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안 스트롱맨의 죽음

6월 14일, explained

20세기 이탈리아의 마지막 스트롱맨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사망했다. 그의 방식은 21세기에도 유효하다.

ⓒ일러스트: 김지연/북저널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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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전 총리가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현지 시간 12일 밀라노의 산 라파엘레(San Raffaele) 병원에서 사망한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사인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지만, 만성 골수 백혈병(CML)으로 인한 폐 감염인 것으로 추정된다.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현 이탈리아 총리와 마테오 살비니(Matteo Salvini) 부총리 등 연정을 맺던 정치적 파트너, 그를 ‘소중한 친구’로 칭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이 애도를 표했다. 반면 이탈리아 시민들은 트위터 등 인터넷 공간에서 샴페인을 터뜨리고 있다.

WHY NOW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역대 최장수 총리로, 총 세 번의 임기를 지냈다. 그 시작과 끝은 1994년부터 2011년까지로, 우리나라로 치면 김영삼 대통령부터 이명박 대통령의 재임 기간이다. 이 모든 기간에 총리직을 수행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총리로 재임하지 않을 때도 막후에서 이탈리아의 정치를 주무를 수 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20세기의 스트롱맨이자, 지금 세계에서 출현하는 스트롱맨의 원조 격이다. 우리가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삶에 주목하는 이유, 21세기의 스트롱맨이 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러운 손

베를루스코니는 어떻게 정치 권력을 잡았을까. 1992년이었다. 이탈리아 정치인과 기업인들의 부패를 척결하는 작업인 ‘마니 풀리테(mani pulite·깨끗한 손)’를 계기로 기존 정치권이 붕괴한다. 정치권은 깨끗해진 게 아니라 폐허가 되었고, 베를루스코니는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깨끗한 손’ 덕분에 권좌에 오를 수 있던 그는 역설적이게도 집권기 동안 추문과 막말, 만행을 저지른 ‘더러운 손’이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미국 오바마 전 대통령에게 “선탠을 했다”고 묘사하는 등 인종 차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고 “엄마는 로마 시장이 될 수 없다”는 등 여성 차별적인 언사를 내뱉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정력가 이미지를 구축하기도 했는데, 도가 지나쳐 총리 재직 시절이던 2011년, 미성년자 성매수 스캔들을 이유로 사퇴하게 된다.

언론 권력

베를루스코니에게는 확실한 뒷배가 있었다. 언론 권력이다. 청소기 외판원과 유람선 오락 프로그램 사회자, 밀라노 부동산 개발 업자 시절을 거친 베를루스코니는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뒤 1970년대 민영방송에 뛰어든다. 자신의 채널 ‘카날레5’를 설립한 후 경쟁 채널 두 개를 인수하고, 1980년대에는 시청자 점유율 45퍼센트를 차지하며 독보적인 민영 방송국이 되었다. 이렇게 베를루스코니가 소유한 미디어 그룹 ‘메디아셋(Mediaset)’은 이탈리아 미디어계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갖게 된다. 미디어를 손에 쥔 베를루스코니는 1994년이 되자 마니 풀리테로 비어 있는 정치 권력을 노리며, 자신의 정당 ‘포르자 이탈리아(Forza Italia)’를 출범시킨다.

기업가형 지도자

언론 권력에 더불어, 그는 기업가의 이미지를 활용한다. 부동산과 미디어를 기반으로 한 이탈리아의 재벌 베를루스코니는 인기 축구 클럽 AC밀란을 소유하고, 팀을 1988년 내셔널 챔피언십, 1989년과 1990년 유러피언 컵에서 우승시킨다. 유능한 기업인이라는 이미지에 더해 스포츠를 통한 진정성을 보이자 사람들은 베를루스코니에 환호했다. 포르자를 창당한 후 베를루스코니는 국회의원 후보의 구취나 손바닥 땀도 관리할 정도였다. 깔끔하고 정돈된 기업인의 이미지를, 그는 휘몰아치듯 선거에 이용한다.

이탈리아 정치 특성 - 북부와 남부

우리나라가 그렇듯, 이탈리아에도 지역감정이 있다. 남부는 농업 지역으로 가난한 편이고, 북부는 공업 지역으로 상대적으로 부유하다. 우파 성향의 친기업 정당인 포르자가 주로 공략한 것은 북부였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는 남부를 놓치지 않았다. 1994년 1월, 출마를 선언한 그는 세 개의 국영 텔레비전 네트워크에 “이탈리아는 제가 사랑하는 나라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띄운다. 어두운 정장을 입고 책상에 앉아 책장에 꽂혀 있는 가족 사진을 배경으로 그는 말한다. “여기에 제 뿌리와 희망, 지평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아버지로부터 사업가의 일을 배웠습니다.” 세일즈맨십과 애국심을 동시에 자극한 그는 기존 민주 세력의 텃밭인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경험 없는 정치 신인이 창당 몇 달 만에 총리가 된다.

포르자 이탈리아, 세 번의 집권기

그러나 세 번의 집권기 동안 이탈리아는 무너진다. 1990년대 초반 영국과 비슷한 수준의 국내총생산(GDP) 수치를 보였던 이탈리아는 베를루스코니 집권기 이후로 세계에서 가장 느리게 성장하는 나라 중 하나가 됐다. 실업률과 국가 부채가 매우 높았다.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2001년 총선을 앞두고 베를루스코니 총리를 표지에 실으며 그가 과연 “이탈리아를 운영하기에 적합한가?”라고 물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민주주의 국가 중 하나인 이탈리아 정부를 이끌기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2011년 11월, 이탈리아는 결국 IMF와 유럽연합(EU)으로부터 감시를 받게 된다. 베를루스코니가 재임하는 동안 이탈리아의 공공 부채가 두 배로 늘었기 때문이다. 2022년 이탈리아의 부패 인식 지수는 56점으로, 서유럽권 국가 중에서 이탈리아보다 낮은 점수를 보이는 국가는 52점의 키프로스공화국과 그리스가 유이하다. 재임 기간 동안 베를루스코니는 마피아 커넥션 의혹, 성추문, 비리 등 다양한 사건을 저지른다.

막후 권력

총리직에서 사퇴한 후 2012년, 베를루스코니는 세금 사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상원의원직을 박탈당하며, 2018년까지 공직을 맡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그가 아니다. 그는 2018년 81세의 나이에도 정당의 킹메이커 역할을 자처했다. 베를루스코니의 포르자는 우익 포퓰리즘 정당 ‘동맹(Lega)’, 극우 정당 ‘이탈리아의 형제(Fdl·Fratelli d'Italia)’과 연정을 맺고 북부 선거구에서 압승하며 이탈리아의 형제를 정치적 주류로 끌어올린다. 베를루스코니가 사망한 지금, 그의 정당인 포르자 이탈리아는 작지만 여전히 중요한 연정의 축을 담당한다.

스트롱맨의 죽음

결국 베를루스코니는 떠났다. 2020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었을 때에도 극복해내고, 2013년 주치의로부터 ‘기술적으로 불멸(technically immortal)’하다는 말을 듣던 그도 죽음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언론에서는 베를루스코니가 세계에 알린 말 ‘붕가붕가(Bunga Bunga·성행위를 뜻하는 은어)’를 조롱하듯 언급하고 있다. 다른 한편 이탈리아 국민들은 베를루스코니에 대한 애증의 마음을 표현한다. 80세가 넘은 나이까지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펼치려고 했던 베를루스코니는 이제 정말로 세상을 떠났다. 현지 시간 14일, 밀라노 대성당에서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진다.

IT MATTERS

《베를루스코니와 이탈리아(Berlusconism and Italy: A Historical Interpretation)》의 저자 지오반니 오르시나(Giovanni Orsina)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 대해서, 그가 이탈리아를 더 좋게 변화시켰는지 더 나쁘게 변화시켰는지 묻는 기자의 질문에 “매우 대답하기가 복잡하다”고 답했다. 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그는 이탈리아를 변화시켰다. 텔레비전 미디어와 정치를 통해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에 새로운 선을 그은 사람이 된 셈이다. 조르자 멜로니의 성명처럼, 베를루스코니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세계에 베를루스코니는 20세기 기업가적 스트롱맨의 전형으로 남을 것이다. 정치의 아웃사이더로서 정직하고 자수성가한 사업가로 자신을 내세우며, 마지못해 정치인이 된 자신에게는 금전상 이익은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 말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훔치는 정치인 말이다. 베를루스코니는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정권을 장악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내게는 세계 곳곳에 저택과 보트 (...) 멋진 비행기가 있고, 아름다운 아내와 가족이 있습니다. (...) 나는 희생을 하고 있습니다.”[1]

이런 식의 스트롱맨은 세계 곳곳에 나타나고 있다. 2015년 《포브스(Forbes)》에 의하면 베를루스코니 가문의 자산은 78억 달러로, 이탈리아 6위에 해당한다. 한편 태국의 친나왓 가문도 16위로 태국 내 10위에 해당하는 부자 가문이다. 이 가문의 탁신 친나왓 전 총리 역시 최대 민영 미디어인 ‘친(Chin) 코퍼레이션’ 소유주였으며, 짧게나마 축구단 맨체스터 시티를 보유했던 일도 있다. 전형적으로 베를루스코니 모델이다. 한편 미국의 도널드 트럼도 부동산 재벌로 시작해 미디어 스타가 된 후 정계에 진출했다는 점에서 영미권의 언론들은 베를루스코니와의 유사성을 찾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새로 등장하는 스트롱맨들 각자가 누구인지가 아니다. 이 셋의 정치적인 지향점은 다르다. 주목할 것은 스트롱맨으로서, 포퓰리스트로서 비슷한 작동 원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돈과 미디어, 영향력 있는 인물 세 개가 만나면 정치 권력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것을 쥐려는 자는 누구인가. 한국에서도 주시해야 한다.
백승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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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스 무데·크리스토발 로비라 칼트바서(이재만 譯), 《포퓰리즘》, 교유서가, 2019.,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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