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비추어리, 교육감 노옥희
1화

울산에서 만난 사람들

2021년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했을 때 이것은 국제면의 뉴스였다. 늘 그랬듯 미국의 철군과 중동 역내의 세력 변화에 관심을 쏟았다. 하자라인의 존재가 알려지고 ‘미라클 작전‘이 펼쳐지자 이는 사회면의 뉴스가 됐다. 사건을 인식하는 틀이 완전히 바뀌었다. 먼 중동에서의 일은 그렇게 우리나라와 지역 사회, 우리 모두의 문제가 됐다.

언론은 다양한 수사로 하자라인을 소개했다. 그들은 난민이자 무슬림이었고 한국 대사관의 일을 돕던 자들이었다. 레토릭은 무섭다. 사람들은 예멘을, 테러리스트를 떠올렸다. 한국 정부는 하자라족에게 난민이 아닌 새로운 수사를 부여했다. ‘특별 기여자’다. 390여 명의 특별 기여자들은 그렇게 울산 동구에 마련된 보금자리에 새 둥지를 틀었다.

어린이날이 다가올 즈음 이주 배경 아이들을 떠올렸다. 내국인 취약 계층도 기댈 곳 없는 한국, 외국인에겐 더욱 가혹한 땅일 터다. 아이들에겐 오죽할까. 특별 기여자가 한국에 온 지 1년 반, 모두 잘 지내는지 궁금했다. 울산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시민들 마음의 문도 열려있으리란 확신은 없었다. 나의 울산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울산역의 KTX ⓒ사진: 이현구/북저널리즘

특별 기여자 자녀들이 일반 학교에 입학하던 날, 울산 동구는 진통을 앓았다. 울산교육청이 원칙대로 특별 기여자가 거주하는 아파트 인근의 학교로 아이들을 배정했기 때문이다. 항의가 빗발쳤다. 왜 분산해 입학시키지 않았는지, 왜 하필 우리 아이가 다니는 학교인지. 외국인 학교나 타 시설에서 맡아줄 수 없는지. 특별 기여자에게는 고통스러운 기억일 것이다. 공교육 제도 안으로 아이들을 품은 것은 울산의 첫 진보 교육감 노옥희의 뜻이었다.

노옥희 역시 다양한 수사가 공존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교사이자 노동·인권 운동가, 교육 운동가였고 동지이자 스승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 주로 ‘노샘’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현대공고 교사로 부임했던 노옥희를 사회적 삶으로 이끈 것은 제자들이 부딪던 열악한 노동 환경이었다. 사회 문제에 각성한 노옥희는 이후 열정의 삶을 산다. 사회 운동으로 가득찬 1980년대를 지나 교육 위원을 지냈고, 정계를 향한 도전에서 낙선의 고배를 마신 끝에 다시 교육계로 돌아온다.

높은 청렴도와 지지율로 교육감 재선에 성공한 노옥희는 2022년 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단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는다’가 그가 내건 울산 교육의 기치다. 그 뜻은 배우자 천창수에게 이어졌다. 노옥희의 반려이자 평생 동지인 교사 천창수는 ‘노옥희 울산 교육, 중단 없이 한발 더’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교육감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다. 언론은 “노옥희가 돌아왔다”라는 제목으로 당선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故 노옥희 울산교육감 추모영상 ⓒ울산광역시교육청 유튜브

정오 즈음 도착한 울산역은 장대비가 내린 뒤 갠 것처럼 맑았다. 울산교육청은 차로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택시로 이동하며 문득 노옥희가 일반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잠시 담소를 나눌 요량으로 대화를 시작했다가 입이 벌어졌다. 36년간 현대자동차에 다니다 2년 전 정년 퇴직을 한 기사님은 2년간의 학교 운영위원회 경험이 있던 분이었다. 학부모로서, 울산 시민으로서 노옥희 교육감에 대한 생각을 유감없이 말씀해 주셨다.

“교육 정책에서만큼은 좌우를 떠나 지지를 많이 받았어요.”

이 말을 하며 기사님은 자신의 정치 성향이 꽤 보수적이라고 덧붙였다. 학부모들에게 노옥희 교육감의 혁신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고 한다. 예전 교육감들에게선 경험해본 적 없는 교육 복지였기 때문이다. 방과 후 프로그램을 활성화한 덕에 대부분이 회사원인 울산의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소위 ‘학원 뺑뺑이’를 돌리지 않아도 됐다. 야간 자율 학습을 강제하는 것도 금지해 아이들에게도 호응이 높았다고 한다.

“울산 교육을 한 단계 업(up)시킨 분이에요.”

노옥희 이전의 교육감은 대체로 보수 인사들이었는데 워낙 비리가 많아 기대가 없었다고 한다. 교사 시절부터 평이 좋았던 노옥희지만 기사님의 우려가 없던 것은 아니다. 노동 현장에서 투쟁하던 노옥희의 이미지는 교육감으로서의 적합성에 의문을 품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교육감으로서의 행보를 지켜보니 소탈하고 진심이 느껴졌다고. 원체 꾸밈이 없고 옆집 아주머니 같은 인상이라 많은 사람들이 친근하게 느꼈다고 한다. 임기 중 전교조 선생님들만 너무 챙긴 것 같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첫 임기 동안 시민들의 상당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고 회고했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옥희 교육감의 노력은 기사님에게도 느껴졌던 모양이다. 그동안 학교가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위주로 끌고 갔다면 노옥희 교육감의 정책은 경쟁을 완화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 같다고 말했다. 노옥희 교육감의 비전대로 한 명의 아이도 포기하지 않고 소외된 아이들과 같이 가려는 모습에 감명을 받으셨다고. 기사님과 울산의 공업 단지 현황과 회사 노조 시절의 이야기를 나누며 울산교육청에 도착했다.

한 평범한 교사가 모든 아이를 품어주는 도시를 만들기까지. 그와 오랫동안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 그가 만든 울산 교육에 안긴 아이들의 말로, 노옥희의 때늦은 부고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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