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의 도시, 베를린
7화

북저널리즘 인사이드 ; 합법 바깥에도 도시가 숨 쉰다

미국 미시간주의 작은 마을 ‘마셜(Marshall)’에서 주민들이 피켓을 들었다. 포드(Ford)의 리튬 배터리 공장 건설을 반대한다는 내용이 피켓에 적혔다. 주민들은 7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크기의 리튬 공장이 지역이 쌓아 온 유산과 역사를 망칠 것이며 지역 사회 전체를 붕괴시킬 것이라 이야기했다. 도시를 지키려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제조업이 미국을 다시 ‘Great’하게 만들 것이라는 산업화 논리보다 더 가깝고 구체적이다.

마셜 주민들에게 필요한 건 지역에 일자리를 공급하고, 지역 전체를 부흥시킬 거대한 크기의 공장이 아니었다. 이 도시와 마을이 쌓아 온 유산 자체를 지키고 보존할 수 있는, 세심한 관심과 선택적 무관심이었다. 마셜 지역의 주민들이 들었던 피켓에 돈이 아닌 지역 사회가 적혔다는 지점에서도 드러나듯, 도시는 돈이나 주민 수와 같은 숫자로도, 혹은 님비와 핌피와 같은 일시적 현상으로도 설명될 수 없었다. 도시는 그런 존재다. 쉽게 설명하거나, 표현하거나 구분할 수 없는.

그래서 도시를 설명할 때는 다양한 종류의 필터가 동원되곤 한다. 도시에 모이는 돈의 규모, 지역에 정주하는 주민의 수, 때로는 국경이라는 경계선과 그 경계를 둘러싼 여론도 중요한 지표다. 《반란의 도시, 베를린》이 택한 필터는 법이다. 이 책은 도시를 규제하는 법안, 때로는 도시민을 구제하는 법안을 언급하며 베를린이 반란의 도시가 돼가던 과정을 조명한다. 도시를 다루는 수많은 담론들이 경계해야 할 문제는, 도구로서의 필터가 도시라는 현상 전체를 규정하게 되는 일이다. 주객전도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반란의 도시, 베를린》은 주객전도라는 부작용을 피하고자 언제나 조심스럽고, 세심하고, 면밀한 태도를 유지한다.

저자 이계수는 법학자다. 그러나 법을 가장 높은 자리에 두지는 않는다. 저자는 도시라는 현상을 둘러싸고 벌어진 소란한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짚는다. 그의 문장들에서는 도시의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포획’할 위험이 있는 도구에 대한 끊임없는 경계가 드러난다. 즉, 법을 만드는 것, 법을 지키는 것, 법을 기록하는 일은 법을 위해 필요한 게 아니다. 《반란의 도시, 베를린》은 법이 더 나은 사회와 도시를 만드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라는 지점을 명확히 한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도시는 도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 도시가 쌓아 온 유산과 이야기, 그리고 도시가 만들어 갈, 수없이 다양한 미래의 선택지 때문에 존재한다. 서베를린 주민이 이른바 ‘불법’이라 불리는 주택 점거 운동을 82퍼센트나 지지한다는 사실이 뇌리에 깊이 남는 것도 같은 이유다. 중요한 건 도시를 만들고 구성하는 행위가 딱딱하고 지우기 어려운 법안을 충족하느냐가 아니다. 사람들이 만들고 싶은 유동적이고 말랑한 도시의 모습 그 자체다. 법을 경계하는 법학자의 시선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돈만 투입한다고, 길과 건물만 있다고 도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도시에는 행정과 법이 기록할 수 없는, 숨 쉬는 이야기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의 도시는 결국 모두의 것이다. 가로수에서 떨어진 낙엽을 누구나 밟을 수 있듯, 작은 돌멩이 위에서 지렁이 한 마리가 쉴 수 있듯, 도시도 모두가 밟고 이야기하고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이 돼야 한다.

젠트리피케이션과 환경 오염, 쫓겨나는 전세 난민과 쪽방에서 여름을 보내는 노인들까지. 한국의 도시가 마주한 상시적 재난 상태는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무거운 건물로 인해 가라앉는 뉴욕은 무엇이 구할 수 있을까? 그건 법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기술도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은 참여와 토의가, 때로는 법의 경계 바깥에 선 불법 행위가 도시를 바꾼다. 우리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한국에 지금 베를린의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김혜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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