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추어리, 교육감 노옥희
2화

조용식 비서실장 ; 노옥희의 길

내가 해직 교사의 손을 잡은 이유


노옥희 선생님의 오랜 교육 운동 동지로 알려져 있다. 노 선생님과의 만남은 어떻게 시작됐나.

교사로 발령받아 울산에 온 게 93년이었다. 처음 뵌 건 95년도쯤으로 기억한다. 전교조 사무장 역할을 하던 동료 선생님의 권유로 전교조 사무실에서 인사를 나눴다. ‘만남’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 뒤였다. 96년도쯤이었나, 노 선생님이 학교에 찾아오셨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전교조 내 역할을 해볼 것을 제안 주셨다. 그때부터 노 선생님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제안의 배경이 궁금하다. 당시의 상황이 어땠나?

노 선생님은 1986년 교육 민주화 선언으로 해직된 여러 교사 중 한 분이었다. 울산에도 선생님을 포함 21명의 해직 교사가 있었다. 당시 선생님은 노동문제상담소 간사와 전교조 활동을 해오셨는데 94년도에 전교조와 교육부 간 합의가 이뤄지며 해직 교사들이 전교조 탈퇴를 조건으로 대부분 복직됐다. 노 선생님은 명목상 전교조 관련 해직이 아니니 복직에서 제외됐고 채용 상근자 한 분과 사무실을 지켜왔다. 95년도에 학교 운영위원회가 제도화된 후 ‘학교운영위원연합회’라는 게 생겼는데 나는 거기서 활동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제안이 이뤄진 것 같다.
 
조용식 울산광역시 교육감 비서실장 ⓒ사진: 이현구/북저널리즘

처음엔 전교조와는 거리를 두었던 것으로 안다. 선생님의 어떤 점이 마음을 움직였나.

당시 진보 계열에도 노선이 여럿이었다. 노 선생님을 중심으로 한 전교조 분들은 약간 노선이 다른 분들이라 생각했다. 부끄럽지만 학교 다닐 때 이른바 학생 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나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막상 만나보니 그런 마음이 사라지더라. 연배 차이가 10년 정도 나는데도 사람을 굉장히 존중하고 진솔하게 대한다는 것이 느껴졌다. 말하기보다는 주로 들으시는 분이었다. 소탈하고 겸손한 그 자세에 선생님의 제안을 수락하게 됐다.

이때부터 선생님의 손과 발이 되어 활동을 도왔다. 어떤 역할을 맡았나.

울산이 97년에 광역시로 승격되며 노 선생님이 전교조 울산 초대 지부장이 됐다. 처음엔 사무차장으로 이런저런 행정 업무를 도맡다가 이후엔 교육국장을 좀 오래 했다. 전교조 내 활동가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직책이다. 선생님이 워낙 조직 내 교육을 강조하시다 보니 당시 울산 지부는 각종 커리큘럼 짜서 공부하거나 강의를 받곤 했다. ‘학습하는 노동자’, ‘학습하는 교육 운동가’를 바라셨던 것 같다. 

노 선생님은 복직 이후 또 교육 위원으로 추대된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선생님을 추대케 했나.

지부장 임기 중 고교 평준화 등 굵직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셨고 ‘전태일 노동상’을 수상하기도 하셨지만 여기엔 당시 교육 운동계의 고민도 있다. 교육 위원 제도가 열린 공간을 꿈꾸던 전교조에게 교육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중요한 도구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럼 누군가가 그 역할을 해야 되는데 문제는 이게 무보수직이었다. 적임자로 노 선생님이 추대되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고민이 많으셨을 거다. 전교조 합법화 전까지 남편과 함께 오랜 해직 기간을 버텼기 때문이다.

 

울산 최초 진보 교육감의 탄생


울산은 대표적으로 보수로 분류되는 도시이지 않나. 진보 교육 위원의 등장은 어떤 의미였는지.

교육청의 공무원들에겐 굉장히 고통스러웠을 거다. 이제껏 암암리에 해왔던 것을 모두 투명하게 바꿨기 때문이다. 온갖 자료 요구부터 시작해 깐깐하고 집요하게 산적한 문제를 파고들었다. 특히 교육청의 하드디스크 납품 비리 사건이 유명하다. 업자와 연결된 공무원들이 줄줄이 구속되기도 했다. 의원들이 기자들과 주고받는 촌지를 없애기 위한 운동도 하고 당신 앞으로 온 선물도 모두 돌려보냈다. 도저히 돌려보낼 수 없는 선물은 모았다가 기부 단체에 기부했다. 교사와 학부모, 지역 사회에서는 신선한 충격이었을 거다.

향후 정치 행보나 교육감 선거에 있어 이런 점이 큰 힘이 되었겠다.

그렇다. 지역 토호 세력이나 특권 계층의 비리를 뿌리 뽑기 위해 싸우다 보니 지역 사회에서 신뢰가 쌓였다. 이슈 메이커가 되니 곳곳에서 각종 비리에 대한 제보도 많이 왔다. 그러니 정보도 더 풍부해졌다. 이게 고스란히 사회적 힘이 됐다. 장애인 교육권 운동이나 친환경 무상 급식에 대한 노력도 호응도가 높았다. 교육 위원 재선 때도 의심의 여지 없이 후보가 된 이유다.

교육 위원 재선을 앞둔 2006년, 노 선생님은 결국 울산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교육이 아닌 정계 발을 들이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에도 오랜 관행이 있었다. 상대 진영의 후보를 중심으로 당선 가능성이 큰 후보를 밀어주는 형태였다. 그 과정에서 자주 계파 갈등이 불거졌다. 여기에 노 선생님과 같이 정계 밖의 인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켜보자는 마음이 모여 추대위원회로 이어졌다. 당시 나 역시 노 선생님을 교육계 내 꽤 유능하고 진보적인 활동가 정도로 여겼지만 외부에서 하도 출마 압박이 거세어 고민 끝에 선거 운동에 합류했다. 교육 운동계에서 욕도 좀 먹었다. 재선이 확실한 이런 교육 위원 후보를 교육이 아닌 정치에 밀어 넣었으니 말이다.

이후 노 선생님은 계속해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다시 교육계로 돌아오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나?

선거 활동 이외에도 재야 활동을 많이 하셨다. 앞서 말한 장애인 교육권 투쟁, 급식 운동을 포함해 학부모 교육 운동이라고 해서 협동조합을 만들기도 했다. 사실 교육감 선거에 대한 꿈은 쭉 가지고 계셨는데 2010년에는 시장 선거 출마로, 2014년에는 유력 후보가 있어서 출마하지 못하시다가 2018년에 출마하게 됐다.

화제의 선거였다. 교육 위원과 교육감은 그 무게가 다르지 않나. 울산 최초의 진보 교육감은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나.

노 선생님 개인을 넘어 사회적 요구 역시 있었다고 본다. 2010년부터 전국적으로 형성된 진보 교육의 흐름과 그 맛을 본 학부모·시민의 욕구가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전체적인 판세가 나쁘지 않았다. 당시 교육감들이 비리로 수감되는 일이 잦아 시민들도 이를 망신으로 여겼고 교육계 전반에도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런 와중에 교육 위원 때부터 청렴으로 무장한 능력 있는 교육 활동가가 선거에 나온 것이다.

교육감으로서 노 선생님의 강점은 무엇이었나.

목표 의식이 뚜렷하다고 생각한다. ‘왜 내가 교육감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확실한 집권 의지가 있었다. 교육 운동의 연장선에서 이제껏 꿈꾸고 요구했던 것을 집행 권력을 통해 직접 실행할 수 있기에 교육감을 하는 것 아니겠나. 선생님은 이를 위해 자기 자신과 주변을 계속 조직해 왔다. 급식 운동이나 학부모 교육 운동 등을 통해 결국 사람이 남은 것 아니겠나.

 

원칙과 신념, 소통의 힘

울산광역시 교육청 ⓒ사진: 이현구/북저널리즘

노 선생님의 교육감 시절 울산 교육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일단은 청렴해졌다. 노 선생님이 임기를 시작하실 때 울산은 17개 시도교육청 중에서 청렴도 하위권으로 출발했지만 국민 권익위가 발표한 2022년 공공기관 종합 청렴도 평가에서 2위를 기록했다. 게다가 무상 교육·무상 급식 등 당시 없던 복지의 대부분을 해냈다. 학생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이 많아졌다. 코로나 시기엔 급식비를 재난 지원금으로 확보해 돌려주기도 했다. 사실 울산 교육의 변화를 가져오는 건 쉬웠다. 돈 들여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되기 때문이다.

복지 지출을 보는 시민 사회의 눈은 복합적이지 않나. 

교육 예산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다. 교육 재난 지원금을 예로 들어보겠다. 우리가 무상 급식을 하니 코로나19 기간 등교를 못 한 학생들에게 투여해야 할 급식비가 남지 않나. 게다가 학생들이 원격 수업을 하며 통신비, 식비 등이 발생했을 거다. 이걸 고스란히 가정이 부담했으니 그 돈을 돌려주자고 결정한 것뿐이다. 의회를 설득해 조례를 만들고 10만 원씩 세 번을 돌려줬다. 한 번 집행할 때 총 140억 원이고 곱하기 3인데, 공무원 대다수는 400억 원이면 학교 하나를 짓는다고 말한다. 예산 지출의 효능감이 적어도 필요한 일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강제 야간 자율 학습을 철폐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다. 강제 야간 자율 학습은 30년 넘은 관행이지 않나. 단순히 교사들이 밤에 힘드니 그만두자는 게 아니었다. 자율 학습이라는 명칭을 붙여두고 학생들의 의사를 묻지도 않거나 사실상 강제하는 행위를 버젓이 하면서 민주 시민 교육과 자율성을 얘기할 수는 없다, 이것을 끊어내야 한다는 생각이 있으셨다. 학부모들이 그 시간에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며 부담을 가중시켰다는 비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학교라는 공간이 고유하게 갖고 있어야 할 가치, 학교의 기본적인 기능을 회복하고자 하셨다.

원칙을 굉장히 중시했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아프가니스탄 학생들을 보듬는 따뜻함도 있었다.

탈레반을 피해 입국한 아프가니스탄 특별기여자 학생들이 일부 학교에 몰아서 입학하게 된 일인데, 사실 우리는 원칙대로 했다. 법적으로 학생은 그 주소지의 학군으로 보내야 한다. 우리 울산교육청 역시 법무부로부터 일방적인 통보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모두가 같은 아파트로 들어오니 특정 학교에 몰릴 수밖에 없던 것이다. 시민 사회 저항은 상상을 초월했다. 왜 아이들을 여기에 다 몰아놨냐, 분산해라, 못 받겠다 등등. 교육청으로 끊임없이 항의 전화가 빗발쳤다.

노 선생님의 해법은 무엇이었나?

원칙대로 하되, 끊임없이 설득하셨다. 두세 번 정도 학부모 전체를 대상으로 교육감님이 직접 나서 호소하셨다. 면전에서 시위와 욕설이 날아왔지만 꿋꿋하셨다. 당시 비대위까지 만들어 반대하시던 학부모분들이 감화하여 나중에는 교육감님의 뜻을 지지하고 도움도 주셨다. 국제화 시대에 다문화 학생들을 동등한 내국인처럼 대하고자 했던 태도가 울산 교육의 격을 높였다고 자부한다. 당시 특별기여자를 담당했던 부서가 국정원, 대구 등에 가서 강의도 하고 그랬다. 다문화 가정과 지역 사회 갈등을 어떻게 조정하고 해결하고 치유하는지 모범이 된 사례다.

어떤 원칙과 신념이 노 선생님을 만들었나. 평소 강조하시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노 선생님은 본인에게 엄격하셨다.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나 철학을 살면서 그대로 구현하고 일치시키려 애쓰셨다. 예를 들어 기후 위기 대응 정책으로 채식 급식이나 ‘고기 없는 월요일’ 등을 시행하자면서 당신부터 채식을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기후 위기에 대응하자고 말하려면 스스로 실천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덕분에 우리도 회식 때 고기 못 먹었다. (웃음) 항상 가치와 일치시키긴 어렵지만 무던히 노력하셨다.

실무자로서 노 선생님을 오랫동안 보좌하며 가장 어려웠던 것은 무엇인가?

보좌하는 역할은 다 힘들다. 특히 특별기여자 건은 민원의 강도와 교육감의 원칙 사이에서 굉장히 고생했다. 교육감도 정치의 영역이다. 가끔은 교육적 원칙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할 수밖에 없는 게 있다. 평준화가 대표적이다. 원칙대로 머릿수를 맞춰 학생을 강제 배정하면 어떤 학생은 주거 지역에서 실질적으로 멀어져 교통편 문제가 생긴다. 예전엔 금요일에 배정 발표를 하고 주말 간 교육청을 비우고 도망가는 일이 횡행했다. 교육감님 아래 우리의 방침은 설득이었다. 실무자들에게는 그 지점이 가장 어려웠을 거다.

설득이 만사는 아닐 것이다. 갈등의 조정자로서 노 선생님의 지론은 무엇이었나.

교육감님이 늘 하시던 말씀이 있다. “누군가 교육감한테 민원을 들고 올 때는 이미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을 거다.”, “이야기만 들어줘도 절반은 해결된다.” 하소연할 곳이 없어 전화했는데 거기에 법이 어떠니 응대하면 화만 키운다는 거다. 환심을 사라는 게 아니라 진심을 갖고 대하라고 하셨다. 교육감님은 열린 교육감을 지향했다. 최소 한 달에 두 번 시민과 만나는 행사를 했고 시위하는 분들 한 분 한 분을 찾아뵀다. 설득에 실패해도 존중하는 태도를 잃지 않았다.

 

노옥희를 만든 것은 현장이다

조용식 울산광역시 교육감 비서실장 ⓒ북저널리즘

현장 교사로도 30년 근무하지 않았나. 학생들이 말하는 노옥희 교육감은 어떤 분인가?

태풍이 심하게 왔던 적이 있다. 중학교까지는 휴교하고 고등학교는 등교하라는 방침이 담긴 페이스북 게시글을 올렸다. 거기에 50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우리는 사람도 아니냐’, ‘우리는 죽으라는 거냐’는 식이었다. 다이렉트 메시지도 300개가 넘게 왔다. 교육감이, 교육청이 굉장히 높은 인물이나 기관이 아니라 우리 얘기를 들어주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감 신분으로 학교에도 자주 방문하셨는데 그럴 때면 학생들은 교육감님께 스스럼없이 팔을 껴안고 사진을 찍자고 했다. 웬만한 연예인급이었다. 좋은 평가나 환대를 받으니 실무자로서 같은 일을 해도 자랑스럽고 더 기운이 났다.

그런 교육감을 잃은 울산 시민들의 아픔이 컷겠다.

선생님은 내가 아는 가장 진보적인 분이셨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변화를 추구하면서도 자기 철학, 자기 원칙, 자기 헌신을 잊지 않는 행보를 보이셨다. 안타까운 건, 기본적으로 우리가 해온 노동 운동은 노동 시간을 줄이고 여가를 확보해 인간답게 살려고 하는 것 아닌가. 그러나 정작 본인은 그 역할에 너무 충실하다 과로로 숨졌다는 점이다. 가슴 아픈 아이러니다.

노 선생님이 걸어온 길이 참 다사다난하다. 이를 이겨낼 수 있던 원동력은 뭐라고 보나.

선생님은 현장에서 학생들의 어려움을 마주하며 각성하셨다. 우리처럼 학교 다닐 때 선배 따라 책 몇 권 읽고 어설프게 현장에 나와 학생 운동을 하던 분이 아니다. 눈앞의 아이들을 도와주려던 순수한 양심과 교사의 사명감, 타고난 성실함, 뚜렷한 목표 의식이 현실과 끊임없이 부딪던 힘이 아니었나 싶다. 주변에 사회 운동을 하시는 분들을 봐도 현장에서 형성된 가치가 굉장히 오래 가는 것 같다.

부군인 천창수 교육감까지 두 분의 교육감을 보좌하게 됐다. 궁극적으로 만들고픈 울산 교육의 모습은 무엇인가.

공교육의 표준을 만들고 싶다. 절대적 수치나 모습이 있는 건 아니다. 그냥 공교육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모습에 부합하고 싶다. 거창한 것도 아니다. 가령 장애물 없는 생활 환경을 의미하는 ‘BF 인증’에서도 그런 표준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강당을 리모델링할 때 법의 최소한에만 맞추는 게 아니라 지난번보다 편의 좌석이 늘었는가를 따져 보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경쟁보다 도움과 협력을 배우는 학교, 선생님들은 잡무 없이 수업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

노 선생님은 조용식 비서실장께 어떤 분인가.

감히 따라갈 수 없지만 ‘또 다른 나’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추구하던 신념과 일치된 삶의 모습을 본받고자 했다. 지금도 그 길을 따라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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