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이 글에서는 근대 일본의 역사 경로에 하나의 분기점으로서 간토(關東) 대지진을 조망한다. 올해 2023년, 9월 1일로 100주년을 맞이하는 간토 대지진은 일본 역사상 가장 큰 피해를 초래한 자연재해일 뿐만 아니라 정치·경제 면에서도 장기간에 걸쳐 불안정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또 지진이라는 ‘자연’적 요인으로 사망한 이들에 더해, 학살이라는 ‘인위’적 요인으로 식민지 조선인들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이 추가로 목숨을 잃었다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다. 이 글에서는 간토 대지진이 일본 역사에 미친 영향을 살펴봄과 동시에,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반복될 일본의 자연재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시사점을 제공하고자 한다.
2. 혼돈의 간토 대지진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서부를 진원으로 하는 매그니튜드 7.9 이상의 강진이 도쿄(東京), 요코하마(橫濱)를 비롯한 간토 남부 일대를 뒤흔들었다. 필리핀해판이 사가미 주상해분(相模舟狀海盆)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2미터 가까이 지면이 융기하거나 5미터 이상의 지진해일이 발생한 곳도 있었고,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당시 최대 진도(震度)인 6을 기록하는 강한 흔들림이 일어났다. 그 결과 근세 이래 못이나 습지를 매립하는 등 지반이 약한 곳에 성립한 시가지를 중심으로 11만 채의 주택이 완전히 무너지는 큰 피해가 발생하였다.
특히 피해를 확대한 요인은 화재였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 많은 가정에서는 점심 식사를 준비하기 위해 불을 사용하고 있었고, 또 태풍의 영향으로 강한 남풍이 불고 있었다. 이로 인해 서민주택이나 중소 공장 등이 밀집한 도쿄의 시타마치(下町)를 중심으로 무너진 건물에서 화재가 다수 발생하여 순식간에 확산하였다. 사람들이 집이 무너질 것을 우려하여 가재도구를 길가에 옮겨놓거나 이를 휴대하고 피난한 것도, 뜻하지 않게 소방 활동을 방해하고 화재를 확산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도쿄에서는 17만 채의 주택이 소실되어 시내 중심부의 40퍼센트가 허허벌판이 되었으며, 전체 사망자의 90퍼센트가 넘는 6만 6000명이 화재로 사망하였다. 그중에는 옛 육군 피복창(被服廠) 터에 모인 3만 8000명의 피난민이 불길과 회오리바람에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한 채 목숨을 잃는 비극적인 일도 있었다.
하지만 간토 대지진은 넓은 지역에 걸쳐 발생한 만큼 피해 양상도 다양하였다. 우선 진원에서 가까운 가나가와현은 주택이나 공장 붕괴 및 이로 인한 사망자가 도쿄보다 더 많았다. 또한 가마쿠라(鎌倉)나 우라가(浦賀) 등 바다와 접한 곳에서는 지진해일이나 배후의 산이 무너지는 대규모 산사태[1]로 인한 사망자도 수백 명 단위로 발생하였다. 결국 간토 대지진으로 완전히 무너지거나 불타거나 떠내려간 주택은 30만 채에 달하였고 10만 5000명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으며 도쿄에서만 150만 명이 집을 잃고 이재민이 되었다.
3. 정치적 불안정과 경제적 약체화
간토 대지진 전야의 근대 일본은 정치적 변화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선 1921년 11월에는 육체적·정신적 건강이 악화한 다이쇼천황(大正天皇)을 대신하여 황태자 히로히토친왕(裕人親王)[2]이 섭정으로 취임하였다. 또한 다수당인 정우회 총재로서 정국을 주도하던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가 같은 시기에 암살당하였고, 이듬해 2월에는 육군·관료 등 비정당 세력의 수장으로 군림하던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도 사망하였다. 하라가 사망한 뒤 후임 정우회 총재가 총리가 되었지만 당내 대립으로 조기 퇴진하였고, 1922년 6월에 해군 출신인 가토 도모사부로(加藤友三郞)가 총리가 되어 내각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8월 24일에 가토가 병사하자 역시 해군 출신인 야마모토 곤베에(山本權兵衛)가 후임 총리로 지명되어 한창 내각을 조직하고 있었다.
즉, 간토 대지진은 내각 교체라는 정치적 공백기에 발생한 미증유의 대재해였다. 또한 지진으로 교통·통신이 두절되면서 법령 제정에 필요한 의회나 추밀원(樞密院) 소집도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러한 가운데 가토 내각의 외무대신 겸 임시 총리 대리가 비상 징발령 및 계엄령 선포, 임시진재구호사무국 설치 등 응급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대지진이 발생한 다음 날에 야마모토 내각이 정식으로 발족하자, 도쿄 시장을 역임한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내무대신을 중심으로 구호 작업이 본격화하였다. 특히 고토는 지진을 계기로 도쿄를 근대적 도시로 개조하기 위해, 당시 국가 일반 회계 세출의 2년 치에 달하는 30억 엔을 투입하는 제도 부흥(帝都復興) 계획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그해 말에 무정부주의자가 섭정 히로히토를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도라노몬(虎ノ門) 사건이 발생하면서 야마모토 내각은 총사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4년 1월에는 관료 출신이자 천황의 최고 자문 기관인 추밀원 의장 기요우라 게이고(淸浦奎吾)가 총리로 임명되었다. 세 번 연속으로 비정당인 출신 총리의 초연 내각(超然內閣)이 출현하자 정우회, 헌정회, 혁신 클럽 등 주요 정당은 ‘호헌(護憲) 3파’를 결성하여 내각을 규탄하는 제2차 호헌 운동을 벌였고, 이에 대해 기요우라 내각은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호헌 3파가 대승을 거두면서 그중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한 헌정회 총재 가토 다카아키(加藤高明)를 총리로 하는 호헌 3파 연립 내각이 그해 6월에 성립하였다. 이처럼 간토 대지진을 전후한 1년 동안 일본에서는 총리의 재직 중 사망, 암살 미수 사건, 정부와 의회의 충돌로 세 차례나 내각이 교체되는 등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한편 러일전쟁 당시 전비 조달을 위해 도입한 거액의 외국채 상환과 무역적자 등에 시달리던 일본을 구해준 ‘천우(天佑)’는,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불러온 전시 특수였다. 일본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지만 전투에는 거의 가담하지 않은 채 대량의 군수물자를 판매하였다. 또한 유럽 세력이 철수한 아시아 시장을 석권하였으며 대미 생사 수출도 크게 늘었다. 이러한 ‘대전 경기’를 통해 일본은 11억 엔의 채무국에서 단숨에 27억 엔의 채권국으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자 전시 특수도 사그라지면서 1920년에는 주식·상품 시장이 폭락하는 ‘전후 공황’이 발생하였고, 이후에도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는 등 만성적인 불황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일본 경제에 심각한 타격을 가한 것이 바로 간토 대지진이었다. 수도권을 직격한 강진이 건물, 가재·집기, 공장, 상품 등에 초래한 피해 총액은 약 55억 엔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당시 일본 국부(國富)의 5.4퍼센트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였다. 또 다수의 회사나 공장이 무너지거나 불타 버리면서 이들이 발행한 어음은 휴지 조각이 되었고, 이는 해당 어음을 보유한 은행들의 경영난으로 이어졌다. 게다가 대전 경기에 편승하여 투기적 경영을 하다가 실패한 기업들이 발행한 어음 처리도 큰 문제가 되었다. 정부는 일본은행으로 하여금 이러한 ‘진재 어음’을 재할인하여 상환을 유예하고 4억 3000만 엔에 달하는 특별 융자를 하도록 하였지만, 1926년 말까지 2억 엔 이상이 아직 상환되지 않았다.
이에 와카쓰키 레이지로(若槻禮次郞) 헌정회 내각은 추가 조치로, 정부가 은행에 공채를 교부하고 진재 어음을 인수하여 부실 채권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해당 법안은 1927년 3월에 의회에서 가결되었지만 질의 과정에서 각료가 일부 은행은 경영 파탄 상태라는 부정확한 발언을 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불안에 빠진 예금주들이 은행으로 몰려가는 예금 인출 소동이 일어나면서 대만은행을 비롯한 다수의 은행이 휴업하는 금융 공황이 발생하였다. 와카쓰키 내각은 대만은행 구제를 위한 긴급 칙령을 발포하고자 하였지만, 야당 정우회에 설득된 추밀원이 이를 부결함으로써 총사직해야만 했다. 이처럼 간토 대지진은 장기간에 걸쳐 일본 경제를 약체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공황에 대한 미숙한 대처와 권력 다툼은 정당에 대한 국민의 실망감을 높였다. 이는 몇 년 뒤 뉴욕발 세계 공황의 파도가 일본을 덮쳤을 때 일어날 일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4. 군과 자경단, 그리고 조선인 학살
간토 대지진 당시 수도 도쿄의 경찰 행정은 경시청, 지방 경찰 행정은 내무성 경보국이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기관은 지진 발생 초기의 화재로 소실되었고 각지의 경찰서, 주재소 등도 다수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경찰력에 공백이 생긴 가운데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 바로 군이었다. 당시 도쿄에는 근위 사단과 제1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지진 발생 직후부터 병영 주변의 화재 진압, 치안 유지, 이재민 구호·수용, 부상자 치료 등에 나섰다. 그리고 9월 2일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3일에 간토 계엄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수도권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집결한 대규모 군대에 의한 치안 유지 및 구호 활동이 본격화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종결 후 세계적인 반전·평화 사조 속에서 반군(反軍)·군축 여론에 직면해 있던 군은 간토 대지진을 계기로 일시적으로나마 국민의 지지를 회복하였다.
또한 민중의 자발적인 활동도 눈에 띄었다. 재향군인회, 청년단, 소방조(消防組), 정내회(町內會) 등 관제 조직 혹은 주민 자치 조직은 지진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도 화마와 싸우고, 노약자를 대피시키며, 부상자를 치료하고, 부족하나마 피난민에게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하였다. 또한 인근 지역 주민들도 구호물자를 싣고 상경하여 노동 봉사를 하였고, 철도로 피난하는 사람들에게는 정차하는 역마다 여성단체나 여학생 등이 차와 음식을 제공하고 의사들이 부상자를 진료하였다. 이는 오늘날의 자원봉사 활동에 해당한다.
하지만 이러한 미담과 함께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 바로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학살 사건이다. 지진이 발생한 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불온한 조선인들이 폭탄을 던지거나 기름을 끼얹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푼다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이는 각지로 피난하는 사람들의 입과 입을 거쳐 순식간에 전파되었고, 주민들은 자경단을 결성하여 몽둥이, 죽창, 일본도 등으로 무장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임의로 검문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으로 지목된 이들에게는 무자비한 폭행과 살인, 성폭력 등이 자행되었다. 학살은 주로 자경단이 저질렀다고 하지만 군과 경찰이 학살에 직접 관여한 사례도 있다. 또한 학살당한 이들 중에는 조선인 외에 중국인, 일본인 사회주의자, 사투리가 심한 지방 출신자, 언어 장애인 등도 포함되었다. 이러한 자경단의 만행은 구호 활동에 써야 할 인력을 낭비하고 외부로부터의 노동력·물자 유입을 방해했다는 점에서 재해 복구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