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의 도시, 베를린
1화

프롤로그 ; 도시의 보석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

도시의 빛과 어둠을 따라 걸은 1년


나는 도시법 연구자다. 때때로 독일의 법과 도시를 공부한다. 나의 글을 읽은 사람들은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이상은 좋으나…….” 이러다 보니 나도 나에게 자주 자문(自問)한다. “나는 왜 쓰는가?” 답변이 궁할 때가 많았다. 2022년 10월 29일 일어난 이태원 참사 이후로는 질문조차도 사치스럽게 느껴져, 한동안은 질문도, 답도 없이 지냈다. 그러다가 생각했다. 무슨 말이라도 해보자. 안전한 도시, 난민과 이민자들도 함께 살 수 있는 도시, 혐오가 아니라 이해와 격려가 ‘승리하는’ 도시, 사고 싶은 도시가 아니라 살고 싶은 도시. 내가 꿈꾼 도시가 아닌가. 그 도시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는 것, 계속 상상하며 글을 쓰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애도라고 생각했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내 개인이 경험하고 읽은 베를린에 관한 서술과 평가이므로 주관적 보고라는 한계를 안고 있다. 그러나 왜곡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독자들이 베를린을 통해 우리의 도시를 새롭게 상상해 볼 수 있기를 바랐다. 베를린이 모범 정답은 아니다. 그러나 반란의 도시 베를린이 도시 정치, 도시법과 관련하여 많은 얘깃거리를 제공해 주는 건 사실이다. 동료 시민과의 토론을 기대하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다.

나는 2017년 8월에서 2018년 7월까지, 1년을 베를린에서 보냈다. 그러면서 때때로 유럽 도시들을 여행했다. 나는 ‘빛을 보러(觀光)’ 다녔다. 그런데 오래 관찰하다 보니 어둠도 보였다.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거리는 가난한 자들로 가득했다. 나는 베를린과 유럽의 몇몇 대도시에서, 사회 양극화의 공간적 표현인 계급 도시를 체험했다.[1] ‘1970년대 이래 북미와 서유럽 대도시의 일부 지역에서 발생하던 특별 사례였던 젠트리피케이션은 이제 세계 모든 도시(발전)의 일상이 됐다.’[2] 원 거주자들은 축출되고 중산 계급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독일 전역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안정된 집 없이 떠돌고 있고, 노숙자들은 길거리에서 얼어 죽는다.

그 원인으로 가까이는 2000년대 초반 우경화된 사회민주당 정권이 밀어붙인 하르츠(Hartz) ‘개혁’이 지목된다. 그것은 과연 개혁이었을까? 이유야 어쨌건, 전후의 사회 국가 체제를 대폭 수정한 노선 전환이 초래한 노인의 빈곤을 매번 길거리에서 마주하는 건 힘든 일이다. 특히 이방인인 나 같은 사람들에게 그런 순간은 더더욱 곤혹스럽다. 그들은 “우리를 바라보았다. 늙은 양복장이가 바늘귀를 꿰듯이, 우리를 바라보는 눈매가 속눈썹을 날카롭게 세운 채 매서웠다.”[3]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 하락이 자국으로 이주해 온 외국인 때문이라는 (극)우파 정치인들의 주장에 빠르게 동조한다. 독일인 3분의 1은 외국인에 대해 적대적이다. 라이프치히대학교의 연구 결과는 이런 태도들이 점점 더 심화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외국인 적대적 태도는 구동독 지역에서 더 두드러지며, 36퍼센트의 독일인은 외국인이 독일의 복지 시스템에 그저 편승한다며 눈을 흘긴다. 절반의 독일인은 이슬람계 이주민 때문에 자기 나라에서 마치 이방인처럼 느낄 때가 있다고 응답했다.[4] 왜 이렇게 생각할까? 이유가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긴 세월을 노동하고(육아, 가사 노동, 노인 돌봄 노동 포함) 은퇴해도, 난민과 ‘독일 사회에 기여한 게 없는’ 외국인에게 주어지는 사회 부조금보다도 더 적은 연금을 받는 독일 노인이 존재한다면,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이것을 외국인 공격의 중요 빌미로 삼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제어하려면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노인 빈곤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5]

하르츠 개혁의 이론적 뒷배가 됐던 담론들, 예컨대 ‘성찰적 근대화’니 ‘제2의 근대’니 하는 얘기들은 신자유주의의 승승장구에 힘을 보탰을 뿐이다. 독일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국가 개입주의가 그 수명을 다했음을 선언했다. 그는 시민 사회의 성찰적 과정을 믿고 국가의 퇴진을 선전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통제되지 않는 시장, 사회적 개입의 포기였다. 사회적 리스크, 예컨대 비정규직의 증가와 같은 노동 시장의 변화에 따른 리스크 등이 모든 계급에게 민주적으로 분배될 것이라 믿었던 그의 진단도 설득력을 잃었다. 사회의 계층 질서에서 자신이 선 위치가 밑바닥에 가까울수록 그가 직면해야 할 리스크, 즉 현재의 사회적 지위 이하로 추락하거나 밑바닥에서 벗어나지 못할 위험은 더 커진다.[6] 이런 차별적 위험이 존재하는 신분 하강 사회라면 외국인, 난민, 비국민과 같은 타인에 대한 환대와 관용은 기대하기 어렵다. 베를린에 가기 전에 나는 독일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멀리서 보면 바다 위의 낙조는 붉고 아름답게 보인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면 실상 그것은 상어 떼가 만들어 낸 핏빛 바닷물임을 깨닫게 된다. 문자로서의 법과 현실로서의 법이 일치할 수는 없기에 도시법 연구자로서 나는 늘 현실 속의 법을 읽고 싶었다. 도시법 연구자가 직시해야 하는 현실은 무엇일까? 바르셀로나 성가족성당의 주인은 과연 성(聖) 가족일까, 아니면 자본 가족일까? 섹스 숍이 즐비한 함부르크 상파울리의 레퍼반(Reeperbahn)이 소돔과 고모라일까 아니면 그곳을 밀어 버리고 완전히 자본주의적으로 ‘재개발’ — 관료와 개발업자들은 이를 지역 사회의 재활성화(neighborhood revitalization) 혹은 도시 재생이라고 그럴듯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 한 새로운 도시 공간이 소돔과 고모라일까?

바르셀로나의 성공은 일정한 장소에 ‘특별한 탁월성(special marks of distinction)’을 부여하는 힘, 즉 집합적 상징 자본의 힘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한 도시가 가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점차 균질화하는 다국적 상품화를 불러들이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현재도 그러하고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집합적 상징 자본을 만들어온 것은 모든 사람인데, 왜 이 상징 자본에 따라붙는 독점 지대가 다국적 기업에게 혹은 소규모이지만 유력한 현지의 부르주아지에게만 귀속되는 것일까?[7] 나는, 베를린에서 ‘걷기 파(foot people)’가 되어 끊임없이 이런 질문들을 던져 보았다. 답을 얻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그래도 나는 평범한 풍경이, 거리와 공원처럼 소중한 것들이 도시의 다른 특징에 관한 단서 및 열쇠와 밀접히 연결돼 있음을 금세 깨달았다.[8] 자동차 중심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car people), 주마간산으로 도시를 훑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알아채기 힘든, 혹은 알고자 하지 않는 도시의 보석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

도시가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의 독점적, 독재적 공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 모두에게 열려 있고, 접근 가능한 공간을 만드는 일은 한 공동체를 사회적으로 통합하고, 민주주의적으로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코펜하겐은 이러한 소중한 인식을 그 어느 도시보다도 일찍 실천에 옮겼다.[9] 베를린도 그 길로 나가고 있는가 혹은 나설 수 있을까? 나의 베를린 걷기에는 늘 이런 생각이 따라붙었다.

도시법의 전체 상(像)을 얻으려면 도시민들이 법과 법제를 실제로 수용・변용하고 변혁시키는 과정을 관찰해야 한다. 도시와 법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닌, 갈등과 투쟁, 타협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사실 이런 얘기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숙고의 자료들은 대부분 바로 내 집 문 앞에 있다.’[10] 그러나 서있는 장소가 달라지면, 그러한 자료들이 더욱 생생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마음으로 길을 나섰지만,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11] 그럴 때마다 외부인이기에 어떤 부분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 자세히 보고, 관련 자료도 찾아서 읽었다. 나의 베를린 산보가 한국의 도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흥미로운 비교의 관점을 제공해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도시와 법의 문제를 생각했다. “길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간판, 거리의 이름, 행인, 지붕, 간이매점, 혹은 술집이 말을 걸어오게 마련이다.”[12] 사람들이 지하철 승강장에서 떨어져 죽기 시작하자 스크린 도어를 설치한 나라가 있고 사회 복지를 강화한 나라가 있는 것이 아닐까? 스크린 도어가 없는 베를린 지하철역 어느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물론 이런 비교가 반드시 서울과 베를린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베를린이 사회 복지를 강화한 도시에 해당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73개의 베를린 지하철역 표지판 디자인을 보면서 내가 느꼈던 마음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전부는 아니지만, 정말 다양한 글자 폰트와 디자인의 역 간판은 이 도시의 다양성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과문하지만, 유럽의 어느 대도시에서도 이런 다양성은 만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건 베를린은 나에게 지적 자극과 비교의 시각을 가져다줬다. 법 연구자에게 이런 경험은 매우 중요하다.

 

난민과 이민자들을 품어온, 반란의 도시


베를린을 특징짓는 열쇠 말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은 베를린만이 아니라 대도시라면 대체로 갖추고 있는 특징이지만 이것은 더욱더 각별하게 베를린의 역사에 새겨져 있다. 프로이센 왕국 이전의 베를린은 슈프레강을 낀 조그마한 교역 도시에 불과했다. 인구도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의 성립 이후 크게 발전한다. 프로이센 왕국은 브란덴부르크 대(大)선제후국에서 커온 나라다. 프로이센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말까지 1세기에 걸쳐 영토를 확장했다. 그 마무리를 한 사람이 프리드리히 대왕이라고 불리는 프리드리히 2세였다. 그런데 ‘늙은 프리츠’라고 불리던 그를 만든 건 그의 선조,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였다. 이 대선제후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1685년 낭트칙령의 폐지로 프랑스에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 위그노(프랑스 칼뱅파)들을 베를린에 오게 한 것이다. 당시 베를린 사람 다섯 명 중 한 명이 위그노였다니 이주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이때 넘어온 1만 5000명의 위그노 중 다수는 장인, 학자, 신학자, 의사 등 전문 직업인이었다. 이들은 경제와 교육 분야에 놀라울 정도로 기여했다.[13] 브란덴부르크 대선제후국은 이로써 100년 폭풍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베를린을 걷다 보면 바로 이런 역사의 현장을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다. 특히 베를린의 도심, 그래서 지명도 슈타트미테(Stadtmitte)인 지역은 바로 이 위그노들이 최초로 정착해 지금까지 그 흔적을 남기고 있는 곳이다.

독일은 여러 나라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빈번히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을 가진 나라다. 독일사는 인구의 끊임없는 유출과 유입의 역사를 보여 준다. 중세 시기의 동유럽 진출은 유출의 사례이고, 17~18세기 프로이센에 의한 다수의 이민자 수용은 유입의 대표적 사례다. 19세기에는 미국 이민이 최고조에 달했다. 100년간 550만 명의 독일인이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서 대서양을 건넜다. 그러나 독일이 후발 자본주의 국가로 우뚝 서면서 인구 유입이 유출을 능가했다. 1890년대 후반 이후 독일은 노동력을 수입하는 국가가 됐다. 제1차 대전 전후에 독일 내 외국인 노동자 수는 120만 명을 넘었다.[14]

베를린을 강하게 만든 건 바로 이러한 다문화와 사회적 연대였다. 물론 베를린 사람들이 처음부터 유대인, 외국인 노동자, 난민을 평등하게 대하진 않았다. 특히 유대인에 대한 차별은 이곳에서도 뿌리 깊었다. 그 흔적은 베를린의 전역에서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독일에서 아우슈비츠 등지로 잡혀간 유대인 중 3분의 1은 베를린에 살던 사람들이었다. 독일 내 유대인 디아스포라에서 베를린은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독일에는 50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이 중에서 17만 명이 베를린에 정주하고 있었으니 유대인 공동체에서 베를린의 의미는 각별하다. 이들 유대인의 베를린 내 집단 지구는 슈판다우어 포어슈타트(Spandauer Vorstadt)에 위치해 있었다. 슈판다우어 포어슈타트는 우리말로 ‘슈판다우 문 앞 동네’라는 뜻이다. 베를린이 아직 중세 시대의 도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때 이곳은 성벽과 함께 베를린 서북부 지역인 슈판다우로 가는 슈판다우 성문이 있던 곳이다. 지금은 미테(Mitte) 지구, 즉 시내에 속해 있지만, 옛날에는 베를린의 변방이었던 곳이다. 여기에 유대인들과 빈민들이 살았다. 이 지구 중심부에 자리 잡은 옛 유대인 묘지에는 낭만파 작곡가인 펠릭스 멘델스존의 조부이자 탁월한 계몽 철학자였던 모제스 멘델스존과 같은 유대인뿐 아니라, 1945년 4월의 마지막 전투에서 사망한 2500명이 넘는 독일인들도 같이 묻혀 있다. 나치스 시절에 묘지가 파괴되기 전에도, 이미 유대인들은 묘지의 상당 부분을 기독교 교회 공동체에 내놓으며 독일인과의 공생을 모색했다. 감사히 이 땅을 받은 독일 개신 교회는 여기에 소피아 교회(Sophienkirche)를 세웠고, 이후 유대 교회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가톨릭, 개신교, 유대교가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지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유대교 묘지가 있는 거리, 즉 그로쎄 함부르거 슈트라세(Große Hamburger Straße)를 관용의 거리라고 불렀다. 나치스는 이 200년 공존의 역사를 철저히 파괴해 버렸다.

이 거리를 걷다 보면, 베를린, 아니 독일 전역의 그 어디보다도 많은, ‘걸림돌(Stolperstein)’이라는 이름의 기림 돌을 만나게 된다. 독문학자 김누리는 이 슈톨퍼슈타인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림돌’이라고 표현했다.[15] 그러므로 유대인에게 베를린은 여전히 상처의 도시이지만, 기억하기를 통해 그 상처를 치유해 가는 도시이기도 하다.

유대인 박해에 대한 반성에 더해 자신들 스스로가 똑같은 처지가 되는 경험은 전후 독일인들의 의식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줬다. 독일계 주민들은 1945년 이후 동유럽에서 추방됐다. “1950년까지 대략 1200만 명에서 1500만 명의 독일인이 중앙 유럽과 동유럽의 고향에서 탈출하거나 강제로 쫓겨났다. 대부분 갈 곳이 없었다.”[16] 독일인들은 외국인, 난민을 독일 사회에 통합하고 유대인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 왔다. 그래서 난민으로 인해 ‘우리 사회의 민족적 정체성’이 위협받는다는 비판이 나오면 그들은 이렇게 응대한다. ‘우린 원래부터 다문화였다. 그리고 이것이 독일이 가진 저력의 바탕이다.’ 이러한 자의식은 베를린과도 잘 맞는다.

베를린은 20세기에 다섯 번의 체제 변화(독일 제2제국-바이마르공화국-나치스 정권-분단과 베를린 장벽 하의 냉전 체제-통일 자본주의 도시)를 경험했다. 혁명과 전쟁, 분단과 장벽, 추방과 귀환이라는 격변 속에서 급격한 인구 구성의 변화도 겪었다.[17]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 혼란을 느낀 사람이 어찌 ‘프란츠 비버코프’ — 알프레드 되블린의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주인공 — 만이었을까? 처음에는 위그노들이, 이후에는 독일 자본주의의 성장기에 도시로 몰려온 국내외 노동 이민자들이, 그리고 전후에는 동유럽에서 추방된 독일계 주민들과 전후 부흥을 위해 집단적으로 건너온 튀르키예계 초청 노동자가 테겔 형무소에서 막 출소한 비버코프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들을 맞이한 것은 가난하지만 함께 사는 공동체 문화였다. 이민자들은 과거 베를린의 유대인 공동체가 그러했던 것처럼 기존의 공동체와 크게 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문화를 지키며, 베를린에 터를 잡았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분위기가 변하고 있음을 몸으로 느꼈다. 앞서 지적했듯이 외국인에 대한 배타적 태도는 물론이고 도시민들의 생활 양식도 바뀌고 있다. 환경, 인간, 사회, 이 모두가 세계화의 영향을 받고 있으니 도시와 도시의 문화가 변하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1990년대 중반 독일 소도시 튀빙겐에서 유학할 때 나는 이 나라가 환경 독재 국가가 아닐까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독일에서 인구가 제일 많은 대도시에 살아 보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사이 반환 보증금(Pfand) 제도에 의해 회수되지 않고 그냥 폐기되는 플라스틱 용기들이 크게 늘었다. 이 중 절반 이상은 음료수 병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잠시만 생각해 보면 답을 금방 알 수 있다. 지역에서 생산하고 지역에서 소비하며, 지역에서 빈 병을 회수해 다시 사용한다면 반환 보증금 제도는 효과적이다. 그러나 코카콜라 같은 글로벌 기업이 음료 시장을 장악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빈 병 회수와 집하에 돈이 더 든다고 말한다. 환경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상점 개점 시간도 아주 길어졌다. 완전히 내 맘대로 소비 사회가 된 건데, 이렇게 ‘자유로운’ 사회가 될수록 불평등은 더 심화한다. 플라스틱 등 일회용 폐기물의 배출량과 사회·경제적 불평등 사이에는 분명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우리가 한국 자본주의의 폐해라고 비판해 왔던 것 중 상당수는 점차 세계의 새로운 표준, 뉴노멀이 되고 있다. 여기에는 흔히 젠트리피케이션으로 표현되는 원주민의 축출,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과 대립도 포함된다. 대부분 베를린, 특히 크로이츠베르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인 튀르키예계 이민 노동자의 후손들은 무수한 모욕에 시달리며, 다수가 도시 중심에서 쫓겨나고 있다. 그러면서 베를린이라는 도시에 대한 그들의 공헌은 무시되고 있다. 독일인이지만 이슬람계여서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들의 정당한 분노는 복지 국가를 축소하고 혐오를 조장하며 차별을 시행하는 국가와 자본을 향해야 한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분풀이 대상이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선정되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사회·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헐거워진 마음은 억눌러 왔던 전통적인 혐오를 다시 활성화한다. 최근 독일 내 반유대주의가 다시 두드러지는 건 이런 배경을 갖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반유대주의에 가담한 세력의 상당수는 이슬람계 독일인이다.[18]

독일의 그 어느 곳보다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던 곳이 바뀐다는 것은 독일 사회의 변화를 상징한다. (서)베를린 사람들은 냉전 시대 소련에 의한 봉쇄를 겪었고, 장벽과 철조망에 막혀, 오도 가도 못 하는 섬 주민처럼 살았다. 이러한 상황이 역설적으로 베를린 사람들의 개방 지향성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반(反)난민, 반이민은 베를린답지 못한 태도로 비판받아 왔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가 변하고 있다. 이것은 프로이센의 낡은 군국주의와 맹목적 법실증주의를 조롱해 온 베를리너(Berliner)의 기본 정념(Affect)과도 맞지 않는다. 의심스럽다면, 칼 추크마이어(Carl Zuckmayer)의 희곡 《쾨페닉의 대위》를 읽어 보면 좋겠다. 68세대인 베를린의 내 친구 마틴 쿠차(Martin Kutscha) 교수는 보행자 신호등이 빨간색이어도 차가 안 오면 그냥 건너갔다. 그러면서 가끔 이렇게 중얼거렸다. “합법이니 불법이니 하는 법률 독재적 발상은 개나 줘버려” 알고 보니 그가 내뱉은 말은 1970년대 주택 점거 투쟁 시절부터 베를린 사람들이 즐겨 썼던 저항의 구호였다.

베를린은 함부르크, 프랑크푸르트와 함께 1970~1980년대의 주택 점거 투쟁의 본산이었다. 그중에서도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은 여전히 이 투쟁의 중심지다. 2021년 9월 26일 베를린주 의회 선거와 동시에 시행된 베를린주 국민 표결(주택 사회화 찬반 표결)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곳도 크로이츠베르크 지역이다. 되돌아보면 주택 점거 투쟁이 활발했던 시기에 베를린 시민의 연대와 포용의 정신도 고양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란의 도시 베를린은 난민과 이민자들의 도시이기도 했다. 베를리너는 무엇에 저항했는가?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그들은 땅 주인, 건물주의 소유권 독재[19]에 맞서 ‘거주하는 사람’의 주거권을 위해 연대하고 투쟁했다. 이하에서 나는 베를린의 이러한 면모를 ‘반란의 도시(Stadt der Revolte), 베를린’이라는 주제 아래 조금 더 자세하게 풀어 볼 것이다.
[1]
지그문트 바우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일어에는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nis)이라는 명사가 있습니다. (…) 독일어 명사 ‘경험’은 나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독일어 명사 ‘체험’은 내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내가 느끼는 것, 내가 겪는 것, 사건에서 비롯되는 감정이죠. 저의 모든 사회학은 ‘경험’과 ‘체험’ 사이의 공간에서 움직입니다.” 나의 베를린 체험도 ‘경험’과 ‘체험’, 이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한다.
페터 하프너(김상준譯), 《익숙한 것을 낯설게 바라보기》, 마르코폴로, 2022, 94-95쪽.
 
[2]
Andrej Holm, 〈Gentrification im langen Schatten der ‘Behutsamen Stadterneuerung’〉, 《Zeithistorische Forschungen》 11, 2014, S. 303.
[3]
단테 알리기에리(박상진譯), 《신곡 지옥편》, 민음사, 2013, 149쪽.
[4]
〈Studie zeigt: Ausländerfeindlichkeit in Deutschland nimmt zu〉, 《Berliner Morgenpost》, 2018. 11. 7.
[5]
2005년 도입된 하르츠Ⅳ(실업 수당Ⅱ)는 2023년 1월 1일부로 폐지됐다. 이를 대체한 것은 시민 수당(Bürgergeld)이다. 시민 수당은 하르츠Ⅳ의 수급 요건을 완화해 복지 수당 지급과 관련한 문제점을 부분적으로 개선했다. 이 제도에 대한 간략한 소개는 다음을 참고할 것.
강하림, 〈2021년 독일 노동분야 주요 이슈〉, 《국제노동브리프》 20(1), 51-53쪽.
[6]
Oliver Nachtwey, 《Die Abstiegsgesellschaft》, Suhrkamp Verlag, 2016, S. 161.
나흐트바이는 과거와 같은 사회적 이동성이 멈춰버린, 포스트 성장 자본주의하의 (독일) 사회를 ‘신분 하강 사회’로 명명한다.
[7]
David Harvey, 《Rebel Cities: From the right to the city to the urban revolution》, Verso, 2012, pp. 103-106.
[8]
제인 제이콥스(유강은譯),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그린비, 2010, 6-7쪽.
책의 서술을 이 글의 문맥에 맞게 변형하였음.
[9]
코펜하겐은 ‘공공 공간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한 유럽 내의 대표적인 도시다. 그 결과 개방적이고, 접근 가능하고, 유동적이고, 다양하게 이용 가능한 공간이 탄생했다. 코펜하겐도 1960년대까지는 자동차가 중심인 도시였다. 자동차 주차장은 즐비했어도, 보행자 도로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걸 바꾸는 데 기여한 도시 계획가가 얀 겔(Jan Gel)이다. 그를 중심으로 1970년대 이후 40여 년간 건축가, 도시 계획가가 결합했고 여기에 강력하고 결단력 있는 도시 행정이 긴밀히 협력했다. 이로써 ‘도시에서의 삶’을 중시하는 코펜하겐 학파가 성립했다. 얀 겔은 이후 유럽과 전 세계에서 인간에게 합당한, 정의로운 공간 창출을 위해 노력했다.
[10]
제인 제이콥스(유강은譯), 《미국 대도시의 죽음과 삶》, 그린비, 37쪽.
[11]
단테는 신곡의 첫 번째 문장에서 “우리 인생길의 한가운데서, 나는 올바른 길을 잃고 어두운 숲속에서 헤매고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러나 길을 잃는 것, 이것은 모든 여행의 출발이 된다. “단테는 자신이 길을 잃었다는 사실, 절망적인 현재 상황과 그런 상황에 이른 과정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상황과 주변 세계의 상황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앞으로 동료 인간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프루 쇼(오숙은譯), 《단테의 신곡에 관하여》, 저녁의 책, 2019, 41-42쪽.
[12]
발터 벤야민(윤미애譯),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베를린 연대기》, 길, 2007, 162쪽.
[13]
마틴 키친(유정희譯),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독일사》, 시공사, 2001, 149쪽.
위그노 교도들은 프로이센으로 들어와 이 나라에 상공업 발전의 씨앗을 뿌렸다. 그것은 프로이센 절대주의의 토대를 마련하는 중요한 걸음이었다. 이를 성사시킨 대선제후는 네덜란드 도시들의 예를 따라, 포츠담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건설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는 선제후가 되기 전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었으며, 17세기에 승승장구하던 이 나라의 발전상을 선례로 삼고자 했다.
고유경, 《독일사 깊이 읽기: 독일 민족의 기억의 장소를 찾아》, 푸른역사, 2017, 115쪽.
[14]
木村靖二, 《ドイツの歴史: 新ヨーロッパ中心国の軌跡, 有斐閣》, 2000, 123-125頁.
[15]
김누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림돌’〉, 《한겨레》, 2017. 8. 13.
슈톨퍼슈타인은 직역하면 걸림돌이지만, 나치스 정권에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는 보도(步道) 위 기림 돌이다. 베를린에 가장 많다. 현재는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에 설치되고 있다. 걸림돌 프로젝트와 관련된 독일어 자료는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할 수 있다.
[16]
닐 맥그리거(김희주譯), 《독일사 산책》, 옥당, 2016, 466쪽.
[17]
19세기 이래 베를린의 인구 변화는 대략 다음과 같다. 1849년 42만 4000명, 1875년 96만 7000명, 1900년 188만 9000명, 1919년 190만 3000명, 1920년 387만 9000명, 1925년 408만 3000명, 1933년 424만 3000명, 2014년 356만 2000명. 이 통계를 보면 특히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의 인구 변화가 드라마틱하다. 이는 패전 이후 전선에서 귀향한 병사들이 급증한 것도 한 이유겠지만, 1920년 대(大)베를린 개혁으로 인해 베를린의 영역이 크게 확대된 것 때문이기도 하다.
Ben Buschfeld, 《Bruno Tauts Hufeisensiedlung》, Nicolaische Verlagsbuchhandlung, 2015, S. 12에서 통계 인용.
[18]
Frederik Schindler, 〈Muslime stimmen antisemitischen Aussagen deutlich häufiger zu als Nichtmuslime〉, 《Die Welt》, 2022. 5. 9.
[19]
독일에서 건물(주택)은 그 부지인 토지와 일체 불가분을 이룬다. 따라서 주택 사회화 투쟁, 즉 주택 소유권에 대한 제한은 토지의 이용에 대한 제한을 동반하므로 독일에서 주택 사회화는 토지 사회화이기도 하다. 반면 우리의 경우, 토지와 건물은 별개로 소유권의 객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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