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 전쟁의 비밀을 품다
완결

샤넬, 전쟁의 비밀을 품다

여성복의 혁신가, 전쟁 스파이, 혹은 저항가. 샤넬이 세계사에 남긴 유산은 패션에 그치지 않는다. 그의 진짜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Adobe Stock

1. 혁신가 코코 샤넬


‘코코(Coco)’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은 혁명가였다. 그녀는 여성을 코르셋에서 해방시키고 여성들의 옷장을 바꾸어 놓으면서 20세기 초의 답답한 패션계에서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러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스타일보다 훨씬 더 복잡한 것이 있다. 그녀의 매혹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개인사다. 대표적으로는 나치 부역 혐의, 무산된 비밀 작전, 그리고 2차 세계 대전의 주요 인사들과의 연루 등이 있다. 음모 가득한 샤넬의 전쟁이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것은 놀랍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 충격적이지 않다. 세계 최대의 패션 기업 가운데 하나인 그들이 왜 곧이 설립자와 나치의 관계를 떠벌리려 하겠는가?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A)에서 새롭게 열리는 〈가브리엘 샤넬: 패션 선언(Gabrielle Chanel: Fashion Manifesto)〉 전시는 1883년 프랑스 작은 마을에서 노점 행상과 세탁부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패션 업계의 위대한 혁신가로 성장한 코코 샤넬의 모순을 영리하게 포착한다. 이 전시회는 시작부터 흥미를 유발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부본적으로 거울이 설치된 계단을 따라 구불구불 내려가게 된다. 그 끝에 다다르면 역시나 거울에 부착된 수많은 계단을 따라 엄청난 양의 야회복이 전시되어 있다. 그 두 가지는 모두 파리의 캉봉(Cambon) 거리에 있는 샤넬 사옥의 유명한 나선형 계단을 연상시킨다. 그 사옥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전설적인 디자이너의 개인 아파트로 연결된다. 계단 덕분에 전시회의 관람객은 방향 감각을 상실한다. 관람객은 거울에 자기 자신은 물론이거 전시된 드레스들이 수없이 파편화 된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놀이공원의 화려하게 꾸며진 유령의 집에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각각의 거울에 비친 관람객의 모습은 약간씩 다른 각도로 나타난다. 이는 사후 50년이 넘도록 그 정체를 파악하기 매우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는 한 여성을 탐색하는 전시회에 적절한 장치였다. 샤넬의 생애에 대해서는 수많은 버전의 해석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 일부는 자신의 기원 신화를 다시 쓰려고 노력하면서 그녀가 직접 조작한 것이다. 일부는 다양한 각도에서 샤넬의 생애을 조망한다. 일부는 그녀의 연인이자 극우 잡지의 설립자인 폴 이리베(Paul Iribe)와 같은 강경한 민족주의자들과의 연관성이나 그녀의 선입관을 가볍게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는 호사스런 잡지 속에서 각종 재담과 촌철살인 등으로 그녀를 뒤섞어버린다.

샤넬의 생에에서 언제나 가장 불편하게 여겨지는 모순이 있다. 여성의 패션을 해방시킨 위인이 반유대주의와 나치 부역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V&A의 전시회는 샤넬이 2차 세계 대전 기간에 레지스탕스의 일원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드러냄으로써 그런 그림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그것이 그녀의 의문스러운 과거를 떨쳐내려는 시도는 전혀 아니다. 그러나 이 복잡한 여성에게 훨씬 더 많은 다층적인 면면이 있었다는 점은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샤넬은 자신의 모델들에게 빳빳한 흑백의 의상을 입히는 걸 사랑했지만, 실제로는 흑백 사이의 혼탁한 음영 속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 Andrea De Santis

2. 사넬의 생애


샤넬의 어린 시절은 불투명하다. 이는 그녀가 그 내용을 수정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샤넬의 전기인 〈코코 샤넬: 전설과 생애(Coco Chanel: The Legend and the Life)〉에서 저자인 쥐스탱 피카르디(Justine Picardie)는 그녀가 더 젊어 보이기 위해 여권에 표시된 출생일을 어떻게 펜으로 고쳤는지 들려 준다. 어머니의 사망 이후 샤넬의 아버지는 가족을 버렸고, 그녀를 비롯한 자매들은 프랑스 누벨아키텐(Nouvelle-Aquitaine) 지역의 오바진(Aubazines)에 있는 한 수녀원에 딸린 고아원에 보내졌다. 샤넬은 스스로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이력을 다른 버전으로 그려냈다. 자신이 엄격한 숙모들에 의해 길러졌다는 설명이었다.

고아원에서 그녀는 바느질을 배웠다. 오바진의 수녀들이 입고 있던 금욕적인 검은색과 흰색의 복장이 나중에 그녀의 디자인에 반영되었다는 걸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일부 전기 작가들은 샤넬의 기다란 진주 목걸이에서 가톨릭의 묵주를 연상하기도 한다. 열여덟 살이 되면서 그녀는 재봉사로 일했고, 캬바레에서 노래를 불렀다. 참고로 그녀의 애창곡은 ‘코 코 리 코(Ko Ko Ri Ko)’와 ‘퀴 쿠아 부 코코(Qui qu’a vu Coco)’였다. 일반적으로는 이것이 그녀의 별명에 영향을 준 것으로 여겨지지만, 샤넬은 그 애칭을 아버지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그녀는 기병 장교이자 직물업 상속자인 에티엔 발산(Étienne Balsan)의 정부가 되었다. 그녀는 발산을 통해 ‘소년(Boy)’ 아서 카펠(Arthur Capel)을 만났다. 영국의 부유한 상인인 카펠은 후에 그녀 일생의 연인이 되었다. 샤넬이 처음 패션 사업을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녀는 파리의 갤러리 라파예트(Galeries Lafayette) 백화점에서 밀짚모자를 구입하여 여기에 약간의 장식을 추가했다. 발산과 카펠은 어쩌다 보니 그녀의 첫 번째 재정적 후원자가 됐다. 발산은 그녀가 매장을 차릴 수 있도록 파리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를 제공했다. 카펠은 일상적인 비용을 충당했다. 매장은 곧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어 발산의 아파트만으로는 주체할 수 없게 됐다. 1910년, 발산으로부터 더욱 많은 자금을 받은 그녀는 파리 1구 캉봉 거리에 매장을 열었다.

샤넬의 전기 작가들 가운데 일부는 그녀의 다양한 연인이 재정적이거나 창의적인 면에 있어 그녀의 대표적인 스타일에 미친 영향에 주목한다. 그들은 샤넬이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재단을 좋아했다는 사실과 아서 카펠이 착용했던 정장 사이를 연결한다. 그리고 후에는 20세기 초부터 샤넬과 10년 정도 사귄 2대 웨스트민스터 공작(Duke of Westminster)인 “벤도어(Bendor)” 휴 그로브너(Hugh Grosvenor)의 정장과도 연관을 짓는다. 참고로 이 공작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어떤 이는 샤넬의 상징과도 같은 트위드 부클 재킷이 그로부터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가 스코틀랜드 하일랜즈(Highlands)로 함께 여행을 가면서 트위드 스포츠 코트를 착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샤넬이 제정 러시아 시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의견도 있다. 제정 러시아 시대의 괴승이었던 라스푸틴(Rasputin) 암살자 중 하나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Dmitri Pavlovich) 대공과 샤넬이 연인 관계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러시아 자수나 목 부분이 사각으로 파진 루바슈카(roubachka) 블라우스, 그리고 모피로 안감을 덧댄 코트 등의 요소를 그녀가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샤넬은 확실히 연인을 비롯한 모든 관계로부터 크게 빚을 지고 있다.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작가인 장 콕토(Jean Cocteau), 그리고 러시아 발레단 발레뤼스(Ballets Russes)를 설립한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 등 친구 및 협력자들도 역시 영감을 제공했다. 〈어리나(Arena)〉라는 BBC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새로운 에피소드인 ‘코코 샤넬 버튼 해제(Coco Chanel Unbuttoned)’에서 전기 작가인 론다 가렐리크(Rhonda Garelick)는 샤넬이 거의 뱀파이어처럼 “다른 사람에게서 가장 흥미롭고 맛있고 생기 충만한 것을 그녀의 능력에 미학적으로, 지적으로, 예술적으로 빨아들인” 다음에 그것을 자신의 작업에 활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샤넬은 지독할 정도로 독립적이기도 했다. 사업이 아직 초창기이던 시절에 그녀는 자신이 아직도 빚을 갚지 못해서 허덕이고 있으며 카펠이 여전히 자신의 보증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경악했다. “제 핸드백을 카펠의 얼굴을 향해 똑바로 던지고는 도망쳤어요.” 훗날 전기 작가인 파울 모랑(Paul Morand)에게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다. 다음 날 아침, 작업실에 도착한 그녀는 수석 재봉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재미로, 혹은 돈을 물처럼 쓰기 위해 여기에 와 있는 게 아냐. 나는 많은 돈을 벌려고 여기에 있는 거야.” 그런 일이 있은 지 1년 뒤, 그녀는 더 이상 카펠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됐다.

 

3. 샤넬, 혁신을 이루다


그녀의 생애를 거쳐 간 남성들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할수록 그녀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다. 샤넬은 스스로 최고의 광고 모델이었다. 호기심에 이끌려 캉봉 거리의 매장에 들어온 고객이 처음 마주치는 건 마치 소년처럼 옷을 입은 이 젊은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착용한 소박한 밀짚모자는 대부분의 사교계 여성이 선호하는 화려하게 장식된 모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그녀는 도빌(Deauville)이라는 바닷가 마을에서 의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녀가 재현했던 건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형태의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이 입기 좋아하는 디자인이기도 했다.

그녀는 실용적인 저지(jersey) 원단을 사용함으로써 혁신을 이뤄냈다. 당시 이 직물은 남성 속옷에나 사용되었고, 유행에 민감한 여성용 의류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당시에, 그것도 전쟁 시기에 저지는 그녀가 쉽게 대량으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직물이었을 것이다. 헐렁하면서도 착용감 좋은 이 직물은 여성의 새롭고 역동적인 생활 방식에도 적합했다. 전장으로 떠난 남성들이 남겨둔 일자리를 여성들이 채우기 시작하면서, 불편한 가운과 몸을 속박하는 코르셋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참고로 코르셋은 샤넬의 라이벌이자 더욱 저명한 디자이너였던 폴 푸아레(Paul Poiret)가 일찌감치 내던진 상태였다. 이전에 유행하던 S자로 구부러진 형태(엉덩이를 뒤로 밀어내고, 가슴을 앞으로 밀고, 허리를 안으로 넣은 형태)는 사라지고, 더욱 자연스러운 실루엣이 등장했다. “나는 신체를 해방시켰고, 허리를 없앴고, 새로운 형태를 창조했다.” 샤넬은 후에 특유의 웅대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발언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다. 샤넬의 디자인은 여성들의 옷장에 새로운 차원의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이처럼 더욱 ‘해방된’ 형태는 그녀처럼 메마른 체형에서 가장 돋보였다. 그러면서 날씬함이 새롭게 강조되기 시작했다.

구릿빛 피부에 날씬하고 매혹적인 샤넬은 의류 문화를 변화시키려면 거기에 어울리는 멋진 라이프스타일을 함께 팔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그 다음으로 거둔 상업적 대성공은 바로 향수를 병에 담아 판매하는 것이었다. 1920년에 그녀는 향수업의 대가인 에르네스트 보(Ernest Beaux)와의 협업을 통해 그녀의 패션 디자인처럼 현대적인 향기를 만들었다. 당시 인기 있던 전통적인 꽃향기와의 결벌이었다. 보와 샤넬은 그들의 첫 번째 향수를 만드는 데 있어 자신들이 직접 관여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가장 널리 퍼진 통설에 의하면, 디자이너인 샤넬이 자신의 의류를 착용한 사람에게서 “장미향이 아니라 여성스러운 향기”가 나야 한다며 조향사인 보에게 도전했다고 한다. 그러자 보가 그녀에게 일련의 번호가 매겨진 시제품을 제시했고, 샤넬은 다섯 번째 버전을 택했다.
© Laura Chouette
그녀에게 5는 행운의 숫자였다. 샤넬 넘버5(N°5)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것은 일랑일랑(ylang-ylang)이나 백단유(sandalwood), 장미, 자스민 등 천연 향료와 향기의 프로필(profile)을 바꿀 수 있는 유기화합물인 알데히드(aldehyde)를 혼합한 최초의 향수 가운데 하나였다. 샤넬은 일종의 몰입형 마케팅을 펼치며 프랑스 상류 사회에 자신의 향수를 은밀히 출시했다. 보와 함께 칸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상류층 여성이 자신의 테이블을 지나갈 때 향수를 분사했던 것이다. 이후 그녀는 향기가 널리 퍼지기 전에 충성스러운 소비자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신의 부티크에 향수를 뿌렸다. 1921년에는 최초의 고객들에게 향수 병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의도대로 소문이 퍼졌고, 이듬해 넘버5는 샤넬 매장에서 판매되기 시작했다. 수요는 공급을 초과했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그녀는 화장품 브랜드 부르주아(Bourjois)의 소유주인 베르트하이머(Wertheimer) 형제와 계약을 체결했다. 피에르(Pierre)와 파울(Paul) 형제는 샤넬의 성명권을 취득하여 ‘레 파르펌 샤넬(Les Parfums Chanel)’을 출시했다.

1920년대에 거둔 샤넬의 혁신은 넘버5로 그치지 않는다. 파리 전역에 모더니즘이 포효하면서 그녀는 바지를 대중화시켰고(베니스로 여행을 다녀온 후, 그녀는 곤돌라에서 타고 내리기 편한 바지를 만들었다), 침실에서나 입어야 할 파자마를 평상복으로 제시하며 그 가능성을 개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장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블랙 미니 드레스였을 것이다. 20세기의 시작 무렵에 검은색은 지나치게 우울하고 장례식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스타일이 좋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1919년의 자동차 사고로 인한 느닷없는 카펠의 사망으로 한동안 슬픔을 겪은 뒤, 샤넬은 이 추모의 색상을 급진적으로 바꿔야겠다고 결심했다. 1926년에 그녀가 검은색 크레이프 드 신(crepe de Chine) 소재의 심플한 시스 드레스(sheath dress)를 공개하자, 미국의 《보그(Vogue)》는 그 드레스가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라며 환호했다. 보그는 그것이 “샤넬 ‘포드(Ford)’”라며, “전 세계 모두가 입을 원피스”라고 표현했다. 그녀는 패션을 영원히 바꿔놓았다. 샤넬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중에서는 온통 검은색으로 치장한 그녀가 길거리에서 라이벌 폴 푸아레의 곁을 지나갔다는 것이 있다. 바로 그때, 푸아레는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이봐요, 아가씨, 대체 누구를 애도하는 건가요?” 그러자 그녀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바로 당신이죠.”

1930년대가 되었다. 샤넬은 “많은 돈을 벌겠다”는 초기의 다짐을 실천에 옮겼다. 《뉴요커(The New Yorker)》는 당시 그녀의 가치가 “약 300만 파운드”에 달한다고 보도했다. 그것은 “프랑스에서, 그리고 한 명의 여성에게 있어서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기사의 필자는 그것이 스케치나 바느질에 관심 없던 패션 디자이너에게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웨스트민스터 공작으로부터 약간의 도움을 받아 런던 ‘하우스(house)’를 열었고, 사교계 여성들에게 자신의 패션쇼 모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영화계 거물인 새뮤얼 골드윈(Samuel Goldwyn)과 초대형 계약을 체결한 후 할리우드 의상 업계로 진출하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그녀는 글로리아 스완슨(Gloria Swanson)이나 조안 블론델(Joan Blondell) 등의 배우에게 영화 세트용 의상을 입혔지만, 그녀의 섬세하고 절제된 스타일이 스크린에 전달되지는 못했다. 《뉴요커》의 또 다른 기자는 그녀가 “여성을 여성답게 만들었”지만 “할리우드는 여성이 두 명의 여성처럼 보이기를 원한다”고 적었다.

 

4. 나치 부역자 혹은 레지스탕스


1930년대가 끝날 무렵, 샤넬은 사업을 완전히 접고 인력을 해고했다. 또 다른 세계 대전이 임박했고 그녀는 “패션을 위한 시기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그녀는 나치 장교인 한스 군터 폰 딩크라게(Hans Gunther von Dincklage)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마도 그녀 생애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장이 시작됐다. 1940년 여름에 나치가 파리를 점령했지만, 그녀는 계속 리츠 호텔에서 살았다. 그곳을 독일 관료들이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듬해 샤넬은 나치의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으로 이름을 올렸고, 요원 번호를 부여받았으며, 이전의 연인을 가리키는 웨스트민스터라는 암호명을 받았다. 영국 상류 사회와의 연결 고리가 잠재적인 정보원으로서 그녀를 특히나 유용하게 만들어 주었다. 1943년 말, 그녀는 영국과의 협상 시도에 휘말렸다. 아마 독일의 항복을 중재하려 했을 것이다. 모델후트(Modelhut)라고 불린 이 작전의 일환으로 샤넬과 그녀의 친구인 베라 바테 롬바르디(Vera Bate Lombardi)는 처칠에게 직접 보내는 메시지를 들고 마드리드에 있는 영국 대사관으로 파견됐다. 그러나 이 계획은 롬바르디가 샤넬을 독일의 요원이라고 폭로함으로써 무산됐다.

반유대주의와 관련한 그녀의 추악한 측면이 있다. 유대계인 베르트하이머 형제와의 관계는 언제나 불안했다. 그녀는 레 파르펌 샤넬의 막대한 성공으로부터 더욱 많은 걸 얻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베르트하이머 형제가 자신을 이용했다고 확신했다. 그런 상황에서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고 유대인의 사업을 금지하는 법령을 도입했다. 샤넬은 이 상황이 향수 사업을 자신의 통제하에 가져올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그래서 이 법령을 활용해 베르트하이머 형제를 축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보다 몇 수 위였다. 파리를 탈출하여 뉴욕으로 향하기 전, 형제는 자신의 지분을 프랑스 사업가인 펠릭스 아미오(Félix Amiot)에게 넘긴 상태였다. 결국 점령 당국은 그 회사가 그의 수중에 있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러한 일화는 그렇잖아도 수치스러운 그녀의 전쟁 관련 기록 중에서도 상당히 역겨운 오점에 해당한다.
© Yves Monrique
V&A 전시회에서 최근 공개된 기록들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점령 당국이 캉봉 거리의 마드모아젤 샤넬(디테 코코(dite Coco))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임시 요원(occasional agent)’으로 분류했던 것이다. 그녀는 1943년 초부터 이듬해 봄까지 레지스탕스와 함께 일했다. 이 문서는 사넬이 수행한 업무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용이 없어 그녀가 참여했을지도 모르는 잠재적인 작전이나 첩보 활동에 대해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기록은 그녀를 영국 정보부와 관련된 에릭(ERIC) 네트워크와 연관시키고 있다. 이 네트워크는 1944년 4월에 조직 지도자인 르네 시모냉(René Simonin)의 체포 이후 소멸됐다. 전시회에서는 1950년대 프랑스 정부가 발행한 또 다른 문서를 보여 준다. 여기에서도 샤넬은 레지스탕스 일원임이 입증된다. 전시회 큐레이터인 오리올 큘런(Oriole Cullen)은 최근 《가디언(The Guardian)》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새로운 증거가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림을 좀 더 복잡하게 만들 뿐이죠.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건, 그녀는 양쪽 모두에 연루돼 있었다는 겁니다.”

디데이(D-Day) 이후, 적군과 동침했다는 이유로 ‘수평적 협력자(horizontal collaborator)’라고 불리며 기소된 여성들은 잔인하게 취급받았다. 타르를 뒤집어쓰고, 머리카락을 강제로 밀어야 했으며, 수모를 견디며 길거리를 행진해야 했다. 샤넬은 이런 굴욕에 직면할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자유 프랑스(Free France)[1]에 의해 몇 시간 동안 심문을 받았지만 결국 풀려났다. 그녀의 전기 작가들은 처칠과의 친분이 그녀에게 우호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추정한다. 파리 해방 이후 영리한 홍보 활동의 일환으로, 그녀는 캉봉 거리의 매장을 열어 연합국 병사들에게 샤넬 넘버5를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여론을 완전히 뒤집기에 이런 평판 관리 활동은 충분치 않았다. 부역자라는 오점이 들러붙은 그녀는 캉봉 거리의 매장 문을 닫고 스위스에서 몇 년 동안 조용히 보냈다. 모델후트 작전의 책임자였던 나치 장교 발터 셸렌베르크(Walter Schellenberg)의 회고록 발표 계획이 알려지자, 샤넬은 그와 그의 아내가 머물 저택의 비용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했다. 이후 그녀는 그의 건강 관리를 위한 기금을 조성했고, 딩크라케와 헤어진 지 한참 지난 뒤에도 그를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5. 패션계로 돌아오다


그런데 이미 70세의 고령에 접어든 그녀를 1954년에 다시 패션계에 돌아오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바로 젊은 녀석이 틀렸다는 걸 입증하고자 하는 완강한 욕망이었다. “어느 날 밤 저녁식사 자리에서, 크리스티앙 디올(Christian Dior)가 여성은 절대 위대한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녀가 훗날 《라이프(Life)》 매거진에 한 말이다. 풀 스커트(full skirt)와 허리를 졸라 맨 디올의 뉴 룩(New Look)은 수십 년 전 샤넬이 개척한 실루엣으로부터 벗어난 세계였다. 그리고 파리 패션계의 귀부인이던 샤넬은 그의 노력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디올은 여성에게 옷을 입히는 게 아니라 천을 둘러씌우고 있죠.” 라이벌 디자이너를 겨냥한 그녀의 신랄한 비판이었다. 발언을 이어가며, 그녀는 디올의 드레스를 입고 앉아 있는 여성은 “오래된 안락의자”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1954년, 그녀의 컴백 쇼는 아이러니하게도 피에르 베르트하이머로부터 자금을 후원 받았다. 여기서 샤넬의 고전적인 스타일이 부활했다. 이를 바라보는 패션계 인사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특히 그녀의 고국에서는 반응이 잠잠했다. 전시 부역자라는 오래된 그림자 때문이었다. 샤넬은 개의치 않았다. 아마도 고집스러움으로 유발된 동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녀는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으며, 마침내 가장 가혹했던 비평가들까지도 사로잡게 되었다. 현재 샤넬이라는 이름과 동일시되는 수많은 스타일이 이러한 말년에 선을 보이게 됐다. 누빔 처리한 고풍스러운 2.55 샤넬백은 1955년에 나왔고, 1956년에는 부클 트위드 수트가 뒤를 이었으며, 1957년에는 투톤 샤넬 펌프스가 출시됐다. 샤넬은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았다. 1971년에 사망하기 불과 며칠 전까지도 그녀는 차기 컬렉션을 작업하고 있었다.

전기 작가인 파울 모랑과의 인터뷰에서, 샤넬은 자신의 생애 전반을 돌아보며 커리어를 간단히 설명했다. “저는 그곳에 있었고, 기회가 손짓했고, 그걸 잡았죠.” 그러나 그녀는 좋은 나쁘든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순간을 포착했던 궁극적인 기회주의자로 기억될 것이다.
〈가브리엘 샤넬: 패션 선언(Gabrielle Chanel: Fashion Manifesto)〉은 2023년 9월 16일부터 2024년 2월 25일까지 런던의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V&A)에서 열린다.
[1]
샤를 드골의 주도로 영국 런던에서 설립된 프랑스 망명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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