3. 철학, 논리적으로 분석하다


러셀은 논리학을 수학뿐 아니라 세계에 대한 지식 일반과 존재자들의 본성을 분석하는 도구로 활용하면서, 엄밀한 의미의 철학을 이러한 논리적 분석의 작업과 동일시했다.[4] 그에 따르면 가장 기본적이고 확실한 지식은 그가 ‘대면(對面)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직접 알 수 있으므로 그 존재를 의심할 수 없는 존재자들에 대한 지식이다. 대표적으로 인식 주체의 현재 경험을 통해 지각되는 특정 색깔, 형태, 냄새, 촉감 등 러셀이 ‘감각 자료(sense data)’라고 부르는 지식들이 여기 해당한다. 러셀에 따르면 책상이나 의자로부터 양성자나 전자에 이르는 세계의 거의 모든 존재자들은 인식 주체가 직접적으로 알 수 없고, 언어적 기술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알 수 있다. 즉, 우리의 지식 대부분은 대면에 의한 지식이 아니라 ‘기술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description)’이다. 러셀은 논리주의 기획에서 수를 비롯한 모든 수학적 존재자들을 집합 및 집합 간의 관계들로부터 논리적으로 구성해 내고, 이를 바탕으로 수학적 지식을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논리학적 지식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같은 원리로, 그는 세계의 모든 존재자들을 대면을 통해 알 수 있는 감각 자료 및 기본적 속성과 관계들로부터 논리적으로 구성해 내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을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한 대면에 의한 지식으로 환원시키고자 했다.

러셀이 1905년 발표한 그의 가장 유명한 논문 〈표시에 관하여(On Denoting)〉[5]에서 제시한 기술 이론(theory of descriptions)은 이러한 그의 인식론적 기획과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다. 기술 이론에서 특히 잘 알려진 내용은 표현 ‘현재 한국의 대통령’처럼 어떤 특정 개체가 유일하게 갖고 있는 속성을 서술하는 한정 기술구(definite description)에 대한 분석이다. 러셀은 한정 기술구가 겉보기에는 마치 어떤 개체를 가리키는 표현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고 양화사 ‘어떤’과 ‘모두’를 포함한 양화 표현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가 든 사례를 살펴보면, 가령 한정 기술구 ‘현재 프랑스 왕’이 나타난 문장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는, ‘어떤 x가 있어서 x는 현재 프랑스에서 왕이고, 현재 프랑스에서 왕인 모든 y는 x와 동일하며, x는 대머리이다’라는 문장으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하에서 개체를 가리키는 표현으로서의 한정 기술구 ‘현재 프랑스 왕’은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이 표현이 가리키는 현재 프랑스 왕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이 표현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라는 철학적 퍼즐에 직면할 수 있다. 이는 러셀의 논리주의 기획에 중요한 함축을 갖는다. 바로 러셀의 역설에 등장하는 표현 ‘자기 자신의 원소가 아닌 집합들의 집합’이 한정 기술구이기 때문이다. 이 표현이 가리키는 집합이 역설을 일으키므로 존재할 수 없다면 도대체 이 표현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러셀은 한정 기술구가 애초부터 개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라고 분석함으로써 문제 자체를 해소해 버렸다.

더 나아가 기술 이론의 한정 기술구 분석은 이름에 대한 분석으로까지 확장됨으로써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 모두를 대면에 의한 지식으로 환원하려는 러셀의 인식론적 기획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됐다. 러셀에 따르면 ‘플라톤’이나 ‘설악산’과 같은 일상 언어의 이름 또한 실제로는 이름이 아니라 ‘위장된’ 한정 기술구다. 따라서 기술 이론의 분석에 따르면, 이들은 개체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니다. 왜냐하면 러셀이 보기에 진정한 이름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상은 감각 자료처럼 우리가 대면에 의해 직접적이고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존재자밖에 없는데, 일상 언어의 이름은 어떤 것도 그러한 존재자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러니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러셀에 따르면 가령 ‘플라톤은 철학자이다’와 같은 일상 언어 문장은 겉보기에 단순한 문법적 형식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 논리적 형식은 매우 복잡하며, 이 문장을 구성하는 표현들 모두가 궁극적으로 대면에 의해 알 수 있는 존재자를 가리키는 표현들로 분석될 때에만 비로소 그 논리적 형식이 제대로 드러날 수 있다. 이러한 러셀의 언어철학적 견해는 ‘세계의 거의 모든 지식이 기술에 의한 지식이고, 이는 궁극적으로 대면에 의한 지식으로 분석되어야 한다’는 그의 인식론적 견해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4. 실천하는 지식인


러셀이 처음 펴낸 저서가 그의 나이 스물네 살 때인 1896년에 출간된 《독일 사회민주주의(German Social Democracy)》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러셀이 첫 번째 부인 알리스 스미스(Alys Smith)와 베를린에 머물면서 독일의 사민주의 정치 체제를 함께 연구한 결과물로서, 그가 일찍부터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러셀은 산업혁명 이후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 덕분에 사회 전체의 생산 활동을 적절히 재조직한다면 누구나 하루 네 시간만 노동하면서 여가 시간에 자신이 선택한 활동을 자유롭게 추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활동을 통해 각 개인이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최대한 발현하고 아울러 타인에 대한 관용과 존중, 상호 협력이 일상화된 조화롭고 평화로운 사회를 꿈꾸었다. 러셀은 자본주의 대신 ‘길드(guild) 사회주의’라고 불리는 형태의 사회주의를 옹호했다. 자본주의가 사적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므로 빈부 격차의 심화와 노동의 비효율적 분배를 야기할 뿐 아니라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같은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자본주의 체제 아래 관련 산업계가 처한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러셀은 마르크스(Marx)의 이론과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강하게 비판했다. 계급 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반민주적이며 지적 자유를 비롯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비롯한 지적 자유는 러셀이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였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지적 자유가 보장되기 위해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최소한의 경제적 안정을 누리면서 오직 이성과 증거에 따라 합리적이고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사회 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여성 참정권과 공공 보육 및 기본 소득 등에 대한 러셀의 옹호, 기독교를 비롯한 당대의 종교와 교육, 결혼 제도 등에 대한 그의 비판은 이러한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6]

러셀은 대표적인 반전 운동가이자 반핵 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영국의 참전을 반대하면서 본격적으로 반전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로 인해 1916년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해고됐고 1918년에는 반전 기고문 때문에 6개월간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미국과 소련 간 핵 경쟁이 심해지던 1955년에는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당대의 대표적 과학자 10명과 더불어 핵무기의 폐기와 국가 간 분쟁의 평화적 해결책을 촉구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의 영향으로 1957년 시작된 퍼그워시(Pugwash) 회의의 의장 및 같은 해 창설된 핵군축캠페인(Campaign for Nuclear Disarmament)의 회장을 맡아 핵무장에 반대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다. 1961년에는 89세의 고령에 반핵 시위로 수감되기도 했으며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등 1970년 2월 2일 97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반전 운동과 반핵 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5. 21세기 학문의 발전


러셀이 남긴 저작은 그 규모의 방대함과 주제의 다양성 면에서 경탄을 금할 수 없다. 그는 60권이 넘는 저서와 2000편이 넘는 글을 발표했고, 가장 추상적 학문인 수학과 철학에서부터 가장 구체적 사회 현안에 이르기까지 거의 백과사전에 필적할 만큼 많은 주제를 다뤘다. 아무리 어려운 내용도 평이한 언어로 그 핵심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는 능력이 있었고 수려한 글솜씨로 195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철학의 문제들(The Problems of Philosophy)》과 《서양 철학사(A History of Western Philosophy)》를 비롯해 러셀이 남긴 여러 저서는 지금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다만 학문적 측면에서 러셀의 논리주의 및 논리적 분석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입장은 오늘날 그 영향력이 상당히 축소된 편이다. 현재 수학 기초론에서 러셀의 역설에 대한 해결책으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수학 원리》의 유형 이론이 아니라 체르멜로-프렝켈(Zermelo-Fraenkel)의 공리적 집합론이다. 또한 철학자 W.V. 콰인(Quine)은 집합론을 수학의 한 부분으로 간주해야 하므로 논리주의 기획은 진정한 의미에서 수학을 논리학으로 환원시킨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 바 있다. 아울러 콰인은 수학적 대상들이 전자나 쿼크(quark)처럼 자연 과학에서 전제되는 이론적 대상들이라 주장했으며, 자연 과학이 세계를 설명하는 성공적 이론이라는 사실에 의해 그 존재가 입증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콰인의 주장으로 오늘날 분석철학의 전 분야에선 자연주의(naturalism)가 커다란 영향을 끼치며 많은 분석철학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다. 자연주의에 따르면 철학적 작업은 과학의 작업과 연속성을 이루며, 특히 철학이 과학의 탐구 방법과 독립적으로 세계에 대한 지식과 존재자의 본성을 분석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따라 ‘분석철학’이라는 이름과 달리 자연주의를 옹호하는 분석철학자들은 더 이상 철학을 논리적 분석의 작업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러셀의 역설과 기술 이론은 오늘날의 수학적, 철학적 논의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밖에도 이 글에서 소개할 수는 없었지만 언어철학에서 러셀적 명제(Russellian proposition) 이론, 심리철학에서 중성적 일원론(neutral monism), 과학철학에서 구조적 실재론(structural realism) 등 최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이론들과 관련해서도 러셀은 선구적 업적을 남긴 바 있다. 아직도 전집 편찬 사업이 계속되고 있는 러셀의 방대한 저작이 21세기 학문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할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1]
버트런드 러셀(송은경 譯), 《러셀 자서전(상)》, 사회평론, 2003, 13쪽.
필자가 번역을 일부 수정함.
[2]
이하 내용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설명은 강진호, 〈『수학원리』 출간의 의의와 영향〉, 《지식의 지평》 9, 2010, 284-304쪽을 참조.
[3]
비트겐슈타인은 1922년 출간한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에서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4]
이와 관련된 러셀의 대표적 저술로는 〈대면에 의한 지식과 기술에 의한 지식(Knowledge by Acquaintance and Knowledge by Description)〉(1911),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식(Our Knowledge of the External World )》(1914), 〈논리적 원자론의 철학(The Philosophy of Logical Atomism)〉(1918/19), 《마음의 분석(The Analysis of Mind )》(1921), 《물질의 분석(The Analysis of Matter)》(1927), 《인간의 지식: 그 범위와 한계(Human Knowledge: Its Scope and Limits)》(1948) 등이 있다.
[5]
‘denoting’을 흔히 ‘지시’ 또는 ‘지칭’으로 번역하지만, 러셀이 《수학의 원리》에서 ‘denoting concept’와 ‘denoting phrase’라는 용어를 도입하면서 원래 의미한 바를 고려할 때 ‘표시’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6]
이와 관련된 러셀의 대표적 저술로는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사회 재건의 원리(Why Men Fight: Principles of Social Reconstruction)》(1916), 《자유로 가는 길(Proposed Roads to Freedom)》(1918), 《볼셰비즘의 이론과 실천(The Practice and Theory of Bolshevism)》(1920), 《자유인의 예배(A Free Man’s Worship)》(1923), 《교육에 관하여(On Education)》(1926),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Why I am Not a Christian)》(1927), 《결혼과 도덕(Marriage and Morals)》(1929), 《행복의 정복(The Conquest of Happiness)》(1930), 《게으름에 대한 찬양(In Praise of Idleness)》(1935), 《권력: 새로운 사회적 분석(Power: A New Social Analysis)》(1938)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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