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읽기를 돕는 디자인

2023년 10월 9일, explained

제577돌, 한글은 발전하고 변화한다. 타이포그래피는 예술이자 브랜딩이고 솔루션이다.

ⓒ일러스트: 권순문/북저널리즘
NOW THIS

한글날 577돌이다. 한글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알리기 위해 지정된 국경일인 한글날에는 자주 벌어지는 오해가 하나 있다. 바로 한글과 한국어에 대한 혼동이다. 한국어는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언어 체계로써 한글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한반도를 중심으로 사용되어 왔던 언어라면, 한글은 그 한국어를 표기하는 문자를 이른다. 북저널리즘은 한글날을 맞아 한글이라는 문자의 진화에 주목했다. 1443년, 훈민정음 창제로 탄생한 한글은 2023년에도 발전하고 변화하고 있다. 바로 디자인, 타이포그래피를 통해서다.

WHY NOW

타이포그래피는 글자의 모양을 디자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글자의 간격을 조정하거나 글을 어떻게 정렬하고 배치할 것인지를 폭넓게 아우르는 영역이다. 즉, 읽기를 디자인하는 과정이다. 타이포그래피는 우리 의식을 건드리며 읽기를 돕거나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다. 때로는 말하는 내용에, 때로는 말하는 사람에 주목하게 만드는 타이포그래피는 예술이자 브랜딩이고, 전통적인 인쇄 매체가 디지털로 옮겨올수록 중요하게 여겨질 영역이다. 더 좋은 읽기를 위해 디자이너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디자이너들의 고군분투는 우리의 읽기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읽기 경험의 재편 ; 디지털화

2012년, 영국의 일간지 《가디언》이 종이 신문 발행 중단을 검토하고 2016년 《인디펜던트》가 실제로 신문 발행을 중단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스크린은 종이를 대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종이를 없애고 있다.지식의 산실인 대학에서도 종이는 사라진다. 종이책 이용 건수가 줄어들고 전자 자료의 이용 건수가 늘어나자 도서관은 수백만 권의 책을 폐기했다. 기존 종이 자료를 문자 인식(OCR) 기술을 통해 디지털화하며 세상의 모든 자료는 인터넷에 아카이브된다. 종이에 인쇄되어 고정된 글씨 대신 휴대폰과 태블릿, PC의 스크린 안에서 움직이는 글자를 더 많이 보는 지금, 스크린 안에서는 수많은 타이포 실험이 이뤄진다.
세리프체인 KoPub바탕 서체와 산세리프체인 KoPub돋움으로 작성한 북저널리즘의 슬로건

세리프 대 산세리프의 전쟁

디지털 시대 타이포그래피의 가장 대표적인 변화이자 현재 진행형인 사건은 세리프(Serif)체와 산세리프(Sans-Serif)체의 대결이다. 세리프는 한글 바탕체와 같이 삐침 있는 서체를 말하며, 산세리프체는 간결한 돋움체류를 이른다. 인쇄된 책의 본문용으로 사용되곤 하던 세리프체는 이제 많은 곳에서 더욱 간결하고 전자 인쇄에 수월한 산세리프체로 대체되었다. 심플하고 모던한 산세리프체는 휴대폰 화면을 지배한다. 그러나 디지털 화면에서도 세리프체의 전통을 지키려는 움직임은 지속된다. 둘 중 무엇이 더 가독성을 높이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나, 읽기 경험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한 타이포의 발전은 계속된다고 볼 수 있다.

글자는 브랜드다

수많은 정보가 즉흥적으로 연결되고 쏟아지는 디지털 환경에서 고정된 것은 없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디자이너들은 고객의 무의식 속에 안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충성도를 높이기 위해 서체를 사용한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 로고는 세리프에서 산세리프체의 이동을 통해 심플하고 모던한 이미지를 구축했고, 국내에서도 확고한 아이덴티티가 필요한 기업과 도시들이 폰트 디자인 회사 윤디자인그룹산돌과 협업한다. 이도타입의 이도희 대표가 말하듯, “성공한 브랜드는 폰트를 일관적으로 잘 쓴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체는 우리 의식 안에서 읽기의 도구를 뛰어넘어 전면에 나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타이포잔치 2023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 포스터 및 조효준 작가의 〈문자들: 쏐뽙힗〉 © 문화체육관광부

예술이 되는 타이포그래피

주인공의 자리에 선 타이포그래피는 예술로 거듭난다. 지금 문화역서울284에서는 〈따옴표 열고 따옴표 닫고〉라는 제목의 타이포 전시가 진행 중이다. 문자는 음악과 정치 등 사회문화적 현상과 상호작용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만든다. 한글에서도 그렇다. 뉇, 쏐, 뽙, 힕 등의 글자는 우리에게 낯설고 발음을 해본 적도 없지만 타이포그래피의 제작 규칙으로 인해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타이포그래퍼들은 각자의 문자를 디자인하는 규칙에 따라 문자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발견을 이끄는 것이다.

읽기 경험 안에서 타이포그래피의 존재감

문자는 발견이다. 그러나 이 문장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한다. 읽기의 경험에서 문자는 발견되어선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의 본능은 로고와 티셔츠에는 새로운 서체가 들어가더라도, 책과 신문은 익숙한 폰트와 레이아웃을 따르길 바란다. 튀는 글자가 등장해 눈을 사로잡는 순간, 우리의 뇌는 글의 내용보다 문자의 모양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그래픽 디자이너 요스트 호훌리가 말하듯, “책을 읽는 와중에 글자의 모양을 눈여겨보게 되거나 글자의 면모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다.” 이러한 가독성의 원칙에 따라 본문 타이포그래피는 보수적으로 아주 천천히 변한다.
영국 《가디언》의 타이포그래피 © The Guardian
언론사의 폰트 사용

타이포 전쟁이 격하게 벌어지는 곳은 읽기를 사업의 핵심으로 두는 곳이다. 언론사와 출판계가 그렇다. 가독성이라는 본연의 임무와 익숙한 것에 대한 독자들의 선호, 그럼에도 새로운 것에 끌리는 디자이너의 본능, 타이포그래피가 담는 브랜딩 효과 사이에서 디자이너들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차별화를 위해 노력한다. 시대의 변화에 맞게 천천히 폰트의 크기를 키우고, 매체의 성격에 맞는 최적의 서체를 개발해 이용한다. 종이 신문을 없애려 했던 《가디언》은 오히려 신문에 사용하던 서체를 웹사이트에도 적용하며 디지털 공간에서 ‘고유의 성격과 목소리’를 구현한다. 원칙과 혁신을 동시에 취하려는 매체들에게 디자인은 숙제이자 해결책인 것이다.

새로운 읽기

스크린 안에서 타이포 실험이 이뤄지는 만큼, 인쇄 매체 안에서도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협업은 시도되고 있다. 그래픽 디자인 교육 과정에서는 스크린 매체의 시각적 요소를 종이책에 옮기거나 선형적인 소설을 배치를 바꾸어 비선형적으로 구성하는 등의 수업이 이루어진다. 디자인적 요소를 강조하는 출판사는 이미 전통적인 바탕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서체를 종이책의 본문에 적용하고 있다. 읽기의 경험을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디자이너는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우리의 읽는 경험을 혁신한다.

IT MATTERS

1800년대, 혹은 그 이전의 자료까지. 인류는 언어로 이루어진 가치 있는 정보들을 디지털화하기 위해 기술을 발전시키고 있다. 인간의 모든 활동이 언어로 이루어지고 설명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움직임은 우리의 생활을 효율적이게 만든다. 아무리 오래된 콘텐츠라도 검색되고, 어떠한 참고문헌이라도 접근할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 시대가 왔다. 절판 개념이 없는 디지털 자료는 무한 레퍼런스가 된다.

텍스트의 양이 점점 더 많아지는 지금, 읽히고 싶은 누군가는 읽기의 경험을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를 고민의 핵심에 두게 된다. 수많은 정보 속에서 말하는 주체를 드러내기 위해 누군가는 서체를 강조할 것이다. 반면 주체보다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보수적인 타이포를 택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확실한 것은 변화하는 매체 사이에서 타이포그래피는 우리의 읽기 경험을 어떤 방향으로든 더욱 진화하는 방식으로 나아갈 거라는 점이다.

문자는 고정된 것일까. 기역, 니은이라는 개념은 고정돼 있지만 그 개념이 실현되는 양상은 변한다. 글자를 이루는 획은 더 두꺼워질수도, 가늘어질 수도 있다. 글씨의 크기가 더 커질 수도, 작아질 수도 있다. 디자이너, 교정지를 보는 편집자, 쓰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글자를 가만 두지 않음으로써 읽는 사람의 마음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 우리의 읽기는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
백승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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