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할 수 있다

음악은 할 수 있다

세계의 위기 상황에 음악도 역할이 있다. 모든 게 잘될 거라는, 우리는 이어져 있다는 위로 말이다.

© SF/Kolarik
오스트리아 알프스 기슭에는 비현실적으로 예쁜 도시 잘츠부르크가 있다. 여기에 지금 전 세계 음악가들이 세계에서 가장 고결한 음악 축제를 위해 모여든다. 글라인드본(Glyndebourne)[1]은 잊어라. 바이로이트(Bayreuth)[2]도 잊어라. 오페라와 오케스트라 음악 팬에게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Salzburger Festspiele)이 연중 문화 행사의 정점이다. 잘츠부르크로부터 영감을 얻은 에든버러 페스티벌(Edinburgh Festival)[3]만이 오직 그에 견줄만 하다.

 

1. 모차르트의 도시 잘츠부르크


무엇이 이 축제를 이토록 특별하게 만드는가? 일부는 환경의 아름다움이고, 다른 일부는 프로그램의 퀄리티다. 참고로 올해 주요 출연진에는 세계 양대 오케스트라로 널리 인정받는 빈 필하모닉(Vienna Philharmonic)과 베를린 필하모닉(Berlin Philharmonic)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축제를 돋보이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가진 눈부신 유산이다. 게오르그 솔티(Georg Solti)부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까지,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부터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까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출신 음악가의 명단은 마치 클래식 음악 유명인 목록처럼 보인다.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SF/Matthias Horn
그러나 이 모두를 무색하게 하는 이름이 하나 있다. 모든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모차르트가 지켜보고 있다. 모차르트는 매년 열리는 이 축제를 배회하는 유령이다. 그의 대표적인 오페라 작품 〈피가로의 결혼〉이 이번 여름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긴 하지만, 설령 잘츠부르크가 공연 목록에서 모차르트 작품을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매년 축제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것이다. 왜일까?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관한 모든 것은 모차르트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나고 자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짐 모리슨(Jim Morrison)[4]부터 커트 코베인(Kurt Cobain)[5]에 이르기까지, 너무 빨리 살았고 너무 젊은 나이에 죽은 모든 록스타들의 선구자였다. 그의 생애에 관한 음울한 이야기가 없다면,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물론 거기에 동반하는 관광 산업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비극적인 슈퍼스타성은 셀러브리티가 주도하는 오늘날의 음악 비즈니스에 선례를 남겼으며, 그 안에서는 비범한 재능과 요절이 밀접하게 얽혀 있다.

관광객들은 1756년 모차르트가 태어난 게부르츠하우스(Geburtshaus·생가)와 그가 25살이 될 때까지 살았던 본하우스(Wohnhaus·자택)를 방문하기 위해 줄을 선다. 그들은 모차르트가 핫초코를 마시기 위해 들렀던 카페 토마셀리(Cafe Tomaselli) 테이블에 앉기 위해 줄을 선다. 또 모차르트가 한때 연주했던 미라벨 궁전(Schloss Mirabell)에서 열리는 콘서트 티켓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선다.

잘츠부르크에서는 어딜 가든 모차르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 우수에 잠긴 그의 창백한 얼굴은 모든 기념품 가게의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상상할 수 있는 (그리고 상상할 수도 없는 수많은) 모든 종류의 장식품에는 그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모차르트는 심지어 잘츠부르크에서 가장 유명한 간식에도 자신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모차르트쿠겔(Mozartkugel)이다. 모차르트쿠겔은 누가(nougat), 피스타치오, 마지판(marzipan)을 둥글게 뭉쳐 다크 초콜릿으로 코팅하고 은박지에 싼 양과자인데, 거기에는 수수께끼 같은 그의 상반신이 장식돼 있다.

 

2. 천재성의 꽃이 피다


표면적으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의 완벽한 상징으로 보인다. 그러나 쇼비즈니스가 늘상 그렇듯, 그 실상이 신화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건 아니다. 물론 그는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수많은 음악을 썼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고향에서 갈수록 좌절을 겪었으며, 하루빨리 떠나고 싶어 했다.
카라얀 젊은 지휘자상 콩쿠르에서 우승한 한국인 지휘자 윤한결 © SF/Marco Borrelli
모차르트는 20대 중반까지 잘츠부르크에 근거를 두고 있었지만,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의 아버지가 짜놓은 매머드급 세계 투어를 하면서 몇 달씩 외국에 머무는 경우가 빈번했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분절적인 어린 시절처럼 말이다. 외국의 수도에서 펼쳐진 그의 공연은 주로 돈을 벌려는 계획의 일환이었지만, 그는 외국 궁정 한 곳에서 일정한 일자리를 확보하길 바랐다. 희망은 소용이 없었다. 1781년에 그는 불안정한 프리랜서로 활동하기 위해 마침내 오스트리아 수도 빈으로 떠났는데, 그 뒤 그가 잘츠부르크에 돌아온 것은 몇 차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도 홀아비가 된 아버지 레오폴드(Leopold)와 누나 난네를(Nannerl)[6]을 만나기 위해 짧게 들른 것이 전부였다.

새로운 삶을 살게 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의 작업을 노예 활동으로 묘사하고 동향 사람들을 바보라고 부르며 잘츠부르크에 대해 무례하게 굴었다. 그는 자신의 고용주였던 잘츠부르크의 대주교(archbishop)인 콜로레도 백작(Count Colloredo)을 ‘똥멍청이(arch-oaf)’라고 묘사했다. 때로는 비난의 감정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도 했다. 1781년에 모차르트가 사직서를 전달하기 위해 콜로레도 대주교를 찾아갔을 때, 콜로레도의 신하였던 아르코 백작(Count Arco)은 이 위대한 작곡가를 계단 아래로 걷어찼다.

이후 빈에서 보낸 모차르트의 10년은 위태롭긴 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작품 활동이 가장 왕성한 시기였다. 모차르트는 빈에 도착하며 이렇게 선언했다. “이곳은 놀라운 곳이며, 나의 직업에 있어 세계 최고의 장소다.”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도 놀라운 작품을 쓰긴 했지만,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빈에서 쓰인 것이다. 그가 빈에서 작곡한 작품만 모아도 우리는 여전히 그를 위인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잘츠부르크에서 작곡한 작품만 모은다면, 우리는 그를 뛰어난 작곡가로 여길지언정 위인으로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를 방해한 것일까? 영화 〈아마데우스〉의 원작인 피터 쉐퍼(Peter Shaffer)의 희곡을 보면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은 모차르트의 현대적 이미지 형성에 있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화에서 콜로레도 대주교는 보수적인 독재자로 묘사되는데, 그는 지나치게 시야가 좁아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한다. 피터 쉐퍼의 희곡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이 작품은 뛰어난 드라마이긴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다.[7] 실제로 대주교의 호화로운 궁전 잘츠부르크 레지덴츠(Salzburg Residenz)에서 새롭게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전시회에 의하면, 콜로레도는 사실 비교적 계몽된 사람이었으며 진보적인 통치자였다. 그는 루소(Rousseau), 볼테르(Voltaire)와 같은 반체제 사상가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다.

콜로레도는 잘츠부르크의 첫 번째 극장을 지었고, 도시 최초로 예술 학교를 설립했으며, 교회의 방대한 도서관을 대중에게 개방했다. 그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간파해 그를 기꺼이 고용했다. 그러나 낭비벽이 심한 그의 전임자인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Sigismund von Schrattenbach) 대주교는 모차르트가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유럽을 돌아다니는 걸 용인했던 데 반해, 콜로레도는 (불합리하지 않은 이유로) 자신의 직원이 잘츠부르크 내에 머물고 하루하루 일당을 받으며 일하기를 원했다. 〈아마데우스〉는 잘츠부르크의 역사가 그곳을 이상적인 공간으로 만들었음을 과소평가한다. 잘츠부르크는 단연코 모차르트가 가진 천재성의 씨앗이 배양되고 만개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장소였다.
© TSG / Breitegger
 

3. 잘츠부르크가 달랐던 이유


모차르트가 태어날 당시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의 일부가 아니라 대주교후(prince-archbishop)가 지배하는 독립적인 도시 국가였다. 중세 시대에 이곳의 대주교후들은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서기도 했지만, 모차르트가 태어날 당시에는 파괴적인 전쟁을 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점을 배웠다. 중세 이후로 중부 유럽이 황폐화됐기 때문이다. 대신 그 에너지를 예술에 헌신했다. 이후의 대주교후들은 값비싼 전쟁에 비용을 대지 않았고, 알프스 버전의 바티칸을 만들었다. 즉, 이탈리아식 교회와 궁전이 모여 있는 복잡한 클러스터를 만들고, 이곳을 음악으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차르트가 자란 이 도시는 여느 장소들과도 달랐다. 이곳은 대교구 수도의 창의적인 영향력을 가진 조밀한 도시권이었다. 교회는 수백 명의 전문적인 음악가를 고용했는데, 이는 훨씬 더 커다란 도시에나 어울릴 법한 규모였다. 그리고 그들 중 한 명이 바로 모차르트의 아버지 레오폴드였다. 레오폴드는 콜로레도 대주교후의 전임자였던 폰 슈라텐바흐 아래에서 아들의 재능을 자유롭게 육성하며 투어에 데리고 다녔다.

오늘날 모차르트의 천재성은 믿을 수 없고 신이 주신 것처럼 여겨지지만, 설령 신이 주신 천재성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자라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환경이 필요하다. 모차르트는 전문적인 음악가 집안에서 성장했다. 그리고 소박한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음악 문화가 있는 조그만 도시에 살았다. 교회는 꾸준히 유입되는 새로운 작곡가에게 일거리를 주었으며, 많은 음악가를 고용해 공연을 펼치게 했다. 이곳에서 음악을 만드는 건 주류 직업이었다. 결국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를 떠났지만, 그곳은 완벽한 출발지였다. 레오폴드가 재능 있는 아들을 키우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곳은 없었을 것이다.

불과 35세에 맞은 모차르트의 때아닌 죽음은 음악 애호가들에게는 재앙이었지만, 그의 전기를 쓰는 작가들에게는 호재였다. 그들은 모차르트의 짧은 생애와 요절이 보여주는 선명한 이야깃거리를 즐겼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전기 작가들은 서사의 더욱 자극적인 측면에 향신료를 넣는 경향이 있다. 작가들은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소재로부터 도움을 받으며 거기에 더욱 이끌렸을 것이다. 바로 모차르트의 미망인 콘스탄체(Constanze)다.

두 명의 어린 아들을 부양해야 했지만 그녀를 보호해 줄 저작권법이 없던 콘스탄체에게 유일한 수입원은 고인이 된 남편의 유산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남편의 전기를 가능한 한 수익성 있게 만드는 데 많은 관심이 있었다. 당시는 낭만주의 시대 초기였고, 작가와 독자들은 모차르트가 비참한 가난 속에서 무관심하게 죽었다는 발상에 매료됐다. 실제로 그는 막대한 빚을 남기긴 했지만 나름 괜찮은 삶을 살았고, 몇 년간의 침체기가 이어지다 1971년 죽음에 이를 때에도 모차르트의 명성은 꾸준히 오르고 있었다.
잘츠부르크에 있는 모차르트 동상 ©Adobe Stock
1824년에 콘스탄체가 다시 잘츠부르크로 이사를 가면서 모차르트의 고향은 확고한 순례 장소가 되었다. 참고로 영국의 선구적인 음악 출판인 빈센트 노벨로(Vincent Novello)는 1829년, 이곳으로 콘스탄체를 찾아왔다. 콘스탄체는 80세의 고령이 될 때까지 잘츠부르크에 살았는데, 19세기로서는 상당히 장수를 한 셈이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 그렇게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1842년에 그녀가 죽은 지 몇 달 뒤, 모차르트의 두 아들이 참석한 가운데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의 동상이 공개됐다. 참고로 이후에 모차르트의 두 아들은 모두 아이를 남기지 않고 죽었는데, 이로써 세상에 모차르트의 직계 후손은 남지 않게 되었다.

이 동상은 그의 사후 50년 동안 모차르트의 대중적 이미지가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 준다. 모차르트 당대의 초상화에서 그는 혈색이 나쁘고 뭔가 병약해 보이는 인물로 그려진다. 코는 길고 눈은 툭 튀어나와 있다. 못생긴 것까진 아니지만,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신장이 163센티미터에 불과한 작고 왜소한 사람으로 묘사했다. 반면 이 동상은 근육질의 영웅적인 인물을 표현한다. 현실이 신화에 가려진 것이다. 1880년에는 그가 태어난 집이 박물관으로 문을 열었다. 모차르트에 대한 신격화가 완성된 것이다.

모차르트의 생애에 대한 이러한 허구화는 잘츠부르크 위상에 생긴 변화에 의해 더욱 뒷받침됐다. 잘츠부르크는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 독립국의 지위를 상실했다. 그리고 1815년에 나폴레옹이 패배한 뒤 오스트리아에 병합됐다. 자치권은 뺏겼지만, 대신 그곳은 문화적 수도가 되었다. 오스트리아가 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동쪽 영토들이 잘려나간 뒤, 잘츠부르크는 몰락한 제국의 수도인 빈과 대조되는 목가적인 곳으로 부상했다.

 

4. 평화의 축제


1920년에 시작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1차 대전 뒤에 유럽 사람들을 다시 하나로 모으고, 공연 예술의 공통적인 속성인 사랑을 통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과감한 시도였다. 페스티벌은 19세기 말부터 이곳에서 개최됐는데 전선의 참호에서 대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사멸된 다양한 모차르트 관련 축제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 페스티벌은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번성했지만, 1938년에 히틀러가 쳐들어오면서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 나머지 지역과 함께 제3 제국(Third Reich)의 수중에 넘어갔다.

나치는 모차르트를 위대한 독일 작곡가로 여겼다. 모차르트 사후 80년이 될 때까지도 독일은 하나의 국가가 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괴벨스(Goebbels)를 비롯 그의 야만적인 수하들에 의해 전용되고 착취당했다. 다행히도 2차 세계 대전 말미에 잘츠부르크는 미국인들이 점령했는데, 그들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과 모차르트가 중심에 있는 문화 명소로서 잘츠부르크를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반유대주의적 인습으로부터 벗어난 모차르트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게르만계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은 보편적이었고, 전 세계의 사랑을 받았으며, 바로 그 점이 위대한 치유력을 부여했다. 잘츠부르크가 프록코트를 입고 하얀 가발을 쓴 모차르트의 닮은 꼴이 걸어 다니는 클래식 음악의 디즈니랜드가 되었다는 게 정말 그렇게 중요할까? 물론 그것은 판타지다. 그러나 두 차례의 끔찍한 세계 대전을 겪고 나니, 그것은 보존할 가치가 있는 판타지처럼 느껴진다. 현재 유럽에서 다시 전쟁이 격화되면서, 모차르트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은 아름다움과 인류에 대한 공통된 이상을 대변하고 있다. 그들이 1차 대전과 2차 대전 이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SF/Marco Borrelli
그리고 모차르트는 여전히 다른 여느 작곡가들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모든 사람을 관통하는 독특한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음악에 관심 없는 사람들도 그의 협주곡과 교향곡에 매료된다. 오페라를 지겨워하는 사람들도 〈코지 판 투테(Così fan tutte)〉 음악은 흥얼거리며 따라 부른다. 나는 내 두 아이가 여덟 살과 네 살이었을 당시 모차르트를 알려주기 위해 아이들을 이곳에 데려왔다. 영국에서는 관심을 갖지 않았지만, 잘츠부르크에서 아이들은 모차르트를 곧바로 받아들였다. 당시 네 살이던 내 딸은 잘츠부르크 마리오네트 극장(Salzburg Marionette Theatre)에서 펼쳐진 〈마술피리(The Magic Flute)〉 인형극에 매료됐다. 여덟 살 아들은 콜레기엔키르헤(Kollegienkirche)에서 〈레퀴엠(Requiem)〉이 연주되는 동안 끝까지 앉아 있었는데, 이곳은 모차르트가 소년 시절 예배를 올리던 곳이다.

그로부터 15년 뒤, 나의 아들과 딸은 둘 다 성인이 됐고 나는 지금 혼자서 잘츠부르크에 돌아왔다. 나는 마리오네트 극장을 다시 찾아 〈마술피리〉를 관람했다. 잔뜩 신난 아이들의 바다에 둘러싸여 말이다. 나는 어두워진 객석에서 황홀하게 앉아 있었고, 내가 지금 인형 조종자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었다. 내 주위의 모든 아이들도 역시나 똑같이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미라벨 궁전을 다시 찾았다. 이곳은 모차르트가 아이였을 때 아버지, 누나와 함께 대주교를 위해 연주했던 대리석 궁전이다. 이날 저녁의 하이라이트는 새들이 노래하듯 아름답고 삶의 기쁨으로 충만한 〈클라리넷 협주곡(A장조)〉였다. 이곳 대리석 홀에 앉아 시대를 초월한 이 음악에 흠뻑 젖어 있자니, 이런 불후의 멜로디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걸 상상하기 어려웠다.
© Salzburger Festspiele / Marco Borrelli

기립 박수와 앙코르가 끝난 후, 수많은 사람이 여름밤의 미라벨 정원(Mirabell Gardens)으로 쏟아져 나왔다. 이곳은 모차르트의 시절부터 변하지 않은 장소다. 나는 그 정원을 가로질러 시내를 향해 걸어갔다. 귓가에는 여전히 하늘을 나는 클라리넷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같은 풍경을 모차르트도 보았을 것이다. 바로크 스타일의 알트슈타트(Altstadt·구시가)에는 둥근 지붕과 첨탑들이 있고, 그 뒤로는 눈에 덮인 산이 둘러싸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음악 애호가들이 매년 잘츠부르크를 찾는 이유다. 우리가 다른 수만은 곳에서는 단념해 왔던 과거와의 소중한 유대감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가 살아 있음을 기쁘게 만들어주는 작곡가와의 친밀한 교감이다. 단지 몇 시간만이라도 모차르트를 듣고 있으면, 세상의 그 모든 고통과 고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라고 느끼게 된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는 2023년 7월 27일부터 8월 28일까지 〈피가로의 결혼(The Marriage of Figaro)〉 공연이 열린다. 잘츠부르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정보는 본 사이트를 참고하기 바란다.
[1]
영국 이스트서식스의 글라인드본에서 개최되는 세계적인 오페라 축제
[2]
독일 바이에른의 바이로이트에서 개최되는 세계적인 음악 축제
[3]
영국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개최되는 세계적인 공연예술 축제
[4]
밴드 도어스(The Doors)의 보컬, 27살에 죽었다.
[5]
밴드 너바나(Nirvana)의 기타리스트 겸 보컬, 역시 27살에 죽었다.
[6]
마리아 안나 모차르트의 독일어 별명
[7]
피터 쉐퍼의 대표작으로는 〈아마데우스〉 외에도 영국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모티프로 만든 〈에쿠우스〉, 스페인의 잉카 정벌을 소재로 한 〈태양 제국의 멸망〉 등이 있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신가요?
프라임 멤버가 되시고 모든 콘텐츠를 무제한 이용하세요.
프라임 가입하기
추천 콘텐츠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